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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4, 2011

일본 역사의 고대 국가 형성은 백제인(百濟人)·신라인(新羅人)이 주역이었다!

⑴ 백제계(百濟系)의 대화개신(大化改新)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 가운데 645년 ‘대화개신(大化改新)’ 사건과 672년 ‘임신변란(壬申變亂)’ 사건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역사를 얼마나 심하게 왜곡해 놓았는가를 알 수 있다. 다만 그 왜곡된 부분을 잘 분석하면 왜국(倭國)은 백제계(百濟系) 후국(侯國), 야마토국[大和國]은 신라계(新羅系) 후국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선 대화개신의 경위는 이러하다.『일본서기』에는 이 사건을 나카노 오에 왕자[中大兄王子]가 궁중행사 때 백제 무왕(武王)의 딸인 고오쿄쿠여왕[皇極女王] 면전에서 실권자인 소가 이루카[蘇我入鹿] 일족을 참살한 일로 기록하고 있다. 645년 6월 13일에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처음에는 ‘을사사변(乙巳事變)’이라고 했다. 사건 직후 고모도쿠왕[孝德王]이 즉위하여 연호를 ‘대화(大化)’로 정함에 따라 ‘대화개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연호이다. 대화는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연호인 대화(大和)에서 후일 대화(大化)로 변조한 것이다.



백제계의 나카노 오에가 권력을 장악했는데, 백제계의 고오쿄쿠여왕이 4년만에 갑자기 몰락하고 신라계의 고모도쿠왕이 즉위했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나카노 오에는 왕세자(王世子)로서 22년 동안 나니와[浪速]와 아스카[飛鳥]·오오츠[大妻] 등 5개의 궁중을 전전했다고 한다. 왕세자가 이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닐 위치일까? 실은 그는 초기에 북규슈[北九州]에 있었다. 이 행적이 가장 중요한데, 일본 역사서들에서는 배제해 버렸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이기 때문이다.



나카노 오에가 후일 텐지황제[天智皇帝]가 되어 왜국을 통치한 것으로 왜곡해 놓은 것이다. ‘텐지’는 죽은 후의 시호(諡號)로 ‘상국(上國)에 복종하여 슬기[智]를 다했다’는 의미이다. 모국(백제)이 따로 있었고 왜인(倭人)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타당한 것은 이 때문이다.『일본서기』에서는 그를 일본인으로 왜곡하여 자랑하고 있지만 실은 백제 출신의 왕자인 것이다. 백제 패망과 백촌강전투(白村江戰鬪) 등 그의 행적을 보면 명백하다.



⑵ 신라계(新羅系)의 임신변란(壬申變亂)



『일본서기』에서는 임신변란을 671년 6월 24일 오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가 텐지황제[天智皇帝]가 자기 아들인 오오토모 황자[大友皇子]에게 세습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오오토모 황자를 제거하고 정권을 빼앗은 사건이라 했다. 오오아마 황자가 나라[奈良]의 요시노[吉野]에 은거하고 있다가 급습한 것이다. 백촌강전투(白村江戰鬪)에서 패배한 8년 후의 일이다. 또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국 땅에 당나라가 군정을 펴 지배기반을 구축하려 하자 이들을 신라가 물리친 해이기도 하였다. 당시 텐지황제의 오오미 조정의 연호는 홍문(弘文),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 재위 12년의 연호는 태세임신(太歲壬申)이었다. 일본의 텐무황제[天武皇帝] 재위 원년에 해당한다. 텐무황제는 신라계이므로 신라 연호를 따른 것이었다.



오오아마 황자가 권력을 잡은 후 텐무황제로 불렸는데, 신라 본국(本國)에서 “천하를 판가름하는 모국[天]의 대업에 무용(武勇)을 다하였다”하여 천무(天武)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일본의 마흔번째 제왕인 텐무황제[天武皇帝]가 일본으로 건너 간 신라의 왕족 김다수(金多遂)였다고 역설했다.



⑶ 일본 역사는 8세기부터 시작



그 거세었던 한국계 세력들이 현재까지 존속하지 못하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린 당나라 군사들이 철수하지 않고 한국 땅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하자 이를 몰아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어 왜국에 대한 관리를 소흘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왜국에서도 신라에 대한 관리가 소흘해진 공백기에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이 신라계와 대립하면서 섬나라의 지정학적 여건에 따라 새로운 국명을 제정하여 독자적인 체제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도 병행했던 모양이다. 과거에는 ‘해 돋는 쪽의 왜국’으로 통칭하기도 했지만 정식국명을 제정하는 것이 불가피했음직하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여 통일신라가 수립된 그 해, 왜국에 잔류한 우리 삼국인들은 종래의 ‘해돋는 쪽의 왜국’은 왜소한 종족에서 연유한 것으로 국명으로는 좋지 않다고 해서 한자를 빌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제정하기로 한 것 같다. 사실상 우리 조상들이 일본이라는 국호를 정해 준 셈이다.



일본이란 국명을 제정하기 이전에는 ‘해돋는 곳’으로 불려진 기록이 있다. 607년 왜국에서는 수(隨)에 외교문서를 보낸 바 있는데, 여기에 ‘일출(日出)의 천자(天子)’라는 표기를 했다가 양제(煬帝)로부터 ‘무뢰한 놈’이라는 호통을 받아 쫓겨난 일이 있었다. ‘일출’은 해돋는 곳으로서 문제가 안되겠지만 ‘천자’로 자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면서 왜국 사절을 추방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는 “수나라 황제를 상대로 일본 천황은 일출의 천자라며 대등한 지위를 과시했다”고 하여 당당한 국위선양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문전축출의 창피를 당한 사실은 감추면서 말이다.



일본 역사학자들도 ‘일출의 나라=해가 돋는 근본’이므로 일본인들이 일본 국호를 제정한 것이라며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라면, 중국에서 보면 한국이 해돋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한국을 일본이라고 불러야 한다. 일본에서 보면 태평양 건너의 일출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을 일본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일본이란 국호는 고대 한국인들이 제정해 준 것이 분명하다.



왜국에 잔류한 우리 삼국인들은 과거의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를 역사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역사서 편찬에 눈을 돌렸다. 독자적 체제를 구축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712년 백제 출신의 사관인 안마려(安磨侶)가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 열도에 천손(天孫)으로 강림하여 지배한 신화·전설·노래 등을 모아『고사기(古事記)』를 저술하여 내놓게 되었다. 그 8년 후인 720년에는 편년체의『일본서기』를 편저했다.



그런데 인쇄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음을 감안할 때, 동시대에 두 편의 역사서가 등장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백제계인 안마려가 쓴『고사기』는 자연히 내용에서 백제 편중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신라계의 반발이 심해 다시『일본서기』를 내놓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새출발을 한 후에도 삼국 세력이 뿌리 깊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본래의 원작『고사기』는 백제 중심의 책자이고,『일본서기』는 가야·신라 중심의 역사서였다고도 한다.



이들 책자는 편술 당시에는 삼한·삼국인들의 족적을 충실히 수록한 정사(正史)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일본 열도에서 삼한·삼국인들의 업적, 한반도 출신의 천황 등을 말살하고 그 대신 일본 황실의 한 혈통이라며 조작하였다. 그리고는 잔류한 우리 민족을 귀화인, 도래인이니 하면서 멸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니 배은망덕의 표본이다.



이들 두 사서의 원본은 아득한 옛날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과연 불타 없어진 것인지, 불에 탔다면서 고의로 없애버리고 다시 왜곡된 역사서로 꾸몄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날조와 변조, 가필과 삭제의 수난이 계속된 상처투성이의 비운의 역사서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원서를 해체하여 개찬했을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역사서까지 왜곡시켜 누더기 깁듯 끼워 맞추어 놓았다.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후인 에도[江戶]시대 중기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宣長]가 30여년에 걸쳐 저술한『보증고사기전(補增古事記傳)』을 통해 고대 한국과의 관련 역사를 왜곡시켜 놓더니, 한국 병탄을 호시탐탐 노리던 군국주의 체제하에 메이지시대에서는 더욱 난도질당했다. 그 후에도 어용학자들이 동원되어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계속 변조되었다. 대충 잡아서『일본서기』만 해도 24종류가 나돌고 있다.



이들 일본의 고대 역사서는 더러 인용할 대목도 있으나 중국 고대사와 한국 역사서, 그리고 왜곡을 바로잡기에 노력하는 양심적인 정론파 학자들의 연구서와 대조하는 참고용이 될 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⑷ 야마토[大和] 국명은 김춘추(金春秋)가 작명



『일본서기』에는 “고모도쿠왕[孝德王] 시대에 신라에서 김춘추가 왔다. 미남이고 능변가였으며 공작새 한 마리와 앵무새 한 마리를 머리에 얹고 웃으면서 왜국에 왔다”는 기사가 있다.



두 정상의 만남, 즉 김춘추와 고모도쿠왕을 공작새와 앵무새로 의인화한 것 같다. 김춘추는 신라의 최고위직인 대아찬(大阿飡)으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자였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하기 전인 647년에 왜국에 간 것이다. 왜국에서 율령을 제정하려 한 시기이다. 신라는 당나라가 개국하기 93년 전인 520년부터 율령을 시행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실권을 잡은 후 내정개혁을 위해 이방부령 양수(良守)에게 수(隨)·당(唐)의 율령을 참작하여 수정작업을 추진하게 했다.



이 무렵 왜국에서도 유사이래 최초의 율령 제정을 시도했으며, 그 주역이 백제계의 고향한인(高向韓人) 현리(玄理) 등이다. 그는 ‘고향’이라는 고을에 사는 ‘한인(백제계)’으로, ‘현리’는 고유의 이름이다. 그는 수·당에서 32년간 유학을 마치고 신라 견당사(遣唐使)의 귀국선에 편승하여 신라에 들러 머문 일이 있었다. 백제인이 분명한데 백제에는 간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친신라(親新羅)적이었던 모양이다. 체류기간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의 율령 수정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율령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김춘추는 왜국에 갈 때 현리를 데리고 갔다. 일본 역사서에는 현리가 신라에 처음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 역사서에는 신라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흔적이 있다. 왜국내의 신라계 세력인 오오아마 황자가 백제계 세력을 타도하는 ‘임신변란’을 앞두고 백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왜국을 교란시키기 위해 신라에서 현리를 제2진의 공작대로 파견한 일이 있다.



일본 역사서에는 나카노 오에의 ‘대화개신’ 작업을 유학승들이 당나라에서 배워 제정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 역시 언어도단이다. ‘임신변란’ 이후 오오아마 황자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김춘추는 이들 유학승을 거느리고 가서 고모도쿠왕을 보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춘추는 일본의 고모도쿠왕을 만나 율령을 제정하여 왕권확립을 촉구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에 대한 협력을 협의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당시 신라는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던 시대로 재위 원년부터 4년간 ‘대화(大和)’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에 예속된 상태였기에 당나라의 눈을 의식한 듯『삼국사기』에는 태화(太和)로 기록되어 있고, 그 후에는 아예 당나라의 연호를 썼다. 김춘추가 고모도쿠왕의 대화율령 제정작업을 지도·감독하면서 진덕여왕 초기의 연호를 쓰도록 한 것이다. 신라의 연호가 일본의 야마토국[大和國]의 국명으로 된 셈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야마토’ 국명은 김춘추가 작명해 준 것이었다. 대화개신의 ‘대화(大化)’는 당초 진덕여왕의 연호인 ‘대화(大和)’였던 것을 훗날 바꾼 것 같다.



한편 김춘추는 고모도쿠왕을 만난 이듬해 당나라로 건너갔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여 삼국통일을 성취할 목적으로 당나라와의 군사적 협력을 결속하기 위한 외교행각이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같은 행적을 무시하고 김춘추를 비방·모욕하는 잡설이 난무하고 있다. 야나이 겐지[柳內賢治] 일본문화연구원장은 “일본은 김춘추를 인질로 잡아와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여성을 좋아하여 일본 미녀들과 놀아났다. 탈출을 꾀하던 그는 그녀들의 도움으로 밤중에 탈출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쯤이면 일부 일본 지식층이 역사왜곡에 광란하고 한국인을 경멸하기에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추악한 작태를 벌이고 있는가를 알만하다. 



⑸ 일본 역사학자도 ‘왜국(倭國)과 야마토국[大和國]은 한국의 식민지였다’고 주장



일본의 역사학자인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라 왕족 김춘추가 대화(大和) 3년, 공작새 한 마리와 앵무새 한 마리를 안고 웃으면서 일본에 온 것은 신라가 왜국의 정변과 대화개신(大化改新)의 진행상황을 검열하기 위해서였다. 신라의 다음 국왕이 될 김춘추로서는 배후의 왜국 국정을 신라와 완전히 같은 상황에 두는 것이 필요했다. 김춘추는 자신감을 가지고 정변을 종결짓고, 왜국의 국호마저 바꿔버렸다. 일본의 야마토국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고사기』나『일본서기』에서 일본의 국호를 왜국(倭國)으로 쓰기도 하고,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으로 쓰는가 하면, 일본(日本)이라는 문자까지 혼돈시켜 ‘왜국’이나 ‘대화’, ‘일본’을 모두 ‘야마토’라고 읽게 하고 있다. 이는 일본을 같은 줄기의 역사로 바꾸어 꾸미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대화 5년 고모도쿠왕[孝德王]은 관위(冠位)를 19단계로 하여 8성(省)에 백관(百官)을 두었다. 백제와 신라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피식민지적인 정권이었기에 왜국에 대한 신라의 내정간섭은 오랫동안 주류로서 형성되어 왔다....... 고모도쿠왕은 대화개신 때 맹우였던 구라야마타 기시가와마로[倉山田石川麻呂]가 모반하자 처형하였고, 신라에 급히 특사를 보내 보고하였다. 신라 국왕은 이에 대응하여 사록부(沙碌部) 사창(沙滄) 김다수(金多遂)를 왜국에 급파했다.”



하야시 세이고의 지적은 계속된다.



“『일본서기』에는 김다수가 인질단(人質團)을 이끌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이 없어 행방불명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텐지황제[天智皇帝]와 투쟁한 오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가 바로 김다수이다. 후일 김다수는 텐무황제[天武皇帝]가 된다.『일본서기』에는 오오아마 황자를 텐무황제의 ‘나이 많은 동생’으로 조작해 놓았으나, 나이 많은 동생이 어느 천지에 있다는 말인가? 김다수가 신라인이었기 때문에 변조한 것이다.



한편 백제는 백제군(百濟君) 여풍장(余豊璋)을 왜국에 보냈다. 여풍장은 숙모인 왜국의 고오교쿠여왕[皇極女王]이 폐위되자 왜국 조정을 부활시켜 고오교쿠여왕을 사이메이여왕[齊明女王]으로 다시 즉위시켰다. 신라계와 백제계가 정권 쟁탈의 정변을 벌여 한때 백제계가 장악하게 된 것이다. 왜국내의 정권을 신라인과 백제인이 지배하면서 암투를 벌인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과정에 신라인과 백제인은 타협·혼인도 하면서 야마토 정권을 형성하였고, 오늘의 일본 정권의 원류가 된 것이다.”



지성이 번쩍이고 정의감이 넘치는 노학자 하야시 세이고는 필자에게 “역사왜곡은 국제질서를 무력(武力)으로 교란할 징조요, 후세를 무기화(武器化)할 야욕이며 불행을 자초할 우려가 있다. 역사를 바로잡기에 생애를 거는 것이 애국이다”고 역설했다. 하야시 세이고는 도쿄 도립대학 출신으로 남경대학 객원교수와 오가라 학술기금 운영위원장으로서 일본 역사에 관한 많은 저서를 냈으며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일본인 학자로서 이렇게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으니 더 부연할 필요조차 없겠다.



▶ 출처; 최성규(崔性圭) 著『일본의 역사는 없다.』아시아문화사編(2000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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