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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21, 2011

신라가 제나라를 치지않았다면...

고구려유민 이정기장군은 당나라 산둥반도에 평로치청국(후에 제나라)을 세운다.
이정기는 당나라경제를 무너트리고 당을 멸하려했으나 짧은 나이에 죽고 그뒤에
아들(이납)에 이어 4대황제 이사도가 고구려멸망의 복수를 하려했으나 신라는 고구려,
백제멸망때와 마찬가지로 구원병 3만을 보내서 제나라 후방을 친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신라가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당나라의 멸망이 더욱 가속화됐겠죠.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이 무너진 것은 10세기 초반이지만, 7세기 후반부터 당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북아 최강을 구가하며 수백년년간 대륙의 한 쪽을 지배하던 고구려는 단순한 이웃 나라의 개념을 넘어서는 나라였고, 수의 침입에서 알 수 있듯이 중원의 모든 힘을 기울인다고 해도 멸망시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5년도 지나지 않아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국력의 지나친 소모를 틈타 서역의 토번이 중원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설인귀는 백제 유장 흑치상지의 지혜로 겨우 몸만 살아 돌아갔고 당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분노하여 설인귀에게 백의종군의 명령을 내립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백성들까지 복속시키지 못했던 당으로서는 백성을 위무하기 위해 고구려 멸망 당시의 태왕이었던 고보장을 임명하여 국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1년만에 이를 폐지하고 직할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1년만에 고보장이 당의 조정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역할을 수행하였던지 정반대의 방향으로 유도되었던지 둘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의 사서를 보면, 아마도 후자의 경우였던 것 같지만, 아무튼 자치통감의 서술을 따른다면, 당으로서도 일정 수준 만족을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자치통감에서 677년에야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기술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당이 고구려의 문제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아니면 신라의 강력한 저항으로 당의 한반도 완전 점령이라는 당초의 목표에서 고구려의 멸망까지로 목표가 전환되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668년 이후 30년 만인 698년 동모산에서 대조영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고, 산동 반도 일대에서는 이정기가 고구려의 후예를 명분으로 새로운 국가를 일으켰습니다.
이정기의 제국 같은 경우는 단순히 이정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연속하여 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중국의 사서에서는 '하북삼진 하남이진의 난'으로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이정기의 나라는 50년 넘게 지속되었는데, 당시 당의 승상마저 살해하고 당의 운하마저 불능상태로 만들어서 사실상 당이 반쪽만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라에 요청하여 정예병 5만을 지원받고 신라출신의 장수들로 운영되던 부대를 사용하여 겨우 이정기의 후예를 토벌합니다.
민족이 배출한 위대한 장수의 명단에 당당히 실린 장보고의 역사로의 첫 출현은 이토록 민족에 대한 철저한 배신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겹쳐 8세기 중반, 당제국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버린 사건이 바로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반란으로 고구려출신 명장 고선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당은 군사강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멍청한 황제들과 욕심많은 황제들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나라가 천천히 기울었고 마침내 9세기 후반,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날린 최치원이 당에서 벼슬을 하던 무렵, 황소와 왕선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왕선지는 후일 당에 투항하여 역사에서는 이 반란을 '황소의 난'이라고 부르죠.
이때, 황소의 부장 중 주온이라는 장수가 반란이 불리해지자 당에 투항을 하였는데, 당은 이에 감격하여 이 장수에게 '온 몸이 충성으로 되었다'는 뜻의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감격했던 당 조정의 기대와는 달리 주전충은 당의 황제들을 폐위시키고 죽이더니 당을 멸망시키고 양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해가 905년인데, 양은 전에도 있었던 이름이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전의 양과 구분하기 위해 후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자면, '안사의 난'으로 목이 반쯤 잘렸고, 질기디 질긴 목숨을 150년간 유지했지만, 주전충이 남은 목을 짓이겨버렸다고나 할까요?
“고구려인 노예, 당나라서 쿠데타”
‘현종 집권’ 이뤄낸 경호 노비 왕모중…
군사·재정 확충해 병권 잡은 뒤 정권 탈취 기도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 주장

“노예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 병권을 장악, 황제에 대항해 쿠데타를 기도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인 왕모중의 발자취’란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이 인물은 조국 패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 노비로 살았던 고구려 장수 왕구루(王求婁)의 아들 왕모중(王毛仲)”이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왕모중은 당시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져 있던 이융기의 호위 노예였다”며 “발군의 능력으로 이융기의 정권 탈취를 도와 그를 황제로 옹립한 뒤, 그 공로로 ‘3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융기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본명이다.

지 교수는 또 “왕모중은 CEO로서의 능력도 뛰어나 군사력과 재정을 확충, 현종 통치하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개원지치(開元之治)’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며 “당나라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그는 훗날 정권 탈취를 기도,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고 주장했다.

▲ 왕모중의 보필을 받아 당나라 최고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를 이뤘던 당현종 이융기의 모습, 이 그림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고 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며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을 쓰기도 한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인에 의한 당 황실 전복 쿠데타는 이것이 유일한 기록”이라며 “제나라를 세우고 765~819년까지 산동지역을 다스린 이정기·이납 부자가 당나라 전복을 꾀한 바 있지만, 이것은 쿠데타라기보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주간조선 2003년 2월 6~13일자 보도)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왕 모중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그런 인물이 당나라 실세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왔을 뿐으로, 그의 출신과 행적에 관한 연구 논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지원으로 이뤄진 이 논문은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된 것으로 내년 초에 출간될 예정이다.



현종과 함께 쿠데타… 대장군에 올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은 장정 20만명을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장수였던 왕모중의 부친 왕구루도 이때 끌려가 관노가 됐다. 왕모중이 태어난 시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지 10여년 뒤인 681~683년. 노비의 신분을 이어받은 왕모중은 나이가 비슷한 ‘임치왕’ 이융기(685년생)의 수행 노예가 됐다.

이융기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사냥을 즐겼던 그는 용맹한 사람을 만나면 돈과 음식을 하사해 자신의 사람으로 삼았다. 총명하고 깨달음이 빨랐으며 고구려인답게 기마와 궁술에 능했던 왕모중은 이 과정에 적극 개입, 세력을 규합해 이융기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다.

이융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710년이었다. 황제 중종이 황후 위씨(韋后)와 딸 안락(安樂)공주에 의해 독살된 것이다. 중종의 조카였던 이융기는 “위후 일파를 제거해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켰다. 왕모중은 이 과정에서 황궁 수비대를 사전 장악, 거사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융기 군사는 왕모중의 활약에 힘입어 황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살해, 중종 시해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거사를 이뤄낸 임치왕 이융기는 ‘평왕(平王)’으로 왕호를 높여받은 뒤, 문무 주요 관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었다. 위후를 살해한 종소경(鐘紹京)은 ‘중서령’으로, 위후 제거 후 조칙을 쓴 유유구(劉幽求)는 ‘중서사인’으로 임명해 정사를 관장하게 했다. 또 거사에서 무공을 세운 설숭간(薛崇簡), 마사종(麻嗣宗), 갈복순(葛福順) 등과 임치왕 경호를 맡았던 이의덕(李宜德) 등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왕모중도 이때 장군으로 파격 제수됐다.

지배선 교수는 “이융기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사람이 한족이 아닌 고구려인이란 사실에 의미를 두고 싶다”며 “이 사실로 미뤄 당시 중국 사회에서 고구려인들이 다양한 활약을 벌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나라를 장악한 이융기의 남은 과제는 황제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변의 눈’을 의식한 이융기는 명분을 쌓기 위해 중종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 당나라 상류층들이 즐겨던 격구 장면, 이 그림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실 권을 쥔 이융기는 예종의 장남이자 자신의 맏형 이성기를 제치고 황태자가 됐다. 그가 착수한 작업은 쿠데타의 주축이었던 좌우영(左右營)을 격상시키는 일이었다. 이융기는 좌우영의 이름을 ‘용무군(龍武軍)’으로 바꾼 뒤 최고의 대접을 해줬다.

당 서(唐書) ‘왕모중전(王毛仲傳)’은 용무군에 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양가 자제들은 군역과 요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용무군만은 예외였다. 앞다퉈 들어가려 뇌물을 바칠 정도였기 때문에 (1000명이었던) 부대 규모가 수천명으로 늘었다. 용무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는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예종이 즉위한 ‘격변의 해’ 710년 하반기, 왕모중은 3품의 품계를 받고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야심가 이융기는 712년 자신의 뜻을 달성, 천자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가 훗날 ‘개원의 치’를 이룬 황제 현종이다.

노예 출신의 ‘대장군’ 왕모중은 713년 다시 한 번 부각된다. 7명의 재상 중 5명을 장악, 권력을 휘두르던 예종의 누이 태평공주가 ‘현종 폐위 음모’를 꾸민 것이다. “태평공주측에서 병사를 동원, 7월 4일 침입해 올 것”이란 극비정보를 입수한 현종은 역공을 취했다. D데이를 하루 앞둔 7월 3일, 왕모중과 그의 병사 300명을 동원해 공주 일행을 주살해 버린 것이다. 현종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상 숙지충을 비롯한 태평공주 측근 전원을 죽이고, 자신과 고종사촌인 공주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주살한 뒤, 이미 세상을 뜬 공주 망부(亡夫)의 시체를 꺼내 부관참시했다.



병력·재정 확충해 ‘개원의 치’ 틀 마련

사 태를 신속하게 ‘정리’한 사람은 왕모중이었다. 그 공로로 그는 7일 뒤인 713년 7월 10일, 보국대장군·좌무위대장군·검교내외한구 겸 지감목사로 임명되면서 국공(國公)의 작위와 함께 장안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황족을 제외하면 진압에 공을 세운 인물 중 최고의 포상이었다.

지 교수는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馬)을 관리하는 직책인 검교내외한구”라며 “이것은 현종 이융기가 임치왕에서 평왕으로 봉해질 때 함께 받았던 관직이자, 훗날(754년) 현종의 양아들로 총애받았던 안록산이 받기도 했던 요직”이라고 말했다. “황실과 군사 양쪽에 말을 공급하는 핵심임무를 독점함으로써 왕모중이 물자 수송과 병력관리의 맥을 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왕모중은 검소했다. 황제로부터 호화저택을 하사받았음에도 ‘병마양성’을 위해 변방의 처소에서 사병과 함께 생활했으며, 사심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CEO로서의 경영능력도 뛰어났다. 목동 1000여명을 모집해 그들에게 방목을 맡기는 현대적 개념의 ‘전문가 아웃소싱’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왕모중은 24만마리이던 병마의 수를 43만마리로, 3만5000두였던 소를 5만두로, 1만2000마리였던 양을 28만6000마리로 늘렸다. 그는 죽은 짐승도 버리지 않았다. 가죽을 팔아 비단 8만필을 구입했고, 동맥·목숙 등의 사료를 준비해 겨울을 대비했다.

사욕을 부리며 재물을 축적하던 다른 관리들과 달리 왕모중은 이익을 재투자, 매년 수만석의 잉여 물자를 확보해 황제에게 추가로 바쳤다. 현종은 왕모중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노예 출신인 그를) 연회석에서 황제의 형제·자식들과 나란히 앉게 해 ‘왕’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줬다”는 당시의 기록은 그에 대한 현종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당서(唐書) 기록에 따르면 “현종은 연회 때 왕모중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와 밤새워 대화를 나누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밤을 새고 난 뒤에도 그 다음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 시의 전쟁에선 기병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말은 최고의 군사자원이었다. 왕모중은 빠르고 멀리 달릴 수 있는 병마를 단시일 내에 확보하고 재정적 확충을 이룸으로써 당이 ‘세계국가’로 뻗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현종의 정치적 안정을 일컬었던 ‘개원의 치’는 왕모중이 닦아 놓은 재정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멈추지 않았다. 현종은 왕모중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감목송(監牧頌)’을 지어 부르게 했으며, ‘이씨’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하사했고, 그녀에게 ‘국부인(國夫人)’의 칭호를 내렸다. 또 왕모중의 어린 아들에게는 5품 벼슬을 제수하고 황태자와 함께 놀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왕모중은 상승을 거듭, 721년 당나라 북부의 병력을 총괄하는 ‘지절충삭방도방어토격대사(持節充朔方道防禦討擊大使)’로 임명돼 중국 북부의 군권을 장악했고, 4년 뒤인 725년엔 1품 고관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돼 ‘3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파격적인 황제의 총애는 환관들의 질시를 불러왔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물욕·권력욕이 유달리 강했던 환관들과 강직한 성품의 왕모중은 애초에 맞는 궁합이 아니었다. 왕모중은 드러내놓고 환관들에게 모욕을 주곤 했다. 그러자 환관들은 은밀하게 왕모중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축이 된 사람이 훗날 현종에게 양귀비를 소개하는 환관 고력사(高力士)다.



“당나라 황제를 노려라” 또 다시 쿠데타

환관들의 ‘작업’은 은밀하고 집요하게 진행됐다. 틈을 노리던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729년 6월, 황제 호위를 담당하는 ‘용무군’ 대장 갈복순의 아들과 왕모중의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들은 혼인을 통해 세력 결속을 꾀한다. 권력자의 입장에선 이것이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현종의 경우엔 특히 그랬다. 당나라의 병권이 ‘한 집안’으로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이 왕모중을 따르는 상황에서, 그가 황실 경비대장 갈복순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좋지 못한 일입니다. 게다가 왕모중은 소인배인지라 총애가 지나치시면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 종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짐은 그대들의 충정을 알겠노라.”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상적으로 비대해진 왕모중의 권력이 거슬리던 판이었다. 현종은 “간언 내용을 극비에 부칠 것”을 명했다. 만에 하나 왕모중 제거 의사가 새나갈 경우 역공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를 제거할 때, 왕모중과 함께 역공을 폈던 현종이다. 그는 은밀하게 작전을 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갈등이 표출된 것은 730년이었다. 왕모중이 황제에게 ‘병부상서’ 자리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병부상서는 당의 군사력 전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왕모중을 제거하려 마음먹은 황제가 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 현종은 드러내놓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왕모중도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왕모중의 행위는 당 지배질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이의덕(李宜德), 당지문(唐地文), 왕경요(王景燿), 고광제(高廣濟) 등 당대의 무장 수십 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자적 군사력을 키워온 왕모중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황제에 대한 도전은 황실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왕모중에겐 힘이 있었다. 그가 더이상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현종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왕모중은 자신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현종에게 대항할 뜻을 굳혔다. 그는 더 많은 장군들을 포섭,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현종도 자위 수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왕모중과 대립관계에 있는 환관들을 동원해 정보수집에 착수, 왕모중의 비리를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종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환관들의 권한도 그에 비례해 커지는 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왕모중은 흥분했다. 그는 현종의 조서를 갖고 온 환관들에게 노골적으로 모욕을 줬다. 조서를 받드는 환관에겐 황제에 버금가는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신하의 본분이었다. 왕모중은 더이상 현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먼 저 칼을 뽑은 것은 황제였다. 왕모중이 극비리에 병기를 수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황제는 측근 엄정지(嚴挺之)를 등주자사·태원소윤에 임명, 왕모중의 군사기반인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왕모중도 당시 최대의 군수기지였던 태원·삭방·유주 등지에서 군량과 병마·무기를 사들이며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켰다.

때는 731년 정월. 현종은 왕모중을 따르는 장군들과 왕모중의 아들들을 강등시켜 변방 한직으로 내모는 신년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왕모중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양 대 세력은 충돌했다. 하지만 ‘두 세력이 어디서 어떻게 부딪쳤는가’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왕모중이 패하여 죽자, 황제는 엄정지의 충성을 평가해 그를 형부시랑으로 불러들이고, 이후 고위직인 ‘태부경(太府卿)’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지배선 교수는 “왕모중의 사망에 대해 구당서(舊唐書)는 ‘현종이 왕모중을 죽이도록 조서를 내려, 영릉(零陵)에서 목매달아 죽였다’고 적고 있다”며 “이 두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전투에서 패한 왕모중이 (장안에서 직선거리로 800㎞ 떨어진) 호남성 서남쪽 영주(永州)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훗날 현종이 애첩 양귀비를 죽일 때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당시 조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을 처형할 땐 목을 매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발해의 서쪽 강역문제는 요동의 지배여부와 집결된다. 이하 당나라의 요동지배는 중국 측 기록에 따른다하더라도 발해가 성립된 지 6년만인 714년 요서지방으로 완전 철수하였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 그 이전에도 실제로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하 간단히 이에 관계된 자료들을 간추려 본다.

1. 안동도호부는 발해 건국 이후 요동에서 사라졌다.

1)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안동도호부의 옛 주민(舊戶)을 맡겨 통치(統攝)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구당서 고려전) ---- 이 때 발해가 성립된다.
2) 699년 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안동(도호부)에 있는 고구려의 옛 주민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 말갈 등으로 흩어지 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만다.(구당서 고려전) ---- 발해가 성립된 후 형식적으로나마 안동도호부를 유지하려했으나 실패한 기록이다. 여기서 말갈 땅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바로 발해에 흡수된 것을 말하며 적어도 이때부터는 요동반도가 발해 땅이 된 것이다.
3) 714년 - 당나라, 요서지방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2. 732∼733 발해의 등주 공격 때 요동에는 당의 세력이 없었다.

732년 9월 발해 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원정군은 바다길로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살해한다. 만일 가탐의 도리기에 나오듯이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쯤 올라간 박작성이 국경선이라면 당나라를 침략할 대부대가 압록강 하구를 지키는 당나라군부터 무찔러야 했을 것이다. 발해 군이 현재 산동성인 등주를 공격하려면 반드시 압록강 입구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 요동반도 끝에서 고군산 열도를 지나가야 한다. 만일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면 발해군의 대선단이 아무런 저항없이 등주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동반도 에 당나라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발해가 요동반도를 치지 않고 등주를 친 것도 요동반도를 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요동반도에 당나라 세력이 있으면 그곳부 터 쳤을 것이다. 발해는 해군의 출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육로로 요서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문제를 일으켰던 대문예를 유주에 보내 군사를 모아 싸우게 하고, 유주 절도사가 [하북채방처치사를 겸임하도록 해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총 16개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권 213 당기 현종 개원 20년) 한편 당나라는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 왕족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남쪽으로부터 발해를 침공하도록 한다(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3. 요사 지리지에 반영된 요동반도의 발해 영토

요동반도가 확실한 것만 몇 곳 간추린다(요사 권 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 - 본래 조선(필자 주 : 단군조선)의 땅이다(本朝鮮之地). ……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는데 후에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後爲渤海大氏所有)
진주(辰州) 봉국군 절도 - 본래 고구려 개모성, 당 태종이 이세적을 만나 개모성을 격파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개주(蓋州)로 바꾸었다.
노주(盧州) 현덕군 자사 - 본래 발해 삼노군이다. 옛날 5개 현으로 산양, 삼노, 한양, 백 암, 상암이었는데 모두 폐지했다. 철주(鐵州)는 본래 한나라 안시현이었는데 고구려 때 안시성이 되었다. 당 태종이 쳐들어 갔을 때 항복하지 않자 설인귀가 흰옷을 입고 성을 올라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 때 주를 두었는데 본래 위성, 하단, 창산 용진의 4개 현이다.
암주(巖州) 백암군 하 자사 - 본래 발해 백암성, 태종이 빼앗아 심주에 속하게 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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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막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발해와 당이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던 사건에서 비롯한다.
대 문예는 다음과 같이 당나라 공격을 반대하였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몇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이다. 지난날 고구려가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하다."고 대문예는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참고로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과 말갈(=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3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위의 기록을 통해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이 330여만명-40만 강군이라면, 멸망시의 고구려는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인구를 최소한 발해의 2배로 잡는다 하더라도 660여만명이라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에는 1000여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왕은 결국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또 당나라에 묶고 있던 신라 김사란(金思蘭)에게도 신라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고 전한다.

무 왕은 몰래 동도(東都)에 사신을 보내 자객을 사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찔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죽었다고 한다. 무왕이 당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깊은 원한과 주변의 돌궐과 거란도 당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이렇게 정연한 국가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발해는 시종 당나라와는 나라 대 나라의 국가관계 차원에서 영활한 화전 양면의 전략전술로 응수해나갔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거란 등 가까운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전대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데와 교섭하여 가까운 데를 치다)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서천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위압당한 당나라 중종은 705년 특사를 보내 과거 고구려와 그 유민들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수교를 제안한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당나라와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중국 지린성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고,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알려주는 발해 황후의 무덤이 발굴됐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원이 발간한 ‘고고(考古)’(2009년 제6기)에 실린 ‘발해왕실묘장 발굴 간보’에 따르면 2004~2005년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 마을 룽터우산 고분군에 있는 발해왕실무덤에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계승한 금제관식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발해국 3대 문왕(재위 737~793년)의 황후 효의왕후와 9대 간왕(재위 817~818년)의 황후 순목황후의 묘지(墓誌)가 출토됐다. 그런데 순목황후의 묘지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泰)씨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한상 대전대 교수는 “출토된 금제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새 깃털모양 관)의 전통을 잇고 있다”면서 “새 날개의 이미지를 세 가닥의 식물 이파리처럼 도안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는 당나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순수한 발해산이며 고구려 조우관”이라면서 “여백을 끌로 쪼아 문양을 드러내는 ‘물고기알모양(魚字文)’을 활용하면서 발해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절정의 금속공예 문화 수준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으면서 황제국의 위상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뒤엎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참고로 당나라는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왕조가 아닌 흉노계 선비족 왕조다.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발해는 완비된 국가체제와 주권국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한 국제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화를 주고받은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를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용서못할 거역이고 오만이며, 우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에 다름아니다고 정수일 교수는 말한다.

또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 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에 기여했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 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 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여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81&aid=0000090110&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6/10/25/200610250500036/200610250500036_1.html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현재 북한 평양에 발굴 터와 건물 유구 일부가 보존돼 있는 8만6천여평 규모의 고구려 최대 정궁인 안학궁(安鶴宮)

안 학궁은 427년 장수 태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뒤 축조한 성으로 그 중심이 안학궁이었다. 안학궁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궁궐로, 우리나라 정궁 역사상 최대 규모다. 근세조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높이가 34m인데 비해 안학궁의 정전인 중궁은 87m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높이 2m가 넘는 치미(기와장식품)가 발굴되기도 했다. 안학궁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 최대 왕궁인 대명궁 함원전 67.5m보다 규모가 컸고, 건립시기도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명(明)·청(淸) 시대의 궁전인 자금성 태화전은 60m에 불과하다.

자금성 태화전은 동서 60m, 남북 33m / 경복궁 근정전은 앞면 30m,·옆면 21m /
고구려 안학궁 - 남궁은 앞면 62m & 중궁은 앞면 87m, 옆면 27m

자금성(원래 9999칸이었고, 현재 8800여 칸)은 둘레가 3.52km이다.
반면 경복궁(원래 7481칸이었지만 현재 700여 칸이다. 경복궁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허물어졌고 현재는 10분의 1정도가 남아있다)은 둘레가 3.26km이다.

자 금성 안에 나무가 없는 것은 자객이 나무에 숨어 성 안의 사람을 공격할까 봐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궁 안의 나무가 황제의 위엄을 가린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나무 없는 자금성은 바람이 쌩쌩~ 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금성의 황제들은 겨울궁전을 따로 만들어 겨울에는 자금성을 떠나 겨울궁전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 내부가 신하들이 옥좌 앞에 도열해서 국사를 논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금성 태화전 역시 신하들이 도열할 내부공간은 별로 없었다. 태화전은 가로로 길게 건설되어 배치되어있고 그 직각 방향으로 문이 있어서 옥좌가 그 방향으로 되어있으니까말이다. 웅장한 태화전도 옥좌 앞에서 출입문까지 별로 공간이 없었다. 둘다 조회나 의식에 쓰였고 신하들은 광장에 도열했던 거였다.

정치·문화적으로 볼 때 중원을 압도하며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면모와 증거를 안학궁에서 깊게 엿볼 수 있다.
고 구려 문화는 당시,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중심문명이었다. 당나라의 왕릉, 궁성 유적에도 고구려의 영향은 드러난다.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원인을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문화선진국이던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부여-고구려-백제가 비슷한 의복을 입고, 비슷한 음식에 비슷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토기와 신라의 황금장식도 고구려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또 발해의 상경성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발해의 주작대로는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사신도? 어쨌든 발해는 건축구조에서 온돌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고구려의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펴내

발 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 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등주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150t의 카라크선(carrack 船)이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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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스페어 타이어 달고 다니세요?
LA폭동 미국의 백인 흑인들의 심각한 한국인(동양인)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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