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입니까? 못생기고 쪼그만 ‘쪽발이’의 나라? 깔끔하고 희생정신 투철한 존경받을만한 국민성을 지닌 나라?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남의 나라를 빼앗고 짓밟은 강도국? 급속한 근대화와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선진국?
명암이 교차하는 이런 일본관은 대부분 장구한 역사의 일부에 형성된 생각입니다. 일본은 여러 모로 수수께끼의 나라입니다. 동양권에 위치하면서 교황과 황제, 봉건영주들로 구성됐던 중세 서양 봉건제를 닮은 천황과 장군(쇼군), 번주(다이묘)로 구성된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작동하던 국가였습니다.
또한 서양을 제외하고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이지만 막스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바라본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가장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샤머니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 일본을 폄하하는 바람이 불었지만 일본은 확실히 한반도 보다 대국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보유하던 조총의 숫자가 당시 유럽대륙 전체가 보유했던 조총을 능가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지상최대의 군사력을 지닌 국가와 전쟁을 치렀던 것입니다.
18세기 일본의 수도 에도(지금의 도쿄)는 인구 100만의 세게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청의 수도 베이징의 인구가 50만이었고 조선의 한양은 30만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에선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런 면모를 간과하기 일쑤입니다. 그저 근대 이전까지 한국보다 문물이 한참 뒤졌던 섬나라 오랑캐 국가가 운 좋게 근대화에 성공해 졸부가 됐다고 간주할 뿐입니다. 서양의 석학들의 연구를 통해 일본의 이런 본모습을 발견하더라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심정을 벗어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을 경이로운 국가로 바라보는 서양적 시각이나 한반도의 영향 아래 있던 축소지향의 국가로 바라보는 시각이나 모두 문제입니다. 일본을 철저히 타자로 바라보는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의 형제국가입니다. 그동안은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는 서열다툼을 벌이느라고 정작 양국이 피를 나눈 형제라는 점을 간과해왔습니다. 그러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양자강문명과 차별화되는 고조선(요하문명)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발원했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즉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면서 그동안 절대악으로 간주했던 일본의 만선사관에도 우리가 충분히 수용할만한 진실이 담겼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선사관에서 일본중심주의를 제거한다면 몽골-만주-한국-일본을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형제국가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소수민족의 블랙홀인 한족(漢族)이 주변민족을 분할해 지배하려는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역사인식이기도 합니다.
이 역사인식의 주체가 되어야할 민족국가 중에 현재의 인구나 영토로 봐서 한국과 일본이 쌍두마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쌍두마차 중 하나가 지금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면서 과거 중국 중심주의나 서양 중심주의에 빠져 잊고 있었던 양국의 유대의식이 새롭게 움트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침 양국의 그런 동일 뿌리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KBS1 주말드라마 <근초고왕>입니다. 현재 드라마 근초고왕의 열혈 시정자들은 이 드라마가 한일 형제의식의 뿌리를 다루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실 겁니다. 실제 현재까지 드라마에는 아직까지 일본 이야기가 하나도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제와 일본은 부여를 뿌리로 한 국가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동아시아 고대사를 천착해온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대쥬신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부여와 백제, 일본의 관계를 대륙부여-반도부여-열도부여로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
국내 역사학계에서도 우리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만 중시하는 삼국시대로 부르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보다 훨씬 앞서는 고조선 시대는 별도로 하더라도 우리 고대사의 주요국가였던 부여와 가야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국시대 내지 오국시대라고 불러야한다는 것이지요.
부여는 고구려에 흡수되고 가야는 신라에 흡수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여와 가야는 삼국시대라는 역사적 칭호에서 제외된 우리 고대사의 잉여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여와 가야의 역사는 또한 일본의 역사와 직결됩니다. 가야계와 부여계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고대사를 한반도의 역사로 국한시키지 않고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로 불러야한다면 그 네 번 째 나라는 부여나 가야가 아니라 일본이 돼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쌍두마차 중 하나가 지금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면서 과거 중국 중심주의나 서양 중심주의에 빠져 잊고 있었던 양국의 유대의식이 새롭게 움트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침 양국의 그런 동일 뿌리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드라마 <근초고왕>은 바로 그런 역사인식의 근원을 무의식적으로 건드리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최초의 정복군주입니다. 그를 통해 한강(드라마의 욱리하) 주변에 웅거하던 소국 백제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웅비합니다. 그는 또한 일본에 불교와 유교를 전했고 칠지도를 선물했는데 이때에 일본에서 비로소 최초의 중앙집권 정부인 야마토 조정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 이 야마토 조정의 천황이 모두 백제계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동명왕 기록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기록은 7세기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북사(北史)>입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출간된 이 역사서에 실린 백제의 건국설화는 아예 부여 동명왕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의 후손인 구태(또는 구이)가 대방 땅으로 건너가 세운 나라가 백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백제가 부여의 계승국임을 가장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봐도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이란 기록과 북부여의 후손인 구태/구이의 후손이라는 2개의 기록이 병존합니다.
김운회 교수는 마한연합세력의 군소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4세기 중반 갑자기 강대국이 된 배경에 바로 구태/구이로 대표되는 대륙부여 세력이 남하해 비류와 온조 세력과 결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김 교수는 이런 부여의 남하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고 봅니다.
첫 번째가 위나라의 요동정벌로 부여가 위기에 처했던 2세기초로 이 때 남하한 세력이 백제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정비한 고이왕 계가 됩니다. 김 교수는 고이왕이 곧 구태/구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는 선비족국가인 연의 모용황의 침공으로 부여가 멸망한 346년을 전후한 시기입니다. 근초고왕의 재위기간은 346년~375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백제가 고이왕계인 계왕(위례궁주 부여준) 세력과 초고왕계인 근초고왕 세력의 왕위다툼도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고이왕계가 3세기경 1차로 남하한 부여계라면 초고왕계는 4세기경 2차로 남하한 부여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이 백제의 원래 왕실계통인 초고왕을 계승한 왕명을 사용한 것은 1차 부여세력에 맞서기 위해 원래 백제 왕실계통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직 가설이지만 상당한 설득력을 띱니다. 드라마에서 부여구(감우성)가 요서 땅으로 쫓겨가 부여세력과 손을 잡고 다시 백제로 건너온다는 설정 보다 이 가설이 더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 사실 이 드라마는 대륙부여-반도부여-열도부여로 이어지는 부여일통의 역사를 명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이 셋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근초고왕 부여구(감우성)가 왕자시절 백제에서 쫓겨나 요서지역을 방황하다가 동부여의 후손들과 손을 잡고 백제로 돌아와 왕위를 쟁취한다는 설정부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안팎에선 백제가 부여를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더 명백한 증거들이 쏟아집니다. 첫째 백제 왕족의 성씨가 부여 씨입니다. 실제 중국의 사서들은 백제 왕족의 성을 부여(夫餘)나 여(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백제가 시조로 모시는 동명왕이 부여를 건국한 왕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셋째 백제 성왕 때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고쳐서 대륙부여(북부여)의 계승국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입니다.
북방의 고리 또는 색리라는 나라의 시녀가 달걀 크기의 빛이 내려와 임신을 한 뒤 아기를 낳아 이름을 동명이라 지었는데 활을 잘 쏴 왕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몸을 피해 부여를 건국했다는 내용입니다. 주몽이 부여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주몽설화가 이 동명왕 설화를 변용 발전시킨 것으로 봐야합니다.
- 건국신화의 이런 내력을 놓고 본다면 백제와 고구려가 같은 시조를 놓고 모신 것이 아니라 누가 부여의 적통이냐를 놓고 치열한 정통성 싸움을 펼쳤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드라마에서 백제 근초고왕(감우성)과 고구려 고국원왕(이종원)이 부여왕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란 인장을 놓고 경쟁하는 장면은 결국 역사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런 고구려와 백제의 정통성 다툼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열도부여가 될까요. 그 키워드를 쥔 사람이 바로 근초고왕입니다. 드라마에선 최근 근초고왕의 제1왕후 부여화(김지수)와 제2왕후 위홍란(이세은)이 서로 자신의 자식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또 번한 궁중암투로군 하고 혀를 차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근초고왕을 뿌리로 백제왕실과 일본왕실로 분화하게 되는 것을 다루기 위한 극적 장치가 아닐까 합니다. 자 이 부분은 다음 회에 다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http://blog.donga.com/confetti/archives/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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