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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30, 2014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Part 1: 그리스-알타이-신라를 이어 준 汗血馬의 질주

그리스-알타이-신라를 이어 준 汗血馬의 질주

新羅의 신화·알타이의 눈보라·무덤 속의 女戰士·曲玉·금관·積石목곽분·싸랑·솟대·샤먼… 그 속에 감춰진 우리의 原形과 만나다.
비로소 피부로 접한 알타이 文化0309_562-1.jpg알타이는 산 이름이다. 동시에 산맥 이름이며, 그 주변 지역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내륙지방의 고원지대에 알타이산이 솟아 있고 알타이 산맥이 東西로 흐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키인, 야쿠트인, 몽골인 등이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들이다. 이들의 각종 언어는 모두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한국어와 일본어와도 깊은 親緣(친연) 관계에 있다.
  나의 알타이에 대한 관심은 박시인 교수가 소개한 알타이 신화 때문이었다. 朴교수는 알타이 지역을 답사해 보지 못한 채 2차 자료만 가지고 알타이 문화를 소개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다. 이를테면 영특한 새로서 까마귀의 기능이라든지, 씨족의 조상이나 최초의 왕이 등장하는 장소가 「신령스러운 나무(神樹)」 밑이라는 것 같은 내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三足烏(삼족오)나, 鷄林(계림:경주)에서 발견되는 김알지 설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읽어 가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어는 알타이 계통의 언어다. 왜 가까운 중국어와 비슷하지 않고 저 멀리 알타이와 가깝단 말인가?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해답이 없던 시절은 의외로 오래 계속되었다. 1990년 이후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하고 나 같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광활한 시베리아와 스텝지대를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글자로만 접하던 알타이 문화를 피부로, 肉聲(육성)으로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키타이 女戰士의 모자
 
0309_562_1.jpg알타이 남서쪽에 살고 있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나무 - 새- 엑스터시 잉태- 위대한 샤먼의 탄생이라는 圖式이다. 그래서 알타이 문화권에서 태어난 유능한 지도자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한국사에서도 탄생과정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는 사람이 씨족의 始祖(시조)나 왕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신라의 朴赫居世(박혁거세)와 김알지의 부모가 불분명하고, 昔脫解(석탈해)와 金首露(김수로)도 누구의 후손인지 모른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0309_562_2.jpg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신라인의 이중 구조: 북방+남방族
  0309_562_3.jpg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南아시아적 생활+北아시아적 정신
 
0309_562_4.jpg얼마 전까지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한국지부에서 세계총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한 뒤였다. ICOM 총회는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며 한 번은 박물관 문화가 일찍 발달한 유럽에서 다음 한 번은 非유럽 국가에서 개최해 왔다.
 
ICOM의 회원국은 145개국이고 등록회원수가 평균 1만7000명이다. 총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평균 2000~2500명으로 주최도시가 얼마나 문화적 흡인력이 있느냐가 최대의 관건이고, 주최 측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홍보하느냐에 따라 참가인원이 크게 달라진다. 2004년의 서울 대회는 ICOM 100여 년의 역사상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인 만큼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 전문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해 오고 있어서 어느 대회보다 큰 규모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세계대회를 하려면 본부 집행위원회가 인정하는 로고를 디자인하여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준비위원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고민을 하였다. 아시아에서 처음 하는 행사이니까 로고의 내용을 아시아인 공통의 상징으로 할까, 아니면 서울市에서 개최하니까 서울의 상징인 북한산, 청와대, 남대문에서 로고를 딸까. 또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무형문화재이니까 탈춤이나 사물놀이를 내용으로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사람마다 주장이 그럴듯하고 어느 아이디어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상징들은 이미 다른 행사에서도 한두 번 이상 사용되었음직한 것들이라는 공통성이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솟대를 로고로 채택한 까닭
 
중국 고전 山海經(산해경)에 기록된 少昊國(소호국)에서는 모든 공경대부가 새(鳥)일 만큼 새들은 東아시아의 신화 속에서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신라 金氏 왕들의 조상인 김알지가 계림에서 발견되었을 때 온갖 새들이 노래하였다고 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태양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있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일본 古墳時代(고분시대)의 벽화에는 死者(사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의 항해사로 새들이 앉아 있다. 나라(奈良)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는 십여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다. 일본 神祠(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鳥居: 門)도 새들이 앉는 곳이다.
 
이 모두가 알타이 문화권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현대 민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솟대의 원형들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神鳥사상은 뿌리가 깊은 것이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흐르고 있는 문화의 맥이다.
 
한국적인 것이 틀림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도도히 흐르는 문화의 저류를 민속행사에 등장하는 솟대를 통하여 실감한다. 이처럼 새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중요한 토템이자 東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통적 토템이기에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 박물관 총회에 로고로 사용해도 격조에 맞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로고는 단오제의 솟대를 기초로 하여 도안되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흰색 오리 두 마리가 앞뒤로 앉아 있는 모습이 탄생하였다. 최선호 화백의 작품이다.
 
알타이산 북쪽은 고원지대로서 예니세이江의 발원지이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양(羊)을 기르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땅인데 철기문명이 확산되면서 여러 민족이 드나들게 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주민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백인들과 황인종이 섞여 있지만, 옛날에는 아시아계 몽골족 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
 
 
알타이 기사의 부적-曲玉의 의미
 
0309_562_5.jpg그 증거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덴코라는 학자가 이 지역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분들을 발굴하여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보고서는 1953년 러시아어로 출판되었고 1970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필자가 이 고분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적석목곽묘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보다 시간적으로는 약 900년 가량 빠른 것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구조가 같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통나무집에 사람과 유물이 들어 있고 그 위에 막돌을 두껍게 덮어 놓은 형식이다.
 
어느 민족이든 고분 구조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분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인공들이 생전에 유사한 사유세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어쩌면 종족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인과 파지리크人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파지리크 5호 고분에서 나온 물건 중 통나무집 벽에 걸어 놓았던 모직 담요 펠트(Felt)가 있다. 수놓아 그린 그림에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 사람은 의자에 앉았는데, 동양인 얼굴에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고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발굴자는 이 사람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는 가죽 같은 재질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왼손에 구불구불한 가지가 많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직업은 샤먼(巫師)이라고 해석되었다.
 
오른쪽 사람은 말 위에 앉은 남자 기사인데 튜닉형의 半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감아 올린 아랍인 型이다. 목 뒤로 날리는 스카프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말은 다리가 긴 아라비아 계통의 말로서 옛날 漢(한) 武帝(무제)가 흉노를 격퇴하기 위해 간절하게 원했던 汗血馬(한혈마)이다.
 
0309_562_6.jpg두 사람 중에 샤먼은 크게 그렸고 기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례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림 기법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크게,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동양계 여인이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주인공임을 알 수 있고, 아랍인 기사는 아마도 멀리서 온 방문객이거나 용병쯤으로 해석된다.
 
내가 이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신라와 그리스는 馬로 연결
 
0309_562_7.jpg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니 신라 유물 중에 동물 뿔 모양의 술잔인 角盃(각배)도 그리스, 스키타이, 알타이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경주에서 발견된 기와에 그려진 날개 달린 天馬(천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Pegasus)라고 해석해야 될 판이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그리스인은 비록 時空을 달리하였지만 스키타이-알타이를 통한 말의 문화로 단단히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대체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고금의 동서양을 떠도는 이상한 구름에서 문득문득 내리는 비와 무지개를 찾는 작업인 듯하여서이다.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의 주인공인 기사여, 그대는 왜 푸른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오셨는가? 파지리크에 왔더니 그곳 샤먼이 선물로 알타이 원산의 옥으로 깎은 曲玉을 부적 삼아 선물로 준 것인가?
 
 
이시크의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女戰士
 
0309_562_8.jpg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실로 많은 연구과제를 던지고 있는 인물이다.
 
알타이 지방의 여러 곳을 탐사하던 중 알아낸 귀중한 한마디 말이 바로 「사랑」이란 단어의 뜻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모든 유행가 노랫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의외에도 알타이 언어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다. 알타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로 세계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다. 몽골 루트, 시베리아 루트, 중국 루트가 있는데 필자는 몽골·시베리아 루트는 과거에 탐사하였고 마지막으로 중국 루트를 탐사하게 되었다.
 
1996년 여름, 모험심에 가득 찬 소년들처럼 동문 임상현, 김두영, 김명용 제씨가 필자와 함께 항공편으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오아시스인 신강 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전세 낸 9인승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북쪽으로 800km나 펼쳐진 중가리아 사막을 17시간이나 걸려 건너갔다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그곳에서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유목민 카자흐족 마을에서 인류학 조사를 하던 중 듣게 된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이다.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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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벼랑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님에게 여인이 間食(간식)인 양젖을 가져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여인이 쓰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만 바람에 날려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목민에게 실크는 비싼 보석을 주고 중국에서 수입한 귀중품이다. 실크로드라는 경제용어가 있으니 알 만한 일이다.
 
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길의 벼랑을 기어 내려가 스카프를 주워다 여인에게 주었다. 그 순간 여인이 기이한 소리로 절규하는 게 아닌가.
 
『싸랑! 싸랑!』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 준 스카프를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싸랑-무정한 바보

0309_563_1.jpg싸랑. 그 의미는 「무정한 바보」라고 한다. 손님은 자기에게 싸랑이라고 소리친 카자흐 여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우리 탐사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현지 안내인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한 뼘 높이의 베개도 못 넘는 남자가 어떻게 수십 길 아래의 벼랑 밑까지 내려갔다가 기어서 올라올 수 있느냐는 의미의 바보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기마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40代의 카자흐 族長(족장) 아들과 한국인 탐사대원들은 양젖과 馬腸(마창: 말 순대)을 안주 삼아 경쟁적으로 독주를 마시고 대취하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알타이족들끼리의 혈연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듯이 경쟁적으로 산타이주(三臺酒)를 여러 병 비웠다. 수 만 리 먼 곳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 꼭 하룻밤만 지내고 가라는 카자흐인의 간곡한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던 게 못내 아쉬웠다. 떠나오는 우리 등에다 대고 카자흐인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싸랑! 싸랑!
金秉模/한국 전통문화학교 총장
월간조선 2003년 09월
 
金 秉 模1940년 서울 출생.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이탈리아 국제문화재연구소 및 영국 런던고고학연구소 수학. 영국 옥스퍼드大 철학 박사. 한양大 문화인류학과 교수. 안면도 고남리 패총, 二聖山城 발굴작업 주관. 1993~1995년 한국 고고학회 회장. 現 한국 전통문화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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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주장 - 로마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66)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 문화 왕국 - 新羅」(新潮社)란 책은 317쪽 분량의 원색 사진이 많은데 띠에 써놓은 선전문이 이러하다.

「古代史가 바뀐다! 東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新羅다! 출토유물과 新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實在자료에 의하여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

imagesCAJKDM0S.jpg이 책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1973년과 이듬해 경주에서 발굴한 天馬塚(천마총·발굴 당시는 155호 고분)과 皇南大塚(황남대총·발굴 당시는 98호 雙墳) 출토 유물이었다. 著者 요시미즈씨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고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고구려, 백제는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유독 신라만은 6세기중반까지 중국의 선진문물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신라는 草原의 길을 통하여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 못지 않은 先進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굳이 중국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고 있던 新羅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先進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라는 6세기까지는 동양문명의 중심지인 중국과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백제, 고구려가 거의 매년 중국의 여러 나라와 사신을 보내어 교류한 것과는 선명한 대조이다. [로마문화왕국 신라의 저자 요시미즈씨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캐고들어간다. 신라는 동양에서 역사적 상식을 뒤엎은 나라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가 무슨 배짱으로써 아시아 문명의 거대한 光源인 중국을 무시하고 수백년을 버티었는가이다.

요시미즈씨는 한국과 중국측의 史料를 검토하여 辰韓(신라의 모태. 지금의 경상도 지방 부족국가)시대에 중국의 西晉에 조공한 서기 286년 이후 91년간 공백, 前秦에 조공한 382년 후 126년간 공백, 北魏에 사신을 파견한 521년 이후 43년간 국교 공백의 상태였음을 적시하면서 이것은 미스터리라고 규정했다. 그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신라가 북방 草原 루트를 통해서 로마세계와 교류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것을 확인했으며 신라 지배층의 행태에서 흉노적인 것, 유목기마민족적인 것을 많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이웃 백제, 고구려가 중국의 정치, 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도 이에 동조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자국의 정치제도나 경제시스템, 또는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자신을 갖고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내용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분의 출토유물을 분석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우리 고고학자들이 스키타이-흉노 草原 문화의 결정체라고 보는 신라금관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계통의 왕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수많은 금팔찌, 금귀걸이, 보금, 유리공예품 등을 분석하여 로마에서 온 것이든지, 로마적인 것이 중앙아시아-초원 루트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로마문화 원류의 유물이란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는 4-6세기 신라는 북방 초원루트를 통해서 서방 로마세계와 교류했고 이는 신라 지도부가 이 문화 루트를 잘 아는 흉노족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서방으로 통하는 창을 열어놓고 있었던 신라는 6세기 중반부터 중국으로 방향을 튼다.

신라의 이런 입장변화는, 5세기에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西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방이 사라진 때라고 이 책은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 신라는 중국에 朝貢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著者는 이 책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다.

「그 후 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唐과의 교류를 밀접히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도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소국 신라가 지녔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 문화의 수용 시대에 쌓아 올렸던, 중국 문화와는 다른 에너지의 잠재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도 통일의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였다고 한다.
흥분한 요시미즈씨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이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다. 요시미즈씨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신라 왕과 異國의 왕·왕비 사이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 玉구슬 속에는 뭔가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국제적 전개와 고대 신라 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문화 상황이 넘쳐날 정도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신라의 王墓에서는 로만 글라스(로마 유리제품)를 비롯, 황금의 칼, 금가락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 裝身具나,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형 왕관, 자작나무로 만든 冠帽 및 말 배가리개(障泥·장니)가 나왔고, 무엇보다도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積石木槨墳이 확인되는 등 중국 문화권에는 없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어 著者 요시미즈씨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시미즈씨는 신라 고분에서 로마 문화 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물건만 교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따라서 사람이 오고갔으며 로마의 정신문화도 묻어왔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그 예로 든 것이 1973년에 경주 鷄林路 공사장에서 발굴된 황금 寶劍이다. 길이 약 30㎝ 되는 이 보검은 황금판에다가 여러 개의 보석을 박은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名品이다. 요시미즈씨는 이 보검의 계보를 추적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 생산하여 신라 王家에 선물한 칼이라고 단정했다. 트라키아 왕이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에 맡겨 북방 초원을 통과시켜 신라에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라키아 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까지 가서 下賜받았든지 둘 중 하나란 것이다.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왕이 금세공 기술자를 신라로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로마 문화 왕국-신라」의 著者 요시미즈씨는 신라 통일의 원동력이 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던졌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여 본 경험 때문에 중국문화를 받아들일 때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으며 여기서 나온 정신적 에너지가 對唐 결전을 통한 삼국통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한 일본인을 흥분하게 만든 4-6세기 신라문화의 서방적 요소, 여기에 한민족의 源流가 갖는 국제성과 주체성의 뿌리가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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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왜의 중국어 발음이 바이유에(월족)의 유에(yue)이다?

taolee789 13.03.02. 18:20
I think so…

bc 2000 인도 강가(갠지즈)유역 드라비다인의 지배(dalit)
… o2a 유전자 = o2 + 드라비다인 부계 유전자
… o2* 유전자 … 1차 동남아시아 이주(mon-khumer?)

bc 1000 인도 강가유역 아리안의 지배(aryan)
… o2* 유전자의 동아시아(현재의 중국남부해안) 이주
… o2a 유전자 … 2차 동아시아 이주(thai-kadai?)

1. 드라비다계 텔루구(telugu) 언어에서 문디 (mundi) 는 bald-head(빡빡머리) 를 의미.(telugu dictionary 에서)
… 여진족의 변발 == 일본 야요이남성(무사)문화의 빡빡머리 == 반도에서의 mundi 의 호칭.... 공통점은 O2b & O2b1.
… 빡빡머리집단 == mundi 집단이거나 피지배집단.
 
 
taolee789 13.03.02. 17:47
2. 왜(倭) 의 중국식 발음 == /yue/ == 월(越, 넘다) 의 중국식 발음. == "야요이" 발음은 변형.
... 왜구의 의미: 월나라 출신의 도둑.

3. 반도남부 및 큐슈지역의 선주민이동과 난민유입.
3.0. 선주민집단은 C,D,N,O3 등등.
3.1. 오월전쟁후 난민..오나라 (O3 집단, 우임금의 후손), BC 400 년경
3.2. 초월전쟁후 난민..월나라 (O2* 집단), BC 200 년경
 
 
taolee789 13.03.02. 17:26
3.3. 가야(김해김씨, O2b) + 허황옥(mtdna-M-group) = O2b1 탄생, AD 30년경
… 허황옥 세력은 indo-aryan 집단에게 쿠데타 일으켜 실패한후 중국남부를 통해 반도로 이주한 집단.
… 반도남부(경남,전남)에 김해김씨와 dark-skin 여성의 분포가 집중된 이유가 설명됨.
… 가야의 주변지역(경남,전남,큐슈등) 정복활동.
… 지속적인 반도전역, 일본 중/서부지방으로의 확장정책.
… 2,000 년동안의 반도남부 수탈역사 시작.

3.4. 임진왜란,병자호란때 반도지배가 아닌 학살형태의 침략행태.
3.5. 조선강제합병시의 조선내부에서의 신분-지위고하를 떠나서 내부협조자 다수존재
(소위 친일집단, 강원도출신 자발적인 관동군부대)

i think
 
꼬꼬닥 13.03.02. 18:17
환영합니다. taolee789님^^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쓰신 댓글중에 O2b1의 탄생이 AD 30년경이라고 하셨는데, 현재 O2b1의 분화시기는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taolee789 13.03.02. 19:48
꼬꼬닥님 반갑습니다.
O2b1의 분화시기를 BC 2,000 년이라고 하셨는데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봤습니다.

O2* + 허황옥세력(mtdna-M group's 부계유전자) == o2b

허황옥의 부계유전자가 O2*에게 유전되었다면 bc 2,000 년이라는 값이 나올수 있지 않을까요.

고유의 O2*의 분화시기가 아니라,
허황옥의 부계의 분화시기가 측정값으로 나올수도 있지 않을지... 음.. 너무많이 생각했나..
 
taolee789 13.03.02. 20:01
혈액형 분포에서도 증명이 되는듯...

반도중부의 수치상 높은 분포의 혈액형B
반도남부의 높은 분포의 혈액형A

비교집단으로 (초재님이 쓰신 글중에)

인도 동북지역(브라마푸트라)에서 O3 집단(네팔-타망족, 인도-가로족등)은 혈액형B
인도 동부지역(오리사,벵갈등)에서 O2a 집단(인도-문다족)은 혈액형A 이고,

일본의 경우도 O2a가 집중분포하는 지역은 혈액형A, O3집단은 혈액형B 일듯 싶네요.
 
꼬꼬닥 13.03.02. 20:35
부계 하플로의 분화시기는 역사적 기록이나 논리적인 추정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계 하플로를 가진 데이터 값을 측정하여 얼마나 유전적 변형이 생겼는지를 시기적으로 추정하여 측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차범위가 있긴 하지만 o2b1a의 경우는 오차범위를 고려해도 5000년에서 4000년전에 분화되었다는 것이 분자인류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taolee789 13.03.02. 21:08
o2b의 사돈은 누굴까요.

동거집단 드라비다계.............................o2a 유전자
동거집단 아리안계...............................o2a 유전자
동거집단 O3집단(남만,북적,동이,서융,화하,한족)..o2a 유전자
동거집단 백월계.................................o2a 유전자
동거집단 몽골계.................................비슷한 비교집단인 인도네시아 순다열도에는 o2b가 없음.
동거집단 코랴크계...............................동북지역에 거의없음, 일본에는 있음.(kobe's amagasaki's koryak)
 
taolee789 13.03.02. 21:08
동거집단 핀우그르계.............................o2b의 잠재성있음
동거집단 아이누계(혹은 티벳계)..................o2b의 잠재성있음
기타 동거집단 ??

또다른 단서들..
인도동부의 mtdna-M-group 의 부계유전자
동남아/중국남부 mtdna-B/F-group 의 부계유전자
중국북부/동북부 mtdna-C/D-group 의 부계유전자
 
garimtto 13.03.03. 02:50
읭 일본에 O2a가 많을런지요. 생각만큼 많지는 않을 거라 보는데, 굳이 혈액형하고 연관짓고 싶으시다면, 부계 하플로 D가 많은 집단에서 A형이 나올 확률은 높겠죠. 티벳이나 안다만제도도 A형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하니깐요-_-;; 그런데 따오리789님은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고픈지 모르겠군요.
 
기생충 13.03.03. 11:07
taolee789님,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O2a는 O2b와는 한 항렬(?)의 형제이긴 하지만, 분화시기나 분화장소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에는 굉장히 드문 분포를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혈액형 등의 연관 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o2b가 드라비디아계?

taolee789 13.03.02. 18:20
I think so…

bc 2000 인도 강가(갠지즈)유역 드라비다인의 지배(dalit)
… o2a 유전자 = o2 + 드라비다인 부계 유전자
… o2* 유전자 … 1차 동남아시아 이주(mon-khumer?)

bc 1000 인도 강가유역 아리안의 지배(aryan)
… o2* 유전자의 동아시아(현재의 중국남부해안) 이주
… o2a 유전자 … 2차 동아시아 이주(thai-kadai?)

1. 드라비다계 텔루구(telugu) 언어에서 문디 (mundi) 는 bald-head(빡빡머리) 를 의미.(telugu dictionary 에서)
… 여진족의 변발 == 일본 야요이남성(무사)문화의 빡빡머리 == 반도에서의 mundi 의 호칭.... 공통점은 O2b & O2b1.
… 빡빡머리집단 == mundi 집단이거나 피지배집단.
 
 
taolee789 13.03.02. 17:47
2. 왜(倭) 의 중국식 발음 == /yue/ == 월(越, 넘다) 의 중국식 발음. == "야요이" 발음은 변형.
... 왜구의 의미: 월나라 출신의 도둑.

3. 반도남부 및 큐슈지역의 선주민이동과 난민유입.
3.0. 선주민집단은 C,D,N,O3 등등.
3.1. 오월전쟁후 난민..오나라 (O3 집단, 우임금의 후손), BC 400 년경
3.2. 초월전쟁후 난민..월나라 (O2* 집단), BC 200 년경
 
 
taolee789 13.03.02. 17:26
3.3. 가야(김해김씨, O2b) + 허황옥(mtdna-M-group) = O2b1 탄생, AD 30년경
… 허황옥 세력은 indo-aryan 집단에게 쿠데타 일으켜 실패한후 중국남부를 통해 반도로 이주한 집단.
… 반도남부(경남,전남)에 김해김씨와 dark-skin 여성의 분포가 집중된 이유가 설명됨.
… 가야의 주변지역(경남,전남,큐슈등) 정복활동.
… 지속적인 반도전역, 일본 중/서부지방으로의 확장정책.
… 2,000 년동안의 반도남부 수탈역사 시작.

3.4. 임진왜란,병자호란때 반도지배가 아닌 학살형태의 침략행태.
3.5. 조선강제합병시의 조선내부에서의 신분-지위고하를 떠나서 내부협조자 다수존재
(소위 친일집단, 강원도출신 자발적인 관동군부대)

i think
 
꼬꼬닥 13.03.02. 18:17
환영합니다. taolee789님^^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쓰신 댓글중에 O2b1의 탄생이 AD 30년경이라고 하셨는데, 현재 O2b1의 분화시기는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taolee789 13.03.02. 19:48
꼬꼬닥님 반갑습니다.
O2b1의 분화시기를 BC 2,000 년이라고 하셨는데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봤습니다.

O2* + 허황옥세력(mtdna-M group's 부계유전자) == o2b

허황옥의 부계유전자가 O2*에게 유전되었다면 bc 2,000 년이라는 값이 나올수 있지 않을까요.

고유의 O2*의 분화시기가 아니라,
허황옥의 부계의 분화시기가 측정값으로 나올수도 있지 않을지... 음.. 너무많이 생각했나..
 
taolee789 13.03.02. 20:01
혈액형 분포에서도 증명이 되는듯...

반도중부의 수치상 높은 분포의 혈액형B
반도남부의 높은 분포의 혈액형A

비교집단으로 (초재님이 쓰신 글중에)

인도 동북지역(브라마푸트라)에서 O3 집단(네팔-타망족, 인도-가로족등)은 혈액형B
인도 동부지역(오리사,벵갈등)에서 O2a 집단(인도-문다족)은 혈액형A 이고,

일본의 경우도 O2a가 집중분포하는 지역은 혈액형A, O3집단은 혈액형B 일듯 싶네요.
 
꼬꼬닥 13.03.02. 20:35
부계 하플로의 분화시기는 역사적 기록이나 논리적인 추정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계 하플로를 가진 데이터 값을 측정하여 얼마나 유전적 변형이 생겼는지를 시기적으로 추정하여 측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차범위가 있긴 하지만 o2b1a의 경우는 오차범위를 고려해도 5000년에서 4000년전에 분화되었다는 것이 분자인류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taolee789 13.03.02. 21:08
o2b의 사돈은 누굴까요.

동거집단 드라비다계.............................o2a 유전자
동거집단 아리안계...............................o2a 유전자
동거집단 O3집단(남만,북적,동이,서융,화하,한족)..o2a 유전자
동거집단 백월계.................................o2a 유전자
동거집단 몽골계.................................비슷한 비교집단인 인도네시아 순다열도에는 o2b가 없음.
동거집단 코랴크계...............................동북지역에 거의없음, 일본에는 있음.(kobe's amagasaki's koryak)
 
taolee789 13.03.02. 21:08
동거집단 핀우그르계.............................o2b의 잠재성있음
동거집단 아이누계(혹은 티벳계)..................o2b의 잠재성있음
기타 동거집단 ??

또다른 단서들..
인도동부의 mtdna-M-group 의 부계유전자
동남아/중국남부 mtdna-B/F-group 의 부계유전자
중국북부/동북부 mtdna-C/D-group 의 부계유전자
 
garimtto 13.03.03. 02:50
읭 일본에 O2a가 많을런지요. 생각만큼 많지는 않을 거라 보는데, 굳이 혈액형하고 연관짓고 싶으시다면, 부계 하플로 D가 많은 집단에서 A형이 나올 확률은 높겠죠. 티벳이나 안다만제도도 A형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하니깐요-_-;; 그런데 따오리789님은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고픈지 모르겠군요.
 
기생충 13.03.03. 11:07
taolee789님,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O2a는 O2b와는 한 항렬(?)의 형제이긴 하지만, 분화시기나 분화장소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에는 굉장히 드문 분포를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혈액형 등의 연관 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원형점토대토기의 연대는 그 상한이 송국리 유형보다 이를수는 없다.

한일

설명없음
제작 kim hyejung 날짜 2010년 12월 5일

 

한일의 스크립트

한일교섭과 고고학 06 김기문
08 김혜정
08 안경진 세형동검의 등장 이후 원삼국 시대까지의 호서와 호남서부의
시공간적 공백이 300년 동안 공백지대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음

→ 즉 현재 편년상의 문제로 인해 시간적 공백이 생겼다는 것.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요약> 편년을 조정해보자 원형점토대토기는 세형동검과 공반됨.

→ but 원형점토대토기 단일 생활유적이 발견되지 않음.
즉 송국리유형은 세형동검의 등장과 함께 기원전 300년경
일거소멸된 것이 아님. 1. 송국리유형의 하한
2. 타날문토기의 상한 원형점토대유적의 연대와 송국리유형연대는 상당 중복.

원형점토대토기의 연대는 그 상한이 송국리 유형보다
이를수는 없지만 공존기간은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을 것. 송국리유형의 편년을 기원전 2세기중엽경으로 하향조정해야한다! 타날문 토기는
삼국시대의 특징을 뚜렷한 지역색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삼국 시대의 현 편년안에서는 물질문화상의 지역적 편차에 대한 고려가 부족함. 이것으로 인해 시간적 공백이 발생한 것으로 봄.
세형동검단계부터 세죽리-연화보와의
서해를 통한 교류가 있었음 ◎ 기존의 학설 - 타날문토기 등장 이전에 경질무문토기 단순기 존재

◎ 경질무문토기 단순기는 호서지방과 서부호남지역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음(김장석) 이때 이후로 청동기가 이 지역에서 급감.
→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있음.

→ 철기의 본격적 전래시점을 분구묘의 등장과 같이 보
고 분구묘에서의 타날문토기 출현을 감안
(분구묘의 상한 기원전 2세기) 타날문토기의 상한을 기원전 2세기 후반대로 상향조정해야한다! 1. 두 논문의 요약

2. 비교
-공통점과 차이점

3. 고찰 2. 비교 - 공통점 ☞ 두 논문 모두 호서와 서부 호남지역의 초기
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한 주제임.

☞송국리유형의 하한을 하향조정 함으로써
초기철기시대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를 함 2. 비교 - 차이점 송국리유형의 하한 세형동검의 등장
원형점토대토기와의 공존

기원전2세기 중엽으로 하한 기원전 1세기대가
중심연대인 유적에서도
송국리형토기 발견

기원전 1세기까지 하한 가능
↔ 타날문토기의 상한 낙랑설치 이전에 철기기술이 도입되어
철기의 본격적 보급시기가 빨라지며 이와 분구묘 등장시기를 같게 봄.

기원전 2세기후반까지 상한
세형동검의 현저한 감소가 철기나 타날문토기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으며 기원전 1세기까지 올라가는 타날문토기는 없음.

기원전까지 올라가지 않음 ↔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한 반론’> 요약 1. 송국리유형의 하한
2. 철기,타날문토기의 출현과 실용화 * 기원전 1세기가 중심연대인 광주 신창동⦁운남동유적에서
송국리형토기와 삼각구연점토대토기 공반되어 출토.

* 무안 인평유적에서도 무문토기와 삼각구연점토대토기의 사용확인 송국리유형은 기원전 1세기까지 하향가능하다! 기원전 1세기까지도 송국리형토기가 잔존하였음을 알수있음 * 세형동검의 현저한 감소를 철기, 타날문토기의 등장과
일치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

* 초기의 전국계 철기는 수입품이지 자체생산은 아니었음.
→ 철기의 실용화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타날문토기의 생산을 거론할 수 없음.

* 호서, 호남지역 어디에도 기원전 1세기에는 타날문토기가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가는 타날문토기는 없음 타날문토기의 기원은 낙랑토기.

→호서지역과 낙랑군과의 교섭관계유물이 증가하는
시기는 기원후 2세기대. 호서⦁호남지역의 타날문토기는 기원후 1세기대에 나타남 타날문토기의 상한은 기원후 1세기대이다! 김장석의 주장 3. 고찰 감사합니다!!!!! ^*^ ① 김장석논문

기존의 편년안을 문제로 삼은 후 편년의 재조정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전개방식을 취함 ②

기존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보고한 후에, 김장석논문 중요부분을 인용하여 비판적 검토를 하면서 전개함 전개구조상의 차이점 장점
김장석 논문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의
분포상의 차이점을 지도사용으로
이해를 도움 김장석논문

- '가설적인 것'이라고 계속 언급해
편년안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짐.

- 현재자료에 충실하지 않고 예견하는 측면에서 논의를 전개에 신뢰성이 떨어짐.

표를 사용했다면
이해와 비교가 쉬웠을 것. 단점 토기설명을 주관적으로 함.
→그림을 삽입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설명했어야함. 토기의 분포와 파급양상을 설명 →
지도를 사용하여더빠른 이해를 도와야함


https://prezi.com/kvsb7jgodlai/presentation/

para O2b1a(47z) 원형은 충청도와 전라도에 남아있다.



1. 12000년~10000년전에 O2*에서 분화된 O2b가 발해만연안이나 북중국에 정착. 8000년~6000년전경에 발해만연안에 발생한 요하문명에 일원이었으나, 다수의 N, C에 비해 소수세력이고, 피지배층으로 추정. 농경을 하고 가축을 사육했으며, 빗살무늬토기 사용. 이중 일부가 만주, 연해주, 한반도 동북부로 이동.

2. O2b1a가 분화되기 전인 6000년~4000년전경에 만주, 한반도, 제주도, 열도, 오키나와 등지로 다양한 계통의 O2b가 이동하여 정착함. 하지만 이들은 소수 점조직으로 이동, 주거하였고, 주로 해안가나, 큰 강가에서 약간의 농경과 어로,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 이들중 대부분은 현대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도퇴되고, 제주도나 오키나와의 O2b*들은 주류 O2b(Korean star cluster)와 다른 초기 O2b(para O2b*)의 후손으로 추정됨.


 
 




3. 요하문명에서 발달된 농경기술과 청동기문화를 습득한 O2b* 그룹에서 4000년전쯤에 O2b1이 분화됨.
3000년전, 즉 기원전 1000년부터 민무늬토기인들이 기존의 빗살무늬토기인들을 제압하고 한반도에 세력 교체현상이 나타남. 이들의 주 세력이 para-O2b1로 추정됨.

이 O2b1a들이 초기에는 반도와 열도에 퍼지면서 기존의 고아시아인(N,Q,C1,D2)와 para O2b*들을 비파형 동검(요령성 동검)과 발달된 문명으로 제압하고 비교적 대규모로 취락을 형성하여 생존함.
전라 지역, 경기, 충청지역의 O2b1a들이 다른 한국과 일본지역의 O2b1a와 유전적 거리가 먼 것을 보아, 이들이 민무늬 토기 세력의 초기 유형으로 추정됨.
만주, 연해주, 함경도, 강원도쪽 루트를 타고 반도로 내려온 para-O2b1의 초기 정착지역이 한반도 남서부 지역으로 추정됨. 이들은 비교적 장시간 고립되어 정착한 것으로 보임.

4. 600년간 번영을 누리던 민무늬 토기세력인 para-O2b1들은 농경과 발달된 문화로 비교적 단시간에 많은 개체수를 늘려갔지만, 기원전 4세기에 강력한 점토대토기인들이 요하지방에서 해상으로 서울경기지역에 도착하여 다시 세력교체현상이 나타남.
이 점토대토기인들은 한국식 동검(세형동검)을 사용하던 강력한 무장집단. 말을 사용하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이들의 이동원인은 연나라 장군,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보임.
아주 짧은 시간안에 민무늬 세력은 제압당했고, 이들은 한반도 중남부를 평정한 뒤 바로 일본 북큐슈지방으로 건너가 요시노가리유적을 만듬.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에 부분적으로 거주하던 para-O2b1들을 제압한 점토대토기인들의 주요 세력이 O2b*(Korean star cluster)와 O2b1a(대가야모달)로 추정됨.
강원도 O2b*와 강원도 O2b1a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한국과 일본의 O2b*(Korean star cluster)와 O2b1a(대가야모달 혹은 텐노 모달)은 이 점토대토기인들로 추정됨. 이 점토대토기인들에는 O2b*(Korean star cluster)와 O2b1a(대가야모달 혹은 텐노 모달)과 O3, C3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주 세력은 O2b계열로 보임.


위 자료는 기생충님이 올려주신 오씨 집성촌에서 19명의 혈연집단의 12개 y-str수치를 측정한 표입니다. 향파 해주 오씨로 추정되는 이 집단은 백제인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최소 1000년에서 최대 2000년정도의 유전적 변이를 보여준다고 추정됩니다. dys439에서 2, dys 385b에서 1정도 변이가 일어났는데요, 이씨 집단이나 위씨 집단의 수치에서는 4~5까지도 변이가 일어납니다.



5. 한반도와 열도의 korean star cluster와 O2ba1(대가야모달)은 유전적 거리가 매우 가깝고 비교적 근래에 급속도로 개체수를 확장한 집단.
 비교적 근래에 이러한 대규모 세력교체현상과 맞춰보면 점토대토기인을  korean star cluster으로 상정하면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한국인과 일본인의  korean star cluster 확장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잘 맞아 떨어짐. 점토대토기인들의 확장이 2400년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korean star cluster의 시조를 1세대로 치자면 변이가 일어나기 쉬운 DYS456, DYS389II, DYS385b, DYS439, DYS437에서 유전적 거리가 최대 7~8정도까지 일어날수 있다고 예상됨.


요약을 해보자면,

1. para O2b들은 BC 8000년~ BC 1000년까지 만주, 반도, 제주도, 열도, 오키나와로 퍼졌다. 하지만 제주도, 오키나와, 반도와 열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퇴되어 생존하지 못했다.

2. para O2b1a(47z)들은 BC 2000년전부터 만주, 반도, 열도에 성공적으로 퍼졌고, para O2b에 비해 성공적으로 생존하였다. 그 원형은 전라도와 충청도에 남아있다.

3. 한반도와 열도에 친연성이 높은 O2b와 O2b1a들은 점토대토기인들이며 아주 성공적으로 생존하였다. O2b(korean star cluster)는 한국의 주류가 되었고, O2b1a(대가야 모달, 혹은 텐노 모달)은 일본의 주류가 되었다.

http://m.cafe.daum.net/molanthro/I4rp/296?q=D_ojDD_SeQ6qg0&

수면 중 뇌의 목욕 : 현명한 디자인 솔루션

Brian Thomas
    잠(sleep)을 자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로체스터 대학의 신경과학자 제프  일리프(Jeff Iliff)는 2014년 9월 TEDMED에 모인 청중들을 위한 연설에서 그의 놀라운 새로운 발견을 설명했다.[1] 그가 사용했던 단어들은 천재적인 설계자의 작품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들과 완벽하게 일치했다.[2]
뇌를 제외한 신체의 장기들은 세포에서 만들어진 대사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포 밖에 구축되어 있는 림프계에 의존한다. 그러나 두개골 뒤로 림프관이 존재할 수 없다. 뇌는 신체 에너지의 1/4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뇌의 노폐물을 청소하기 위해 작동되어야만 하는 어떤 다른 메커니즘이 있어야만 한다. 일리프와 그의 동료들은 이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2012년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 지에 그의 발견을 게재했었다.[3] 그는 TED 강연에서, 그의 연구팀이 발견한 사실을 설계(design)와 관련된 단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일리프는 말했다. ”신체의 다른 모든 장기와 떨어져 있으며, 고도의 노폐물 처리 욕구와 좁은 여백을 가지고 있는 뇌에서, 독특한 방식인 수면(sleep)은 실제로 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우아한 ‘디자인 솔루션(design solution)’일 수 있음을 우리는 발견했다.”[1]
수면 동안에 혈관을 따라 발견된 특별한 세포들은 뇌척수액(cerebrospinal fluid)을 뇌의 가장자리에서 뇌의 중심부로 펌프 한다. 액체가 세포들 사이의 작은 공간을 통하여 흘러나갈 수 있도록, 뇌의 신경세포(neurons)들은 수축한다. 그곳에서 대사 노폐물들은 수집되어 버려진다.  
일리프는 다시 말했다. ”당신이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이같이 혈관 밖으로 내보내는 메커니즘은 정말로 현명한 디자인 해결책이다. 왜냐하면, 뇌는 딱딱한 두개골 속에 포위되어 있고, 세포들로 가득 뭉쳐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림프계와 같은 관들이 내부에 있을 여분의 공간이 없다.”[1]
그는 뇌가 어떻게 자가 목욕(상상할 수 없는 한 복잡한 메커니즘)을 수행하는지를 기술하며, '우아한', '멋진', '해결책', '현명한 설계'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1]
어떻게 이러한 경이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 일리프에 의하면, 림프계는 진화했고, 다음으로 뇌 스스로가 '노폐물 청소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1]
뇌는 경이롭다. 하지만 컴퓨터가 자신의 새로운 하드웨어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뇌가 자신의 부품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엄청난 량의 정보뿐만 아니라, 뇌혈관을 따라서 필요한 작은 뇌척수액 펌프들을 장착시키시고, 우리에게 수면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References
1. Iliff, J. One more reason to get a good night’s sleep. TED Talks. Filmed September 2014, accessed October 14, 2014.
2.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attributes are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by the things that are made, eve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Romans 1:20).
3. Iliff, J.J. et al. 2012. A Paravascular Pathway Facilitates CSF Flow Through the Brain Parenchyma and the Clearance of Interstitial Solutes, Including Amyloid β.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 4 (147): 147ra111.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6025&category=A00&orderby_1=editdate desc&page=1

Wednesday, November 26, 2014

미국은 일본에 한게 없다


제 목 일본이 미국놈들한테 고마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글쓴이 미시사가  조회 35  댓글 2   
2014-11-27 13:03:06
110.70.*.*
 
 



밑에 어떤 존만한 하층민 조센징 새끼가 자꾸 억지부리는데
미국은 그저 시장 확보해서 물건 팔아먹으려고
일본을 개항시킨 것 뿐이다.
실제로 미국의 입항에
바쿠후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 영주들의 반발이 일었던 거고,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이 일본이 발전하는데에
"계기"는 제공했을 뿐 실제로 도움을 준 건 아니다.
반면, 일본의 강화도 조약을 통한 조선의 개항을 본다면
일단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자주국으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이후에 갑오개혁을 통해 노비제를 폐지시키고
내시 같은 여러 미개 악습들을 타파시켜줬다.
즉, 일본은 실제로 조센에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줬기때문에
조센징들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근데 일본이 미국에 고마워해야할 이유가 뭐가 있나?
미국이 일본의 신분제를 대신 폐지시켜줬냐
아님 일본이 어느 나라의 속국이었는데
자주국으로 격상시켜줬냐?
미국 새끼들이 한 거라고는 일본 해안에 와서
기웃거리며 깝친 거 밖에 없다.
미국과의 일련의 수치스러운 사건을 겪으며
일본 사회가 각성해서 그 이후의 행보는
순전히 일본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졌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미국 덕에 일본이 발전했다고
되도않는 헛소릴 씨부리냐 병신아
조센징 새끼가 국뽕을 하도 흡입해서 실성을 했나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450009&page=1
 

베트남 사람은 한국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

학교에서 추석 보내기 (2) - 베트남 학생 축구 시합

점심을 든든히 먹고 환호성이 나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 추석에 축구를 하는 사람이 있지도 않을 것이고,
환호성이 한국사람들이 지르는 것과는 다른 것과 같아 분명히 외국인 학생들이다 싶었다.

기숙사 방문을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후다닥 동측 운동장으로 댑다 달렸다.
(아.. 힘들다 보니, 하악하악 소리가 녹음이 되었다. ㅎㅎ 민망하네)



역시 외국인 학생들인데, 그냥 말만 듣고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짧은 영어나마, 동영상 젤 마지막에 나오는 왼쪽 노란 티셔츠를 입은 분에게
몇가지를 물어보았다.

"어느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세요?"
"아. 여기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오신 분들이세요."
"혹시 카이스트 학생이신가요?"
"아뇨. 저는 ICU에서 왔고요. 이 근처 학교에서 베트남사람들끼리 모여서 온 거에요.
저희들끼리 사람들 모아서 여기서 축구도 하고 다른 경기들도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말 한국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 ㅡㅡ
첨에는 한국 사람들도 섞여 있는 것 같아서 우리말로 물어보려다,
눈치를 살피니 전부 베트남 분들이셨다.

이번 같이 긴 황금 연휴를 맞아서,
학업에 지친 베트남 사람들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회포도 푸는 자리인듯 하다.
더 자세한 사항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어색해서리..
마치 너네들 여기서 뭐하니.. 이런 식으로 묻는 게 아닐까 해서,
그 분들이 즐거운 시간 가지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는게 나의 핑계고.
어쨌든 어색해서 그냥 몇몇 동영상만 찍어왔다. ^^;;




유성 대덕 단지 안에는 대학이 몇개 있다.
충남대학교, 카이스트, ICU, 그리고 대덕대학.
그 외에도 몇 개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학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카이스트도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난리 법석이다.
이번 서남표 총장께서는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는데,
앞으로 수년간 엄청난 수의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해서 카이스트를 인터네셔널 스쿨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계획에 나는 찬성한다.
다만, 몇 가지가 먼저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1.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사실 카이스트가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나라가 아니다보니,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없다. -_-;;
외국인들도 영어권에서 오기 보다는 유럽(특히 프랑스), 동남아, 중국에서 많이 오기에,
영어를 썩 잘하는 분들이 많지 않다. - 그러나 의사소통은 다 된다. ㅋㅋ
2. 기숙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외국인 학생의 엄청난 증가와 신입생 수의 증가로, 카이스트의 몇몇 장점 중의 하나인
모든 재학생이 기숙사 생활 가능하다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게 되고 있다.
사람만 데려오기 전에 일단 살 만한 장소를 만들어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아직 이러한 것들이 만족되질 못하다보니,
나 조차도 외국인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와서 얼마나 배워갈까 심히 걱정된다.
도리어 한국에 대한 나쁜 인상만 가지고 돌아가는게 아닐까 싶다.

한국의 연구 문화는 다른 나라의 연구 문화와 상당히 다르다.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양권의 문화에서의 연구는 여러 사람들의 공동 연구가 매우 활발하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고, 새로운 아디이어를 얻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서 이러진 않겠지만..)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연구문화는 나홀로 연구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우리 연구실 선배들이 졸업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서 졸업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히 연구는 혼자서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많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코멘트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에서 학위를 받는게 사실 쉽지는 않다.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완벽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100%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원어민이 아닌 이상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한국 나름의 문화 때문에 한국 사람들과 쉽게 섞이기 힘든 것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래나 저래나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학위를 받는 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런 걸 보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아오는 한국 사람들 참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우리 나라 전반적으로 외국 학위에 대해서 신뢰도가 높은지도 모르고...



우쨋든, 베트남 학생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나도 좋네. ㅎㅎ


학교에서 추석 보내기 시리즈....

http://5bpa.tistory.com/94

Monday, November 24, 2014

Romans wear blonde wigs on their black hair

during the Gallic and Teutonic campaigns blonde wigs made from the hair of captured German slaves were in vogue.

Juvenal(6.120) mocks the sexual excesses of Claudius' notorious wife Messalina who frequented brothels with her dark hair hidden beneath an ash-blonde wig.


Greek and Roman Dress from A to Z
 By Liza Cleland, Glenys Davies, Lloyd Llewellyn-Jones
Page 212

http://books.google.com/books?id=nTaCAgAAQBAJ&pg=PA212&dq=romans+mock+blonde+wig&hl=en&sa=X&ei=MelzVOP3L9StyATX94HwBg&ved=0CDAQ6AEwAA#v=onepage&q=romans%20mock%20blonde%20wig&f=false

Romans made blonde wigs from germanic slaves to mock their physical appearance

As these methods failed, Romans of both sexes took to wearing wigs, even though writers, such as Ovid, enjoyed poking fun at those forced to wear them. Blonde wigs were popular, made from the hair of Germans captured in the campaigns along the frontier or trimmed from the golden locks of slave girls. Black hair for wigs was also trimmed from slaves across the provinces, or was sometimes imported from as far away as india.

Encyclopedia of The Roman Empire
Revised Edition
Matthew Bunson
Page 420

http://books.google.com/books?id=T5tic2VunRoC&pg=PA420&dq=romans+mock+blonde+wig&hl=en&sa=X&ei=MelzVOP3L9StyATX94HwBg&ved=0CD4Q6AEwAg#v=onepage&q=romans%20mock%20blonde%20wig&f=false

Romans wear blonde wigs to mock physical appearance of Germanic slaves.

Clothes Make the Man: Caracalla, Romanitasand Imperial Self-Presentation

Julie Langford-Johnson (University of South Florida)
Recent scholarship has underscored the cohesive role of the emperor and identified him as the only real commonality for all inhabitants of the empire (e.g. C. Ando, 2000).  Because the emperor was the ruler of the ruling nation (the most Roman of Romans), and because he was in control of himself and all others (the mark of masculinity for the Romans), the emperor was considered the avatar of all things Roman and masculine.  He was the role model for ambitious provincials who wished to rise through the ranks to political power.  By patterning himself after the model of the emperor, adopting Rome’s language and dress, and by participating in the imperial cult, a provincial subject displayed his romanitas.  Such displays were rewarded by emperors: by the mid-2nd century AD, about fifty percent of the senate was composed of non-Italians. 
This paper will examine a moment when this tidy model of enculturation unraveled.  Under Caracalla, romanitas and masculinity became far more contested categories.  This emperor, I will argue, rejected the dominant ethnoculture (romanitas) and instead promoted a vision of the empire which recognized and celebrated the various cultures of the empire but nonetheless envisioned them as a part the political whole of the empire.  Caracalla’s chief means of promoting this vision was through his self-presentation, especially his attire. While on campaign in Germany, Herodian reports, the emperor delighted his German troops by throwing off his Roman cloak and donning a blonde wig and trousers, that is, by dressing like a German (4.7.3).  While traveling through Macedonia, Caracalla dressed as a Macedonian, complete with kausia and crepidae.  Finally, both the HA and Dio report that Caracalla created a new garment whence he derived his nickname: the caracallus, a patchwork cloak that stretched from the wearer’s head to toes and was distributed to the military (79.3.3) and the plebs of Rome (HA V. Car. 9.7.).  I will argue that this garment was a clever metaphor for the emperor’s vision of an empire that was diverse, indeed, but one unified political entity nonetheless.  The quirkiness of the emperor’s wardrobe provided ample fodder for the emperor’s critics who undermined his policies of inclusion by mocking his appearance.
Though Caracalla surely undertook this strategy in order to strengthen his position among certain populations in the provinces, his manipulations of ethnicity were politically destabilizing and exclusionary since they changed the rules by which prominent provincials achieved success in Rome.  One of Caracalla’s most outspoken critics was the contemporary senator and historian Cassius Dio.  Hailing from Bithynia, Dio was a successful product of the enculturation who, under Caracalla, suddenly found his finely honed self-presentation rendered ineffective.  Not surprisingly, Dio paints a very hostile picture of Caracalla, harping on his choice of attire as either effeminate or culturally off-base.  Thus, Caracalla’s policy to wear the attire of the people he was visiting was pilloried by Dio.  Rather than recognizing the intelligence behind Caracalla’s philosophy of “When in Rome…”, Dio mocks it as misguided: “In Syria, however and in Mesopotamia, he used German clothing and shoes” (79.3.3).   Likewise, the caracallus was for Dio just another quirky garment that undermined the emperor’s masculinity: it was both foreign and covered the legs – how effimate! (C. Williams, 2001).  Since Dio is our best source for the period, it comes as little surprise that his hostility has significantly shaped our own view of Caracalla.  Perhaps it is for this reason that few question Dio’s damning commentary on the emperor’s universal grant of Roman citizenship as little more than a cheap attempt to collect more taxes (78.9.5).  Instead I see it as the strongest evidence of Caracalla’s attempt to rethink the dominance of romanitas.

https://camws.org/meeting/2007/program/abstracts/11C4%20Langford-Johnson.htm

Romans had black hair and black eyes

Juvenal wrote that Messalina, Roman empress of very noble birth, would hide her black hair with a blond wig for her nightly visits to the brothel: sed nigrum flavo crinem abscondente galero intravit calidum veteri centone lupanar.[

http://en.wikipedia.org/wiki/Blond

Saturday, November 22, 2014

로마 vs 한나라 전쟁하면 로마가 이긴다

답변
님의 답변
03.09.1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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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내용
고대 로마군은 전적으로 보병 위주였고 기병이나 궁수는
보조 부대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술적 문제였지요.
기병은 발을 딛는 등자가 없어 양 다리로 말 배를 꽉 잡고
타야 했으니 말 위에서 전투를 벌인다는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활 역시 동양의 활처럼 대가 중간에서 한번 꺾인 강궁이 아니라
자기 키보다 크고 밋밋한 활 대에 시위를 맨 것 이상 개발이
안되었습니다. 요새 척도로 한 오십미터 나가는게 고작이었죠.
나중에 카르타고의 한니발 부대에 시달린 뒤로 기병 전술이
발달하긴 했습니다만..
주력은 경무장 보병으로 무기는 짧은 칼과 방패가 전부였습니다.
근접해서 방패로 상대방 칼을 막고 배를 푹 쑤시는 기술이
유일한 전투 방법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일찍부터 도, 검, 창, 극, 모, 부월 등
각종 병장기가 발달했고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대단했습니다.
지휘관은 마상에서 전투를 했고, 기병 하나가 보병 열을 당해낼 정도였습니다.
활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주력 병기 중 하나였구요.
전투만 놓고 보면 절대 유리했을거라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국지전이 아닌 대규모 전쟁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전쟁의 승패는 보급이 좌우하는데 당대의 로마는 이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로마군이 진출한 곳에는 어김 없이 길이 닦여졌답니다.
보급이 대단히 원활했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로마군은
전투나 행군 등 모든 전술 행위 매뉴얼이 있었습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기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매우 무자비한데다 약탈도 매뉴얼에 따라
조직적으로 행해져서 만일 보급이 끊긴다 해도 현지 조달이 가능했지요.
그러한 고로
아마 로마군이 초반의 열세를 딛고 승리를 거두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 과학의 보관창고였던 이슬람과학

이슬람 세계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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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에 의하여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교는 불과 100여 년 사이에 세력을 확장하여 서쪽으로는 스페인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따라 헬레니즘 문명권의 여러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자연 철학 내용을 담은 서적들이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들의 번역에는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이슬람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하였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연금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 과학의 보관창고였던 이슬람과학[편집]

이슬람 세력은 무함마드 등장 이후 스페인에서 페르시아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100여 년이라는 빠른 시일에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헬레니즘 문명권의 수많은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의학 및 자연철학 내용들이 집중적으로 유입되었다. 9세기 초반 이슬람 왕조의 군주 알 마문은 당시 수도였던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학문연구소를 세웠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 곳에서 방대한 양의 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여 그 문명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500여년간은 서구 문명권의 위상이 가장 위축되어 있던 시기였다. 서방 세계의 과학 활동이 미약했던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의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번역 과정에서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아랍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물리적 실체를 엄격히 논하는 아랍 세계의 천문학적 경향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 세계의 수학이란 기하학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대수학 분야가 형성되며, 연금술 전통이 이론적인 구도를 갖추면서 강한 전통으로 확립되어 후대 과학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대학이 설립될 무렵, 그리스의 과학 및 의학 저술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서방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리스의 책들은 이미 망실되었고, 서방의 학자들은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아랍의 과학은 그리스의 과학 저술들을 보관해 두었다가 서양에 다시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표현한다[1].

이슬람의 광학[편집]

이븐 알하이삼의 고전적 노작인 《광학의 서》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사막 지대에 신기루를 비롯한 여러 광학현상이 나타났으며, 사막의 강한 바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병에 걸려 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눈과 시각 현상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광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슬람의 광학은 기하학적 전통을 계승한 알킨디(Al-Kindi), 해부학적 전통을 계승한 후나인 이븐 이샤크(Hunain Ibn Ishaq), 그리고 경험에 의해 얻어진 형상이 뇌에 전달된다고 주장한 전통을 계승한 이븐 시나 등 세 사람이 계승한 전통에 의해 이어져 왔다. 당시 수학적ㆍ해부학적 전통에서는 눈에서 나오는 고아선이 물체에 닿을 경우 중간의 공기가 압축되어 그 영향이 눈의 수정체 액에 전달되어 물체가 인지된다고 생각했었다.
서유럽 학자들은 이븐 알하이삼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수학적ㆍ해부학적 전통을 결합시켜 체계화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븐 알하이삼은 빛과 색이 눈과는 독립적으로 물체에서 모든 방향으로 직선으로 방출된다고 생각했으며, 점광원에서 나오는 빛이 눈에서 굴절되면서 물체와 눈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물체로부터 눈으로 들어오는 상을 그대로 인간이 인지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에 입각한 추론에 의해서 물체를 인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근대적인 시각 이론의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븐 알하이삼은 시각 현상 외에도 무지개, 후광, 거울 등 광학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러한 연구들은 케플러와 같은 서구의 광학 이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금술의 발전[편집]

이슬람 세계의 연금술에 대한 문건
서양의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했으며,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서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금술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연금술은 영지주의를 위시한 신비주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이런 신비주의적 전통을 지닌 연금술은 이슬람으로 건너오면서 역시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과 결합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연금술이라는 어휘 자체가 아랍어의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 외 알칼리, 알코올, 나프타, 나트륨 등 연금술을 통해서 발견된 수많은 화학물질의 명칭이 아랍어에서 기원했다.
한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물질은 4원소들의 배합이기 때문에 그 비율을 바꾸면 다른 물질이 된다는 생각은 연금술사들에게 물질이 변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9세기에 와서 이슬람 연금술의 아버지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황-수은설을 제창했다. 그의 황-수은 설은 이슬람과 유럽 연금술의 기본 원리로 발전했으며, 18세기를 풍미했던 플로지스톤 이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화학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남아 있었다.
연금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이나 황-수은설을 이용하는 한편, 물리ㆍ화학적 조작을 가하기도 했으며, 기도 혹은 주술도 활용하는 등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강하게 남아 있었던 신비적 자연관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또한, 연금술사들은 점성술사들처럼 대우주와 소우주가 서로 연결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물질들을 각각의 별자리와 연관시켰다.
연금술은 이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지만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사(科學史)상 많은 공헌을 이루어졌다. 즉, 연금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칭이나 시약이 사용되었으며, 화학적 조작이 활용되면서 새로운 화학 물질도 많이 발견되었다. 연금술이 과학사에서 한 역할은 베이컨의 평가에서 비유적으로 잘 나타난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 밭 어딘가에 금을 묻어 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A%AC%EB%9E%8C_%EC%84%B8%EA%B3%84%EC%9D%98_%EA%B3%BC%ED%95%99

Friday, November 21, 2014

o2a는 인도 드라비다족이고, o2b와 갈렸다?

한국인의 유전자 계통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41735
"다시 생각해보는 민족론 "의 댓글

twile
확장된 민족주의 공동체의 구성원을 이루는 서브 종족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요. 시간이 흐르면 피가 섞입니다. 피가 섞이면 증오는 묽어지지요. 남미인은 스페인 선조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일본인이 야요이와 죠몽을 똑같이 기리듯이. 탐라인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슬픈 일인지요. 동아시아 언어학의 주류는 제주어를 한국어와 별도의 언어로 봅니다. 일본인은 일본어와 전혀 다른 류큐어를 “오키나와벤(사투리)”이라 부르지요. 프랑스는 알제리인에 대한 출입국관리를 하였으나, 일제는 조선인이든 류큐인이든 출입국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족을 변절이라 쉽게 말할 수 있을지요.
물론 성별차는 있습니다. 대체로 고대와 그 이전을 보면, 정복민족이 들어올 때, 피지배 남성의 대는 대부분 끊겼고, 피지배 여성의 혈통은 지배계급과 혼화되어 계승되었습니다. 한국인도 그렇듯이, 대부분 민족체의 유전자 풀에서 부계 Y염색체 구성은 매우 단순하나, 모계 마이토콘드리아 염색체 구성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twile
염색체의 경우 Y염색체 DNA는 부계로만 전승되고, 마이토콘드리아의 mtDNA는 모계로만 전승됩니다. 한국인의 경우 Y염색체 Haplogroup의 경우 O2b (한인/예족/말갈족), O3 (화하족/상족), C (맥족)가 3대 염색체이고 D (고아시아인=아이누=읍루, 혹은 임나/변한/침미다례의 왜족), N/K(훈누 스키타이 계열)도 일부 나오나 소수입니다. 잘 아실 것으로 생각되나 O2b는 도작문명을 가지고 북상한 남방계이며 한국인의 지표 유전자로서 나오는 민족은 현재 4개밖에 없습니다(한국인, 만주족, 일본인, 류큐인). 일부 양자강 베트남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O2b가 O2a (인도 드라비다족)와 인도 인더스강 유역에서 갈라져서 올라오다가 남은 흔적입니다. 실제 한국어의 농업 관련 단어들은 드라비다어 계열이 많습니다. 제주 탐라인은 약간 달라서 O2b 비율이 적고 N 비율이 높습니다.
한국인의 mtDNA의 경우 Y염색체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비율적으로도 북방 퉁구스 계열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고아시아인(아이누/퉁구스계)이 양자강 유역에서 산동, 요서를 통해 북상한 O2b에게 정복당한 흔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O2b가 C와 D의 땅에 들어와 남자는 노예로 부리다 죽이고 여자만 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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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43292

twile
제가 연말에 너무 정신이 없어 아주 가끔에야 들어오는 수준이라 제대로 된 토론에 참가할 수 없는 형국이고 답변조차 못드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는데, 미천한 글을 인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본적으로 성씨의 문제는 다수 분들이 지적해 주신대로 왕족 귀족을 제외하면 오랜 역사에서 일반 민중들이 성을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김/이/박 중 진짜배기는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 임란 이후 가져다 붙인 성씨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왕족 귀족 성씨에 대해서만 논의하겠습니다.
잘 아시듯이 고(구)려/백제 성씨는 거의 소멸된 상태입니다(이들이 모두 사라졌다기보다는 신라 지배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려/백제계 맥족(고마족) 성씨는 한국의 부여 서씨, 전씨 등등 정도이고, 오히려 일본에 도요타(중간에 이름이 바뀜), 하야시, 마쓰다, 나가노 등 다수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성씨의 메이저는 단연 신라계로서, 왕족(박, 경주김씨)+ 수로왕 후손 김유신 계열(김해김씨)+사로 육촌에 뿌리를 둔 성씨들(이, 최, 정, 손, 배, 설)이며, 희성은 대부분 중국 귀화성씨가 많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위 김, 박, 이, 최 하는 것들이 실은 원래 그런 한자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고유어로 되어 있다가 법흥왕 대를 전후하여 소급적으로 한화시켰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경주김씨의 경우 울진봉평비나 양서[김원종(법흥왕) 이름이 모진으로 나옴]에 따르면 모씨였을 가능성이 높고, 박씨 또한 박제상 관련 일본서기/삼국사기의 기재(본명이 모말(모마리)로 나옴)에 따르면 본래 모씨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김해김씨의 경우 최치원 석리장전에 따르면 김수로왕의 본래 이름이 뇌실청예로 추정되어 본래 뇌실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양서에 나오는 법흥왕의 본래 이름(募秦):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o_008_001b_0040_0020
* 울진봉평비에 나오는 법흥왕의 본래 이름(牟卽智매금왕):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gs_kr_008_0010_0020_0030
* 울주천전리서석에는 법흥왕 본래 이름이 另卽知태왕으로 나옵니다.
* 일본서기에 나오는 박제상(김제상)의 원래 이름 = 毛麻利질지 (질지는 관직명)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m_001r_0050_0060
* 혁거세 후손 박제상의 원래 이름 = 毛末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sg_045r_0080_0010
정리하자면, 중국 성을 갖다 쓴 것이 아니라, “한화된 신라계성”을 갖다 쓴 것이 오늘날 성씨의 주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화된 신라계성인 김, 박 등은 화하족에는 없는 성씨이므로, 이를 중국성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김씨의 경우 신라계, 훈누계(김일제 후손), 만주족계(아이신쥐러가 신해혁명 이후 김씨로 바꿈) 등 동이족 뿐이고, 화하족은 김씨가 없습니다.

twile
정확히는 16세기 이후 “중국 성”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한화된 신라계 성”을 공명첩, 납속 등으로 앞다퉈 가져와 사용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계속 고려, 조선에까지 잘 나갔으니까요. 중국계 귀화성씨는 대부분 희성들이 많습니다. 성씨의 한화는 법흥왕(모진) 이후 경덕왕 때까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http://botw.egloos.com/viewer/10968446

Friday, November 14, 2014

Roger Federer actually got mono virus in 2005

崔晗
 
답글
 
i thought he got that in 05, i remember he recovered from it and lost a 5-set to Nalbandian in SH master cup
 
 

Thursday, November 13, 2014

southern vietnam belongs to cambodia

Actually, the South Vietnam from Tay Ninh to Ca Mau (Kampuchea krom) is used to belong to the Kampuchea, but the French took and gave it to the Viet on June 4, 1949. If you need more information, you can type on Google "Kampuchea krom land" or Khmer Empire map.

http://khmerization.blogspot.com/2012/08/does-koh-tral-belong-to-cambodia-or.html?showComment=1345521899668#c7468764401638539884

Wednesday, November 12, 2014

Minoans were Greek


1. THE ORIGIN, THE NAME AND NATIONALITY OF THE CRETANSTHE ORIGIN AND NATIONALITYOF THE CRETANS
The ancient poet Homer in the epic “ILIAD” reports that in the “Trojan War” all citiesof Crete: Knossos, Gortyna, Lyktos or Lyttos, Lykastos etc. fought on the side of theAchaeans or Argoeans or Danaeans or Panhellenes and the leader of all men fromthe Cretan cities, that is (all men of Knossos, Gortyna, etc.) or the leader of allnations (city-states) that existed in Crete (= Eteocretans, Kydonians, Achaeans,Pelasgeans and Dorians) was Idomeneas, who was the grandson of Minoas and alsoone of the top leaders of all Achaeans or Argoeans or Danaeans or Panhellenes:"with Nestor, the magnificent old man of the Panachaeans being the first andfollowed by Idomeneas..." (Iliad, B 402 - 405).Therefore, Minoas and the residents of Crete during his reign (Kydonians,Eteocretans, Achaeans, etc.) were Greeks/Hellenes, part of the Panhellenes.In addition, the ancient writers clearly report that the Minoans were Greeks," Thefirst residents of Karpathos were those that campaigned with Minoas, during theperiod in which he became the first Greek maritime “sea-governor”, (DiodorosSikeliotis, 5, 54).Specifically according to the ancient writers and historians: Pafsanias (Solar, 1 - 10,Arcadian 8, 3), Thucydides (A, 3 -9), Diodoros (Book 4 and 5), Stravon (GeographicsI = 10), Herodotus (Z, 169 - 171), Isocrates (Panathinaikos) and others:1. Crete was initially inhabited by the so called Idaiae Daktylae or Kouretaes (orEteocretans in contrast to the Epilydaes, as it will become evident below), and forthis reason they were called native (endemic) Cretans. They came to the island fromFrygia (=Troy in Asia Minor) and reciprocally from Crete some Cretans went toFrygja (Troy)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that, there is a mountain range named"Idae or Idaiae mountains" in Crete and also in Frygja (Troy).2. Simultaneously with the Idaiae Daktylae or shortly thereafter came to Crete fromArkadia, Peloponnesus (and thus Gortyna of Peloponnesus and Crete) the so called"Kydonians" and for that reason they were also called natives. The cities Kydonia(and thus the name Kydonians), Gortyna and others of Crete and which, according toPlato and Pafsanias were built by the sons of Tegeat Lykaona from Arkadia of









 
Gortynia in Peloponnesus (and that is precisely so, because it is also depicted in theancient currencies of these cities).3. Several generations later, and specificallywhen Cretheas was king of the Eteocretans,certain sects (races) of Achaeans, Pelasgeans andDorians under the leadership of Tektamos orTektafos (the son of Doros who was the son of Hellene and Minoa’s grandfather) left from thePelasgean Argos (=Thessaly in central mainlandGreece) and after several adventurous roamingsand expeditions arrived in Crete, which hadmeanwhile suffered huge desolation, settling onthe eastern part of the island. The Dorians settledin the eastern part, the Kydonians in the western,the Eteocretans in the southern part and theremaining others in the interior of the island. Thenew inhabitants of Crete were named "Epilydes"(= epekae, immigrants in contrast to the localinhabitants) and the old "Eteocretans" (= firstsettlers and therefore genuine, local, endemic).4. Upon Tektamo’s death, on the throne of the ‘Epilydes Cretans Kingdom’ ascendedhis son Asterios, who because his wife gave birth to a son separated from her andabducted from the seashores of Phoenicia the daughter of the Phoenician KingAgenor of Tyre, the beautiful Europa, who is also mentioned as one of the causes of the “Trojan War”. When Asterios died, his sons Minoas and Sarpidonas quarreled andfought each other as to who will ascend to the kingdom. Minoas won and Sarpidonaswith his mutineers having been defeated and chased out of the island by Minoas tookrefuge in Lykia, Asia Minor and there he built the city Myletos in remembrance of theCretan city Myletos.According to the Pario Chronicle, Minoas reigned until 1470 B.C., and with the help of his brother Radamanthys, unified and united into a single comprehensive system (ina highly unique way, the institutions of the State for this particular period of time, aswe will see below) the natives (Eteocretans and Kydonaeans) with the Epilydes(Achaeans, Pelasgeans and Dorians) Cretans and designating Knossos as thegoverning city ‘Capital’ (the seat of the in common king of the united Cretan cities).During this period of time Minoas with the help of his brother Radamanthysconceived, designed, organized and created for the first time in world history amaritime martial navy, which he used to drive away from the islands of the Aegean(Cyclades, etc.) the criminal elements and pirates (Kares and Phoenicians) whoresided there, and inhabits these islands with permanent settlers that he broughtfrom Crete. Up to that point in time neither marine shipping nor agriculture wereknown nor had been developed for use, and consequently most of the islands of theAegean were poor and did not have the capability or means to support permanentresidents other than renegades and criminals (mainly pirates). As a result of themaritime martial navy constituted by Mjnoas, he was able to both, become amaritime power and free-up (open-up) the marine corridors, and thus enable theGreeks to commute freely amongst themselves, deal with and practice marine workand related tasks, prosper and gain wealth, establish cities (permanent residencewhich before could not be created due to the criminal activities of the thieves,renegades and pirates who lived there, such as the Kares, Phoenicians, etc.).
KING MINOAS, COIN OFKNOSSOS













 
Additionally, because of the newly developed marine capabilities, Minoas was able toestablish Cretan (and subsequently Greek) colonies in Sicily, the sea coast of AsiaMinor, etc. For all of the above reasons Minoas and Radamanthys were deified, thatis to say, after their death they were declared semi gods, sons of god Zeus and judges at Hades (the underworld of the Greeks), something similar to GreatConstantine, Apostle Peter, Alexander the Great, etc.5. Three generations after the death of Minoas the ‘Trojan War’ started (thegrandson of Minoas, Idomeneas took part in it). In this war (according to the ParioChronicle 1228 - 1218 B.C), Cretans, natives and Epilydes, under the leadership of Idomeneas, the grandson of Minoas and one of the largest naval fleets everassembled in history fought on the side of the Argoeans or Achaeans or Danaeans orPanhellenes and for that reason they were named (the natives: Eteocretans andKydonians and Epilydes: Achaeans, Dorians and Pelasgoeans) after the end of thewar Greeks/Hellenes.
Note:1) When the Epilydes Cretans (=Achaeans, Dorians and Pelasgoeans of Crete) went to the islandand found there the natives (= the Kydonians and the Eteocretans or idaiae Daktylae or Kourites)the differentiation of the terms "Greek" and "barbarian" did not yet exist, since that terminologyoccurred after the “Trojan War”.Thucydides (A, 3 - 9) and many other ancient writers report that before the “Trojan War” thedifferentiation of “Greeks”’ and “barbarians” did not exist. After the end of the war "Greek" werenamed all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Trojan War” campaign and "barbarian" those who alliedwith Troy, and through that action they became another reason or cause for the war.2) Clearly the Eteocretans and Kydonians racially were the same with the Dorians, Achaeans andPelasgoeans, and all were part of the Panhellenes and concretely of Pelasgoean origin. Simplystated, the Eteocretans and Kydonians were natives of Crete and the others were not, they cameto Crete from Thessaly. That is to say, here we have a similarity to what had also occurred withthe Spartans (who were Epilydes, had come to Peloponnesus from Sterea Hellas) and theArcadians (who were natives of Peloponnesus), and both were Greeks/Hellenes.
THE NAMEOF THE CRETANS
According to the ancient writers Pafsanias (Iliaka), Stravon (Geographics 10),Diodoros (Book 4 and 5), etc., initially the Cretans were named “Idaioi dactylae” or “Couretes”. Couretes (Greek Κουρήτες, is derived from the words Κούροι, κοράσια,επι-κουρώ = Latin curio) etc., were the young Cretan people who nourished (caredfor the infant’s upbringing and well being) Zeus and subsequently all Cretans.Consequently the name “Κρήτες” = Cretans, derived from the name C(ou)retans, asit is concluded from mythology. Crete was the daughter of one of the Couretans andwife of Zeus. (For more see the book: “Cretan History”, A. Krassanakis)
KNOSSOS AND OTHERS CITIESOF ANCIENT CRETE
Poet Homer in the epic ILIAD (Iliad B 645 – 652, Odyssey t 178 - 183) reports thatCrete had 100 or 90 cities, but report only these : Knossos, the capital of Crete,Gortys, Phaestos, Lyctos, Miletos, and Rhytio.Knossos was the capitol, the largest, the most important and the most famous-




http://www.scribd.com/doc/44259181/ANCIENT-CRETE-AND-MINOAN-CIVIL%CE%99%CE%96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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