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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December 12, 2011

소공동 화교들이 떠나게 된 뒷 얘기

1966년 10월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으로 서울의 도심 재개발이 촉진됐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존 슨 대통령의 방한은 김포공항에서부터 한·미 두 나라의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시청 앞 환영식을 중계하던 각국의 TV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은 35분간 진행된 행사를 계속 방영하는 게 지루하다고 생각했는지 시청 주변 지역으로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했다. 시청 맞은 편에 있는 초라한 모습의 중국인 마을이 가장 먼저 카메라에 잡혔다. 이어 카메라는 중국인 마을 뒤편 남창동·회현동을 거쳐 남산 중턱까지 비췄다. 낡은 일본식 주택과 판잣집이 빽빽이 들어선 이 일대의 모습이 TV를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됐다. 3∼4층짜리 한국은행·신세계백화점이 고층건물에 속하던 때였다. 이를 계기로 66년 말과 67년 초 재미동포들이 청와대에 '서울시청 주변의 슬럼을 깨끗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70년 6월 11일자 중앙일보는 서울 도심 재개발 계획을 특종 보도했다. '태평로2가·소공동에 있는 화교(華僑)상가를 현대화'한다는 기사와 함께 시청 광장 분수대와 그 앞에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는 조감도를 실었다. 11월 20일 양택식 시장은 소공·무교지구 재개발 계획안을 들고 청와대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매우 기뻐했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梁시장의 얼굴에는 희색이 넘쳤다. 곧바로 소공·무교동을 입체 환지(換地)방식으로 재개발한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재개발을 위해 조사해보니 소공지구의 대지 면적은 3천6백93평, 건물은 연면적 8만여평이었다. 한화그룹 창업자인 김종희씨와 대한해운 남궁연 대표가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화교 소유지는 점점 줄어들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형편이었다. 서울시가 화교 소유의 땅을 한곳에 모아 지상 18층 규모의 화교회관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하자 화교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71년 10월부터 시청 광장 앞의 화교상가가 철거됐다. 그러나 화교회관 건립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남궁연씨가 "왜 화교회관을 지어 중국인들만 따로 모으느냐, 그렇게 구분하지 말고 대형 건물을 건립해 한국인·중국인이 함께 입주케 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사업은 72년 중반을 지나 1년 가까이 중단됐다. 서울시의 화교회관 건립 약속을 믿고 철거작업에 순순히 응했던 화교 상인들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 때 한국화약 측이 화교 상인 대표에게 "평당 감정가 최고액(1백7만원)에 소공동 화교 상인의 땅을 모두 사들이겠다"고 제의했다. 왕십리나 청량리 땅값이 평당 2만∼3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상점이 없어져 생계 수단이 막막했던 화교 상인들은 모든 땅을 한국화약에 팔았다. 한국화약 측은 계약금이나 중도금을 생략하고 한꺼번에 현금으로 땅값을 치렀다. 그리고 시청 앞에 있는 프라자호텔을 지었다.

나는 지금도 화교회관 건립 무산, 화교 상가집단 분산·축출은 잘 짜여진 한편의 각본에 따라 이뤄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재개발 계획 수립·화교회관 건립 약속·梁시장의 발표까지는 각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서울시에서 일했던 내가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화교회관 건립 부지 바로 옆에 '육군 보안사령부 서울분실'이 있었던 사실이 지금까지 내 마음에 걸린다. 화교회관 건립이 발표될 때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였다. 보안사의 정보 수집력, 김종희씨의 경제력, 남궁연씨의 처세술 등을 모으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지금도 떨쳐낼 수 없다. 결국 72년 말 소공동 화교들은 대부분 떠났다.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화교의 힘이 먹히지 않는 나라가 일본과 대한민국! 동남아는 사실상 경제는 전부 중국인이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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