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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13, 2011

임나 연정 광개토태왕 설치설

興이 世子 자격으로 宋에 사신을 보낸 이유



宋書 倭國傳을 보면 倭五王이 나오고 倭5王 중 濟가 죽은 후 世子 興이 세자 신분으로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安東將軍 倭國王을 제수받은 내용이 나온다.



「濟가 죽자 세자 흥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濟死世子興遣使貢獻」

「세조 대명 6년(462년) 왜(倭) 왕세자 흥에게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하였다.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藩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註 濟가 죽고 세자 흥이 宋나라에 사신을 보낸 해는 안동장군 왜국왕 관작을 받은 대명 6년으로 보인댜.]



宋書 倭國傳에 나오는 倭五王의 정체는 무엇일까? 또 倭五王 중 왜 興만 王이 아닌 世子 신분으로 宋나라에 사신을 보냈을까?

먼저 倭5王의 정체를 살펴본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倭5王을 日本書紀에 나오는 天皇이라고 주장하나, 倭5王은 일본서기의 天皇과는 달리 5세기 초부터 A.D 479년까지 아주 한정된 시기에만 나타나는 倭王이다. 이 倭5王이 주장하는 영역은 韓半島 南部, 對馬島, 日本列島이며, 倭王 武의 表文에 의하면 "동쪽으로 毛人 55國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衆夷 66國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의하면 倭5王이 다스린 倭國의 영역은 大和倭와 九州倭를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지방가지 포함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백제는 任那聯政 세력권에서 바로 벗어난 것으로 보이고, 新羅는 인질 미사흔이 도망처 온 후 바로 任那聯政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倭5王 중 초대왕 讚은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倭王으로 칭하였고, 2대왕 珍은 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으며(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3대왕 濟는 왜국왕을 칭하고 宋나라로부터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장군을 제수받았고(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幷除所上二十三人軍郡), 4대왕 興은 大明 6년(462년)에 세자 자격으로 사신을 보내어 宋나라로부터 安東將軍 倭國王을 제수받았으며, 5대왕 武는 사신을 보내어 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으나(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나라로부터 백제를 빼고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倭王을 제수받았다(順帝昇明二年遣使上表曰..中略..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註 2대왕 珍이 6국 제군사를 자칭하면서 加羅라는 이름이 빠진 것은 任那를 대마도와 가야 지역으로 합쳐서 보았기 때문이고, 3대왕 濟 이후는 대마도와 가야지역을 분리하여 대마도는 임나로, 가야 지방은 가라로 적었다.]

倭王들이 주장한 6국 또는 7국의 영역은 일본열도, 대마도, 한반도 남부이다. 특이한 점은 신라 지역을 新羅와 秦韓으로 나누어 적었고, 백제 지역을 百濟와 慕韓으로 나누어 적었으며, 對馬島와 加耶를 합쳐 任那로 부르거나 또는 對馬島만 任那로 부르고 加耶는 加羅로 적었다. 그리고 일본열도왜는 大和倭, 九州倭로 구분하지 않고 倭로 적었다. 그런데 관작명 倭王 또는 倭國王은 일본열도 倭王이라는 뜻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 대마도, 일본열도를 모두 관장하는 倭王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관작명에 나오는 6국 또는 7국의 영역은 倭王 武의 표문에서 나오는 "東征毛人五 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 영역과 일치한다.

倭5王이 주장하는 왜국은 언제 생겼을까?

A.D 247년에 神功皇后가 죽은 후 九州倭의 내분으로 邪馬臺聯盟이 와해되므로서 일본열도에는 A.D 390년에 대화지방에 大和倭 應神朝가 세워질 때까지 100여개 소국(小國)으로 분립된 천황공백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A.D 390년에 백제의 지원으로 應神朝가 세워진 후 다음해 신묘년부터 大和倭 應神朝는 백제의 용병으로 한반도에 출병하였다가 A.D 400년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응신조는 멸망하고 A.D 400년부터 고구려계 履中天皇 이 즉위하였다. 이후 대화지방은 고구려계 反政天皇(A.D 406년 즉위), 允恭天皇(A.D 412년 즉위), 安康天皇(A.D 453년 즉위), 雄略天皇(A.D 456년 즉위)이 다스렸고, 雄略天皇 재위 중 반고구려계로 변하였다가 A.D 479년에 任那聯政이 멸망하면서 고구려계 혈통은 끝이 나고 A.D 480년에 淸寧天皇이 즉위하였다.

일본열도를 고구려계 履中天皇, 反政天皇, 允恭天皇, 安康天皇, 雄略天皇이 다스릴 시기에 대마도에는 한반도 남부의 신라, 가야, 백제와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任那聯政이 대마도에 설치되어 강력한 水軍을 바탕으로 이 지역을 통제하였다. 宋書나 南齊書에 나오는 倭5王은 바로 이 任那聯政 5왕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A.D 390년에 세워진 응신조가 A.D 400년에 멸망하고 A.D 400년부터 479년까지 일본열도는 고구려계 天皇이 다스리고, 한반도 남부,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연정(聯政)이 대마도에 설치되어 있었자 천황가의 혈통이 단절된 적이 없는 것처럼 萬世一系로 위장하기 위하여 A.D 400년부터 A.D 479년까지 任那聯政 시대에 대화지방을 다스린 고구려계 천왕들을 모두 응신天皇의 자손들로 왜곡하였고, 일본의 사학자들은 倭5王을 任那聯政 시기에 대화지방을 다스린 履中天皇, 反政天皇, 允恭天皇, 安康天皇, 雄略天皇으로 비정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任那聯政에 관한 내용은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나온다.



「임나는 원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게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대마도와 구주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3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A.D 400년)에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 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 自古 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任那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首邑指稱也 自是三汗相爭 歲久不解 佐護加羅屬新羅 仁位加羅屬高句麗 계知加羅屬百濟是也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海陸諸倭 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然直割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桓檀古記 高句麗本紀



광개토왕이 설치한 任那聯政의 임무는 한반도 남부,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고, 任那聯政 시대에 大和倭는 任那聯政王의 요구에 따라 大和倭의 臣과 장군들을 임나(대마도)에 주재시켰다. 일본서기 雄略天皇本紀를 보면 任那聯政 시대에 大和倭의 臣과 장군들이 임나에 주재한 내용이 나오고, 이들이 주재한 곳이 日本府로 적혀 있으며, 일본부에 주재한 大和倭의 臣과 장군들은 任那聯政王의 지시를 받았다.



「웅략천황 8년(A.D 463년) 봄 2월 身狹村主靑과 桧隈民使博德을 吳國에 보냈다. 천황의 즉위 이래 신라국이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은 지가 8년이 되었다. 그리고는 천황의 마음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와 수호하였다. 이 때문에 고구려왕이 정병 100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뒤 고구려의 한 군사가 잠깐 동안 귀국하였다. 그때 신라인을 마부로 하였다. 몰래 말하여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에게 패할 것이 오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혹본에는 그대의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되는 것이 오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마부는 듣고서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는 흉내를 내고 물러나 뒤에 처졌다. 드디어 나라 안으로 도망하여 그 말한 바를 전하였다.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 주는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달려가 "사람들이여 가내에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고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 국내에 있는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다. 그때 한 고구려인이 남아 틈을 타 탈출하여 자기 나라에 도망쳐서 모두 상세하게 말하였다. 고구려왕이 즉시 군병을 일으켜 축족유성(혹본에는 도구사기성)에 주둔하였다. 가무하며 음악소리를 내었다. 신라왕은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가무하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 온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임나왕에게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는 매달려 있는 깃발과 같다. 나라의 위태로움은 누란의 위기보다 더하다. 명의 장단도 헤아릴 수 없다. 엎디어 일본부의 장군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임나왕은 선신, 길비신소리, 난파길토역목자 등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도와주게 하였다. 선신 등이 가는 도중에 야영하였다. 고구려의 제장이 선신과 싸우지 않았는데도 두려워 하였다..중략..두 나라의 원한이 이에서 생겼다. 八年春二月 遣身狹村主靑・桧隈民使博德使於呉國 自天皇即位 至于是歳 新羅國背誕 苞苴不入 於今八年 而大懼中國之心 脩好於高麗 由是 高麗王遣精兵一百人守新羅 有頃 高麗軍士一人 取假歸國 時以新羅人爲典馬 [典馬 此云于麻柯比] 而顧謂之曰 汝國爲吾國所破非久矣 [一本云 汝國果成吾土非久矣] 其典馬聞之 陽患其腹 退而在後 遂逃入國 説其所語 於是 新羅王乃知高麗僞守 遣使馳告國人曰 人殺家内所養鷄之雄者 國人知意 盡殺國内所有高麗人 惟有遣高麗一人 乘間得脱 逃入其國 皆具爲説之 高麗王即發軍兵 屯聚筑足流城 [或本云 都久斯岐城] 遂歌儛興樂 於是 新羅王 夜聞高麗軍四面歌儛 知賊盡入新羅地 乃使人於任那王曰 高麗王征伐我國 當此之時 若綴旒然 國之危殆 過於累卵 命之脩短 太所不計 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由是 任那王勸膳臣斑鳩 [斑鳩 此云伊柯屢餓]・吉備臣小梨・難波吉士赤目子 徃救新羅 膳臣等 未至營止 高麗諸將 未與膳臣等相戰皆怖 膳臣等乃自力勞軍 令軍中 促爲攻具 急進攻之 與高麗相守十餘日 乃夜鑿險 爲地道 悉過輜車 設奇兵 會明 高麗謂膳臣等爲遁也 悉軍來追 乃縱奇兵 歩騎夾攻 大破之 二國之怨 自此而生 [言二國者 高麗新羅也] 膳臣等謂新羅曰 汝以至弱 當至強 官軍不救 必爲所乘 將成人地 殆於此役 自今以後 豈背天朝也」[註 이때부터 任那聯政과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변하여 고구려는 任那聯政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위 웅략천황 8년조 문구에는 "天皇의 즉위 이래 신라국이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은 지가 8년이 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의 연대기에 의하면 大和倭는 그 전 應神天皇 시대에 신라(길비국)의 공격을 받아 白馬의 피로 항복의식을 치르고 6縣을 떼어주고 항복하였다. 따라서 조공을 바쳐야 될 쪽은 신라(길비국)에 항복한 大和倭이지 大和倭로부터 항복을 받은 新羅(길비국)가 아니다. 즉 위 문구는 雄略天皇이 즉위한 해부터 大和倭가 신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을 거꾸로 적어 놓은 것이다.

또 위에 나온 웅략천황 8년 문구에 신라(길비국)와 고구려 군사가 싸웠다는 것은 신라(길비국)가 A. 464년경에 이미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임나왕(任那王)이 일본부(日本府)의 장군들에게 신라를 도와주게 하였다는 것은 고구려계 任那聯政이 이 무렵 이미 반고구려 세력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雄略天皇은 즉위한 A.D 456년부터 고구려를 등에 업고 있는 新羅(길비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웅략천황 8년에는 이미 신라(길비국)와 任那聯政이 반고구려의 세력으로 변하였다.

그런데 광개토왕이 일본열도왜를 항복받고 광개토왕이 세운 任那聯政이 일본열도왜를 통제하였다는 古記 내용이 사실일까?

宋書 倭國傳에는 任那聯政王이 倭를 포함하여 6국 또는 7국 제군사라고 적혀 있고, 倭王 武의 표문에는 [東征毛人五 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 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내용에 의하면 倭王(任那聯政王)은 일본열도왜와 대마도, 한반도 남부를 모두 정벌 또는 복속시켰다.

倭王 武의 표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하여 일본서기 應神天皇 13년조를 살펴본다.



「一에 말하였다. 日向의 諸縣君牛는 조정에 섬긴 지 오래되어 그 이상 섬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致仕하여 본토에 돌아왔다. 그리고 딸 髪長媛을 바쳤다. 처음에 播磨로 왔다. 그때 천황은 담로도에 사냥하러 갔다. 천황이 서쪽을 보니 수십 마리 사슴이 바다에 떠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播磨의 鹿子水門으로 들어왔다. 천황은 좌우에 일러 " 저 무슨 사슴인가? 넓은 바다에 떠서 많이 온다"라고 말하였다. 좌우가 다같이 보고서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보게 하였다. 사자가 와서 보니 모두 사람이었다. 다만 뿔이 붙어 있는 사슴의 가죽을 의복처럼 입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諸縣君牛는 지금 나이가 들어 비록 致仕하였지만 조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골 자기의 딸 髪長媛을 바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기뻐 불러서 배에서 섬기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들이 온 해안을 鹿子水門이라 하였다. 무릇 뱃사공을 鹿子라고 하는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一云 日向諸縣君牛 仕于朝庭 年既耆耈之不能仕 仍致仕退於本土 則貢上己女髪長媛 始至播磨 時天皇幸淡路嶋 而遊獵之 於是 天皇西望之 數十麋鹿 浮海來之 便入于播磨鹿子水門 天皇謂左右曰 其何麋鹿也 泛巨海多來 爰左右共視而奇 則遣使令察 使者至見 皆人也 唯以著角鹿皮 爲衣服耳 問曰 誰人也 對曰 諸縣君牛 是年耆之 雖致仕 不得忘朝 故以己女髪長媛而貢上矣 天皇悦之 即喚令從御船 是以 時人號其著岸之處 曰鹿子水門也 凡水手曰鹿子 蓋始起于是時也」



應神天皇의 실제 재위기간은 A.D 390-400년이므로, 위 應神 13년조는 실제로는 應神 재위 마지막 해인 A.D 400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사슴 뿔이 붙어 있는 가죽옷을 입은 무리들이 왔다는 것은 고구려 군사가 처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여 무리들이 수도로 한 곳을 鹿山이라 불렀는데, 이때 담로도 방면으로 온 부여 무리는 고구려 군사들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應神天皇 22년 9월조를 살펴본다.



「가을 9월 신사삭 병술(6일) 천황이 淡路嶋에 사냥을 갔다. 이 섬은 바다에 가로누워 難波의 서쪽에 있다. 바위가 어지러이 섞여 있고 능과 골이 연속되어 있다. 아름다운 풀이 무성하고 물이 길게 물결을 이루며 흐른다. 또 사슴, 오리, 기러기 들이 많이 섬에서 산다. 그래서 천황이 자주 갔다. 천황이 淡路에서 돌아 吉備애 가서 小豆嶋에서 놀았다. 庚寅(10일) 葉田[이를 簸娜(하다)라 한다]의 葦守宮에 옮겨 지냈다. 그때 御友別이 와서 그 형제자손을 膳夫로 섬기게 하였다. 천황은 御友別이 공손히 섬기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래서 吉備國을 갈라서 그 아들에게 봉하였다. 즉 川嶋縣을 나누어 장자 稻速別에게 봉하였다. 이가 下道臣의 시조다. 다음 上道縣을 中子 仲彦에 봉하였다. 이것이 上道臣과 香屋臣의 시조다. 다음 三野縣을 弟彦에게 봉하였다. 이가 三野臣의 시조다. 또 波區藝縣을 御友別의 아우 鴨別에게 봉하였다. 이가 笠臣의 시조다. 苑縣을 형 浦凝別에게 봉하였다. 이가 苑臣의 시조다. 織部를 兄媛에게 주었다. 그르므로 그 자손이 지금도 吉備國에 있다. 이것이 그 연유다. 秋九月 辛巳 朔丙戌 天皇狩于淡路嶋 是嶋者横海 在難波之西 峯巖紛錯 陵谷相續 芳草薈蔚 長瀾潺湲 亦糜鹿.鳧.鴈 多在其嶋 故乘輿屢遊之 天皇便自淡路轉 以幸吉備 遊于小豆嶋 庚寅 亦移居於葉田[葉田 此云簸娜] 葦守宮 時御友別參赴之 則以其兄弟子孫爲膳夫而奉饗焉 天皇 於是 看御友別謹惶侍奉之状 而有悦情 因以割吉備國 封其子等也 則分川嶋縣封長子稻速別 是下道臣之始祖也 次以上道縣 封中子仲彦 是上道臣.香屋臣之始祖也 次以三野縣 封弟彦 是三野臣之始祖也 復以波區藝縣 封御友別弟鴨別 是笠臣之祖也 即以苑縣 封兄浦凝別 是苑臣之始祖也 即以織部 賜兄媛 是以 其子孫 於今在于吉備國 是其縁也」



위에 나온 응신 13년조나 22년조는 모두 같은 사실을 적은 것이다. 應神天皇 마지막 해는 A.D 400년이므로, 위 사실은 모두 A.D 400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리고 大和倭가 신라에 항복하고 땅을 떼어준 내용이 일본서기에는 거꾸로 누구에게 어느현을 봉하였다고 윤색되어 있다.

왜국(大和倭)이 신라(길비국)에 항복하였다는 일본의 연대기 관련 문구를 살펴본다.



동사강목 제3상

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년)

2월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

【안】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이[번]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島夷]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으로 전쟁상태로 되어 있는 한일관계를 복원하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高僧 玄蘇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 결과 1609년 조약으로 강화가 성립됐지만, 그 때 조선의 答禮 사절로 일본에 온 呉允鎌의 통역으로 온 李恵稷은 "일본연대기"라고 하는 책을 보았는데, 그 것에는 "應神 22 년 신라군이 내습 해오자 전투에서 패한 應神天皇은 오사카에서 백리 떨어진 明石浦에서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막부 관리의 안내를 赤間関에 간 바, 동쪽 오카의 윗쪽에 한 개의 무덤이 있었다. 관리에 따르면, 그것은 백마총이라는 것으로, 항복의 맹세 표시로 백마의 목을 베어 매장한는 것이며, 이때 길비국 지방의 여섯개 현을 신라에 양도했다고한다. 赤間関는 赤馬関라고도 하며 현재 下問市인데, 明治 35 년, 赤間関에서 下関로 호칭을 변경하였으나, 白馬塚에 대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豊臣秀吉の朝鮮出兵によって戦争状態のままになっていた日韓関係を修復しようとして、徳川家康は高僧玄蘇(げんそ)を朝鮮に派遣した。その結果、1609年の己西条約として講和が成立したが、そのとき、朝鮮の答礼使節として来日した呉允鎌(オユンキヨム)の通訳として随行してきた李恵稷(イヘジク)は、『日本年代記』なる書物を見ている。それには「応神22年、新羅軍が襲来してきた。戦いに敗れた応神天皇は、大坂から百里離れた明石浦で降伏した」と記録されていた(当時の1里は現在の400メートル強)。さらに幕府の役人の案内で赤間関へ行ったところ、東の岡の上に一つの塚があった。役人によると、それは白馬塚と呼ばれるもので、降伏の誓いの印に白馬の首を斬って埋めたものであり、このとき、吉備国地方の六つの県を新羅に割譲したという。赤間関とは赤馬関ともいい、現在の下問市のことで、明治35年、赤間関から下関に呼称を変更しているが、白馬塚のことはなにも伝えられていない」( http://www.highlight.jp/06.html )



고대에 大和地方과 가까운 岡山縣 전역, 廣島縣 동부, 香川縣, 兵庫縣 서부, 赤穗市의 일부에 걸친 지역에 吉備國(고대 발음 기미쿠니)이라는 지방국가가 있었는데, 吉備의 옛 발음은 키미(キミ:金)이고, 이는 한국식 발음으로 金으로 신라를 의미하였다. 즉 吉備國의 옛 명칭은 新羅였다.(吉備国には近年まで新羅邑といわれる土地があったといわれており、広島県には現在でも世羅郡、世羅町という地名が残っている).

應神 22년조와 일본의 年代記를 비교하면 應神 22년조 문구는 應神朝가 신라(길비국)의 공격을 받자 백마를 잡아 그 피로 항복의식을 치르고 6현을 신라(길비국)에 떼어주었다는 것을 거꾸로 윤색해 놓은 것이다. 應神朝는 A.D 400년에 멸망하였으므로, 應神 22년조 문구는 응신조 마지막 해인 A.D 400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래서 응신조가 멸망한 A.D 400년부터 仁德(담덕)의 아들인 履中天皇, 反政天皇, 允恭天皇과 그 아들인 安康天皇, 雄略天皇 순서로 大和倭를 다스렸고, 이 시기 일본열도, 대마도, 한반도 남부는 任那聯政王이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倭5王 중 濟나 왕세자 興이 任那聯政王으로 재위할 시기에 대화지방은 允恭天皇(A.D 412년 즉위), 安康天皇(A.D 453년 즉위), 雄略天皇(A.D 456년 즉위)이 다스리고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安康天皇이 정변으로 죽고 그뒤 雄樂天皇이 즉위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雄略天皇 8년경 任那聯政王과 大和倭 천왕에게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웅략천황 8년에 吉備 지방의 신라국(길비국)과 고구려 군사가 싸울 때 任那聯政王은 大和倭 장군인 膳臣, 吉備臣小梨・難波吉士赤目子 등에게 반고구려계로 변한 新羅를 지원하라고 권하였고, 이때 大和倭 장군들은 비록 任那王의 권고를 받았지만 根國인 고구려를 도우지 않고 반고구려계로 변한 新羅를 도와주었다. 이는 雄略天皇 8년 이전에 大和倭 天皇과 任那聯政王이 이미 본국인 고구려 세력에서 이탈하여 반고구려 세력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정황이 倭5王의 마지막 왕 倭王 武가 宋나라에 보낸 표문에서도 나오는데, 倭王 武의 표문에는 任那聯政王이 고구려와 적대세력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順帝昇明二年(478년)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 躬 甲胄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 掠抄邊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以勸忠節 순제 승명 2년 왜왕 무가 표문을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구석지고 먼 곳에 봉 받아 밖의 번신이 되었습니다. 옛 조상 때부터 몸소 갑옷을 입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편히 쉬지 못하였습니다.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 왕도가 무륵익어 태평하고, 땅은 서울에서 멀리까지 넓혔으며, 해마다 세공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를 이어 나라를 평안하게 통솔하고 있으며, 천극으로 가는 길은 백제를 통해 가야하기에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비록 나아갈 길은 있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양암(빈소)에 거처하였기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롭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 눈앞에 흰 칼날이 번쩍이는 다급함이 있더라도, 또다시 되돌아다볼 필요는 없사옵니다. 만일 황제님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임시로 개부의동삼사의와 그 나머지 모두에게도 관작의 제수를 원하였다.」



宋書를 보면, 倭王 興은 아버지 濟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르지 않고 世子 자격으로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었는데, 宋나라는 興에게 安東將軍 倭國王을 제수하였다. 만약 이때 倭王 興의 아버지 濟가 살아 있었다면 宋 皇帝는 倭王 濟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王世子 興에게 安東將軍 倭國王이라는 관작을 제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興이 世子 자격으로 宋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나 宋나라가 興에게 安東將軍 倭國王을 제수하였을 때 倭王 興의 아버지 濟는 이미 사망한 후이다.

위 倭王 武의 표문을 보면 倭王 武는 아버지 濟와 형 興의 사망사실을 말하면서 고구려에 강한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보아 이들의 사망에 고구려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倭5王이 사신을 보낸 해나 南朝로부터 관작을 수여받은 해는 전 왕이 죽고 새로운 倭王이 즉위한 해이다. 倭王 興이 世子 자격으로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관작을 받은 해가 대명 6년(462년)이므로, 倭王 濟가 갑자기 죽은 해는 A.D 462년으로 보인다. 또 倭王 武가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관작을 받은 해가 A.D 478년이므로, 倭王 興이 갑자기 죽은 해는 A.D 478년으로 보인다.

任那聯政王 濟가 A.D 462년경 갑자기 죽은 것은 濟가 반고구려계로 변한데 대하여 내부에서 일어난 반발 때문으로 보인다. 이 무렵 大和倭 雄略天皇도 웅략천황 8년조(A.D 463년)에서 보는 것처럼 반고구려계로 변해 있었다. 즉 거의 같은 시기에 任那聯政王과 大和倭 천황은 반고구려계로 변하였고, 이 과정에서 반고구려계로 변한 任那聯政王 濟는 갑자기 죽었다.

倭王 濟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倭王 興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세자 자격으로 宋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이러한 내부 사정과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九州倭와 大和倭가 倭王(任那聯政王)을 따라 반고구려계로 변하고, 宋나라가 세자 興에게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하므로서 任那聯政 내부의 암투는 반고구려계로 변한 倭王 興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http://home.megapass.net/~hsg8689/zz40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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