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일본 왕실의 기원
일본
왕실은 본래 가야와 백제의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운 왕조입니다.
원주민에 비해 높은 문명을 소유한 이들은 일본에서 존경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왕실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추앙 받은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정부가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 왕실을 신격화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주민에 비해 높은 문명을 소유한 이들은 일본에서 존경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왕실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추앙 받은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정부가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 왕실을 신격화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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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후손
2.
근대권력 ‘천황폐하’를 만들다
3.
일본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풍속
1.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후손
백제가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게 멸망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일본에 있던 그의 누님인 제37대 '제명(齊明,
사이메이)일왕'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중에 제명일왕이 죽자, 제명일왕의 조카이면서 일찍이 왜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인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이 이끄는 구원군은 나ㆍ당연합군에 대항하지만 서기 663년 금강(錦江)하구로 추정되는 곳(일본 문헌에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서기 663년 최후의 거점인 주유성(州柔城 또는 周留城)이 함락되자, 일본열도에서는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에도 이제 다시 못가게 되었구나"라는 비통의 노래가
유행했다고《일본서기》(663년 천지(天智)2년 조(條))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열도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또 한번의 소용돌이를 칩니다.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해 들어오자 일본열도의 백제계는 다시 뭉치게 됩니다. 백제 재건의 꿈이 무너지자 중대형은
나ㆍ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일본 각지에서 산성(山城)을 서둘러 쌓는데 전력투구하였습니다.
산성쌓기는 66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북규슈 후쿠오카현(福岡縣)에 태재부(太宰府)를 건립하고, 그 주변에 백제식 토성(土城)을 쌓아 신라군이 공격해 올 경우 수공(水攻)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城)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는 높이 14m, 길이 1.2km, 기저부의 폭이 80m나 되었습니다. 뒷산에는 백제의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백제산성을 모방하여 축성한 성이 8km에 걸쳐 토담과 석벽으로 산의 정상부를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667년에는 대마도의 하도(下島, 시모섬)에도 축조했습니다. 이 대마도 산성이 유명한 금전성(金田城, 가네다노키)으로 러ㆍ일전쟁 때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대포 등을 놓고 요새로 삼았습니다. 7세기 후반에 쌓은 이 산성이 20세기 실전에 쓰일 정도로 견고하게 잘 쌓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당시 백제인의 높은 건축기술 수준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제38대 천지(天智)일왕이 된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은 668년에 왕으로
정식 즉위하고, 백제계 중심의 왕권을 강화합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혈통인 중대형이「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데 '일본(日本)'이란 국호는 서기 670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제40대 일왕이 된 천무(天武)는 도읍을 다시
아스카(飛鳥)로 옮겨 이른바 왕족과 일반 호족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 일왕 중심으로 씨성제(氏姓制)를 재편성하고, 193개의 성씨(姓氏)를
하사하여 지배계층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천무일왕이 죽자 그의 부인이 왕이 된다. 제41대 지통(持統)일왕은 이름 그대로 전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일왕의 이름을 지통이라 했고, 백제계 중심의 호적을 재편성하고, 백제계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2.
근대권력 ‘천황폐하’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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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찍은 위 왼쪽 사진은 공식 궁정복 소쿠타이 차림에 수염이 없는 군주 메이지의 앳된 얼굴이다. 반면 바로 그 이듬해에 찍은 위 오른쪽 사진에서는 몸에 딱 맞는 서양식 군복을 입고 머리는 짧게 잘라 가르마를 탔으며 수염을 길렀다. 친정을 펼치기에 어울리는 적극적이고 남성화한 이미지로 바꾼 것이다.
왼쪽
그림에서 군기를 든 기마부대가 지나가고 눈앞에는 이제 막 화려한 서양식 궁정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아낙부터 멋들어진 실크햇을 쓴 서구풍
신사까지, 길가에 늘어선 백성들의 눈길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맨 앞의 노인들은 절로 엎드려 신민의 예를 표하고 있다.
책의 표지는 1906년 러-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일본 왕(천황)의 개선관병식을 그리고 있는 석판화다. 지금 봐도 ‘모던’해 보이는 이
표지는 책의 내용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차에 탄 왕의 얼굴은 길가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 때문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앞좌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종장의 모습을 통해 이 권력자의 위치와 권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군중과 수행원들이 권력의 소재를 드러내
보여도 바라보는 백성들은 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어왔다는 일본의 왕은 아직도 반신반인의 존재다. 인간을 초월하므로 그에게는 성(姓)도 없다. 이러한 왕의 관념적
이미지는 너무나 강해서 주변국인 우리조차 그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다. 그러나 그가 지금 같은 존재가 된 것은 불과 일백수십년 전의
일이다. 막부 통치를 끝내고 근대 제국주의 시대를 연 일본의 정치엘리트들이 새로운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허울뿐이었던 존재를 부각시키기 전까지,
평범한 일본 민중들은 왕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결국 이는
근대에 ‘발명’된 시스템인 것이다.
천황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책 표지 그림은 그 본질을 명쾌하게 드러내 보인다. 천황이란 결국 일종의 ‘국가적 미장센’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은 이런 관점에서 메이지와 함께 개선관병식 행진과 같은 다양한 ‘패전트’ 곧 국가의례 또는 공식의례를 통해 일본 근대 권력의 창출과정을
문화사적으로 들여다본다. 지은이 다카시 후지타니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으로 샌디에이고대학 역사과 교수로 있는 일본 연구가다.
후지타니는 메이지가 당시 지배층들에 의해 철저하게 국가 패전트로 활용됐다고 분석한다. 이를 만들어낸 자들은 왕을 이용해 국민들을 근대화
물결에 동참시킨 동시에 그들 역시 왕의 권위에 절대 복종한 ‘확신범’들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바로 그
주역들이다. 이들은 왕을 신비하면서도 가시적이고, 초월적이면서도 관여하고,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사에서 면제되면서도 국가의 모든
성취를 책임지는 이원적 존재로 만들었다. 극적인 국가의례가 논리적으로 지탱하기 힘든 이원성을 현실화했다.
지은이는 메이지 정부가 많은 기억 못지않게 수많은 망각, 곧 자신의 기억을 만들어낸 기원과 일본 국민의 근대성이라는 패권적 프로젝트에
적합하지 않은 다른 모든 경험에 대한 망각까지 함께 생산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일본의 근대와 ‘천황제’를 근원적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누구의 전통인가” 일본인 모두에게 국가적 표상의 오만방자함을, 즉 국가적 표상의 정치를 문제 삼도록 촉구하려는 질문이다.
한겨레 2003.11.14.
http://www.aspire7.net/belief-1-19-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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