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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31, 2014

혼다는 백제성씨


근구수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응신천황릉

부여에서 나온 백제의 국시는 역시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의 국시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다물(담로)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고 관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한 고이왕 이후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기부터 부여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차원에서 만주지역 녹산에 위치한 부여를 정벌하여 부여세력을 전연지역으로 몰아 내고(자치통감 기록), 백제담로지역인 일본열도의 마한세력(왜)와 연합하여 단군3조선 중 마조선에 속한 마한과 가야.사로국을 정벌하였고(일본서기 기록),단군3조선 중 번조선(기자조선)에 속하였던 요서.산동.절강성지역을 정벌(지나문헌-북서.양서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영토확장에 나선다.

그러나, 신라사관론자 김부식이 고려 때 편찬한 [삼국사기-백제본기]기록에는 이러한 장대한 백제의 영토확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백제 근초고왕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한수이남에서 군대사열을 하면서 황제국을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삼국사기]기록에서 당시 백제는 동아시아 강국임을 알 수가 있다. 근초고왕은 너무나 유명한 백제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버지 근초고왕에 가려진 근구수왕은 아버지 근초고왕보다 유명세가 낮은데 사실은 근초고왕보다 더 영토를 확장한 왕이 근구수대왕이라 할 것이다. 근구수대왕은 태자시절부터 전쟁터를 누비면서 백제의 기상을 드높인 왕이다.훗날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태왕이 할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초토화시키는 배경이 되지만,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남평양성(북한 평양성)에서 전사시킨 인물이 근구수왕이다.

일본의 응신천황릉의 주인은 백제 근구수대왕인가?

백제 왕들의 죽음을 [삼국사기]에서는 '붕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무녕왕릉비문은 '붕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백제.신라.가야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의 내용에 신뢰성을 주었다. '붕어'는 천자국의 왕의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백제는 22제후국을 거느린 천자국임을 '붕어'라는 표현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구려 왕들에 대한 기록은 장례 후에 묻힌 장소(예컨대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혀 붙어진 왕명이다.고구려 왕들은 죽은 후 묻힌 장소가 왕명이 된다)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백제 왕들은 죽은 후 묻힌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 근구수왕은 375 – 384까지 9년간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측 자료는 그의 생몰연도가 320 – 394로 74세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 (295 – 375)의 둘째 아들이며 부왕과 함께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부왕이 왕위에 오른 서기 346년 그의 나이 26세 (부왕 51 세)였고 근초고왕시대에 역사에 알려진 녹산의 부여정벌과 마한과 가야합병, 고구려와 치양전투 그리고 남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 왜의 신라침공이 실제로는 태자 시절 근구수왕과 관련한 기록들이다. 근초고왕이 빛나는 진짜 이유는 아들 근구수왕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상 그가 백제왕위에 있던 것은 9년뿐 (나이 55세부터 63세까지)이다. 태자때부터 제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고 74세까지 살았다는 근구수왕의 남은 세월은 역사의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버지 부여구(근초고왕)를 꼭 빼어 닮은 싸움꾼이었고,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지나대륙까지 위세를 떨친 인물이다. 아직까지 역사는 근구수왕의 모습을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머리땅을 의미하는 야마토Yamato라는 나라는 이 무렵 일본열도에 건국되었다고 본다. 일본 천황중 15대 응신(應神 Emperor Ojin)이 있는데 이 사람을 Yamato의 시조로 본다. 일본열도에서 Yamato의 우위를 확실히 다져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것이다. 천황기록은 기원전 서기 660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사람앞에 기록된 14명의 천황은 이 사람을 위하여 이 때까지의 세월을 대강 짜 맞추었다. 일본기록에 응신의 재위기간이 270 –310의 40년간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역사학자는 없다. 

다음은 응신왕 시절의 기록들이다. 

백제의 직조기술자, 야금 기술자 입국. 백제 근초고왕의 칠지도, 칠자경 헌상. 근초고왕 시기의 백제인 아직기 말 두필 가져 옴. 근초고왕 시기의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와서 강의하며 일본왕자의 스승이 됨.(한국측에는 왕인 기록이 전혀 없음).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대마도)인, 신라인들이 이주해 옴. 이들로 하여금 큰 못을 만들게 하고 한인지(韓人池)라 함. 유쯔키기미(弓月君- 훗날의秦氏) 가 백제에서 인부 백 이십현(縣)을 데리고 귀화하였다. (이들은 쿄오토 가쓰라강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 농사를 하고 농잠업으로 비단을 생산하여 농업생산력 증진에 공헌한다). 이 무렵 아야(漢)씨, 사케노기미 (酒君)등 유력 백제귀족세력이 대거 일본에 도래한다. 이후 광개토태왕의 백제정벌시 백제 피난민의 행렬이 가야지방을 통하여 일본으로 유입되어 오오사카의 Naniwazu(難波津)부두는 백제사람으로 넘쳤다. 이러한 인구이동 때문에 백제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 들고 야마토는 비약적인 국력신장을 이룬다.


[칠지도]"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일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요약하면 백제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가 369년에 백제의 마한.가야정벌에 군대를 지원해 준 아들 왜왕에게 특별히 '칠지도'라는 칼을 만들어 하사하니, 잘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뜻이다. 

역사가들은 이 무렵 왠지 모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좋았다고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때 백제 근초고왕은 다섯가지 색깔비단 한 필씩과 쇠뿔로 만든 활, 철궤 40 개를 왜국 사신에게 주었다. 또 보물 창고에 있는 진기한 물건들을 보여 주며 백제에 보물이 많다는 것을 자랑한다. 백제가 왜국 사신에게 선물을 하고, 보물을 자랑한것은 왜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가야연맹의 탁순국으로부터 받은 왜국(백제 담로)의 병사를 목라근자 장군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했다. 백제 장군의 지휘를 받은 왜국의 병사들은 백제군과 함께 가야지역에 속하는 경상도 남서 지역의 7개 나라를 정벌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땅을 왜국이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섬진강 하구의 다사성도 보태 주었다고 한다. 백제가 왜국에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고도 되어 있다. 과거 일본학자들은 당시 왜국이 정벌한 땅을 백제에게 하사할 만큼 강한 나라였고, 백제는 일본에 조공을 바친 나라로 보았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백제멸망 후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인들이 한반도와 인연을 단절하면서 일본열도위주로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일본사학자들이 해석에 있어 헤갈리며 역사날조를 하는 것이다.

오진왕의 이름은 Honda Wake 또는 Homuda Wake (譽田別) 이며 Homuda란 근초고왕의 잠시 수도로 삼았던 한산 (漢山 또는 漢田)을 뜻한다고 한다. 오진왕, 근구수왕, Homuda Wake는 동일인물인 셈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야마토의 닌토쿠왕이 그의 이들이다. 야마토라는 통일왕조의 출현은 근초고(Yamato Takeru)와 근구수(Ojin or Homuda Wake) 부자의 2대에 걸친 정복전쟁( 318년부터 390년까지)의 결과물이다. 근구수왕Homuda Wake는 서기 390년 나이 70에 야마토(大和) 라는 나라를 오사카에 세운다. 만주 부여족의 후예로 백제에 이어 야마토의 지배자가 된 Homuda왕은 가와치(河內)의 구다라노(百濟野)에서 제천(祭天)의식을 올리고 만세일계의 영원한 일본지배를 기원한다. 그로부터 1,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아직도 천황으로 있다. 

얼마 전 히로히토 일본왕이 자신이 백제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방송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본왕을 통합이데올로기로 악용했던 일제시대 일본군부는 구다라 노(백제 벌)를 하비키노(羽曳野)로 개명하여 백제의 남은 그림자마져 없애 버린다. 

근초고왕(응신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어 하치만(Hachiman) 신궁에서 모시는데 전국에 3만의 하치만 신궁이 산재해 있고 오사카 응신천황능 앞에 하치만 신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아버지 근초고왕(야마토 타케루倭建命 또는 日本武尊)도 20 – 30대의 대부분을 일본의 전쟁터에서 보냈음으로 그 또한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근초고왕.근구수왕 시기 백제영역(추정)

한반도.일본열도.지나대륙에 거쳐 위세를 떨친 근구수왕의 행적을 추정해 본다면,

362년 (42세) 왜 성무천황의 반란을 진압하고 성무천황비Empress Jingu (336 – 390)를 후비로 취한다. 
363년 (43세) 근구수 왕자와 성무천황비 사이에 왜왕 출산(근구수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참조) 
364년 (44세) 왜군을 이끌고 마한.가야.신라을 정벌하다.
369년 (49세) 고구려 고국원왕 2만 군사로 백제침공했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하여 승리 
371년 (51세) 고구려 남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375년 (55세) 백제 14대 근구수왕으로 즉위 
376년 (56세) 고구려 침공, 요서.산동지역 경략 
377 년 (57세) 고구려 남평양성 재탈환,절강지역 경략 
383년 (63세) 근구수왕 사망 (삼국사기).실재로는 아들 침류에게 백제왕를 맡기고 오사카로 돌아감. 
383 (63세) – 394 (74세) 왜 Homuda천황으로 재위.그의 순행.전쟁행적이 일본 여러 지방에 전해 옴. 
390 년 (70세) 야마토 (大和) 건국.이 해에 신공황후(백제 근구수왕 왕후-아이 부인) 사망. 
392년 (72세) 야마토 장수 4명을 보내 백제 아신왕을 복위시키고 진사왕을 체포하여 야마토로 압송. 
394년 (74세) 사망.묘는 大阪 譽田御墓山의 전방 후원분. 길이 420미터로 1천명의 인부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지금 일본의 고분가운데 오진릉과 그 아들 닌도쿠(仁德)릉이 가장 거대하며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오진능 바로 남 쪽에 그의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의 백조능이 있다. google 지도에서 하비키노(羽 曳野) 지역을 확대하면 이들 묘의 위치가 확인된다. 항공사진으로도 식별가능하다. 거기서 청녕 천황능이 곤지왕능이고 서쪽으로 커서를 옮겨 사까이(堺)항으로 오면 거대한 닌도쿠 천황능이 보인다. 

백제 태자들은 보통 백제왕에 즉위하기 전에는 거의 백제담로지역인 일본열도로 건너 가서 왕노릇하다가 부왕이 붕어하면 한반도로 건너 와서 백제왕에 즉위했다. 동성왕.무녕왕.전지왕.부여풍 등이 모두 그랬다. 닌도쿠 천황(337 – 419)은 근구수왕의 장자로 근구수왕의 아들들이 되는 백제 침류왕, 진사왕의 친 형이 된다. 왕인 박사가 372년 일본에 가서 그 스승이 되었다는 왕자가 우치노와케이라츠꼬 (宇遲能和氣郎子)로 나이 10세였다. 이 어린 왕자가 커서 20세 때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 당시 백제와 일본은 백제황실이 경영하는 하나의 나라였고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기 660년 한반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지만 나머지 한쪽 일본열도에는 고스라니 일본백제가 남게 되어 이후 한반도와의 인연을 단절하고 일본열도위주로 백제사를 일본이 '담로'에서 시작한다는 창세신화로 시작하는 [일본서기]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백제초기 한강변의 10여기의 전방후원분들은 일본왕릉의 규모보다 큰 세계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다.그러나 사학계에 식민사관론자들이 득세해서인지는 몰라도 발굴을 하지 않고 산이라며서 그 실체를 감추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전방 원분군이다.




일본의 전방후원분 분포도

전방후원분은 주로 마한지역인 영산강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의 무덤양식인데, 고대 마한인들의 무덤양식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일본열도는 본래 단군조선당시 한반도와 연결된 마한인들의 거주지로서
전방후원분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족의 무덤양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건너 온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지나대륙의 백제담로지역을 확장한 왕으로서 그 무덤의 출처를 알 수 없으나 서백제의 왕성인 산동성지역에 '백제래왕'이라는 비문을 가진 왕릉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북위와 전쟁을 벌인 동성왕의 무덤이 아닌까 추정된다.

http://www.kookminnews.com/atc/modify.asp?ik=1809&ru=

일본서기는 왜곡 되었다

번역을 해 나감에 있어서 새롭게 발견하는 사실은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철저하게 우리 나라 역사와 과거사에 대해서 무지할 수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달 달 외웠던 연대는 아무런 지혜도 되지 못했고 우리나라 역사는 단지 시험보기 위한 걸리적거리는 한 과목에 불과 했었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우리의 역사가 우리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뿌리이고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달라 질 수있다는 사실을  안 가르쳐 주었습니다. 좀 더 친근한 방식으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좀 더 사실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배웠더라면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도덕적 방황이 훨씬 단축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번역을 시작하고 완전 역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삼국시대,고려시대, 조선시대가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글을 쓰려고 하니 너무 딸리는 것이 많아서 인터넷을 뒤지고 역사책을 주문해서 읽고 법석을 떠는 중입니다. 마침 인터넷 검색도중 백제와 일본의 역사에 관련하여 좋은 글을 발견하여 이 번역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첨부합니다. 재미도 있고 또 유익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1.     백제 무령왕 Muryeong of Baekje (AD 461 - 523)


 


백제 무령왕(서기501 – 523까지 23년간 재위)은 생몰연대가 가장 확실하고 그의 인생역정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고 있다. 그의 본명은 사마이며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로 삼촌인 좌현왕 여곤 (곤지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에게 입적되어 여곤을 아버지라 부르며 오오사카 가와치성에서 자랐다.


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을 발굴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도굴꾼들의 피해를 입지않고 완벽한 모습을 드러냈다.무덤속에서 지석 이 함께 나왔는데 이름, 출생사망연대등이 기록되어있어 신분이 파악되었다. 이리하여 백제 무령왕은 생몰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고대의 왕이 되었다.


이후 일본 후쿠오카 북쪽 가카라시마섬 사람들이 공주에와서 백제 무령왕릉에 참배하고 461년 그곳에서 태어 난 무령왕의 탄생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일본 서기 Nihon Shoki 기록에 의하면 서기 461년 백제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에 보낼 때 임신한 부인을 아내로 삼아 함께 보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출산했다. 이때문에 무령왕은 섬 왕 즉 사마 왕이라 불렸다.


일본에서는 곤지에 대하여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없고 반드시 뒤에 군이나 왕자를 붙여 호칭한다. 일본서기 (곤지왕), 백제신찬 (곤지군). 일본 오오사카 히비키노시에 있는 아스카베신사가 곤지왕을 모시는 신사이며 곤지왕 시대에는 이 곳이 곤지왕의 거성 가와치성이었다.


461년 7월 백제의 정로장군이자 좌현왕 곤지가 일본에 가서 그해 8월부터 왜국의 지배층을 모두 숙청한 후 11월에 왜국왕에 즉위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백제 하남 위례성이 점령되어 폐허로 변 하고 이때 개로왕 (429-475, 재위 455-475 21년간) 은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 )를 건너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때 폐허가 된 하남 위례성은 1,500년 동안 4미터 깊이의 토사속에 묻히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하나 일본서기는 아들이 아니고 동생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으로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개로, 문주, 곤지는 형제간이다.


477년 야마토의 곤지가 야마토를 떠나 면서 무령왕을 왜무왕으로 봉한 뒤 백제에 나왔던 기록이 있다. 어찌 된일인지 삼국사기는 이 때 곤지가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요즘 역사학자들의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곤지의 생몰연도가 444 – 484로 되어있다. 왜무왕은 478년 송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무령왕은 백제왕이 되기 전 477년부터 왜무왕 이었고 그가 백제 무령왕이 된것은 501년 나이 40세때이다.


문주왕과 그 아들 삼근왕은 의문의 암살을 당하고 479년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야마토에서 돌아와 백제왕으로 즉위하여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중국본토에 백제분국을 설치하고 북위와의 전쟁에서 대승한다. 광양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등의 백제관리가 분국을 다스렸다.


동성왕 사후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무령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지리적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회복코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의 아들 성왕때 이 목표는 거의 이루어질 듯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훗날 동맹국 신라의 배신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2. 야마토 타케루 日本武尊 Yamato Takeru


 


본래 동양의 역사기록은 사마천 (BC145 – BC86) 의 사기이래 그 분류방법을 본 따 본기, 세가, 표, 서, 열전으로 나누어 기술하였고 후대의 모든 역사기술이 이 틀을 따르는데 일본의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 古事記 Kojiki 와 일본서기日本書紀 Nihon Shoki 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일본 건국신화위주로 시작된다. 자기 조상들의 역사를 신화형식으로 기록하면서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 놓아서 신화를 역사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상기 두개의 역사서는 덴무천황 天武 Emperor Tenmu (631 – 686) 재위 672 – 686 의 명에 의하여 Toneri 황자와 백제의 학자 안만려가 고사기 AD712년, 일본서기 720년에 완성하였다. 덴무천황부터 현직의 왕에게 천황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시작한다. 이제부터 야마토 타케루라는 신화속의 인물을 살펴보자.


Yamato Prince Ousu 는 전설속의 12대 천황Emperor Keiko의 둘째아들인데 총명하고 용감하였다. 나이 16세가 되어 부왕의 명으로 큐우슈 구마소 형제가 왕명에 잘 따르지 않으므로 정벌에 나선다. 상대는 너무나 용맹스럽고 용의주도하여 고심끝에 Ousu는 단신으로 여장한 모습으로 구마소 형제에게 접근한다. 가슴속에 날 선 비수를 감추고. 미모의 젊은 여인이 따라주는 술에 기분 좋아 진 형제를 처치하였을 때 그 형제가 붙여 준 이름이 야마토 제일의 무사라는 뜻의 Yamato Takeru였다. 그 후 이즈모 出雲 Izumo 를 정복하고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 돌아와 서 갑자기 병이 들어 Mie 현 Ise군 어딘가에서 죽는다. 죽어서 그의 혼백이 백조가 되어 날아 갔다고 전 한다. 그의 무덤이 오오사카 금탄원에 있는 백조능이다. 백조능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서기 295년 태어나 333년 39세로 죽었다.


그런데 신화속에서 Prince Ousu는 큐우슈와 동쪽의 나라를 향해 떠나기 전에 이세신궁의 숙모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지혜를 구하게 되는데 숙모에게서 받은 신물이 그 임무수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우연한 일인 듯 기록된 이 숙모는 야마토 천황가의 시조중의 하나로 알려져있고, 동쪽을 정벌하러 떠 날때 이세신궁의 숙모가 준 신검 Kusanagi는 현재 천황가의 보물중의 보물로 되어있다. 이세신궁의 주인 신녀인 Ousu왕자의 숙모와 Kusanagi 청동검은 역사속에서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신화는 요즘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인기있는 소재이다. 이 신화는 시대개념을 철저히 배재하고 있어서 어느 때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기록상 Emperor Keiko 생몰연도를 AD 71 – AD 130이라고 하나 아예 전설상의 천황으로 치므로 믿을게 못 된다. 백제가 망해 없어진 뒤에 야마토의 역사를 백제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하되 자기 조상들의 자랑스런 행적은 신화의 형식으로 남겨 둔 것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이다.


3세기 말, 만주에서 선비족의 세력이 강해져서 부여의 의라왕이 부여세력을 이끌고 한 반도를 거쳐 일본을 차지하여 숭신 천황이 된다. 그 와중에 백제의 책계왕이 298년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분서왕이 304년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백제 12대왕으로 기록된 계왕 (273 – 358)은 분서왕의 왕자였지만 당시 큐우슈와 오오사카에서 부여세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계왕의 나이가 어려 비류왕이 즉위했다고 적고 있으나 계왕의 실재나이는 이때 32세였다. 그런 사정으로 분서왕 사후 비류왕이 11대왕이 된다. 비류왕이 왕이 되기 전 서기 295년 쌍둥이 아들을 낳았었는데 이름이 큰방아와 작은방아였으니 오오(大)우스와 오(小)우스이다. 일본어로 우스로 읽는 한자의 뜻이 우리 말의 방앗간의 방아에 해당한다.


Yamato의 전설속의 12대 Emperor Keiko는 백제계왕의 젊은 시절이었으며 그를 도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것은 다름아닌 방아 쌍둥이 형제였다. 전쟁은 318년 Keiko측 승리로 끝 나지만 오오우스는 24세로 전사하고 그 후 오우스의 정복전쟁은 신화속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정복전쟁중 신검 Kusanagi의 존재는 백제황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신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백제 11대 비류왕이 죽고 Yamato의 Emperor Keiko가 백제에 돌아 와12대 계왕이 된 것이 344년이며 346년 Yamato Takeru 가 백제 13대 근초고왕이 되어 나이 80이 된 375년까지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Yamato Takeru는 백조가 되어 Yamato를 떠나 백제 근초고왕이 된 것이다.


작성자: 권선철 0 개의 덧글


3. 칠지도 七支刀 Seven-Branched Sword


한국과 일본간 논쟁중인 한일 고대사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중의 하나이다. 1870년대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가미 신궁 石上神宮Isonokami Shrine창고에서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발견되었다. 길이 74.9 cm이며 일곱 개의 날이 있고 양면에 60여자의 한자가 금상감되어 있다. 글자일부가 훼손되어 추측해서 해독해야 되는 탓도 있지만 기록된 연호를 둘러싸고 한일학자간에 공방이 계속되고있다. 일본은 한국이 고대에 자기들의 상국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 중국커넥션으로 설명하고 싶어한다. 곤란하면 신화라고 우기며 역사로 해석하는것을 거부한다.


일본서기에 신공황후 Empress Jingu 52년 백제 근초고왕이 七枝刀를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에 120년의 차이가 난다. 여기 나오는 Empress Jingu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가장 심한 역사왜곡이 이루어진 인물이며 신화속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일본학자들도 명치시대까지 그녀를 천황으로 기록했으니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저작했던 사람들의 심모원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왜곡이 심하다는 것은 그 만큼 숨겨야 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언젠가 그녀는 이 글의 제목으로 등장하여 역사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본서기 기록


則獻七枝刀一口 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 仍啟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飲是水 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


칠지도에 금상감 된 글자 가운데 괄호안은 추정이며 검은 부분은 추정불가한 글자.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 (作 or 祥)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가장 민감한 부분이 태화4년인데 백제연호로 볼 수도 있고 중국연호로 볼 수도 있어서 한일간에 자기 쪽에 유리한 주장을 한다. 다음은 아랫 줄 왕 세자 기생성음 부분인데 백가쟁명의 해석이 나와있다. 그런데 윗 글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奇로 표현된 사람의 이름이다.


백제 왕세자 기가 태어나 말을 하므로 왜왕으로 봉하여 후세에 전 하노라.


왜왕 奇는 위에 언급된 신공황후가 서기 363년 큐우슈 후쿠오카에서 출산한 왜기왕이다. 왜기왕을 367년 백자국 百慈國 (시가현) 의 세자로 책봉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근초고왕이었고 그를 기념하여 칠지도를 만들어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다. 백제태화 원년은 364년이


다. 타고 난 미모에 사나운 무사였으며 전쟁때는 전투의 선봉에 섯던 며느리를 근초고왕은 자랑스러워 했으며 거기서 태어 난 태자 奇에 대한 사랑과 기대를 표현한 것이다. 왜기왕이 훗날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는 것만 밝히고 넘어간다.


 


4.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에 관련된 역사는 삼국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일 발견된 광개토대왕비 Gwanggaeto Stele 때문에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되었다. 만주 지린성 지안에서 일본 정보장교 Sako Kageaki 중위가 1883년 탁본하여 일본학계에 보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을 파악한 일본군은 일본의 조선합병을 합리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흥분하는데…


높이 7미터 둘레 4 미터인 한 개의 화강암 석주에 1802자의 한자가 음각되어있다. 그런데 거기 기록된 내용중 한국과 일본학자간에 논쟁이 된 부분을 학계에서는 신미년조라 부른다. 우리역사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두 명의 왕이 있으니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이다. 광개토대왕 (391 – 413)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391년 17세때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라 39세에 병사하므로 22년간 왕위에 있었다.부왕의 위업을 기려 414년 장수왕 2년 건립하였다. 추모왕의 고구려건국과 광개토대왕시절 정복한 전쟁기록인데 등장하는 성의 이름만 백여개이다. 문제가 되는 신미년조는 다음과 같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XX)新羅以爲臣民


而後以辛卯年不貢因


신묘년 (AD 391)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XX)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록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한국측 학자들은 원래 두째 줄에 있는 내용을 처음 발견한 일본군이 첫 째줄의 내용처럼 비문을 변조하였다고 음모론을 제기하였다. 그렇게 되면 “ 그후 신묘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XX)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로 되어 한국측에게 만족스런 내용이 되나 세계사학계의 견해는 음모론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 9년 (364년) 대대적인 왜의 공격으로 신라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공격의 지휘관은 야마토의 응신천황 應神 Emperor Ojin (320 – 394) 이었다. 지금 일본에 있는 하치만 신궁에서 받 들어 모시는 신격화된 인물이다. 일본측 역사에는 Empress Jingu 가 신라를 정복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고의적인 왜곡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실성니사금 원년 (402년) 3월 내물왕자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낸다. 백제기록에도 아신왕 6년 (397년) 왕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낸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것은 김 부식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지는 인질이 아닌 왕자의 신분으로 야마토를 둘러 본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낭랑 대방이 가로 막아 주어서 접촉이 없었는데 313년 고구려 미천왕때 낭랑 ㄷㅒ방군이 소멸되고 국경을 맞 대게 되어 충돌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무렵 백제가 군사력에서 우세했던 것 같다.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2만의 군사로 먼저 공격하였으나 치양전투에서 백제에게 패배한다. 백제는 371년 근구수왕자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고국원왕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뒤 소수림왕이 즉위하고 중국대륙에선 전진황제 부견이 383년 비수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대륙은 혼란에 빠진다.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정비하면서 백제에게 패전한 상처를 회복한다. 이후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순으로 이어진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형제간이므로 광개토왕은 대 백제전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손자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왕자 담덕이 17세의 나이로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고구려의 국력은 주변국에 별로 위협이 되지 못 했는데 어떻게 하여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적의 나라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단숨에 백제를 유린하고 만주대륙을 종횡무진으로 공략한다. 백제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왜의 인덕천황은 399년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나 고구려군에게 궤멸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신라와 가야전역이 왜군으로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 대마도 큐우슈 오오사카를 점령하고 광개토대왕의 왕자 고진이 백제세력을 제압한 뒤 오오사카에서 윤공천황으로 즉위한것이 서기 431년이다.


이때 형성된 고구려 세력을 야마토에서 정리하는 것이 백제 무령왕 편에서 살펴 본 곤지왕의 몫이었다.


 


5.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大和)


왜의 최초역사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야마다이國 왜 여왕 히미꼬 (卑彌呼)가 서기 238년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사이다. 일본측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히미꼬의 기록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는 왜 여왕이 239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그들이 240년 돌아 왔다는 기록은 남겼다. 일본서기의 저자가 중국측 기록을 알고 있었다.


위나라와 시작된 이러한 야마타이국의 외교관계는 다음의 진(晉)으로 이어지다가 266년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이후 147년간 중국역사에 왜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가들은 서기 266년부터 413년까지의 147년간 일본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미꼬의 야마다이국은 부족연맹수준의 작은 나라였는데 147년 간의 역사가 없는 신비한 세월이 흐른 뒤 (이 기간 일본은 역사는 없고 신화만 무성하다) 갑자기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가 야마토와 가와치 지방 (현재 나라현) 에 나타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고학상 일본역사 발전단계의 한 획을 긋는 거대한 분묘가 이 무렵 나라 – 오오사카 지역에서 생기기 시작하더니 차차 일본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 분묘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해서 길이 420미터를 넘는 것도 있는데 이집트 피라밋 건립과 맞 먹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250년부터 552년 불교공인이후 매장문화가 변화할 때까지의 기간을 일본에서 고분시기(古墳時期)라고 한다.


이 새로운 문화가 일본내의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일본인이 인정하는데 어디에서 누가 왜 일본에 왔나? 하는 물음에 대 해서는 아직까지 공인된 결론이 없다. 결론이 없다기보다 결론이 두려워 회피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말 할 수 없는 대목에서 침묵할지어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 Wittgenstein)"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황실과 일본국민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이 무렵의 권력자라고 생각되는 천황묘의 발굴에 관심이 많은데 황실은 고인의 권위와 평안을 지켜야 한다면서 반대하고 있다.


사실 별 것 아닌 것도 국가 문제가 되면 국가라는 도그마에 매몰되어버린다. 요즘 티벳사태를 대하는 중국을 보면 된다. 성화가 지나가는서울에서 그들은 애국이란 이름으로 수치를 모르는 짓을 한다. 국가란 원래 폭력을 독점하고있는 합법적인 집단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교육 받은 개인들 또한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중국 대륙이 불안할 때 주변의 오랑케들은 편안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않고 있다. 1951년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뺏기고 57년 동안 티벳인들은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망해 없어진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기 보다는 가미(神)의 후손이라고 하자.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는 가미의 세계라면 지난 역사를 적당히 꾸며 댈 수 있을것이다. 만세일계로 이 곳에 군림할 권위를 신에게서 빌리자.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이 감히 가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의 자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온 천손이다. 천손강림 신화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오늘날 개명한 일본국민들 또한 믿고 있다. 믿음의 체계란 진실의 체계가 아니라 주관의 체계인 것이다. 믿음의 체계라는 이름아래 인류는 진리를 의식하지 못 하는 세계에 살고있다. 인간의 무명(無明)이 안타까울 뿐이다.


8 세기 초 성립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의도했던데로 일본국민은 가미를 생활화하면서 21 세기를 살고있다. 황실과 관련된 신궁, 이나리 신사, 하치만 신궁 등등 수 10만의 신궁과 국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 2006년 정초 3일간 269만명의 참배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단 한 개의 신사에 이렇게 사람이 몰려오는데 전국에 이나리 신사만 3만개, 하치만 신궁 2만5천개, Susanoo를 모시는 야사카 신사는 8만개 이상의 지역신사가 있다고 하며 이밖에도 무수한 신궁이 있다.


역사시대의 정교한 기록을 과시하는 중국의 전국시대( BC 8세기)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기원후 2 - 3세기의 역사를 일본은 이런 식의 신화로 만들어 놓았다.


 


6. 백제 근구수왕 (320 – 394)


삼국사기에 근구수왕 은 375 – 383까지 8년간 재위한다. 일본 측 자료는 그의 생몰연도 320 – 394로 74세를 살았다. 근초고왕 (295 – 375)의 둘째 아들이며 부왕과 함께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부왕이 왕위에 오른 서기 346년 그의 나이 26세 (부왕 51 세)였고 근초고왕시대에 역사에 알려 진 가야합병, 고구려와 치양전투 그리고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 왜의 신라침공이 실제로는 그의 기록이다.


그런데 역사상 그가 백제왕위에 있던 것은 8년뿐 (나이 55세부터 63세까지)이다. 왕자때부터 재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고 74세까지 살았다는 이 사람의 남은 세월은 역사의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를 꼭 빼어 닮은 싸움꾼이었고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대륙까지 위세를 떨친 인물이다. 아직까지 역사는 이 분의 모습을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Yamato라는 나라는 이 무렵 건국되었다고 본다. 일본 천황중 15대 응신 (應神 Emperor Ojin)이 있는데 이 사람을 Yamato의 시조로 본다. 일본열도에서 Yamato의 우위를 확실히 다져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것이다. 천황기록은 기원전 서기 660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사람앞에 기록된 14명의 천황은 이 사람을 위하여 이 때까지의 세월을 대강 짜 맞추었다. 일본기록에 응신의 재위기간이 270 –310의 40년간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역사학자는 없다. 다음은 응신왕 시절의 기록들이다.


백제의 직조기술자, 야금기술자입국. 백제 근초고왕 칠지도, 칠자경 헌상. 백제인 아직기 말 두필 가져 옴. 왕인 논어와 천자문 가져와 경서 강의하며 왕자의 스승이 됨. (한국측에는 왕인 기록이 전혀 없음). 고려인,백제인, 임나인, 신라인들이 옮겨 옴. 이들로 하여금 큰 못을 만들게 하고 한인지(韓人池)라 함. 유쯔키기미(弓月君- 훗날의秦氏) 가 백제에서 인부 백 이십현(縣)을 데리고 귀화하였다. (이들은 쿄오토 가쓰라강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 농사를 하고 농잠업으로 비단을 생산하여 농업생산력 증진에 공헌한다). 이 무렵 아야(漢)씨, 사케노기미 (酒君)등 유력호족세력이 대거 일본에 도래한다. 이 후 광개토왕의 백제정벌시 피난민의 행렬이 가야지방을 통하여 일본으로 유입되어 오오사카의 Naniwazu(難波津)부두는 백제사람으로 넘쳤다. 이러한 인구이동 때문에 백제의 인구는 줄어들고 야마토는 비약적인 국력신장을 이룬다.


역사가들은 이 무렵 왠지 모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좋았다고 본다.


오진왕의 이름은 Honda Wake 또는 Homuda Wake (譽田別) 이며 Homuda란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 (漢山 또는 漢田)을 뜻 한다고 한다. 오진왕, 근구수왕, Homuda Wake는 동일인물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야마토의 닌토쿠왕이 그의 이들이다. 야마토라는 통일왕조의 출현은 근초고(Yamato Takeru)와 근구수(Ojin or Homuda Wake) 부자의 2대에 걸친 정복전쟁( 318년부터 390년까지)의 결과이다. Homuda Wake는 서기 390년 나이 70에 야마토(大和) 라는 나라를 오오사카에 세운다. 만주 부여족의 후예로 백제에 이어 야마토의 지배자가 된 Homuda왕은 가와치(河內)의 구다라노(百濟野)에서 제천(祭天)의 의식을 올리고 만세일계의 영원한 일본지배를 기원한다. 그로부터 1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아직도 천황으로 있으니 역사를 다룰 줄 아는 조상들의 슬기에 숙연해 질 뿐이다. 일제시대 일본군부는 구다라노(백제 벌)를 하비키노(羽曳野)로 개명하여 백제의 남은 그림자마져 없애 버린다.


근구수왕(375 – 383재위) –야마토 오진왕(362 – 367재위) – 야마토 호무다왕 (383-394재위)의 인생역정


응신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어 하치만(Hachiman) 신궁에서 모시는데 전국에 3만의 하치만 신궁이 산재해있고 오오사카 응신천황능 앞에 하치만 신궁이 함께 세워져있다.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 (倭建命 또는 日本武尊)가 20 – 30대의 대부분을 일본의 전쟁터에서 보냈으므로 그 또한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를 따라 하늘이 그들 부자에게 준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일생동안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362년 (42세) 왜 성무천황 반란진압하고 성무천황비Empress Jingu (336 – 390)를 후비로 취한다.


363년 (43세) 근구수왕자와 Empress Jingu 왜기왕 출산(칠지도 편 참조).


364년 (44세) 신라 내물왕 9년 왜군을 이끌고 신라침공.


369년 (49세) 고구려 고국원왕 2만 군사로 백제침공했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


371년 (51세)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375년 (55세) 백제 14대 근구수왕으로 즉위.


376년 (56세) 고구려 침공.


377 년 (57세) 고구려 평양성 재탈환.


383년 (63세) 근구수왕 사망 (삼국사기). 실재로는 아들 침류에게 백제왕를 맡기고 그는 오오사카로 돌아감.


383 (63세) – 394 (74세) 왜 Homuda천황으로 재위. 그의 순행과 전쟁 행적이 일본 여러지방에 전 해 내려 오고 있다 함.


390 년 (70세) 야마토 (大和) 건국. 이 해에 신공황후(Empress Jingu아이 부인) 사망.


392년 (72세) 야마토의 장수 4명을 보내 백제 아신왕을 복위시키고 진사왕 체포하여 야마토로 압송.


394년 (74세) 사망. 묘는 大阪 譽田御墓山의 전방 후원분. 길이 420미터로 천명의 인부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지금 일본의 고분가운데 오진릉과 그 아들 닌도쿠(仁德)릉이 가장 거대하며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오진능 바로 남 쪽에 그의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의 백조능이 있다. 7.일본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편 Google 지도에서 하비키노(羽 曳野) 지역을 확대하면 이들 묘의 위치가 확인된다. 항공사진으로도 식별가능하다. 거기서 청녕 천황능이 곤지왕능이고 서쪽으로 커서를 옮겨 사까이(堺)항으로 오면 거대한 닌도쿠천황능이 보인다. 닌도쿠 천황(337 – 419)은 근구수왕의 장자로 백제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의 친 형이 된다. 왕인 박사가 372년 일본에 가서 그 스승이 되었다는 왕자가 우치노와케이라츠꼬 (宇遲能和氣郎子)로 나이 10세였다. 이 어린 왕자가 커서 20세때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 당시 백제와 일본은 백제왕실이 경영하는 한 나라였고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기 660년 한 반도의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지만 나머지 한쪽이 일본열도에 고스라니 남게 된 것이다.


2008년 6월 7일 토요일


 


7. 히미코(卑彌呼) Himiko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일절 언급이 없으나 중국역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역사적 왜왕이다.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고사기나 일본서기 저자들이 신화속에 끼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렵 신공황후를 가공하여 히미코와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신화를 기록하였다.


히미코의 역사기록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온다. 왜나라에 원래 남자왕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쟁만 계속되고 나라가 편안하지 않아 합의에 의하여 히미코라는무당여인을 왕으로 뽑은 뒤 야마다이국에 평화가 왔다. 여왕은 결혼하지 않았고 망루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궁에서 살았으며 무장한 경비들이 항상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처음 위나라에 사신이 온 것은 서기 238년이며 히미코의 사망을 247년으로 기록했다. 사망후 지름이 백 보를 넘는 거대한 분묘를 세우고 순장자 가 백명을 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 (서기 172년) 왜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그래서 히미코의 재위기간을 172 – 247로 보기도 한다. 일본학계에서도 히미코와 야마다이국의 위치에 관심이 많은데 정설이 없다. 1986년 큐우슈 사가(佐賀)현 간자끼(神綺)시 요시노가리에서 야요이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BC 3 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벼를 논에서 재배하였다고 한다. 1992 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위에 기록된 히미코의 궁과 흡사하다.


삼국유사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4년 (서기 157년)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신라에 해와 달의 광채가 사라졌다. 사람을 보내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와서 영일현에서 제사를 지내자 광채가 옛날 처럼 돌아왔다.


일본에 수 많이 등장하는 가운데 Super Star는 단연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天照大御神)라는 여신이다. 이 여신은 태양신이며 이세신궁의 주인이다. 남자 형제신이라며 스사노오 라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함께 나오는데 성질깨나 있고 괘팍하여 누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다. 이때도 스사노오가 누나의 시녀를 죽이고 난폭한 행동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로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는 동굴속에 들어 가 입구를 막아버리고 나가지 않았다. 태양신이 숨어버리자 세계는 암흑으로 덮히고 말았다. 곤란해진 신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아�


http://www.aljago.com/bbs/zboard.php?id=japanese_01&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PHPSESSID=0457c42309adefa4f10af592b560842a


일본의 성씨

성(性)아님^^

방송통신대 교수님 사이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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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성씨   

1. 성씨의 유래 

  원래 귀족이나 무사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성을 평민도 가질 수 있게 된 때는 1876년부터이다. 1873년 징병령 발표 이후 전 가구를 파악할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1875년에 성의 보유를 의무화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성은 메이지유신 이후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급조된 것이 많다. 하지만 성을 갖고 있던 지배층보다 몇 배에 달하는 일반 서민이 갑자기 성을 가지려니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자기의 성을 지은 사람도 있었지만, 글깨나 배운 사람에게 성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심지어는 호구조사를 하는 공무원에 의해 급조된 성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급하게 지어진 성들은 대부분 주거지에서 따온 것이 많은데, ‘다이콘’(大根), ‘쿠모’(蜘蛛), ‘우나기’(鰻)같이 일상생활에서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동식물의 이름을 딴 재미있는 이름도 있다. 

  예) *기노시타 (木下) : 큰 나무 밑에 집이 있었기에 

      *다나카 (田中) : 농촌의 중심지를 가리킴. 마을의 대지주 등이 이 이름을 붙임 

      *우에다 (上田) : 윗쪽에 있는 밭이 아니라, 양질의(상급)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서. 

      *아즈마 (東) :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보다 동쪽지방을 가리킴. 

                    현재의 도쿄 부근,  관동지방이라 해서. 

      *스기모토 (衫本) : 삼나무(衫)가 많은 고장이라 해서 

      *다카하시(高橋) : 다카하시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장소라는 뜻. 성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이름 

      *미야시타(宮下) : 미야(宮)란 신사(神社)를 뜻함. 신사 부근에 살던 성직자들이 붙임. 

      *와타나베(渡邊) : 사공을 했던 사람들 

      *사토 (佐藤) : 사노(佐野)지방의 후지와라(藤原) 가문이라는 뜻. 

      *나이토(內藤) : 궁에서 내사(內舍)직=사무직에 종사하던 후지와라(藤原) 가문. 

2. 성씨의 종류 

  성의 가짓수가 워낙 많은데다가 읽는 법도 제각각이라 일본인들조차 남의 성 읽기가 곤혹스러울 정도이다. 「日本苗字大辞典」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일본인의 성씨는 약 30만개 정도로, 100만을 헤아리는 미국에 이은 세계 제2위의 다성(多姓)국가이다. 영토면에서나 인구면에서도 일본과 비교가 되지 않는 중국이 겨우 10만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성을 가진 나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워낙 종류가 많다보니 그 수도 천차만별이어서 2백만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佐藤같은 흔한 성이 있는가하면, 너무 드물어서 코드화조차 할 수 없는 희성도 허다하다. 성이 너무 많아 혼란이 야기되자 인명용 한자에 쓰는 한자를 상용한자 외에 284자의 표외자에 한했다. 그렇지만 글자를 제한한 것일 뿐 발음까지 규제한 것은 아니므로 같은 한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어서 일본인조차 헛갈릴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의 명함을 보면 한자와 가나표기를 병기한 것이 적지 않다. 옛날사람들은 읽기 어려운 성이나 이름을 많이 사용해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성도 있다. 

일본인들의 성은 주거지와 관련된 성, 숫자와 관련된 성, 생활과 관련된 성 등 다양하다. 성의 종류가 워낙 많다보니 그 수도 천차만별이어서 2백만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佐藤같은 흔한(?)성이 있는가하면, 너무 드물어서 코드화조차 할 수 없는 희성도 허다하다. 佐藤외에는 鈴木, 高橋, 田中, 渡辺가 흔한 성이고 九(いちじく)나  十(つなし), 四月一日(わたぬき), 一二三(ひふみ) 같이 숫자와 관련된 성도 있다. 

3. 특이한 성 

▷숫자와 관련된 성 

일본인들은 성이나 이름에 숫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一’라는 성은 ‘이치몬지’(いちもんじ)라고 읽고, ‘一二三’은 ‘히후미’(ひふみ)라고 읽는다. ‘九’는 ‘이치지쿠’(いちじく), ‘十’은 ‘모지’(もじ) 또는 ‘쓰나시’(つなし),  ‘九十九’는 ‘쓰쿠모’(つくも)라고 읽는다. ‘千萬憶’이라는 성은 ‘쓰모루’(つもる)라고 읽는다. 이때의 억자는 숫자 단위인 ‘億’이 아니고 한자음이 같은 ‘憶’이다. 날짜로 된 이름 六月一日는 ‘우쓰와리’(うつわり)라고 읽는다. 이외에도 이치노세(一瀬), 니노미야(二宮), 니헤이(二瓶), 삼페이(三瓶), 고미(五味), 니카이二階)라는 성에도 숫자가 들어간다. 

▷생활과 관계있는 성 

생활과 관계있는 ‘四月一日’또는 ‘四月朔日’이라는 성이 있다. 이것은 ‘와타누키’(わたぬき)라고 읽는데, ‘와타’(綿; 솜)을 ‘누쿠’(抜く: 빼다) 하는 계절인 4월에서 유래된 성이다. 

▷재미있는 성 

1)‘후케’(浮気):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로 우리말의 ‘바람(기)’와 같은 뜻 

2)‘고후케’(小浮気): ‘약간 바람기 있는 사람’의 뜻 

3)‘아야시’(愛子): 일본어의 의심스럽다는 성의 ‘아야시이’(怪しい)와 같은 발음 

4)‘미타라이’(御手洗): 원래 화장실이란 뜻. 옛날에 높은 분의 화장실을 관리하던 사람에서 유래 

5)‘안락쿠’(安楽): 편안한 즐거움 

6)‘시오리’(塩入): 소금이 들어 있다(?) 

7)‘하나다’(花田): 꽃밭(?) 일본 스모의 요코즈나인 <타카노하나>와 <와카노하나>의 본래 성은 <하나다>임. 

8)‘코마’(高麗): 대개 옛날에 귀화한 고려 사람들의 성이다. 인구는 약 1,900여명 정도 있다. 백제(百済)란 성도 있는데, 잘 알려진 데로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인구는 약 750명이 있다. 

9)‘바바’(馬場): 이름 자체도 재미있지만 보통 나이든 아줌마를 경멸하는 뜻으로 부르는 ‘바바’(婆)와 발음이 같다 

10)‘오쿠’(奥): 상대방의 부인을 부르는 존칭어 "옥상(奥さん)"과 한자와 발음 모두 같다. 이 성을 가진 사람은 남자도 어린아이도 모두 옥상이다. 

11)‘키토우’(鬼頭): 우리말로 해석해 보면 귀신머리가 된다. 

12)‘이이’(伊井): 길게 발음하면 우리나라의 성인 李로 들린다 

13)‘쯔마부키’(妻夫木): 부부나무라는 뜻? 

14)‘루스’(留守): ‘부재중’ 또는 ‘부재중에 집을 지키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매우 희귀한 성 

15)‘오마타’(男全): 읽는 방법도 특이한 매우 희귀한 성 

16)‘진푸우’(神風): 일반적으로 ‘가미가제’라고 읽지만 성으로 쓰일 때는 ‘진푸우’로 읽음 

17)‘토도로키’(轟): 차가 세대? 

18)‘이가라시’(五十嵐): 읽는 방법이 아주 특이한 성이다. ‘고주아라시’라고 읽으면 안된다. 

19)‘켄가쿠’(見学): 면학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학구파 성이다. 

20)‘야쓰메’(八女): 잘못하면 ‘그 자식’이라는 뜻의 奴め로 들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21)‘야마나시’(月見里): 산이 없으니 달이 잘 보인다는 뜻의 성 

22)‘다카나시’(小鳥遊): ‘다카’(매)가 없으니 작은 새가 잘 논다는 뜻의 성 

23)‘오바’(大庭): 오버한 느낌이 드는 성 

24)‘데구치’(出口)와 ‘이리구치’(入り口): 영원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두 성 

25)‘이에시키’(己己己己): 자기주장이 몹시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성 

26)‘스네코시’(子子子子): 자식 욕심이 몹시도 많은 사람이 가질 것 같은 성 

4. 일본의 성 베스트 10 

1위 사토(佐藤) 
2위 스즈키(鈴木)
3위 타카하시(高橋)
4위 타나카(田中)
5위 와타나베(渡辺)
6위 이토(伊藤)
7위 야마모토(山本)
8위 나카무라(中村)
9위 코바야시(小林)
10위 카토(加藤)
  

5. 일본 성 읽는 법 

일본에서 현재 인명에 쓰이는 한자에는 상용한자외에 284자의 표외자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글자를 제한한 것일 뿐 발음까지 규제한 것이 아니므로 하나의 한자가 여러 가지로 읽힌다. 때문에 같은 한자라도 읽는 방법이 다를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사업상으로 일본인과 상대할 때는 반드시 명함 뒤에 적혀진 로마자 표기를 확인한 뒤에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야 실수를 안하게 된다. 그 정도로 성과 이름을 읽는 방법이 복잡하여 같은 일본인조차도 읽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면 일본인들의 성을 읽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다. 


1) 같은 한자라도 읽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경우 

渡辺 (와타나베/와타베)
菅野 (칸노/스가노)
山崎 (야마자키/야마사키)

土橋 (츠치하시/도바시)
神山 (카미야마/코우야마)
塩谷 (시오타니/시오야)

河野 (코우노/카와노)
渋谷 (시부야/시부타니)
五十嵐 (이가라시/이카라시)

中島 (나카시마/나카지마)
  
2) 읽는 방법은 같은데 한자가 틀린 경우 

아다치 (足立/安達)
아베 (阿部/安部)
이데 (井出/井手)

우에다 (上田/植田)
카와다 (川田/河田)
하야미 (早見/速水)

모리모토(森本/守本)
혼다 (本多/本田)
와쿠이 (和久井/涌井)

이토 (伊藤/伊東)
이노우에 (井上/井ノ上)
나가이 (永井/長井)



3) 읽는 방법이 특이한 경우 

元 (하지메)
出井 (이데이)
長谷川 (하세가와)

三宅 (미야케)
和泉 (이즈미)
記虎 (키토라)

服部 (핫토리)
村主(스구리)
春日(카스가)



4) 2글자 이상인 경우 

久保河內 (쿠보코치)
弓納持 (유미나모치)
大日向 (오오히나타)

久保田 (쿠보타)
宇佐美 (우사미)
佐久間 (사쿠마)

佐々木 (사사키)
  

6. 기타 

일본의 여성들은 결혼하면 대개 남편의 성을 따른다.  최근에는 부부별성제의 영향으로 결혼하기 전의 성을 그대로 쓰는 여성들도 있으나 그리 많지는 않다. 죽을 때까지 성이 바뀌지 않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성씨나 가문, 뿌리 등에는 다소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필요에 따라 성을 여러 번 바꾸는가 하면 데릴사위가 처가의 성으로 바꾸어 계승하기도 한다. 

일본인 가운데에는 성이 없는 사람도 있다. 바로 천황가인데 서민이 결혼으로 천황가문에 들어가면 자신의 성이 없어지고 이름만 남게 된다. 거꾸로 천황가문은 부계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이 일본인과 결혼하면 천황가문을 떠나서 새롭게 남편의 성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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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백제 유물

81.나가노 고대사찰

‘젠코지’백제 불상 모신 명찰… 日 국민들 성지로

 

 

◇ 젠코지 본당.

 

1998년 2월 일본 나가노현 북서부인 ‘우시로다테야마’ 산줄기의 핫포오네(八方尾根) 스키장을 중심으로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지금부터 10년 전인 이 겨울올림픽 당시 나가노 시민들은 유별나게 한국 선수단에게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의 목청을 돋우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나가노에는 고대 백제와 뿌리 깊은 7세기의 훌륭한 사찰

‘젠코지’(善光寺, 나가노시 겐센초 491 소재)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누가 나가노의 젠코지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고 할 만큼  젠코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사찰이다. 일본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명찰로 젠코지를 꼽는다.   이 사찰에는 6세기 중엽인 552년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재위)이 보내준 ‘일광삼존아미타여래’ 삼존불상을 모시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백제 아미타여래 삼존불상은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직접 본 일이 없다는 비공개 비불(秘佛)로도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이 백제 비불로부터 가호받으며 평생의 소원을 빌기 위하여 젠코지 가람을 찾아가고 있다.

 

젠코지 본당인 아미타원(阿彌陀院) 지하실에 존귀하게 모시고 있다는 이 백제 비불은  ‘아미타삼존불’로도 부르듯, 좌우 양편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협시로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최초의 사찰 명칭이 ‘백제사’였다는 아미타원 지하는 참배객이 시커멓게 어두운 디귿자형의 낭하(내내진, 內內陣, 전장 약 15m)를 걸어서 계단순례(戒壇巡り) 통로를 돌아나올 수 있다. 입장료 500엔을 내야 한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관람객은 백제 비불 아미타 삼존불의 가호를 받게 된다는 ‘무량(無量) 빛의 부처님과 결연한다’는 신앙심을 안고 줄지어 지하 통로로 주저없이 들어간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긴 줄을 지어 차례로 이 법당 지하 계단 내부를 그냥 한 바퀴 걸어서 돌아나가는 것으로 평생의 가장 보람찬 불복을 누린다고 하기에. 젠코지를 다시 찾은 이날은 단풍이 한창 물들고 있는 지난 11월17일이었다.

 

 

◇ 백제와 관련 깊은 젠코지가 있는 일본 나가노시 풍경.

 

일본 고대 문헌인 ‘현진자필 태자전 고금목록초 책자본’(顯眞自筆太子傳古今目錄抄冊子本)에 의하면 젠코지는 원래 명칭이 ‘백제사’(百濟寺)였다고 한다. 도쿄대학의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 젠코지는 긴메이천황(欽明天皇, 539∼571 재위) 때에 백제로부터 전래한   ‘아미타삼존’을 본존불로 삼는다는 전설이 있는 저명한 사원이다.   10번 이상이나 화재가 일어났으나 그때마다 재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

(‘國寶, 重要文化財案內’ 1963)고 말했다.

 

필자가 이 사실을 지난 6월13일 일본 도쿄의 학술강연(퍼시즌호텔 강연장) 때 밝혔더니 여러 일본인들이 직접 필자에게 찾아와서 “젠코지가 본래는 백제사였던 게 틀림없군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점은 지금부터 40년 전에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지적하기도 했다. 즉

“ 젠코지는 본명이 백제사였다.   젠코지의 아미타원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 성덕태자, 574∼622)가 세웠던 사찰 모두

  46원들 중에서 두 번째 사찰이며 이름은 백제사이고, 뒷날의 명칭은 젠코지로 바뀌었다.   아미타원의 본존은 일광삼존(一光三尊)인 아미타불(협시는 관음 및 세지)로서,   백제국의 성명왕(聖明王, 일본 역사에서의 호칭, 필자주)이 갖다 바친 존상(尊像)이다 ”

(‘歸化人の社寺’ 1969)라고 했다.

 

 

◇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6세기경 금동삼존불.

 

불교 포교를 위해 성왕이 왜왕실에 가져다 준 것을 이마이 교수도 버릇처럼 ‘일본서기’ 투로 썼다.

즉 ‘일본서기’ 같은 역사책에서는 미개했던 고대의 섬나라 일본으로 문화 선진국 백제가 불상을 ‘갖다 바쳤다’는 등 왜곡을 했으며 일부 학자도 이를 답습하는 것을 차제에 아울러 지적해 두련다.

 

이날 젠코지 관계자인 후루타 가즈코(古田和子)씨는 필자와의 면담에서

“ 젠코지의 본존 비불인 아미타 삼존상은 백제에서 보내온 불상입니다.   어째서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루에 약 2만명 내외의 참배객이 저희 젠코지에 찾아옵니다.   연간 700만명이 방문한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들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나가노올림픽 이후 저희 가람은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라고 말했다. 물론 이날도 수많은 관람객 중에 서양인들도 경내 도처에서 눈에 띄었다.

 

현재 젠코지에서 발행 판매 중인 안내서(‘善光寺諸堂參拜’)라는 책자 서두에도 보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 신슈(信州, 나가노의 옛날 지명)의 젠코지에서는 일광삼존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성지로서, 사찰 창건 이래 1400년의 오랜 세월 동안 그 법등(法燈)을 호지하여 온 고찰입니다.   ‘젠코지연기’(善光寺緣起)에 따르자면 어본존(御本尊)인 일광삼존 아미타여래는   긴메이천황 13년(서기 552년)에 일본에 불교가 전래될 때에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오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입니다. ”

 

이어 젠코지 안내서에는 본래 처음부터 젠코지(善光寺)가 ‘구다라지’(百濟寺, 백제사)로서 개창되었다는 일본 고대 문헌들의 고증과는 다르게 젠코지라는 가람의 명칭이 생긴 발자취에 대해 다음처럼 쓰고 있다.

“ 백제 불교가 건너왔을 당시 백제 아미타여래 불상을 둘러싸고   과연 백제의 불교를 일본에서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로 조정에서 큰 정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당시 불교 반대파(조정의 군사 및 치안 책임자였던 대련(大連) 벼슬의 모노노베노 오코시 일당,   필자주)가 난바(難波, 지금의 오사카 중심지, 필자주)의 ‘호리에’ 강물에 갖다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 불상을 나가노에 살던 혼다 젠코(本田 善光)가 서기 642년에 그 강물에 가서 건져내어   이 고장으로 모셔와서 자기 집에다 안치했습니다.   그후 곧 아미타여래 불상은 비불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이 시기를 ‘긴메이천황 13년’, 즉 서기 552년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일본 고대 왕실과 불교 문헌들은 서기 538년에 백제 불교가 백제 성왕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앞에서 인용했듯이, 오타 히로타로 교수와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는 7세기 중엽이 아닌 6세기 중엽에 젠코지가 쇼토쿠태자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밝혔다는 것도 지적해 둔다.

 

더구나 젠코지 안내서에서는

“ 안타깝게도 젠코지의 초창을 설명해 주는 확실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편집된 ‘이로하자류초’(伊呂波字類抄)에는   8세기 중엽에 젠코지 본존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불(靈佛)로서 중앙에도 알려지고 있었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 라고 주장한다.

 

 

◇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반도식 좌법으로 있는 젠코의 부인상(오른쪽).

 

여하간 중대한 사실은 지금의 젠코지 당사가 직접 제작 판매하는 두 종류의 책자에서 비불인 “일광삼존 아미타여래상은 백제에서 보내온 불상이다”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등 저명한 여러 사찰들이 일본 국보가 된 소장 백제 문화재들에 대해 사찰 안내서에서 일체 ‘백제 불상’ 등의 명칭을 표시하지 않고 있는 게 오늘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백제에서 보내준 불상’을 엉뚱하게도 그들이 만든 것인 양 거짓 선전하고 있어서 식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젠코지를 세웠다고 하는 혼다 젠코와 그의 부인과 장남 등 가족은 이 가람에서 높게 존숭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찰 본당의 우측 맨 안쪽에는 ‘어삼경간’(御三卿間)이 있다. 여기 모셔진 것은 세분의 조각 좌상이다.

 

중앙은 혼다 젠코경(卿)이고 그 우측은 부인인 야요이고젠(彌生御前), 그리고 좌측은 장남인 요시스케경(善佐卿)이다.

젠코지 발매의 또 한 권의 책자(善光寺 事務局 監修 ‘よくわかる善光寺參り’ 新晃社, 2000년 발행)에 보면 혼다 젠코의 부인인 야요이고젠의 좌상의 앉은 자세를 가리켜서

 

“ 야요이고젠께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계신 것이 주목됩니다.   이것은 조선반도의 치마저고리(チマチヨゴリ=원문)를 입은 귀부인의 정식 좌법(座法)입니다 

라고 굳이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부인은 말할 것도 없이 혼다 젠코 일가가 한반도, 특히 백제 도래인임을 지적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나가노 시민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일본 국민의 수호불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비불 일광삼존 아미타불은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일까.  현재 비불을 모방하여 제작했다는 것이 가마쿠라 시대(1192∼1333)의 청동 불상인

‘아미타삼존상’으로서 본당에 모신 전립본존(前立本尊, 중요문화재)이라는 불상이다.

 

물론 이 전립본존불도 늘 공개하는 것은 아니며, 7년에 한 번씩만 일반에 공개하는데, 2002년에 이어 내년 4월5일부터 5월30일까지 공개하게 된다.참고 삼아 살펴보자면 백제 왕도였던 부여땅 부소산에서 발굴된 6세기 금동삼존불

(부여박물관 소장)과 젠코지의 비불 아미타 삼존상은 혹시 서로 흡사한 모습은 아닌가 추찰해 보고도 싶다.

 

이 백제 가람 젠코지의 본당은 높이가 29.54m, 약 30m라는 거대한 목조건조물로서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크기를 자랑하는 국보이다. 가장 큰 것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전이다. 젠코지는 나가노역 앞에서 직선 도로로 약 3㎞ 언덕에 자리한다. 문전 거리의 상점가로부터 입구인 인왕문을 들어서면 삼문(三門) 정수리에 ‘젠코지’라는 한자어의 편액이 뚜렷하고, 삼문을 지난 곳에 웅장한 본당이 참배객을 압도한다.

 

‘젠코지’라는 글씨는 1801년에 일본 왕자(澄法親王)가 썼다는데 5마리의 비둘기 모양으로 획을 그은 것이 유명하다. 그래서 ‘구자액’(鳩字額)이라 부르기도 한다.

 

 

82. 나라현의 ‘고후쿠지 사찰’ 

 

백제인 세도가가 세운 고대 명찰 중의 명찰

 

 

◇ 고후쿠지 동금당과 오중탑 경관.

 

그 발자취에 대해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 등은

 “ 처음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부인이 세운 야마시나지는     그 후 서기 710년 천도한 새 왕도 헤이제이쿄(平城京, 현재의 글자는 奈良市가 됨, 필자주)로   옮겨서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658∼720년)가 지금의 터전에서   고후쿠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우선 금당(金堂)을 세우고 장육석가상(丈六釋迦像)을 모셨고,   이어 수많은 사람이 불사에 참여해 여러 당우와 탑이 잇대어 들어서며 가람이 커졌다.   더구나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고묘지(光明子, 701∼760년)가

  제45대 쇼무천황(聖武, 724∼749년 재위)에게 시집가서 고묘(光明)황후가 되자,   쇼무천황은 동금당(東金堂, 726년)을 세웠고,   고묘황후는 오중탑(730년)과 서금당(西金堂, 734년)을 세웠다.

 

  이와 같이 고후쿠지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사찰이면서도   국가 관사(官寺)와 동격의 가람으로 융성하며 광대한 터전을 펼쳤던 곳이   지금의 터전(‘국보·중요문화재 안내’ 1963)이라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나라 시대(8세기)에 백제인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듯 기세등등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고후쿠지뿐 아니라 이 가람에서 북쪽으로 약 2km 지점 언덕받이(나라시 가스가노초 160)에는   역시 후지와라 가문의 큰 사당인 ‘가스가타이쇼(春日大社)’도 있어서   나라시 동쪽인 이 고장이야말로 고대 백제인 후지와라 가문의 권세를 미루어 살필 만한 곳이다. "

 

필자가 최근에 고후쿠지를 다시 찾은 것은 지난달 22일이었다.  그 무렵 고후쿠지에서는   ‘2008년 고후쿠지 국보 특별공개 행사’(10월18일∼11월24일)를 하고 있었다.  동금당의 문수보살상(회나무, 93.9cm 13세기경)과 약사삼존상(청동, 본존 270cm 1415년 주조·중요문화재),  국보 목조건물인 오중탑 1층의 석가삼존상, 난엔당(南円堂)의 불공견색관음상(회나무, 372cm 13세기경) 등 이 가람에는 국보 26점과 중요문화재 44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 고후쿠지 동금당의 약사삼존상.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백제인 지배자라는 것을 여기서 간략하게 짚어보자.  서기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일본 왕족들 가문(左京皇別) 중의 제18번째 인물로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문중인 가스가노마히토(春日眞人)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가스가노마히토는   일본 제30대 “비다쓰천황의 황자(皇子)인 가스가왕(春日王)의 후손”이라고 돼 있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다름 아닌 “백제 왕족 출신 비다쓰천황” (‘신찬성씨록’)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기에 그가 나라 시대에 왕도에서 천하를 주름잡게 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저명한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씨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백제인이다”(‘古事記 天武天皇’ 1980년)라고 밝혀서 주목받았다. 오와 이와오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백제계 귀화인들에게 주어진 왕실 고관 벼슬인 ‘후히토(史)’ 그룹과 관계가 있었다”고도 지적했다.

 

그가 제30대 ‘비다쓰천황’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왕실 세도가가 되었다기보다 .피투성이의 정치적 권력투쟁에 승리했기 때문에 지배자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서기 645년의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끔찍한 정치개혁에 성공했다.

 

다이카개신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세력이 백제인 소가(蘇我) 가문을 뒤엎어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 고대사의 큰 발자취다.  지금까지 왕실의 외척으로서 왕실 최고 대신 자리를 아들 손자 대대로 세습하면서

천하를 주름잡았던 것이 소가 가문이었다.

 

다이카개신 당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본래 이름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였다. 그는 다이카개신 이후 ‘후지와라’라는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그 첫 조상이 되었다. 일본 역사를 보면 자기 스스로 개명하는 것은 아니며,

왕의 윤허를 받거나 왕으로부터 새 성씨를 내려받는 게(賜姓) 흔한 일이었다.

 

“ 다이카개신의 공이 있어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제38대 덴지천황(天智·661∼67년 재위)으로부터 ‘후지와라 조신’(藤原朝臣)의 사성을 받았다 ”    (角川版 ‘일본사사전’ 1976)고 하듯, 그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로부터 새로운 성을 쓰는 인물이된 셈. 여기 덧붙이자면 그 당시 나라 땅 야마토(大和)조정의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문은 겐(源), 페이(平), 도(藤), 기쓰(橘) 네 가문이었다. 여기서 ‘도’는 물론 후지와라(藤原) 가문이다.

 

 

◇ 고후쿠지 오중탑 안에 있는 석가삼존상.

 

특히 6세기 초부터 나라 땅 아스카(飛鳥)의 백제계 왕실에 등장한 소가 가문과 소가 집안을 멸망시킨 7세기 중엽 이후 후지와라 가문을 모르고는 일본 고대 역사를 논할 수 없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에게 멸망당한 세도 가문 소가씨는     백제 개로왕(455∼475년 재위) 때의 조신이었던 목만치(木滿致)의 후손이다 ”   (‘飛鳥’ 1970)라고 했으며,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아스카 왕실 실권자였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645년)를 암살하고 새로운 왕실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최고 대신(豊浦大臣)이었던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645년)는 아들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세력에 암살당하던 와중에 궁지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여간 두 원수 집안은 백제인 후손들이었다.

 

개혁을 주도하게 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5세기부터 왜왕실에서 백제신(百濟神)을 모셔온 구다라노(百濟野) 터전인

셋쓰(攝津, 지금의 오사카 일대) 별장에서 오랫동안 칩거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소가 세력이 왕실을 쥐고 흔드는 전횡이 극에 달하자,  드디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왕실의 나카노오에노오지(中大兄皇子)와 은밀하게 손잡고 소가 가문 제거의 큰칼을 빼들었다.

 

나카노오에노오지는 다름아닌 제34대 조메이천황(敍明, 629∼641년 재위)의 제1 왕자이다. 조메이천황은 서기 639년에 나라 땅   “ 구다라가와(百濟川)에다 몸소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다이쇼(百濟大寺)를 지었다 ” (‘일본서기’)

는 백제계 천황이다.

 

그보다 67년 전에 조메이천황의 친조부인 “ 제30대 비다쓰천황은 572년에 구다라오호루노미야(百濟大井宮)를 지었다 ” (‘일본서기’)는 것이며, 비다쓰천황은 ‘신찬성씨록’에 ‘백제 왕족’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실을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가 필자에게 자택(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  직접 시인했다(SBS TV, 박종필 PD 연출 촬영, 2007년 5월4일).

 

1972년 4월1일자 일본 도쿄신문에다 “조선과 일본은 똑같은 한민족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한일동족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더욱 유명해진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1909∼1992년) 씨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선 귀화인”이라고 밝힌 저명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씨가 지난날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 또한 일본 사학계에서 설득력이 매우 컸다.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본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였던 것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성씨를 바꿨다.   그것을 보더라도 나는 그가 귀화인 계통의 관료였다고 본다.    이름에 ‘다리(足)’가 붙는 것은 조선 도래인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7세기경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인명을 보면 거의 다 귀화인 계통의 인물이다. ”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개성한 것은 백제 멸망 당시 2만7000명의 백제 원군을  일본 규슈에서 백제 땅으로 보냈던 덴지천황 8년(서기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그 때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정의 최고 대신으로 임명 받았다” (‘新皇正統記’)고도 한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지난날 아스카 왕실의 최고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가 그랬듯이,

대대로 왕실과 자기 자신의 연고 관계를 완벽하게 밀착시키느라 

“ 자기 딸들을 차례로 덴지천황과 덴무천황 그리고 고분천황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왕실 외척이 돼 권세를 장악했다 ” (栗崎瑞雄 ‘枾本人麻呂’ 1981년)고 한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두 누나를 차례로 긴메이천황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83. 오우미 땅 백제인 터전 오토모 가문과 덴치왕

 

日 천태종의 개창자도 백제인의 후손이었다

 

 

◇ 쇼겐지 경내.

 

일본 교토시 동쪽 비와코 호수 지대인 오우미(近江) 지방에는 사카모토(坂本)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고대 백제인 오토모(大友) 가문의 옛 터전으로 이름난 곳이다. 시가현 오쓰시의 오쓰역에서 사카모토행 전철을 타고 불과 10여분만 가면 사카모토역에 이른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고문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 오우미 지방에서는 명문인 백제인 오토모 가문이 번성했다 ” (‘渡來人’ 1987)고 밝혔으며,  그 밖의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들도 백제인의 고장임을 각각 고증하고 있다. 물론 비와코 호수 일대는 사카모토 지역 외에도 가모군(蒲生郡)을 비롯해 구루모토군(栗太郡)과 야스군(野洲郡) 등 오우미 땅 일대에 백제인들이 드넓게 퍼졌던 것이 문헌마다 잘 드러나 있다.

 

 

◇ 쇼겐지 내 옛 우물터.

 

우선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8세기 사카모토의 오토모 가문 터전인 오토모향(大友鄕)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사이초(最澄)라는 이름의 고승 덴교대사(767∼822년)였다.

 

일본사 연표에는

“ 덴교대사라는 시호는 사이초 승려 사후인 서기 866년에   세이와천황(淸和, 858∼876년 재위)이 내렸다 ” 고 쓰여 있다. 덴교대사는 일본 불교 천태종의 개창자로서 매우 유명하다.  사이초 덴교대사는 출가 전 소년 시절의 속명이 미쓰노오비토 히로노(三津首廣野)였다.

 

지난 11월25일 필자는 20여년 만에 또다시 사이초 덴교대사가 탄생한 오우미 땅 오토모향의 생가터인 쇼겐지(生源寺)를 찾아갔다. 이날 사찰 경내에는 천막을 치고 덴교대사를 위한 축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절터에는 덴교대사가 태어난 당시부터 있었다는 우물터며 그의 청동 동자상(童子像)이 서있고,  동쪽 벽면으로는 아기가 태어나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 그림 밑의 설명문에는 덴교대사의 출신을 일컬어 “ 전교 대사 사이초는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 일족이다 ” 라고 고대 중국인설을 내세우고 있었다.

 

저명한 고대 사학자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 고대의 고승들 중에는 도래인 계통이 많다.    이를테면 덴표 시대(天平, 729∼749년)의 불교계를 이끈   고승 교기(行基, 668∼749년)의 아버지는 백제계의 고시노 사이치(高志才智)였고,   어머니 하치타노 고니히메(蜂田古爾比賣)인 하치타씨도 백제계의 도래 씨족이었다.

 

  히에이산(比叡山)에 입산해 수행을 거듭하다 당나라에 건너가 구법(求法)하고 귀국해   일본에서 천태종의 바탕을 이룬 사이초 덴교대사도 또한 도래인 씨족의 출신이다.   ‘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 9세기 초 一乘忠 저술)에 의하면

  사이초의 아버지는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이다.

 

  미쓰노오비토의 선조는 도마키왕(登萬貴王)으로서   그는 오진천황(應神, 4∼5세기) 시대에 도래해 시가(滋賀) 땅 오우미에 살면서   미쓰노오비토로 불렸다고 기록돼 있다.   시가 땅의 아야히토계(漢人系, 고대 백제왕족 아치노 오미·阿知使主의 후손들) 씨족의 하나가   미쓰노오비토 가문이었다고 본다 ” (‘息く交流の史脈’ 2001)라고사이초 덴교대사 등 일본의 고승들이 백제인 후손임을 상세하게 밝혔다.

 

 

◇ 덴치천황의 사당인 오우미신궁.

 

일본의 권위 있는 역사 사전에서도  “ 아야씨(漢氏)는 고대 한반도에서 도래한 씨족이다 ” (‘각천판 역사사전’ 1976년)라고  해설하고 있다.  따라서 덴교대사가 탄생한 집터 쇼겐지 벽화 설명문에서 “ 전교 대사 최징은 후한 효헌제의 후손 ” 이라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도 “ 아야씨는 백제인임이 틀림없다 ” (‘渡來人’ 1987년)고 단정했다.

 

고대 백제인들의 오토모향 오토모 가문의 조상 신주를 모신 사당 터전도 오우미 지방에서 이름난 명소다.

이곳에는 제39대 고분천황(弘文, 671∼672년 재위)의 능이 있다. 고분천황이란 다름 아닌 제38대 덴치천황(天智, 661∼671년 재위)의 아들 오토모왕자(大友皇子, 648∼672년)다. 오토모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의 능이 백제인들의 오토모향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는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를 통해

“ 오우미의 오토모향에는 오토모노 후히토(大友史)와 오토모노 스구리(大友村主)라는   두 가지 성씨가 있었다. ‘오토모노 후히토는 백제국 사람, 시라루노 나세(白猪奈世)의 후손이다  (‘신찬성씨록’ 815)’라고 쓰여 있듯이 백제계의 도래 씨족이다 ” (앞책)고 단정했고, 두 오토모 가문의 여러 후손들이 벼슬을 받아 왕실로 진출한 과정들도 상세하게 지적했다.

 

 

◇ 쇼겐지 내 덴교대사 동자상.

 

오토모왕자의 생부인 덴치천황은 역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가. 그는 백제가 망한 지 3년째였던 서기 663년에

2만7000명의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백제 땅 백촌강(白村江)에 보냈던 백제계 왕이다.

 

덴치천황은  “ 서기 665년 2월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우미 땅 간자키군(神崎郡)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3월에는 백제인들에게 땅을 주었다 ” (‘일본서기’)고 했다.

 

이어서 “ 백제에서 망명해온 남녀 2000명을 아즈마(東國) 땅에 살도록 했다.   백제인들에 대해서는 승속(僧俗·승려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3년 동인 국비로 먹여 살렸다 ” (‘일본서기’ 서기 666년 5월조)는 열렬한 백제 구원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그뿐 아니라 덴치천황은 백제국의 관위 계급을 검토하고, 백제 망명 관리 기시쓰슈시(鬼室集斯)에게 소금하(小錦下) 벼슬을 내리는 등 계속해서 망명 백제인들에게 왕실의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뿐이 아니다. 크게 주목되는 사건은 덴치천황이 백제인들을 간자키군에 이주시킨 이듬해인 서기 667년 3월 19일 “ 왕도를 (나라 땅으로부터) 오우미 땅의 간자키군으로 천도했다 ” (‘일본서기’)는 사실이다.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에게 오우미땅의 간자키군에다 땅과 집을 주어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고장을 새 왕도로 삼았다. 덴치천황은 나라(奈良)의 왕도를 내버리고 머나먼 오우미 땅의 백제 망명자들이 있는 간자키군으로 천도했다.

 

그러자  “ 나라 왕도의 주민들은 천도를 반대하고 천황을 비난하며 간(諫)하는 자들이 많았다.   풍자 노래도 많이 나왔다. 낮이고 밤이고 수많은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 ” (‘일본서기’)고 한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풍자 노래에 관해  “ 대부분이 동요 형태로 유행된 노래인데 정치적 목적이 컸다 ” 고 지적했다.

 

이러한 덴치천황의 생부는 제34대 조메이천황(629∼641년 재위)이다.

“ 조메이천황은 나라 땅 구다라강(百濟川) 옆에다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다이지(百濟大寺)를   세우고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한 뒤에는 ‘백제대빈’(百濟大殯) 3년상을 치렀다 ” (‘일본서기’)고 알려진 백제계 왕이었다.


하여간 일본 역사상 민간에서 왕을 풍간하는 노래는 특히 순수한 백제 계열의 제왕들이 다스렸던 7세기 초엽부터

조메이, 고교쿠, 사이메이, 덴치천황 시대에 집중됐다는 점도 지적해 둔다.

 

덴치천황은 어째서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우미로 천도했을까. 오우미 지역 왕도오쓰경(大津京)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하야시 미치히로(林通博)씨는 그의 저서(‘さざなみの大津京’ 1978)에서

“ 이 지역에 거주한 백제계 도래인 집단은 식산흥업(殖産興業)과 고도의 토목 기술을 배경으로   협소한 지역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난 생산력과 경제력을 창출해   7세기 중엽에는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훗날 나가오카경(長岡京, 784년부터의 교토부 지역의 왕도)과   헤이안경(平安京, 794년부터의 현재의 교토시의 왕도)의 왕도 조영(造營)은   오우미 지역을 주름잡았던 도래인 씨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바탕이 돼 이뤄진 것이다.

  오우미경 천도 역시 도래인의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고 설명했다.

 

즉 오우미 일대 백제 도래인들의 뛰어난 산업 기술과 자본이 덴치천황의 오우미 천도에 큰 밑받침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백제 유민들은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밑받침해 준다.

 

또한 이시하라 스스무(石原進)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 덴치천황은 천도에 필요한 고도의 토목 기술이며 경제적 기반을 도래인 집단에서 찾아냈다.   나라 왕도 일대가 신라와 가까워 늘 침략 위협에 노출됐다는 점도 고려됐다.   망명 백제인들의 우수한 기술로 일본 각지에 조선식 산성(山城)이 구축됐다.   덴치천황의 오우미 천도는 한반도의 정세를 강하게 의식한   극히 군사적인 색채를 띠었다고도 생각된다 ” (‘古代近江の朝鮮’ 1984)고 분석했다.

 

그런 오우미 땅에는 지금 덴치천황의 사당인 오우미신궁(近江神宮, 오쓰시 진구초)이 우뚝 서 있다.  이 사당에는 매일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덴치천황은 즉위한 지 두 달째인 서기 661년 9월 나라 땅의 왕궁 나가쓰노궁(長津宮)에서 백제 왕자 풍장(豊璋)에게 직관(織冠)을 수여했다.

 

또한 오노오미 고모시키 (多臣蔣枚, 왕도 나라 조정의 조신으로서 백제 귀족인 오노 야쓰마로·太安麻呂의 친조부, 필자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는 것도 덧붙여 둔다.

 

 

84. 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백제 농업문화 현해탄 건너 씨뿌리다 

 

일본 오사카 지방의 각 지역에는 ‘구다라데라(百濟寺, 백제사) 특별 사적’과 ‘나시즈쿠리 유적지’ 등을  비롯해 200여곳에 이르는 백제 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사카 히라노의 ‘나가하라(長原) 유적’은 아득한 옛날 백제 농업 문화의 역사 터전 중 한 곳이다.

 

이곳은 백제에서 현해탄을 건너 새로운 개척지 나니와쓰(難波津) 나루터로 상륙했던 수많은 백제인의 뜨거운 숨결을 오늘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 나가하라 유적 발굴 당시의 논 터.

 

필자는 지난해 11월 25일 나가하라 유적 지대를 돌면서 오사카시 문화재협회 나가하라조사사무소의 기누가와 가즈노리(絹川一德) 소장 대리의 안내로 나가하라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고고학자인 기누가와 가즈노리는 전시되어 있는 토기 유물들을 가리키며 

“ 이 유물들은 ‘나가하라식 토기’라고 이름붙였습니다만,   이 토기들 중에서 발굴 당시(1977∼1981)에 벼의 뉘가 짓눌린 자국 등이    여러 개의 그릇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곳 나가하라 지역에서 조몬시대(BC 3C 이전)가 끝나던 마지막 무렵과   야요이시대(BC 3∼AD 3C경) 토기에서 벼의 자국이 나타난 것은   벼농사가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발자취로 봅니다 ” 라고 했다.

 

오사카성 천수각(天守閣) 관장인 사학자 마쓰오 노부히로(松尾信裕)도

“ 조몬시대 후기에 북 규슈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벼를 생산하는 기술이 전해왔다.   그 시기는 지금부터 30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나가하라식 조몬 토기 등에서 벼자국이 나타났다.   개중에는 벼의 겨를 벗긴 현미가 붙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토기도 발견되었다 ” 고 했다.

 

즉 한반도로부터의 벼농사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부터 일본 각지로 퍼졌다는 것은 오늘날 저명한 고대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며, 오사카에서도 이미 그 당시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 나가하라 87호 고분 출토분인 흙말 하니와.

 

나가하라 유적에서 논갈이의 터전이 발굴된 것에 대해 오사카 문화재협회의 고고학자 이치카와 쓰쿠루(市川創) 학예원은

“ 한반도로부터 처음 규슈 북부에 전해온 벼농사 기술은 괭이며 써레, 돌식칼   (벼이삭을 잘라내기 위한 석기) 등 논농사용 도구이며 야요이식 토기와 더불어   급속하게(일본열도 서쪽으로부터, 필자주) 동쪽으로 퍼지게 됐다.

 이곳 오사카의 나가하라 유적에서도 야요이 시대 전기 말에 만들어졌다가   중기 초두에 묻혀버린 것으로 보이는 논터(홍수 때문에 논이 매몰된 터전, 필자주)가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 논의 모습은 똑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진 탓인지,   기내 지방(오사카, 나라, 교토 등지)에서 어느 정도 서로 공통된 요소를 보이고 있다 ”

(‘농경사회성립’ 2008)고 지적했다.

 

그런데 고대 한국으로부터 벼농사가 건너오기 전까지 일본열도의 선주민들은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쓰오 노부히로는

“ 조몬시대에는 먹을거리를 찾아 주변의 산이며 강, 또는 가까운 바다에까지 찾아가   음식이 되는 동식물이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지면 주저없이 딴 곳으로 이동했다.

 

 

◇ 나가하라 유적 일대의 밭과 주택.

 

  그러던 중 벼농사가 건너와 조몬인들은 신선한 음식을 맛보았고,   볍씨를 보관했다가 이듬해 봄에 심으면 그해 가을에는 다시금 열매가 되는 소중한 식료였다.   벼농사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한 곳에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고,   집단 주거지를 옮겨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 고 밝혔다.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건너오기 이전의 일본열도에는 그야말로 미개한 채집 생활을 하던 선주민들의 원시적 삶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옷감을 짜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옷 대신 짐승 가죽 따위로 몸을 가려 추위를 모면했다.

 

오사카 나시즈쿠리 유적에서 나무로 된 베틀 부품을 발굴함으로써  5세기 말에 고대 백제로부터 베틀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 (黑須亞希子 ‘나시즈쿠리 유적 발굴 보고서’ 2005).

 

물론 고대 백제로부터 그 이전인 5세기 초엽에 일본 왕실(백제계 오진왕 시대)로 백제 재봉사가 건너왔다는 역사 기사(‘일본서기’)도 있다. 여하간에 옷감을 직조하는 베틀 부품의 실물이 오사카 지방에서 2005년에 발굴돼 고대 백제 복식 문화가 미개한 일본땅에서 옷을 지어 입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의미가 크다.

 

모름지기 베틀은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한 한반도 사람들에 의해 그보다 더 일찍, 이를테면 야요이시대 이전에 벼농사와 함께 이주해온 사람들이 보급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볍씨 자루만을 덜렁 둘러메고 오는 것이 아니다. 큰 배에 농기구와 베틀 등 각종 생활 도구, 삽과 칼, 괭이를 만들기 위한 대장간 시설 등도 모두 함께 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확히 언제 백제 벼농사가 일본으로 전해졌을까.

 

현재 일본고고학회 회장인 규슈대학 고고학과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교수가 16년 전에 발표한일본 농경문화 연구론(‘朝鮮半島の道’ 1993)에 보면 고대 한반도 백제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해주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학계도 이 연구론을 평가하며 크게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론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상세히 규명하고 있다.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이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하나로 정립된 문화 체계로서 이식되어 왔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벼농사 문화를 전파한 데에 백제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벼농사 문화의 담당자를 일본으로 이주시킬 필연성이 한반도 내부 사회에 있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본다 ” 고 했다.

 

니시타니 교수는 벼농사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던 당시의 주거와 부락의 형태 등에 대한 논증을 다음처럼 상세하게 밝혔다.

“ 주거 형식은 한반도 서남부인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유적의 주거 자취를 표준으로 삼아    ‘송국리형 주거 자취’로 부르게 되는데,   지금까지의 ‘이마가와(今川) 유적’(후쿠오카현 무나가타군 쓰야사키정 소재) 등이   ‘송국리형 주거 자취’와 똑같다는 것은 그동안 잘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서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가스야정의 ‘에쓰지 유적’에서도   송국리형이 검출됐다.   ‘에쓰지 유적’은 처음으로 그 부락 구조가 숫자상으로 어느 정도 추측할 만큼의 주거 자취들이   발견된 것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 고 지적했다.

 

니시타니 교수는 2007년 4월 7일 필자 등과 함께 가진 강연 (‘국립영산강고고학박물관 건립방향과제 세미나’ 전남 영암군 시종복지회관)에서도  “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 문화를 전파한 것은    영산강 유역을 필두로 하는 한국의 벼농사 문화였다 ” 며 백제 영산강 유역이 최초로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밝혀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부여 송국리의 벼농사와 돼지 등 축산이 일본에 전파된 것을   벳푸대학의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 교수도 다음처럼 밝혔다.

“ 일본의 경우 야요이 시대까지 가축이 없는 ‘결축(缺畜) 농업’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돼지도 농업의 기원과 더불어 존재하게 되었다.   일본의 농경은 중국과 한국에 뒤지고 있었다.   송국리를 정점으로 해 널리 확산됐으며 일본에 돼지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 (‘日韓中を結ぶ稻の道’ 1989)라며 의미 있는 주장을 펼쳤다.

 

즉 백제의 벼농사와 함께 돼지도 백제로부터 일본열도에 처음으로 전파된 것을 추찰케 했다. 백제의 아직기 왕자(5C)가 암수 한 쌍의 말을 일본 왕실로 데리고 가 백제말이 종마로서 일본에 처음 퍼지게 되었다는 것은 일본 역사(‘일본서기’)에 기사가 있으며, 어쩌면 소와 닭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전파된 것은 아닌가 한다.

 

나가하라 유물전시관에는 흙으로 구워서 만든 말과 닭의 하니와   (埴輪, 왕릉 등 고분에 나열하던 일종의 수호신 격의 동물)의 출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의 ‘흙말’ 하니와는 ‘나가하라 87호 고분’ 출토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고대 한국 농업의 일본 전파 과정에서는 소도 건너갔으리라는 것을 추찰시킨다. 고대 일본에서는 소를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소는 농업용 노동 가축으로서 큰 역할을 맡아 보호되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앞으로 소와 닭과 돼지 등 가축의 일본 도래 과정도    한일 농업 교류사상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고대 일본어 농기구에 ‘가라스키’(韓鋤, からすき)란 것이 있다. 이는 고대 한국에서 전해왔다는 쟁기로서 “논밭을 경작할 때 소가 끄는 쟁기를 흔히 가리킨다” (‘廣辭林’ 1925)고 일찍이 고쿠가쿠인대학 국문과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 박사가 밝혔다. 이로 미루어 소가 끄는 쟁기와 더불어 소도 한국 도래임을 짐작케 한다.

 

이 밖에도 농기구의 옛 명칭에는 한국 것이라는 뜻에서 이를테면   도리께는 가라사오(韓竿, 한국장대)라 하는가 하면 

대장간도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데서 고대부터 가라가누치(韓鍛冶, 한국대장간)로 불러왔다.

 

땅을 파는 삽을 ‘사비’라고 불렀던 것도 주목된다. 쇼사부로 교수는 일본어 삽(さひ)을 가리켜 “조선어 ‘Sap’과 동계어”라며  ‘삽’(Sap)의 영어 발음까지 굳이 표시하면서 한국어임을 단정하기도 했다.

 

 

85. ·끝 백제 위덕왕시대 日 불교문화 

 

백제인 숨결 깃든 목탑·춤… ‘아스카 문화’ 꽃피우다

 

 

◇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었다는 아스카절 입구.

 

일본의 불교문화가 백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아직까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백제 불교는 서기 552년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의 왜왕실 포교가 최초였다. 이를 이어나간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이름은 昌·554∼598 재위)이며, 위덕왕은 재위 기간 45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실제로 일본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선두주자였다.

 

그 시대, 즉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문화’(飛鳥·592∼645) 시대에 일본의 왕은 왜나라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推古·592∼628 재위) 여왕이었다. 스이코 여왕은 백제 성왕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백제 위덕왕과는 이복남매간이었다.

 

 

◇ 584년 백제가 왜왕실로 보냈다고 전해지는 백제 사리 용기.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문화 시대를 입증하는 백제 불교의 자취가 최근 국내에서 발견됐다. 바로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의 사리공에서 발굴된 금제사리호다.

또 “백제 귀족 좌평(佐平) 사탁적덕(沙琢積德)의 딸인 왕후가 기해년(서기 639년) 창건했다”는 미륵사의 창건자 등 내력이 적힌 금제 사리봉안기 기록 등을 비롯해 유물 500여점을 한꺼번에 발견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의 일대 경사다.

 

특히 백제 불교 금속공예의 빛나는 세공 기법을 보여주는 금제사리호는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지(백마강 구드래 나루터 건너 산언덕 밑 터전) 목탑터에서 발견된 위덕왕 시대(서기 577년 제작) 금은동 3개의 빼어난 사리기 이후 두 번째로 발굴된 자랑스런 백제 사리기다.


지금까지 백제 예터전에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최초의 사리 터전은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위덕왕 시대(567년)의 석제(石製) 사리감 (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었다.

 

이 세 곳 모두 백제 불교문화가 왜의 아스카 불교문화 시대를 이룩했던 직접적인 배경을 입증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일본 역사에서도 백제에서 왕흥사를 짓고 왜땅 아스카로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588년부터 596년까지 8년간에 걸쳐 일본 최초의 칠당가람 아스카절(飛鳥寺)을 세웠다 (‘일본서기’)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 불교 왕조사라 할 수 있는 ‘부상략기’(扶桑略記·13세기경)에서는 593년 1월,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 아스카절 목탑 터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법요를 가졌으며,   만조백관이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있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 고 쓰고 있다.

 

 

◇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황금사리병 등 유물 일괄.

 

그런데 일본 역사 기사로는 왜왕실 조정의 백제인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 대신이 584년 9월

“ 백제에서 보내준 미륵석상(彌勒石像)을 이시카와(石川)의 자택에 모시고 불전을 세웠으며,   이듬해 2월에는 오노노오카(大野丘) 언덕에 목탑을 세우고   그 기둥 밑에다 부처님사리 용기를 봉안했다 ” (‘일본서기’)고 한다.

 

이는 백제 미륵불교가 왜나라 초기 불교의 바탕이 되었음을 추찰케 한다. 또 오노노오카의 목탑에서 발굴되었다는 백제의 사리 용기 기사가 일본 역사 최초의 사리봉안 기록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후반 왕흥사 목탑 건립이며, 아스카 시대 등 백제식 목탑과 사리기 봉안 등에서 보듯이 백제는 원래 석탑이 아닌 목탑을 세우다가 후대에 가서 돌로 축조하는 석탑을 세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간에 목탑 건조에서 석탑 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639년의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뛰어난 석조 건축 양식이며, 예술적 미감 넘치는 훌륭한 석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최근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 금제사리호.

 

577년 왕흥사의 사리 용기며   서기 639년 무왕(武王·600∼641 재위) 당시의 미륵사 창건 석탑 봉안 사리호의 발자취와 더불어, 일본 아스카에서의 584년과 593년의 사리기 봉안 등은 모두 한결같이 백제와 일맥상통하는 아스카 스이코 여왕 당시의 백제 불교문화의 눈부신 발자취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4월 초 부여 왕흥사 목탑 사리공 등 이 터전 발굴 현장을 답사했던 일본 와세다대학의 불교미술사학자 오하시 가즈아키(大橋一章·와세다대학 박물관장) 교수는 지난해 5월 22일 필자에게 직접

“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금은동제 사리기 3종은 훌륭한 불교문화의 발자취이다.   또 각종 출토물과 기와(연꽃무늬 수막새)의 문양과 탑 구조 등은   일본 나라 땅 아스카 절의 유물과 거의 일치한다.   일본에 건너와서 596년에 아스카 절을 건축한 백제 건축가들은   이미 그 이전에 백제 땅에서 왕흥사를 건축했던 똑같은 기술자들이었다.   나라(奈良) 땅의 아스카 절은 왕흥사를 모델로 건설한 일본의 유일한 1탑 3금당 형식 사찰이다 ” 고 말했다. 오하시 교수는 이런 내용을 일본 아사히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에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596년 완공한 아스카절 건설은 일본 불교사를 장식하는 왜왕실 최초의 경사였고,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백제 문화가 일본 나라 땅에 꽃피기 시작하는 눈부신 발판이 되었다. 이 당시 건너간 백제 건축가와 기와박사, 화공 등 관계자들의 이름을 ‘일본서기’ 역사책에서 잠깐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당시 백제인들은

복부미신(福富味身)을 비롯해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마나문노(痲奈文奴),

석마대미(昔痲帶彌) 등 대부분 두 개의 한자 글자로 된 이른바 복성(複姓)을 썼다.

 

당시 일본 선주민들은 성씨라는 것은 전혀 없는 미개 상태였다. 즉 성명은 왕과 귀족에게만 허락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근세(近世)까지도 이어져 왔다.

 

17세기 에도시대까지도

“ 일반 서민은 성명을 지을 수 없으며, 허리에 칼도 찰 수 없는 엄중한 ‘명자대도의 금령’   (名字帶刀の禁令)이 내려져 있었다 ” (‘日本人の姓’ 1972)고 성씨 학자로 고명한 사쿠마 에이(佐久間英) 박사는 밝혔다.

 

일본에서 서민도 제 성을 법적으로 허용받게 된 것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1874년부터였다. 이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고대 백제 등의 복성인 한자 두 글자의 성을 짓느라 법석을 부렸다 (앞 ‘日本人の姓’).

 

아스카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603년 10월

“ 스이코 여왕의 왜왕실로 백제 스님 관륵(觀勒)이 달력과 천문지리 등 서적을 가지고 건너가서   가르쳐 주었다 ” (‘일본서기’)고 한다. 이에 따라 왕실과 귀족들은 비로소 달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은인’ 백제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일본 도쿄천문대학의 천문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 교수는 그가 발견한 우주의 소행성에 관륵 승정의 이름을 따 ‘간로쿠’(觀勒)라고 명명해 국제천문연맹(IAU)에 등록했다(홍윤기 ‘일본문화사’ 서문당, 1999).

 

아스카 시대 일본의 사자춤, 가면무 등 음악 무용은 역시 백제인에 의해 창시됐다.

“ 613년 백제의 음악무용가 미마지(味摩之·6∼7세기)가 스이코 여왕 왕실로 건너와   왕실에서 천거한 제자 둘(眞野首弟子와 新漢濟文)을 가르쳤다 ” (‘일본서기’). 물론 이들은 백제인 후손들이었다.  이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친 터전이 현재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 경내에 남아 있는 ‘무대강’(舞臺講)이라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큰 돌춤터다.

이 모든 것은 백제 위덕왕 시대 백제문화의 포괄적인 전수였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백제문화와 아스카에 연관된 사항은 많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 줄이며 일단 졸문의 대미로서 마무리하련다.

[출처] :  홍윤기 외대 교수 /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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