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진 묘지 |
예군 묘지명 덮개 |
다만 이 묘지명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낳기도 했다.
묘 지명에 의하면 예식진은 "함형(咸亨) 3년 5월25일 향년 58세로 죽어" "그해 11월21일 (장안의) 고양원(高陽原)에 장사를 지냈다"고 해서 그가 묻힌 곳은 분명히 당시 당나라 서울 장안(長安)으로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묘지명이 정작 발견된 곳은 뤄양이다.
나아가 묘지명에 나타난 행적을 볼 때 예식진이 바로 구당서(舊唐書) 소정방열전(蘇定方列傳)에 보이는 대목인 "그(백제) 대장(大將)인 예식(예<示+爾>植)이 또한 의자를 데리고 항복했다"에 등장하는 예식과 같은 인물일 가능성은 무엇보다 컸다.
이런 의문점들은 2010년 봄, 시안 시내 한 공사장에서 예식진과 그의 아들 예소사(素士), 손자 예인수(仁秀) 일가족 무덤이 동시에 발견됨으로써 풀렸다. 특히 이들 가족묘에서는 예소사와 예인수 묘지명이 동시에 출토되고 기존 예식진 묘지명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예씨 가족 내력이 드러났다.
예식진 무덤은 발굴 이전에 도굴됐지만, 세 무덤 중 한 곳임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시안에서 도굴된 그의 묘지명은 출처를 숨기기 위한 일종의 '세탁' 과정에서 뤄양으로 흘러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들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직계 선조는 두 음절 이름 중 한 글자만으로 쓰기도 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예식진'이 곧 구당서에 보이는 '예식'임이 확연히 밝혀진 것이다.
백제에 뿌리를 두는 이들 예씨 가문 묘지명은 하나가 더 있다. 지난해 일본의 언론보도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진 예군(예<示+爾>軍) 묘지명이 그것이다.
이 묘지명은 그해 7월 중국 지린(吉林)대학 고적연구소 연구원이 학술잡지에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졌지만 현재까지도 그 출처와 소장처는 파악되지 않는다.
예군 묘지명에 일본이 관심을 촉발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곳에 '日本'이라는 국호가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왜(倭)라는 명칭을 버리고 '일본'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0년(670)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렇지만 실제 일본이라는 표기를 사용한 동시대 금석문으로는 713년 작성된 당나라 서주자사(徐州刺史) 두사선(杜嗣先) 묘지명과 717년 제9차 견당사(遣唐使) 일원으로 당에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734년에 사망한 정진성(井眞誠) 묘지명이 가장 빠른 사례에 속한다.
이런 사정에서 예군이 세상을 떠난 678년 10월에 만들어 무덤에 넣은 예군 묘지명에 등장하는 '일본'이라는 표현은 현재까지 발견된 '일본'의 국호 표기 사례로는 가장 빠른 시기 자료가 된다.
하 지만 예군 묘지명에는 한국고대사와 관련해 훨씬 더 중요한 언급이 있었다. 첫째, 예군이 예식진에게는 두 살 많은 형으로서 백제 멸망 당시에 동생과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둘째, 그의 선조가 백제 토착인이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한 후손으로 등장하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해 이 묘지명은 "그 선조는 중화와 조상을 같이한다"(其先與華同祖)라고 밝히고서 그 선조가 "영가(永嘉) 말년에 난을 피해 동쪽으로 와서 가문을 이루었다"고 언급한다.
영 가란 서진(西晉) 왕조 마지막 황제인 회제(懷帝) 때 사용한 연호(307-313년)다. 이 무렵 서진은 내란에다가 북위 탁발씨의 발흥으로 멸망하고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 동진(東晉)을 건국한다. 이 무렵 시대 혼란상을 역사에서는 흔히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 표현할 정도로 유명하다.
예군 묘지명에서 보이는 이런 인식은 이번에 새롭게 보고된 예소사-예인수 부자 묘지명에서도 공통으로 보인다.
하 지만 같은 가문에서 동시기, 혹은 비슷한 시대에 기록한 묘지명마다 예씨 가문이 귀화한 시기에 대한 증언이 달라 그 진실성은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길이 없다. 예식진의 아들 예소사 묘지명에는 예씨 가문이 백제로 온 시기를 410-420년 무렵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예소사의 아들 예인수 묘지명에는 수나라 말기 때 동래자사인 예선(善)이 백제로 오면서 백제 예씨는 시작했다고 한다.
이 번에 이들 예씨 가족 금석문을 일괄로 소개한 김영관 제주대 교수는 이 가문이 중국에 뿌리를 두는 가문이라는 묘지명 기록을 신뢰하지만, 김 교수 자신도 인정했듯이 백제에서 건너간 가문으로서 중국 본토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족보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 묘지명에는 예식진 아버지와 조부가 백제에서는 모두 정1품인 좌평(佐平) 직을 세습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아 무튼 예씨 일가족 묘지명 사이에 미세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가문은 맨 아래인 예인수를 기준으로 가계를 재구성하면 예인수→예소사→예식진→예선(善) 혹은 예사선(思善)→예예(譽) 혹은 예예다(譽多)→예복(福)→탈락→탈락→예숭(嵩)의 순서로 정리된다.
http://m.koreadaily.com/read.asp?art_id=134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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