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실 1천년 동안에 걸쳐 중국의 수학계를 지배해왔던 <구장산술>에 소개된 높은 수준의 수학 문제도 항상 대규모
치수(治水) 공사와 토목 공사를 담당해야 했던 중국 지배층 관료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들이다. 본래 중국의 수학은 이론을 추구했다기보다도 실용적인 적용을 우선시하는 대수적(代數的)인 특성을 보이면서 발전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자. 이를테면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주판을 발명해 그 계산 능력과 실용주의적 효용성을 마음껏 향유해왔다.
그러나 주판의 그 편리한 실용성이 정작 중국인에게는 수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효율성이
뛰어난 주판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편의성에 빠져 오히려 다른 고급대수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주판은 십진수의 배열에 국한되어 있어 장기적으로는 도리어 수학의 근본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수학은 오직 ‘수를 셈 하는’, 문자 그대로 ‘산수(算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은 오직 ‘눈앞의’ 실용주의만을 추구하다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용주의 그리고 가장 큰 실용주의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자와 컴퍼스를 이용한 작도(作圖)로 수학을 연구했다. 이러한 장기적 과정을 통해 비록 산술의 분야에 있어서는 동양이 분명하게 앞서게 되었지만, 반면에 기하의 분야에서는 서양이 월등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
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플라톤이 건립한 아카데미의 출입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라”라는 유명한 경고문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이후 서양에서 수학은 17세기에 데카르트가 x축과 y축의 좌표 축 개념을 도입해 포물선 등의 기하학적
도형을 이끌어낸 데서부터 고급 대수학의 싹을 틔우며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기하학을 토대로 해 물리학을
비롯한 현대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석 기하학 토대로 물리학 발전시킨 서양과 대조
이 러한 동서양 수학의 역사적 경험은 실용주의의 아이러니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비단 수학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단지 목전의 ‘실용주의’라는 단기적인 이익과 목표 실현에만 몰두할 경우, 결국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발전과 혁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서양이 중국보다 앞서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근대 사상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특 히 천부인권설을 비롯해 사회계약설과 삼권분립 사상은 중세 서구 사회를 질곡화했던 중세적 세계관으로서의 종교 중심적 사고와 절대주의 시대의 왕권신수설을 극복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함으로써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인 사회 및 국가 조직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토대와 사회 구조 위에서 비로소 서구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는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기에 걸쳐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군주 1인의 천하 체제가 강력하게 유지되면서 오직 인간들을 통치와 지배 대상으로만 간주해왔다. 따라서 개인들의 창의력이 발현되기 어려웠고, 결국 사회전체가 건강하고 활력 있게 조직되지 못한 채 도리어 억압되면서 갈수록 정체 내지 퇴보하는 현상을 낳았다. 특히 이러한 중국 사회의 약점은 대부분의 역사 과정에서 지나치게 실용주의만을 추구해온 중국의 특성과 결합되어 사회의 역동적 에너지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 총체적으로 시대에 낙후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중국에서는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관료주의에 의해 창조성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근대 과학이 성장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서구는 합리성에 토대를 둔 자유롭고 열린 토론과 소통을 통해 근대 과학을 화려하게 개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실용주의의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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