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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13, 2011

한국과 일본은 형제국이다(下)

2011-04-29 by [삼척동자]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군의 도하 전투 장면. KBS 제공.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특수 관계를 살펴볼 때 가장 결정적 장면은 663년 벌어진 백촌강(白村江)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부흥군을 돕기 위해 일본에서 400여척의 함선을 동원해 2만7000명의 병력을 지금의 금강 하류에 상륙시키려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부여계 연합군과 나당엽합군이 격돌한 국제전이었던 것이지요.
많은 분들은 동북아 최초의 국제전으로 임진왜란을 떠올리시는데 그 전에 이미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전이 있었고 그 훨씬 앞에 백촌강 전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일본이 연관돼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백촌강 전투(삼국사기엔 백강전투로 기록돼있음)를 거의 기억 못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선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강렬한 국가적 트라우마를 형성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똘똘 뭉친 일본열도는 고슴도치 전략과 도마뱀 전략을 구사하며 일본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게 됩니다.

여기서 고슴도치 전략이란 대륙과 반도를 적대시하면서 열도라는 제한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幽閉) 하는 것입니다. 이로 통해 천황 중심의 내부 단결을 도모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우리가 흔히 ‘섬나라 근성’이라는 부르는 독특한 폐쇄성과 배타성이라는 부작용을 안게 됩니다. 도마뱀 전략이란 일본과 한반도의 연계성을 끊어버리고 일본 역사를 철저하게 자국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712년)와 <일본서기>(720년)의 편찬입니다.

고사기는 일본 고대 신화와 설화에서 출발해 일본 초대 천황으로 기록된 진무천황부터 33대 스이코 천황(554~628)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3권짜리 책입니다. 일본서기는 30권짜리로 이 고사기보다 훨씬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데 역시 신화시대부터 41대 지토 천황(645~703)까지 역사를 연대기로 기록했습니다. 이 두 책은 일본의 역사를 신화시대까지 확장시키는 한편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을 일본 중심으로 새롭게 재구성합니다.

한국에선 재구성과 재설계라는 말 대신 ‘날조’란 표현을 씁니다. 특히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지원지가 된 일본서기는 무슨 저주받을 책이라도 되는 듯 금기시합니다. 하지만 무릇 국가차원의 저술은 어느 정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을 단행하기 마련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유대교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저주를 퍼붓지 않아도 일본 학계에서도 대략 4세기 이전 기록은 상당부분 조작됐을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특히 일본서기의 기록에 대해선 일본의 역사 연대를 끌어올리려고 120년(2갑자)씩 연도를 앞당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서기에선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등극연도를 224년과 255년으로 기록했는데 삼국사기에는 각각 344년과 375년으로, 정확히 120년 차이가 납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근초고왕 역을 맡은 감우성 씨.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 역사서들의 날조 여부가 아니라 왜 그런 재구성 또는 재설계가 이뤄졌나하는 점입니다. 두 역사서의 편찬을 지시한 인물은 일본의 40대 천황인 덴무 (재위 673~686)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덴무 집권기부터 일본이란 국호를 채택(덴지 천황 때부터라는 기록도 있음)하고 천황이란 칭호가 사용됐습니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이 덴무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진 일본의 정체성이 새롭게 구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덴무의 어머니가 바로 백촌강 전투에 국운을 걸다시피 병력을 모집하다가 숨진 사이메이 천황(594~661)입니다. 사이메이의 뒤를 이어 백촌강 전투를 단행한 덴지 천황은 덴무의 형입니다. 사이메이와 덴지는 부여계통의 형제국인 백제에 대한 애착이 강렬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사이메이가 백제 멸망 소식을 접한 뒤 “본국(本邦)이 국토를 잃고 백성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이제 더 이상 의지할 곳도 고(告)할 곳도 없게 되었네”라고 한탄했다고 기록합니다. 덴지 역시 백촌강 전투에 패배하고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조상의 무덤을 모신 곳/어찌 다시 돌아가리”라고 탄식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덴무는 형이 죽고 난 뒤 조카(고분 천황)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그는 본국 내지 본토로서 백제를 그리워한 어머니와 형과 달리 일본 내부에서 백제를 지워가는 형태로 일본의 정체성을 재구성했습니다. 백제 복권을 천명했던 형의 정치노선과 차별화하기 위해 아예 백제 삭제를 모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닮았으면서도 다른 덴지와 덴무 형제관계는 고스란히 백제와 일본의 관계와 겹쳐집니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어가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입니다. 엄마 배 속에서 쌍둥이였던 아이 중 하나가 유산도 아닌데 뱃속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다른 쌍둥이는 그 사라진 쌍둥이의 태반을 흡수하고 태어납니다. 살아남은 것은 하나지만 그 속에는 두 명의 쌍둥이가 들어있게 되는 셈이지요.

<일본서기>에서 한반도를 정복한 여걸로 그려지는 진공황후의 상상도. 동아일보 DB

덴무는 자신이 집권한 뒤 죽은 형(덴지)을 일종의 배니싱 트윈으로 만들려하지 않나 싶습니다. 덴지의 정치적 군사적 유산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적극적 도움으로 이뤄냈던 그 상당부분을 자신의 업적으로 바꿔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스란히 반도부여가 멸망한 뒤 열도부여가 택한 길입니다. 반도부여가 성취한 역사적 업적을 열도부여의 것으로 바꿔치는 것이지요. 그 성취의 상당부분이 반도부여의 파트너로서 열도부여의 도움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도 닮았습니다.

일본사상사학회장을 지낸 고야스 노부쿠니 오사카대 명예교수는 2006년 한중연과 성균관대 공동초청 강좌에서 백촌강 전투 이후의 열도부여의 이런 선택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습니다. “일본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을 통해 그 역사에 남아 있는 한(韓·한민족)의 흔적을 지워 갔다. 근대 일본의 성립은 그래도 남아 있던 한(韓)의 흔적을 총체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갔다.”

이제 우리는 반도부여와 쌍둥이와 같았던 열도부여가 왜 반도부여의 역사를 자신들이 역사로 전유(專有)하려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라진 쌍둥이의 태반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어떻게 해서든 생존하려는 고육지책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부여계 국가의 전통을 돌이켜봐도 매우 비극적입니다. 본디 부여라는 나라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하는 식으로 계속 공간을 이동하면서 국체의 연속성을 이어왔습니다. 대륙부여-반도부여-열도부여의 개념도 그 연장선상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하지만 태평양 끝자락 열도에 갇혀 더 이상 옮겨갈 곳을 찾지 못하면서 자폐와 분열을 겪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역사의 전유는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대륙부여의 역사를 지우고 반도부여의 역사를 열도부여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핵심에 놓인 인물이 바로 근초고왕입니다. 근초고왕이야말로 반도부여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마한을 정복하고, 가야를 복속시키고, 열도부여를 개척하고, 대륙부여 시절부터 라이벌이던 고구려를 패퇴시킨 주인공입니다.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 천황에게 선물한 '칠지도'. 연합뉴스

일본서기는 이 근초고왕의 업적을 진구황후라는 다분히 가상의 인물의 업적으로 바꿔칩니다. 진구황후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의 시조로 분류되는 15대 오우진 천황의 어머니입니다. 일본서기에는 이 진구황후가 아들 대신 무려 60여년을 섭정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 그 연도가 201~269년인데 앞에서 말한 2갑자(120년)를 더하면 321~389년으로 근초고왕의 재위기(346년~375년)와 얼추 맞아 떨어집니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의 업적이 재위 2년 기록이 나오다가 바로 21년 기록으로 건너 뛰어 거의 20년이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명을 받아 백제왕으로 한반도 남부 전역을 공략하는 과정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근대 일본은 이 진구황후를 내세워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정한론(征韓論)을 정당화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우익을 제외하고 일본학계에서도 진구황후를 실존인물로 보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만일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을 대신할 가상의 아바타라면 그 아들로 야마토 왕국을 세운 오우진 천황은 누구의 아들이 되는 걸까요? 더군다나 오우진 천황과 그의 아들인 닌토쿠 천황(오우진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함)은 백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성씨도 백제 왕비의 성씨인 진(眞)씨입니다.

일본 야마토 왕국의 시조인 오우진 천황 또는 그 아들인 닌토쿠 천황의 능.

드라마 <근초고왕>을 보시는 분들은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진씨 가문은 근초고왕의 외가이자 대대로 백제 왕비를 배출한 가문의 성씨입니다. 드라마에서 근초고왕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로 나오는 진승(안재모)의 가문인 것입니다. 또한 부여계 유민 출신으로 진씨 가문의 양녀가 되면서 성씨를 위에서 진으로 바꾼 근초고왕의 제2왕비 진홍란(이세은)의 친정입니다.

부여계 유학자 아지카이에서 아직기로 개명하는 이인 씨.

백제와 일본이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근초고왕 때입니다.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일본에 선물한 시기(372년)가 오우진 또는 닌토쿠 천황의 재위기이며 왕인과 아직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과 여러 문물을 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드라마에서 부여계 유학자로 등장하는 아지카이(이인)는 최근 왕명으로 아직기라는 이름을 내려받는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아지카이가 아직기로 이름이 바뀔 때 복구검(한정수)이란 장수의 이름도 목라근자로 바뀝니다. 목라근자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등장하는 명장으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벌하고 가야를 복속시킬 때 맹활약하는 인물입니다.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는 가야 땅의 지배자로 한때 백제의 전권을 장악하는 거물 정치인이 되는데 학계에선 그가 야마토 조정 시대 일본의 정권을 오랫동안 장악했던 백제계 도래인 소가씨蘇我氏) 가문의 시조인 소가노만치와 같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근초고왕의 충복 복구검에서 백제 명장 목라근자로 변신하는 한정수 씨.

이렇게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을 병치해서 바라보다 무엇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일본의 야마토 왕국이 근초고왕의 일본경략의 일환으로 건국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근초고왕이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 20년 동안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왕국을 세웠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야마토 왕국의 시조로 불리는 오우진 천황이 근초고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농후해집니다.

이는 이후 일본 천황 중 상당수가 백제왕실과 친인척 관계를 맺는다는 점으로도 뒷받침됩니다. 일본 측 기록(신찬성씨록과 속일본서기)에서 백제계로 밝혀진 천황만 꼽아도 일본 26대 게이타이 천황(재위507~531)과 일본 헤이안시대를 연 50대 간무 천황(737~806) 둘이나 됩니다. 간무 천황이 백제계라는 점은 2001년 아키히토 천황이 직접 밝히기도 한 사실입니다.

천황 뿐 아닙니다. 야마토 왕국 시대에 들면서 백제에서 이주해온 도래인의 숫자가 엄청납니다. 일본서기의 기록만 봐도 403년 무려 12개 현, 409년엔 17개 현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집단 이주합니다. <속일본기>란 일본 측 역사서에는 “야마토왕국 중심부에는 도래인의 씨족이 너무 많아서 다른 씨족은 열에 한두 명도 안된다”라고 기록될 정도입니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렇게 백제 도래인이 급증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태왕(391~419)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은 부여계에겐 야차와 같은 왕입니다. 대륙부여의 명맥을 이어가던 동부여를 멸망시켰고 한때 황해도 일대까지 진출했던 반도부여(백제)를 압박해 한강 이남으로 패퇴시킨 주역이니까요. 북부여가 위기에 처하자 동부여로 대거 이주가 이뤄졌던 것처럼 반도부여가 위기에 처하자 열도부여로 대거 이주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 전에도 일본열도에는 가야계와 신라계가 진출했지만 4세기 이후에는 백제계의 진출이 압도적입니다. 그 물꼬를 튼 인물이 바로 근초고왕인 것입니다. 드라마 <근초고왕> 속 백제 귀족의 복장이 일본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복식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를 왜색이라고 비판하기 보다는 백제의복이 전승된 일본의복에서 그 원형을 끌고 왔다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실제 일본서기에는 오우진 천황 시대부터 백제의상이 유행해 이를 백제풍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근초고왕(감우성)과 그의 두 왕비. 왼쪽이 백제게 제1왕비인 부여화(김지수)이고 오른쪽은 부여계 제2왕비 진옥란(이세은).

자 지금까지 설명만으로도 드라마 <근초고왕>이 반도부여와 열도부여의 징검다리라는 점이 충분히 이해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 열도부여는 어떤 식으로 등장하게 될까요. 드라마 제작진의 의도와 상관없이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형제국이라는 전제 아래 제 나름대로 상상을 발휘한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합니다.

진홍란의 아들 부여근 역의 오승근

드라마에서 근초고왕의 아들이 둘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백제 고이왕통을 이은 제1왕후 부여화(김지수)와 사이에서 나은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부여 계통으로 진씨 가문과 손을 잡은 제2왕후 진홍란(이세은)이 낳은 아들입니다. 둘 중 하나는 근초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근구수왕입니다. 근구수왕은 부왕의 명을 받고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전쟁영웅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의 왕자는 누가 될까요?

제가 작가라면 부여화의 아들이 근구수왕이 되고 진홍란의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왕국을 여는 오우진 천황이 되는 식으로 전개할 것 같습니다. 우선 진씨 성이 오우진 천황의 씨족 성이기 때문이며 손수 활을 쏘고 표창을 날리는 진홍란의 캐릭터가 상상의 산물일지언정 진구황후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아직기가 진홍란과 같은 부여계로 설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부여화의 아들 쇠꼬비 역의 박건일.

물론 이는 철저히 제 개인의 상상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백제와 일본의 특수한 관계를 꿰뚫고 있다면 충분히 픽션화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를 “고대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드라마가 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두 나라는 근대적 관점의 본국과 식민지라기보다는 같은 부여계라는 의미의 형제국가 또는 혈맹국가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옛 백제의 영토를 계승한 나라는 한국이 분명하지만 고대 부여계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점에선 일본이 앞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열혈시청자로서 <근초고왕>은 문제가 많습니다. 사극하면 꼭 무협극으로 풀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 어린 시절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은 주인공 중심의 상투적 영웅담구조, 현실성이 떨어지는 드라마 전개…. 그럼에도 이 사극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대중적 욕망이 투영된 판타지 이면에서 역사적 진실에 근접해가는 일종의 집단무의식의 발현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과 일본은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쌍둥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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