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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13, 2011

백제왕족, 일본에 나라를 세우다





 











 고대 동아시아 역사 연재1

 백제왕족, 일본에 나라를 세우다

 

 

 2004년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한 〈일본 천황가의 뿌리는 백제인인가?〉는

 일본왕가의 실체에 관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천황가는 만세일계(萬世一係)라 하여,

 대륙과 무관하게 한 핏줄계통으로 내려온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것이 진실일까?

 과연 백제황족2)과 일본왕조 건국은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이하 ‘일본천황’을 통치자의 일반호칭인 ‘일본왕’으로 표기한다)

 

 

 한반도인, 고대 일본(왜)왕조를 최초로 열다

 고대 일본(왜)열도는 조몬시대( ~BCE 3C)와 야요이시대(BCE 3C∼CE 3C)를 거치는 동안, 도왜(途倭)한 대륙인과 한반도인들이 정착생활을 하며 새끼줄무늬 질그릇·쌀농사·조개무덤 등의 흔적을 남겼다. 경남(옛가야 유역)과 한반도에 가까운 일본 서부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유물이 동일하다는 것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 『후한서』에 ‘왜’라는 나라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소국(약 100여 개)이 난립한 일본열도 전역에, 3세기말 최초로 국가형태로 볼 수 있는 야마타이(邪馬臺)왕조3)(소국연합)가 세워지지만 이때의 역사는 의문투성이다.

 

 강력한 권력체제를 갖춘 일본 최초국가는 4세기말 깅키(근기近畿: 지금 나라현)지방의 야마토정권이다. 야마토(대화)정권4)은 4∼7세기 까지 주변의 카와치(하내河內), 오사카(大阪/難波), 나라(奈良) 등을 통합하여 통일왕조를 열고 급성장한다.

 













 

 백제왕국, 의식주문화와 정신문화를 왜국에 전해주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백제귀족 ‘진모진’을 왜국에 파견하여 일본 최초의 백제조복(朝服)을 만들게 한다.

 『부 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한복(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추고: ?∼628년)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 고증학자 토우테이칸은, 고대논문 「일본결척」을 인용하여 “응신왕 시대에 백제왕이 봉녀(縫女) 2명을 보내주어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이었다”고 지적했다.

 

 동경대 하니히라 교수는 “7세기말 당시까지 한반도 출신 이주민이 대부분이었고 원주민은 소수였으며, 이때까지 야마토(4C), 아스카(7C)시대 사람들은 한국 의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었으며, 건국신화 대부분이 한국형이고 한국어를 사용하였다”고 말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제는 삼국 중에서 선진문화를 가장 많이 일본에 전해준다. 4세기경 통일국가(야마토)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서 선진문화를 전수받아 급속도로 문명이 발전한다. 백제는 일찍이 근초고왕(4C) 이후부터, 아직기·왕인 등을 통해 선진학문과 책(오경) 등을 전수해주고, 무령왕∼성왕 이후는 불경·예술·학문·불교문화와 궁·절 등의 건축기술, 소도 제천(신교)문화 등을 집중적으로 전해주어 일본 고대 정신문명의 꽃인 아스카문화를 열어준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백제왕족, 고대 일본왕국을 건설하다

 KBS와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된 〈일본 천황가는 백제인인가?〉 프로그램을 보면, 최근에 일본 아키히토(明仁)왕이 “옛 칸무(환무: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공식 발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대에 백제왕족들이 건너가서 일본왕국을 세웠다는 것을, 일본왕 자신의 입으로 명확하게 확인시켜준 것이다.

 

 프로그램 제작진이 이 프로에서 확인하여 밝힌, 백제왕족과 일본왕족의 관계에 관한 중요결론은 다음 몇 가지이다.

 

 

 1 일본 정통사서 『일본서기』는 백제 25대 무령왕(501∼523)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이 49대 일본 광인(光仁)왕에게 시집가서 50대 칸무왕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무덤이 현존함을 확인하고, 비석기록에도 그 내용(칸무왕 생모)이 그대로 적혀있음을 확인했다.

 

 2 공주시에서 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의 묘지석’ ‘청동거울인 인물화상경’ 『일본서기』 이렇게 세 곳에 새겨진 무령왕 관련기록에서 “무령왕은 사마(생전이름)왕”이라고 똑같이 적혀 있음이 확인됐다. 여기서 일본의 각라(各羅)섬에서 탄생한 무령왕이 40살에 백제왕에 즉위하기 전인, 탄생 후 40여년간 행적기록이 전혀 없는데, 인물화상경(일본왕의 제사도구)에 적힌 사마왕 기록으로 추정하여, 백제왕 즉위 전에 일본왕위에 먼저 올랐을 가능성이 많다.

 

 3 두가지 기록, 즉 첫째는 일본왕가 계보인 『신찬성씨록』의 “대원진인(왕족성씨) … 민달의 후손은 백제왕(大原眞人 … 敏達孫, 百濟王也)”라는 기록과, 둘째는 『일본서기』의 “30대 비다쓰(민달)왕이 백제궁을 지었고, 그의 손자인 34대 죠우메이(서명)왕은 조상신(백제왕족)을 모신 백제신사 옆에 백제궁을 짓고, 그 속에서 말년을 살다가 죽을 때도 백제대빈(百濟大殯)이라 하여 백제왕실 장례식(3년상)을 치르게 할 정도로 백제를 못 잊어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4 다음 두가지 기록에서 당시 백제와 일본의 권력(명령)체계는 백제왕 → 백제왕자 → 실권자 소가씨(또는 일본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 내용과 함께 생각해보면, 일본은 백제를 상국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구당서』「왜인전」에 “백강구 전투(663년) 당시에 백제 충승·충지 왕자가 왜군과 탐라국 사신을 함께 거느리고 신라-당 연합군에 투항했다”고 적힌 기록이다. 둘째는 『일본서기』에 “642년 일본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당대 최고실권자 소가 우마코(소아마자蘇我馬子)는 일본에 온 백제왕자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백제왕자와 친히 대화(일종의 상관에 대한 정치보고)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왕이 대리인(백제왕자)을 통해 일본국을 간접 통치했음을 확인했다. (소가씨 가문은 당대 실권자로서 사실상 최고권력을 약 100년간 누리는데, 미즈노 유우의 저서 『천황가의 비밀』에 “이 소가씨 가문은 본래 한국에서 건너온 가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일본왕도 백제왕족, 최고실권자도 백제귀족, 이것만 봐도 백제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5 결론으로, 이 분야의 독보적 저술가인 최재석 교수는 “30대 민달왕의 조상도 백제인이고 민달 후손도 백제인, 그러므로 모든 일본왕은 백제왕족인 것을 말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위 사실을 근거로 보면, 분명히 고대 일본(왜)국은 백제왕가와 혈연으로 연결된 국가이다. 정치·문화적으로는 300년간(근초고왕 칠지도 사건∼멸망 의자왕) 백제 밑에서 간접통치를 받으며, 백제의 찬란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고대 일본(왜)은 대백제국에서 파생된 혈연적 분국(分國,제후국)이라는 특성을 띄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자.

 

 

 왜국, 멸망한 모국과 단절하여 일본으로 새롭게 탄생하다

 일본 국호 사용과 한일동족론 고문서 분서 사건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유민들은 혈연국인 왜국의 군사(수만명) 지원을 받아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다. 당시에 일본 37대 제명여왕(의자왕 여동생)은 본국 백제를 되찾기 위해 군선을 건조하고 탐라국에 참전을 요구하고 왜병을 사비성에 파견하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부여용(의자왕 아들)은 망국의 깊은 한을 품고 유민을 거느리고 왜국에 건너가서 38대 텐치(천지: 661∼671)왕이 되고,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 해뜨는 본국)으로 고친다5)(『일본서기』 「천지왕조」 참조). 이것은 한국고대사(특히 백제역사)에 속한 왜(倭)국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 일본(日本)이 탄생한 사건이다.(668∼670년)

 

 일본 정사(正史)인 『고사기』, 『일본서기』는 서기 8세기 초기에, 『속일본기』는 8세기 후기에 편찬이 완료된다. 이때는 의자왕 후손들(38대 이후)이 일본왕으로서 통치하던 때로, 일본은 멸망한 본국(백제국)에 속한 왜국에서 벗어나 자주국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때였기에, 일본 정통역사서들을 대부분 이때 편찬해낸다. 그 목적은 일본의 초대왕 이후 모든 왕들을 하늘신의 아들로 묘사하여 일본왕에게 신성(神聖)함을 부여해서 국민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 이후 50대 칸무(환무: 781∼806)왕 때는, 일본과 한(韓)민족은 같은 민족이라는 ‘한일 동족론’이 적힌 고문서(옛 족보)를 모두 불태워 버린다. 칸무는 본국(백제)과 단절하는 정책을 편다. 그러나 그는 백제인을 고관요직에 많이 등용하고 기존의 백제문화 토대 위에서 ‘새롭고 자주적인 나라, 일본을 만들어나가는’ 정책을 대부분 매듭짓는다.

 

 옛 족보를 불태운 칸무는 “내 생모가 무령왕 후손”임을 자랑스레 밝히려 했지만, 부계 조상(=의자왕)에 대해서는 오히려 말을 아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백제는 무령왕(25대)∼성왕(26대)때 찬란했던 문화대국이었고, 의자왕(31대)은 멸망국 비운의 왕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쇼토쿠 태자는 일본인들이 백제 성군이었던 성왕의 화신이라 생각하며 고대 일본문화의 꽃인 아스카시대를 열었던 통치자이다. 무령왕 후손인 그의 통치(섭정)시대를 열망해서일까?

 

 칸무는 794년, 헤이안(平安京: 현,교토)에 도읍지를 옮겨 헤이안 시대를 열어나간다. 신생국 일본은 헤이안에서 8∼19세기(1860년대 메이지 이전)까지 1천년간 사실상의 수도가 되어, 왕도(王都)와 막부(幕府: 무사정권) 문화를 펼쳐나간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초기(795∼ )부터 비로소 고대 백제사로부터 독립(이질화)된, 일본국 특유의 문화를 펼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칸무왕의 ‘한일동족론 문서의 분서(焚書) 정책’은 본국(문화선생국) 백제 역사와의 단절을 통해, 자주적 일본국으로 태어나서 ‘소(小)백제(=일본) 문화국가의 탄생’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부터 서서히 고대 한국의 역사·문화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길을 걸은 일본국은 끊임없는 침략을 일삼으며 문화적 스승·부모국인 우리나라를 괴롭혀왔다. 그러더니 조선말 1910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의 모국(母國)인 우리나라의 국권마저 침탈함으로써,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뿌리를 배신하는 배은망덕(背恩亡德)의 대죄를 범하고 말았다.

 

 지금은 지나온 역사과정을 총체적으로 심판하는 우주가을 개벽기이다. 오늘날 일본의 작태(역사왜곡 망언, 독도분쟁 등)는 근본(스승국) 뿌리를 배신하는 배사율(背師律)과 부모(부모국)와 조상을 바꾸고 부정하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대죄를 짓는 행위이다.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어리석은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세상이치를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저 안타까움울 뿐이다.

 


진성조_ 증산도 본부


 

 〈참고문헌〉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 2000) | 고준환, 『하나되는 한국사』(범우사, 1993) | 카와이 아츠시,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중앙 M&B, 2000) | 사이카와 마코토, 조양욱 역, 『천황을 알면 일본이 보인다』(다락원, 2004) | 이원복,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8-일본역사편』(김영사, 2006) | KBS, 히스토리 채널, 〈일본천황가는 백제인인가?〉



http://blog.ohmynews.com/cari/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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