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Tuesday, January 31, 2012

파라과이에 한국남자들이 파라과이 여자랑 낳은 자식이 많다.


1960년대 말, 우리의 맹호부대들은 베트남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월맹, 월남으로 갔다.
우린 파월 장병에 대한 노래를 불러 가며 그들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자국민에게도 수치심,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
미국의 자만심에 가득한 전쟁이요, 우리의 아버지, 혹은 형제들은 다만
미군의 용병으로 팔려가, 외화를 벌었고,그 전쟁으로 약간 국가 재건을 했으며,
베트남의 무고한 시민들을 살륙하기로 악명이 높은 부대였다는 걸 우린 알게 됐다.

그 전쟁의 여파는 베트남이 가장 크게 치러야 했겠지만,
그 전쟁을 다녀온 우리의 용맹스런 장수들은 밀림을 파괴하기 위해 뿌려댄
고엽제의 후유증, 전쟁의 부상으로 많은 후유증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현재도 베트남에 남아서 천대를 받고 있는 파월 장병과 베트남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 따이한들...

이들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남미에도 이런 라이 따이한들이 많다.
아마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파라과이에선 특히 이러한
라이 따이한의 아류들이 많다.
파라과이에 온 한인 이민자들 대부분은 초기에 벤데업에 종사했다.

이 벤데업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보부상인데,
아직 대형 마트의 물결이나 중국의 여러 상품들이 밀려 오기 전,
그리고 파라과이가 이따이뿌 발전소로 한창 돈이 많을 때,
보부상 형태로 유행하던 장사업의 일종이다.
교통이 불편할 뿐더러, 너무 더워서 어디 나가려고 해도 힘든
오지의 파라과이 사람들에게 가정방문하여
물건을 할부 형식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중간에 대금을 떼어 먹거나 내일 오라는 고객들,
그리고 도로에선 45도에 육박하는 더위를 참아 가며, 돌길,혹은 흙길을
달려야 하는 일로 고수익인만큼 고위험인 직종이었다.
더불어 현지 사람과 직접 상대해야 하는 이 직종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정말 나쁜 사람, 독한 사람, 상종 못할 꼬레아노로 인식이 박히게 되었다.

파라과이는 문화생활이 힘든 나라이다.
파라과이 교민들이 돈을 벌었다 하면, 그 이유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수퍼에서 일해야 하고, 돈 쓸 시간이 없다는 이유가 크다.
교민들은 주로 한국의 드라마를 비데오로 빌려 보면서 향수를 달랜다.
자신을 채울만한 시간도 없이, 한없이 소모해야 하는 것이 장사인데,
모든 문화생활은 뒤로 한 채, 이 고된 직종에 종사해야 하다보니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얼굴이 영 말이 아니게 되어 버리고,
정서적 고갈은 부부간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어찌하든 돈 벌어서 고국에 금의환향하거나, 아니면 미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라 파라과이 사람들에겐 돈만 벌고 뜨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져서인지 현지인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기 일쑤이고,
나중엔 이 벤데업은 사채 놀이 비슷하게 바뀌었다.
그러다가 악명 높은 사채업자 몇이 현지인에게 타살 당하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환경 속에 신앙심으로 버티는 사람,
건실하게 사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국 돈 1천원만 줘도
쉽게 몸을 파는 현지 여자들과의 성적인 향락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많았다.
파라과이 여자들은 체구가 아담하지만 글래머가 많고
또 다리는 유난히 늘씬하고 예쁘다. 얼굴도 남미에서 제일 예쁠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한국남자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 버리기 쉬웠다.

파라과이 길거리에 다니다 보면, 한국아이다 싶은데 자세히 보면
혼혈인 아이들이 있었고, 대부분 거리에 버려진 거리의 아이들이었다.
즉 물건 팔러 온 한국남자들과 현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자라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며 보낸다.
이들을 돕고자 한 선교사님이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버려진 라이따이한들이 지구상에 참으로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고, 맘이 아프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