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Tuesday, January 31, 2012

신라를 속국으로 삼은 왜국, 신라관계 사료들

일본서기

"응신(應神) 22년,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 세력에게 응신왕(應神王)이 여섯 현(縣)을 떼어주었다."

日本年代記

"응신(應神) 22년에 신라軍이 멀리 일본국의 내해까지 쳐들어와 서울의 대판(오사카)에서 겨우 100里 떨어져 있는 명석포(明石浦)에서 응신왕(應神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조선 光海 9년에 도쿠가와 막부를 방문한 통사관 이경직(李景稷, 1577 ~ 1640)이 당시 열람한 일본 비장(備藏) 도서의 하나인 日本年代記를 부상록(扶桑錄)에 옮김)

 일본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학자 松下見林의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진(晉) 원강(元康) 원년(元年) (= 응신(應神) 22년) 신라兵이 일본을 공격해, 깊이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동사강목(東史綱目)"(제 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儒禮王, ? ~ 298) 12년)


"신라는 1만리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의 맹세를 받았다."


 김세렴(金世濂, 1593 ~ 1646) "해사록(海?錄)"

"왜왕 응신(應神)(22년)때 신라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이닥쳤다... 일본이 강화(講和)와 군대 해산을 요청함... 응신(應神) 22년은 유례왕(儒禮王) 8년이었다."


해동역사 권제41 교빙지9 통일본시말 응신천황 22년 조를

“신라병이 일본 깊숙이 침공하여 명석포에 이르렀는데 대판에서 1백리 떨어진 곳이다. 일본인이 화친을 청하고 백마를 잡아 맹세하였다. 적관의 동쪽인데 지금까지도 백마총이 있다(新羅兵攻日本深入明石浦 距大坂百里 日本人請和刑白馬盟 于赤關之東至今尙有白馬塚)”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2년

 12년(29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서불한 홍권(弘權)이 대답하였다.

왕이 '옳다'고 하고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7년(408) 봄 2월에 왕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사람을 정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그들이 오면 막아서 쳐들어와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할 때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왕이 옳다고 하고,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애장왕

七年 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 『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唐憲宗 放宿衛王子金獻忠歸國 仍加試秘書監 秋八月 遣使入唐朝貢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