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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10, 2012

한니발-로마의 생존을 위협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로마의 생존을 위협한 카르타고의 명장)

아버지와의 맹세
그 의 아버지인 하밀카르는 사막의 사자라 불리우며,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괴룝혔지만, 결국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다.그 후 그는 그의 아들인 한니발과 스페인 남부를 점령했다.그곳에서 하밀카르는 한니발에게 영원히 로마의 적이 되라고 맹세를 시켰고, 그의 아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에브로 강을 넘어서
카 르타고노바에서 병력을 모은그는, 로마의 동맹시인 스페인의 사군툼을 공격해서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그 후 한니발은 37마리아 코끼리와 누미디아 기병등으로 구성된 5만의 용병을 이끌고 에브로강을 넘어서 갈리아로 치고 들어가고 또 론강을 넘고 다시 한번 알프스 산을 거의 병력을 잃지 않고 넘어서서 재해권을 쥐고 있는 로마와 바다에서 싸움을 하지 않고 육로로 기적같이 넘어오는데 성공했다.

명장의 진가
한 편 한니발은 육로에서 로마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이탈리아의 숨통을 쥐이고 있었다.트레비아 회전에서 1만5천명에 이르는 로마인이 사망했고, 트레시메노 호수 전투에서는 본격적으로 기병을 활용해서 로마인을 무려 2만이나 죽이고 계속해서 이탈리아 남부로 밀고 내려갔다.그 사이에 그는 갈리아인들로부터 동맹을 얻어냈고, 병력도 거의 줄이지 않았다.

최고의 포위전, 칸나에 회전
한 편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독재를 그만두고 테렌티우스 바로를 중심으로 대규모 군사를 모아서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 칸나에로 진격하는데, 한니발군은 5만, 로마군은 8만 이었다.하지만 한니발은 기병대를 후방으로 보내서 적을 뒤에서 포위하고 양옆에서는 예비 보병대를 돌격시켜 로마군의 측변을 포위한다는 대 포위 전술을 구사했고, 1916년의 포전투 이전까지 하루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낸 이전투는 무려 6만이상의 로마군이 죽는 참혹한 일로 끝났다.

불리해지기 시작한 정세-스키피오의 역습
하 지만 그 후 다시 시작된 지연전술과 로마 동맹의 확고함이 그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왔고, 그의 동생을 지휘관으로 한 한니발의 지원군이 로마군에 의해 격파됬고, 승리를 자만하고 있던 스페인에서도 스키피오 형제의 아들인 스키피오고 2만의 군사로 스페인 전역을 정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하지만 한니발이 할 수있었던것은 카푸아에서 앉아있는 것 뿐이었다.그리고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자,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본국으로 소환하는수밖에 없었다.

자마전투-영웅의 발악
하 지만 한니발이 귀환하자, 카르타고는 평화협정을 무효라 선언한후 한니발에게 대규모의 신병을 주어 로마와 싸우게 했다.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경험없는 신병이었고 그의 전술을 완성해줄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편에 가담했다.그런 상황에서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가 벌어졌다.한니발은 자신의 이탈리아 베태랑 보병을 마지막까지 아껴두는 전술을 구사해서, 스키피오에게 거의 이길뻔 했으나, 적 기병이 때마침 뒤를 포위해서 패배했다.하지만 이는 우연이었고, 기병이 한니발의 뒤통수를 치지않았다면 스키피오는 패했을 것이다.어쨌뜬 자마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한니발은 그뒤 카르타고에 머물다가 로마의 추격으로 지중해 곳곳으로 망명했다.

오!카르타고여!나를 용서해다오!!
하 지만 바알신도 한니발을 버린듯했다.비티니아에 까지 로마의 추격은 계속됬고, 결국 비티니아 왕으 자신을 로마에 넘겨주려 하자 그는 독약을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로마를 한 늙은이로부터의 두려움에서부터 구해주자."한니발은 그렇게 죽었다.근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스키피오도 같은해에 로마정부로부터의 탄압으로 망명지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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