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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28, 2012

잔혹한 한국인? 서양인 열광 '하멜 표류기' 보니

서구의 식민주의가 정점으로 치닫던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드디어 문호를 개방하자 은둔의 나라를 탐험하려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코리아를 여행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그 체험을 여행기로 남겨두었다. 이들이 기록한 텍스트에 따라 그동안 잘못 인식되었던 코리아의 맨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 세기 말 외국인들이 쓴 텍스트에 등장하는 한국인은 주로 ‘더럽고 게으르며 미개’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비슷한 표상이 덧붙여졌다. ‘겁이 많고 무기력하다’거나 ‘만사태평하고 유약하며 아둔한 한국인’, 그리고 ‘부도덕하며 정신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스스로 통제하는 자질이 없는 한국인’ 같은 표상이 등장했다.
그런 한국은 자신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 텍스트가 맞건 그르건, 한국은 말대꾸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그럴 자신감도 없었다. 같은 시기, 한국에 대한 전혀 다른 표상이 산출되기도 했다. ‘자유분방하고, 쾌활하며 호탕한 민족’, ‘선량하고 관대하며 머리가 명석한 한국인’이라는 평가다.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면 ‘끈기와 열의’를 보이고 ‘상당히 지적이며 놀라운 이해력’을 갖고 있다.
한국인들의 태도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당당하다’거나 ‘일본인보다 일을 더 빨리 배우고 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상도 있었다.
그 러나 한국에 대한 이러한 목소리는 그동안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린다고 해도 당시 형성된 주류 담론을 흔들어 놓기엔 너무 미약했다. 강자의 목소리만 매혹적으로 들리던 시기, 세계의 패권을 쥔 강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힘없는 한국에 대해 쑥덕이고, ‘자치가 부적절한 민족’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1세기 전, 서구 세계가 한국에 대해 쓴 텍스트에는 전혀 다른 의견들이 서로 충돌했다. 서구인들은 한국을 부정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쾌활함과 명석함, 자유분방함과 대범함 같은 긍정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은 주로, ‘나태하고 정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한국’이라는 어두운 표상만을 듣고 알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호탕하며 머리 좋은 한국인’과 같은 매력적인 이미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왜 후손인 우리는 이렇게 유쾌한 표상들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지내온 걸까? 구한 말 서구인들은 한반도에 들어와 똑같은 한국인을 무수히 만났을 텐데, 왜 한국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됐을까? 필자의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관심과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했다.
호랑이 때려잡는 한국인
어떤 유럽인이 이전의 여행기에서 ‘한국인들은 게으르다’라는 글을 읽고 한국을 방문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한국에 머무른 동안 한국인들을 직접 만나서 체험하지 못한다면 ‘한국인이 게으르다’는 정보를 수정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이전에 읽었던 텍스트대로 ‘한국인은 게으르다’라는 말을 덧쓰게 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 유럽인이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인들과 충실하게 교류했다면 어떻게 될까? 최소한 한국인이 게으른지 그렇지 않은지, 한국에 오기 전에 품었던 편견을 검증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일을 열심히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한국에 관한 여행기를 쓸 때, ‘한국인들은 성실하다’고 기록할 것이다(물론 교류하고 나서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나태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가 됐든 한국인과 교류했느냐 교류하지 않았느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한국인들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텍스트가 뭐라고 했건 예전의 학자와 보고서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훨씬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세로 한국을 쓰는 것이다.
구 한 말, 서구인들이 남긴 여행기에는 이렇듯 한국인과 나눈 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리고 교류의 양상에 따라 한국을 인식하는 태도 또한 달랐다. 대체로 한국인들과 긴밀히 교류했던 사람들은 한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한국인과 교류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보고 돌아간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부정적이고 틀에 박힌 인상을 남겼다.
영국 기자 프레드릭 매킨지는 다양한 계층의 한국인을 만나 적극적으로 교류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매킨지는 “한국 사람들을 좀 더 알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친절하고 악의를 모르며 진리를 탐구하고, 또 매우 사랑스러운 성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보다 더 열등한 민족이 4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을 동화시킨다니,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일본은 자신들의 능력은 과대평가한 반면 한국인은 과소평가했다”고 썼다.
스 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여행가이드인 한국 청년과 우정을 나누며 한국과 일본의 인식을 바꿨다. 일본에 대해 매혹적인 인상을 가졌던 그는 한국에 와보니 일본은 ‘자화자찬’하고 있으며 개화한 나라가 아님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인들은 머리가 명석’하고, ‘동면에서 깨어나면 독창적인 탐구심으로 불타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는 한국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뾰족한 자갈길을 걷는데 가죽신보다 ‘짚신’이 유용했고, 한국의 ‘온돌’은 어느 나라에서도 터득하지 못한 난방기술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을 경험해보지 않고 악의적인 편견을 쏟아내는 서구의 여행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2년간을 도쿄에 머물다가 한국의 미국공사관으로 부임한 윌리엄 샌즈는 누구보다도 일본과 한국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샌즈는 “한국인보다 더 다스리기 쉬운 백성은 없다. 한국인들은 절망적으로 학대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비겁하다는 말도 옳지 않다고 했다. 1866년과 1871년, 프랑스와 미국이 각각 침입했을 때 수병들에 항거한 사람들은 ‘호랑이를 때려잡는 한국인’이었고, ‘훌륭한 자질을 가진 농민’이었다. 그는 “일관되고 정직한 통치만 이루어졌다면 한국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으로 육성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과 교류할수록 긍정적 평가
이 렇듯 한국인을 주의 깊게 관찰했던 서구인들은 이전의 텍스트가 뭐라 하던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썼다. 이들은 한국이 식민 지배를 받을 만큼 열등한 종족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도리어 화살을 돌려 세계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쏟아내는 편견에 맞서고, 힘으로 한국을 지배하는 일본의 식민주의에 저항했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을 섬세하게 경험하지 않고 돌아간 서구인들은 한국에 대해 판에 박힌 인상을 남겼다. 영국의 정치인 조지 커즌은 한국인들과 교류하지 않고도 한국인은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부도덕하다’고 썼다. 훗날 인도 총독이 되는 커즌이 한국을 찾은 것은 한국인과 일일이 교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 국을 누가, 어떻게 지배하는 게 좋을지 세계지도를 분할하는 문제만이 중요했던 그에게 조선인들의 기질이나 개성을 포착하는 일은 관심 밖이었다. 조선인이 ‘나태하고 무기력하다’는 표상은 그로부터 30여 년 후, 영국인 소설가 헨리 드레이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영국 제국주의의 우월감과 인종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이 두 사람은 한국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견해도 산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의견을 바꾼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 민속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한국을 여행한 초기에는 전근대적인 한국을 한탄했고 일본의 근대성을 예찬했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과 교류하면서부터 그는 차츰 ‘문명과 독립의 딜레마’에 빠진 한국에 점차 감정이입하기 시작했다.
그도 또한 러시아 치하의 식민지인이었다. 현지인과 상호교류가 깊어질수록 그는 한국의 비극을 인식하고, 자신이 처한 식민적 정체성을 생각했다.
이 렇듯 한국인들과 나눈 ‘상호교류’의 양상은 한국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행자들의 ‘국적’이나 ‘직업’적인 성향도 한국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 인식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지만 ‘상호교류’에 비하면 그 정도는 미미하고 일관되지 못했다.
앞으로 필자는 이 연재물에서 1890~193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이 남긴 여행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인들과 어떤 교류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상호교류에 따라 ‘어떻게 한국을 인식했는지’를 심도 깊게 탐구할 것이다. 국적으로는 영국·미국·독일·스웨덴·러시아이며, 직업으로는 정치인·기자·화가·소설가·학자 등을 망라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개항 이전 그러니까 한국이 서구인들에게 합법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던 1880년대 이전에 한국은 서구와 어떤 경로를 통해 조우해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는 일도 흥미로울 듯하다.
19 세기 후반 서구인들이 한국을 찾기 전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아마 13년간 한국에 억류됐다가 탈출한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1668)일 것이다. 왜 당시 200년도 더 지난 이 책을 여행자들은 좋아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책은 유럽에서 한국을 이야기하는 첫 단행본이었고, 이 책을 쓴 하멜은 직접 한국에 살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 여행자의 필독서 <하멜 표류기>
< 하멜 표류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한국이 유럽에 소개된 적이 아주 드물었다. 한국을 처음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인 그레고리 오 드 세스뻬데스라고 알려져 있다. 세스뻬데스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천주교도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의 군목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남해안의 웅천항(熊川港)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그는 이때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편지에 적어 본국으로 보냈다. 이 편지가 1601년 <선교사들의 이야기>란 책에 실리면서, 한국을 언급한 최초의 텍스트로 알려지게 됐다.
그 후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해 남긴 <동방견문록>에 한국이 ‘카울리’라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으로 잠깐 언급된 적이 있었다. 17세기 중엽,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인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1655년 <새 중국 전도>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반도로 표시된 지도와 함께 한국의 역사와 지리·풍속·지하자원 등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티니는 중국에서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꾸며 한국을 진주와 금이 풍부한 보물섬 같은 이미지로 가공했다. 당시 이국적인 소재에 열광하고 있던 유럽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도 1665년에 라틴어로 된 <역사적 서술>이라는 책에서 한국을 소개했다. 그러나 아담 샬은 마르티니와 사뭇 달랐다. 그는 직접 한국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사실 한국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한국에 관해 아주 조금밖에 모르며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아주 일부분만 번역되어 알려졌다. 한국에 관련된 정보를 유럽의 서적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중략) 한국의 국민과 자연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1653 년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떠나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향하던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스페르웨르 호’가 제주도에 남파되었다. 배에 타고 있던 64명의 선원 중에 36명이 한국 땅에 표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의 왕(효종)이 있는 서울로 끌려가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전라도 지역에 유배되어 살게 된다.
그러나 13년 후, 하멜과 7명의 선원들은 한국을 탈출해 일본을 경유하여 고국으로 돌아간다. 1668년에 하멜은 네덜란드에서 <하멜 표류기>를 썼는데, 이 책이 유럽에 한국을 소개한 최초의 단행본이 된 것이다.
하 멜이 이 책을 쓴 목적은 한국에 억류되었던 13년간의 일지를 적어 그동안 받지 못한 봉급을 동인도회사에게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10년 넘게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던 하멜이 자신을 억류한 나라에 대해 객관적이고 충실한 재현을 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앞에는 생활을 연도별로 기술하고, 뒤에는 ‘한국에 관한 기술’을 붙여 주로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기술한다.
13년간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전반부에는 제주도에 표류되어 서울로 호송되기까지 1653~54년과, 한국인 친구를 꼬드겨(섬에서 솜을 사오면 이익을 몇 배 되갚아주겠다고) 구입한 배로 탈출에 성공하기 직전의 1666년이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나머지 10여 년간은 몇 단락의 묘사로 그쳤다.
17세기 중반 불시에 한국에 표류하게 되어 벽안의 눈으로 한국을 기술한 점에서는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그러나 뒤에 덧붙인 ‘한국에 관한 기술’을 보면, 한국인의 생활상에 대해서 가끔은 꼼꼼하게, 또 가끔은 성의 없는 태도로 혹은 피로하고 억울한 기분으로 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잔인한 형벌로 본 ‘야만의 나라’
하멜은 한국인이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농후해서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가 “기독교도인 우리 유럽인이 부끄러울 정도로 선한 사람들”이라고 썼다. 한국인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를 한 양 우쭐댄다”라고 했다가, “성품이 착하고 매우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어서 원하는 대로 속여먹을 수 있다”고 쓰기도 했다.
“한 국 사람들은 연장자를 공경하고, 아이들은 밤낮으로 독서를 하며, 어린애들이 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보면 정말 경탄할 만하다”고 쓰는가 하면, “양반이나 중들은 절에서 유흥을 즐기는 무리로, 한국의 사찰은 ‘매춘굴’내지 ‘술집’과 같다”고 쓰기도 했다.
한 나라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을 테니 하멜이 비록 모순되는 묘사를 했다고 해도 어쨌든 이 책은 하멜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진귀한 책이다. 그런데 형벌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하멜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잔혹한 묘사를 남겼다. 이러한 형벌제도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하멜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묘사 하나만으로 한국이 얼마나 기괴하고 끔찍한 야만의 나라인지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남편을 죽인 아내는 많은 사람이 통행하는 한 길가에 어깨까지 땅에 묻는다. 그녀 옆에는 나무 톱이 놓여 있는데,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나무 톱으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한 번씩 목을 쳐야 한다. (중략) 사람을 살해한 자는 이렇게 처벌된다.
즉 그들은 식초와 더럽고 구역질 나는 물로 희생된 시신을 씻고 난 뒤의 오수를 배가 찰 때까지 깔때기로 받아 마신 후, 배가 터질 때까지 그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들겨 맞는다. 이 나라에서 절도범은 엄중하게 처벌받지만 그럼에도 절도범이 상당히 많다. 절도범은 보통 발바닥을 때려서 서서히 죽게 한다. 간통을 하거나 기혼 부인을 납치한 자는 그 여인과 함께 발가벗기거나, 때로는 얇은 속옷만 입히고 얼굴에다 석회를 칠한 채로 온 마을을 돌아다니게 한다. 두 사람의 귀는 화살로 연결시킨다.”
<하멜 표류기>가 나온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한국과 서양은 단절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한국은 개항을 한 1876년경까지 서구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서양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국 국경을 통해 입국하여 몰래 포교 활동을 펼쳤을 뿐이다. 이들은 성경을 번역했으나 한국에 관한 저서를 남기진 않았다.
1870년대, 한국에 대한 또 다른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1874년, 프랑스인 달레 신부가 프랑스어로 쓴 <한국교회사서론>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쓴 달레 신부는 한국에 와본 적이 없었고, 한국에서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던 다블뤼 주교가 보내준 자료들을 모아 책을 엮었다.
달 레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 선교사들은 한국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기에 포교와 발각, 처형이라는 끔찍한 순환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한국을 제대로 보았을 리 없다. 이 책에서 한국은 주로 ‘더럽고 미개하며, 풍속이 부패한’ 나라이고, 한국인은 완고하고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라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1882년에는 미국인 자연과학자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도 서구인들이 꽤 많이 읽은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쓴 그리피스도 한국을 체험하고 쓰지 않았다. 그리피스는 1870~74년간 일본의 동경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강의했는데, 일본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던 중 일본을 알려거든 한국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달레 신부의 책이나, 서구나 일본·중국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이용해서 방대한 분량에 달하는 한국사를 저술했다. 머리말 뒤에 붙인 수십 종의 참고문헌들은 자신의 한국에 와보지 않고 한국사를 저술한 ‘결점’을 감추기라도 하듯 몇 페이지에 걸쳐서 방대하게 나열되어 있다.
자연과학자로서의 수집력은 대단했으나 자료를 취합한 백과사전식 서술에 불과했고, 책 어디에도 ‘작가’가 살아있는 듯한 숨결은 느낄 수가 없다.
19 세기 말 한국을 찾은 서구의 여행자들은 이 세 권의 책(하멜과 달레 신부, 그리피스)을 즐겨 읽었다. 필자가 앞으로 중점적으로 다룰 서구인들이 쓴 책을 보아도, 이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이전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은 하멜이었고, 그 다음은 그리피스, 달레 신부 순으로 읽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은 거의 모두 이 세 권의 책들의 ‘결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멜의 결점은 한국에 직접 살았지만 그때는 200년도 더 지난 ‘옛날’이었고, 달레 신부와 그리피스의 결점은 한국에 와보지도 않고 책을 썼다는 것이다.
이 결함 때문에 이 책을 대하는 서구인들의 태도는 묘했다. 때로는 책의 내용을 신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심하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야말로 이제 한국이라는 생생한 공간으로 들어가니 이 책들의 결점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한국서’를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개항 후,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서구인들의 눈에는 이미 하멜과 달레 신부, 그리고 그리피스의 인식의 거미줄이 쳐있는 것과 같았다. 현지인들과 충실하게 교류하지 않는 한 그 거미줄을 걷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생생한 공간에서 한국인들을 직접 만나 교류한 서구인들을 만나볼 차례다.


http://m.koreadaily.com/read.asp?art_id=134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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