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송
Chanson
역사
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샹송(chanson)’은 현대 프랑스의 대중가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세속적인 가곡’을 이르는 것으로 그 범위는 매우 넓다. 중세에 트루바두르(troubadour)와 트루베르(trouvère)가 불렀던 단선율의 가곡부터 오늘날의 대중가요까지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샹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민요풍의 대중적 샹송(chanson populaire)과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학술적 샹송(chanson savante)이 그것이다. 학술적 샹송은 주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창작되었고, 현대 프랑스 샹송이 속한 대중적 샹송은 17세기부터 그 뚜렷한 역사를 볼 수 있다.
학술적 샹송의 역사는 대개 3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단선율의 샹송 시대로서 12-13세기에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가 주도하였고, 제2기는 14-15세기의 다성(polyphonie) 샹송 시대, 제3기는 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이다.
학술적 샹송의 제1기는 11세기말 남 프랑스에서 출현한 음유시인 트루바두르들과 함께 시작된다. 오크어(langue d’oc)로 지어진 그들의 서정시는 음악과 함께 ‘샹소니에(chansonnier: 중세의 세속적 샹송의 텍스트만을, 또는 텍스트와 악보를 인쇄·필사한 가곡집)’라 불리는 가곡집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12세기 기사도 사회의 특징이었던 궁정풍의 사랑을 큰 주제로 하여 다양한 서정적 장르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크게 개인적 샹송과 서술적·극적 샹송으로 나뉜다. 약 한 세기 뒤인 13세기에 출현하여 북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약한 트루베르는 오일어(langue d’oïl)로 트루바두르가 사용한 서정시의 주제를 노래하였는데, 세속적인 사랑의 노래가 주류를 이루었다.
Chanson D'Amour
제2기가 시작되는 14세기에는 기사도 문학과 결부된 단선율의 샹송이 쇠퇴하고, 13세기 초에 나타난 종교적 다성음악이 발전하여 세속음악에까지 침투한다. 그래서 샹송의 성부수는 14세기에 2개, 3개, 15세기에는 5개까지 증가하였다. 특히 아르스 노바(ars nova) 시대라 불리는 14세기에는 3성의 샹송(다성 샹송에서는 최상성부에 가사가 있는 선율을 두고 다른 두 선율은 악기로 반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이 완성되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였다. (▶ 중세 프랑스 음악) 15세기에 프랑스 음악은 부르고뉴 악파(école de Bourgogne)와 프랑스 플랑드르 악파(école franco-flamande)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전자에서는 기욤 뒤페(Guillaume Dufay)와 질 벵슈아(Gilles Binchois)가, 후자에서는 조스켕 데 프레(Josquin des Prés)가 다성 샹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제3기인 16세기에는 보다 대중적인 4성의 파리 샹송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활발한 악보 출판 덕분이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샹송 작곡가는 정형을 배격하고 자유스러운 형식의 샹송을 만들었던 클레망 잔느켕(Clément Janequin)이었는데, 그의 곡들 가운데 「새의 노래(Le Chant des oiseaux)」, 「전쟁(La Guerre)」처럼 자연의 소리와 전쟁 장면을 묘사한 표제 샹송이 유명하다. 이처럼 오랫동안 발전한 다성 샹송은 17세기에 화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기고 독립적인 기악이 등장하는 바로크 음악 시대가 도래하자 쇠퇴한다.
17-18세기
현대 프랑스의 대중적 샹송의 원천은 17세기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7세기의 대중적 샹송은 거리의 구전 예술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사랑의 노래가 많았지만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띤 풍자적 샹송들이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마자리나드(mazarinade: 프롱드난[Fronde] 때 재상인 마자렝[Jules Mazarin]을 풍자한 글)’는 이미 알려진 노래에 날마다 새로운 가사를 붙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풍자적 샹송은 직업적인 샹소니에(chansonnier: 이 때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중세 샹송 가곡집이 아니라 ‘샹송 작가[특히 작사가] 또는 자신이 만든 풍자적 샹송을 직접 노래하는 가수’이다)들이 민중을 대신하여 만들었다. 그들은 센 강(Seine)에 새로 가설한 퐁뇌프 다리(Pont-Neuf)에서 자신들이 만든 샹송을 직접 부르고 그 악보를 판매하였다. 이 샹소니에들은 노래를 직업으로 삼은 최초의 가수였고, 퐁뇌프 다리는 샹송의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에는 독립적인 문학적 샹송(chanson littéaire)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카보(caveau)의 출현이었다. 1734년, 시인인 피롱(Charles Alexis Piron), 파나르(Charles François Panard), 콜레(Charles Collé), 크레비용 피스(Crébillon fils)는 일요일 밤마다 ‘카보(le Caveau)’라는 카페에서 모임을 갖고 주어진 주제에 맞춰 샹송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놀이를 하였는데, 점차 많은 작가, 화가, 음악가, 철학자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비슷한 유형의 카보들이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유명한 샹소니에들이 배출되어 작가나 음악가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19세기 전반에 크게 활약한 피에르 장 드 베랑제(Pierre Jean de Béranger)였다. 카보는 한 때 사라졌다가 대혁명 이후 다시 출현하여 19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대혁명이 가까워지자 많은 고게트(goguette) 또는 겡게트(guinguette: 야외에서 먹고 마시며 춤도 추는 교외의 술집)가 생겼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을 주제로 한 샹송이 불리어졌다. 특히 고게트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카보에 반해 노동자들의 클럽이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샹송이 중요한 선전 수단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 프랑스의 국가가 된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의 「라 마르세이예즈(La Marseillaise)」(1792)이다.
근대
19세기 전반은 정치적 샹송이 주도한 시대였다. 특히 베랑제는 두 번이나 투옥되면서도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적·반교권주의적 샹송을 불러 국민 시인으로까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제2제정기에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가 고게트를 금지·폐쇄하고 여론을 탄압하자 풍자적인 정치적 샹송은 사라지고 대신 애가조의 감상적인 샹송이 불리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곡이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의 상징이 된 장 밥티스트 클레망(Jean-Baptiste Clément)의 「버찌의 계절(Le Temps des cerises)」이다.
이 시기에 고게트 대신 발전한 것이 카페 콩세르(café-concert)이다. 카페 콩세르는 식사를 하면서 샹송, 서커스, 춤으로 이루어진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1770년경에 탄생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곳은 샹송 가수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제공함으로써 스타의 탄생을 촉진하였는데,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와 펠릭스 메이욜(Félix Mayol)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67년부터는 뮤직 홀(music-hall : 프랑스어로는 ‘뮈지콜’이라 발음한다)이 생겨나 카페 콩세르와 경쟁하기 시작한다. 카지노 드 파리(Casino de Paris), 폴리 베르제르(Folies-Bergère), 올렝피아(Olympia), 물렝 루즈(Moulin Rouge)는 쇼와 샹송이 뒤섞인 보다 발전된 형식의 공연을 대중에게 선보여 크게 성공하였는데, 카페 콩세르와 달리 이곳에서는 원칙적으로 음식이 제공되지 않았다. 뮤직 홀은 벨 에포크 시대(Belle Époque)에 그 정점에 달하였다.
1880년대에는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샹소니에들을 위한 카바레(cabaret)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이드로파트(Hydropathes)에 이어 등장한 샤 누아르(Chat-Noir)는 특히 훌륭한 샹소니에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브뤼앙(Aristide Bruant)은 파리와 하층민들의 삶을 노래하여 ‘사실적 샹송(chanson réaliste)’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이 장르는 뒤에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에 의해 계승되어 그 절정에 달한다.
현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스텡게트(Mistinguett)와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가 프랑스 샹송계를 지배하였다. 두 사람은 뮤직 홀이 채택한 대규모 버라이어티 쇼인 르뷔(revue)의 스타가 되어 카지노 드 파리, 폴리 베르제르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재즈(jazz)는 1917년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는데, 그 리듬이 널리 보급된 것은 1925년에 르뷔 네그르(Revue nègre)를 통해 르뷔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한 조세핀 베이커(Joséphine Baker)에 의해서다. 그녀는 「두 연인(J'ai deux amours)」 등 흑인 음악에 바탕을 둔 수많은 샹송을 불렀다. 193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는 점차 스윙(swing: 흑인 재즈 음악을 온화하게 백인화한 음악)의 리듬을 프랑스 샹송에 통합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1937년에 「기쁨 있으리(Y'a d'la joie)」(모리스 슈발리에 노래)를 발표하여 유명해진 샤를 트르네(Charles Trenet)였다. 가수로도 데뷔한 그는 「바다(La Mer)」 등의 많은 명곡을 남겨 ‘노래하는 광인(fou chantant)’이라 불렸고 모리스 슈발리에와 함께 ‘환상적 샹송(chanson fantaisiste)’을 대표하는 가수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미레유(Mireille)는 재즈와 샹송을 결합한 독특한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편, 티노 로시(Tino Rossi)와 뤼시엔 부아이예(Lucienne Boyer)는 감미로운 연가(romance) 등 ‘매혹적 샹송(chanson de charme)’으로 사랑을 받은 반면, 브뤼앙으로부터 시작된 사실적 샹송의 전통은 다미아(Damia), 프레엘(Fréhel), 이본 조르주(Yvonne Georges)를 거쳐 에디트 피아프에게 계승되었다.
전 가정에 보급된 라디오는 19세기말에 출현한 디스크보다도 샹송의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또한 영화가 토키(talkie; parlant[프]: 발성영화) 시대에 접어들자 샹송은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많은 음악 영화들이 잇달아 성공하였고, 배우들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자신이 출현한 영화에서 한두 편의 샹송을 불러야 했으며, 티노 로시처럼 가수들이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기존의 스타들(티노 로시, 모리스 슈발리에 등) 외에 새로운 세대의 샹송 가수들이 부상하여 각광을 받았다. 에디트 피아프는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사랑의 찬가(L'Hymne à l'amour)」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브 몽탕(Yves Montand)은 「낙엽(Les Feuilles Mortes)」 등 자크 프레베르의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여 인기를 누렸다.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와 질베르 베코(Gilbert Bécaud)는 미국 스타일의 샹송과 창법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작사·작곡·노래를 겸하는 통기타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조르주 브라상스(Georges Brassens), 자크 브렐(Jacques Brel), 기 베아르(Guy Béart), 레오 페레(Léo Ferré), 바르바라(Barbara)가 그들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실존주의의 영향 하에 있던 센강 좌안(rive gauche)의 셍 제르멩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가 새로운 ‘문학적 샹송’의 중심지가 되는데, 그곳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쥘리에트 그레코(Juliette Gréco)이다(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를 비롯한 많은 작가·시인이 그녀의 곡의 가사를 썼다).
1950년대 말부터는 스윙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 음악의 물결이 유럽 대륙에 상륙한다. 그것은 바로 로큰롤(rock and roll)인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한 미국의 로큰롤 스타들은 프랑스에서 ‘예예(yéyé)’라는 맹목적인 추종 세력을 낳는다. 그에 따라 조니 알리데(Johnny Halliday),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리샤르 앙토니(Richard Anthony), 프랑스 갈(France Gall),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셸라(Sheila), 에디 미트셸(Eddy Mitchell), 클로드 프랑수아(Claude François), 미셸 폴나레프(Michel Polnareff) 등 젊은 가수들이 10대들의 우상이 되고, 10대들은 디스크와 카세트 테이프의 가장 중요한 소비자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예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미레이유 마티외(Mireille Mathieu)와 같은 전통 샹송 가수들, 장 페라(Jean Ferrat)와 같은 참여 가수들, 바르바라, 클로드 누가로(Claude Nougaro), 세르주 겡스부르(Serge Gainsbourg)와 같이 작사·작곡·노래 또는 작사·노래를 겸하는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에 의해 성인들을 위한 샹송이 계속 성행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까지 가사를 중시하는 성인 샹송과 음악을 중시하는 10대들의 샹송 사이의 구별이 지속된다. 미셸 사르두(Michel Sardou)가 전자의 예라면 록 가수인 베로니크 상송(Véronique Sanson)과 텔레폰(Téléphone) 그룹은 후자의 예에 속한다. 1970년대 말부터는 이른바 '프랑스 누벨 샹송(nouvelle chanson française)'을 이끈 새로운 가수들이 출현하였는데, 자크 이즐렝(Jacques Higelin), 베르나르 라빌리에(Bernard Lavilliers), 미셸 조나스(Michel Jonasz), 제라르 망세(Gérard Manset), 이브 뒤테이유(Yves Duteil), 알렝 수숑(Alain Souchon), 막심 르 포레스티에(Maxime Le Forestier), 르노(Renaud), 이브 시몽(Yves Simon), 프랑시스 카브렐(Francis Cabrel), 장 기도니(Jean Guidoni)가 그들이다.
1981년에 라디오 방송에 대한 국가의 독점권이 폐지되자 수많은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나 음악 방송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영미 음악의 영향이 두드러지는데, 장 자크 골드만(Jean-Jacques Goldman)을 비롯한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에게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파리는 세계 음악이 혼합되는 도가니가 된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전통 음악과 록 음악이 뒤섞이고 프랑스 랩 음악(le rap français)이 탄생한다. MC 솔라르(MC Solaar)와 같은 가수는 미국에서 탄생한 랩에 샹송의 오랜 전통을 결부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랩에서는 가사가 중요시되고, 시적인 언어 유희가 많으며, 사회 비판이 매우 강하다. 1995년에는 모든 라디오 음악 방송의 40%를 프랑스 샹송으로 편성해야 하는 쿼터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샹송이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조처는 또한 영미 음악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새로운 인재가 쉽게 출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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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1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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