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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26, 2012

일본이 한국을 앞설수밖에 없었던 이유

사쓰마번이 幕末이란 亂世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開明藩主(개명번주)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가 11대 藩主인 나리아키라(齊彬)다. 그는 두뇌가 뛰어난데다 蘭學(난학: 서양학문)을 깊게 배웠다. 서양문물에 심취, 심지어 일기도 英語로 썼다. 大名家의 正室과 長男은 에도 소재 藩邸(번저)에 거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武家諸法度」에 따라 나리아키라는 에도에서 성장했다. 당시 에도에서 그의 평판은 대단히 높았다. 
  
  『저 사람이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터 도쿠가와家를 섬긴 大名)가 아니고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家를 섬긴 대명)라면 日本 천하의 國政을 맡을 터인데…』 
  
  그런 그도 나이 마흔을 넘어 11대 藩主를 승계할 때까지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 고전했다. 경쟁자는 그의 異母弟인 히사미쓰(久光)이었다. 사쓰마로부터 보면 에도는 너무 멀고, 나리아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蘭學에 대해서도 기괴한 요술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히사미쓰는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래 무사의 수련법인 犬追物(이누오우모노: 수십 마리의 사냥개를 동원하는 사냥)이나 스모(일본식 씨름)와 궁술 등을 좋아했다. 당연히 보수파 사무라이들 사이엔 히사미쓰의 인기가 높았다. 이런 가운데 히사미쓰 암살 기도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나리아키라 지지파로 지목되어 개혁파 사무라이들이 피의 숙청을 당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나리아키라가 사쓰마 藩主의 자리에 올랐다. 1851년 2월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852년 새 藩主 나리아키라는 가고시마의 이소(磯: 바닷가)에 공업단지를 건설하고 集成館이라고 명명했다. 集成館에는 反射爐, 용광로, 鑽開臺(찬개대: 대포의 포신에 구멍을 뚫는 공장) 등 군수 관련 설비뿐만 아니라 유리공장, 鍛冶場, 蒸氣金物細工場 등도 들어섰다. 쇄국보다 통상개국이 일본의 나아가야 할 길임을 일찌감치 파악한 유능한 藩主는 이렇게 새 시대를 준비했다. 
  
  集成館의 일부는 현재 「尙古集成館」(가고시마市 吉野町 磯 9685)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JR 가고시마역에서 霧島·國分 방면 버스를 타고 가다 磯庭園에서 하차하면 걸어서 1분 거리다. 이곳엔 옛 集成館의 기계공장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1864년에 착공, 1865년에 완성된 것으로 일본 最古의 본격적인 공장이다. 원래 蒸氣기계소인데, 건물 가운데를 관통하는 샤프트로써 동력을 끌어 다양한 기계를 가동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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