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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4, 2011

일본성씨 ‘아야(漢)’는 가야. 백제계 성씨

악랑-->아랑-->아야.아라이는 같은 어원이다!

일시04.01.04 14:02 | 최종 업데이트04.01.16 19:16
장팔현 (jang835)
 
 
한반도인들의 일본 열도 이주는 잦은 전쟁과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일본인 학자들은 이들을 ‘도래인(渡來人)’이나 ‘귀화인(歸化人)’이라 부르길 좋아하나 이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귀화인이 아니라, 이주민(移住民)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옮겨가던 4세기말부터 5세기 초엽과 5세기 후반부터 5세기 말기까지도 일본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한 다음 많은 이주민이 생겼던 7세기 후반 이전에는 도래인이나 귀화인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도 야마토정권이 확실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시기를 7세기 후반쯤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어도 6세기초까지의 이주자는 귀화를 시켜줄 정권도 없었고 호적체계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기이다. 오히려 이들 한반도로부터의 이주자가 일본 내 정권의 담당자로 성장했거나 호족으로 성장했던 흔적이 농후하므로 그들을 정권의 주축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적어도 ‘귀화인’이란 단어 사용은 어불성설이다.

전편의 신라계 진씨족에 이어 일본에 이주하여 명문거족으로 뿌리를 내린 가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바로 그들이 가야, 백제계 성씨인 아야(漢)씨족이다. 이들은 대개 3∼4세기 때 한반도로부터 열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씨족으로 5세기말에는 완전한 계보가 형성될 정도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들을 아야(漢)씨족이라 하며, 두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으니 ‘야마토노 아야(東漢)’와 ‘카와치노 아야(西漢)’씨이다.

이는 방위의 개념으로 후한의 중심지가 동쪽에 있었다하여, 동한으로 하고 한 무제의 전한(前漢)을 서한으로 하듯이 동쪽의 나라분지에 이주해서 세거하던 가야.백제계 가문들이 동한(東漢)이요, 오늘날의 오오사카 지역에 있던 카와치(河內 또는 川內로 표기)지역이 서쪽이니 이들을 서한(西漢)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지역 가문들은 인접한 지역으로 8세기 초에는 이미 동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동한인들은 8세기 이후 그들의 일본 내 첫 이주민 조상인 아치오미(阿知使主)의 계보를 후한 영제(靈帝)의 증손이라고 칭하다가 결국 전한 무제의 후손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된다. 서한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후한 헌제(獻帝)의 아들인 백룡왕(白龍王) 후손이라 주장하고(『신찬 성씨록<新撰姓氏錄>』) 있으나, 동한인 서한인들은 같은 동족의식으로 뭉쳐져 있었다. 그 시기는『속일본기』를 근거로 볼 때 양로기(養老期) 이전인 8세기 전반으로 보인다. 이 두 가문의 공동 시조로 아치오미의 아들인 ‘쯔카오미(都賀(加)使主)’를 칭하는데(『신찬 성씨록』) ‘쯔카’는 우리말로 지방장관을 의미하는 욕(褥).덕(德).탁(啄)과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 동한. 서한인들이 한반도 출신에 대한 차별이 있기 전 까지는 모두가 가야. 백제인임을 내세웠던 가문들이다. 동한인이 세거하던 야마토국 히노쿠마노사토(大和國 檜前郡鄕-現 奈良縣 高市郡 明日村 檜前)는 백제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들이 처음 이곳에 정착한 아치오미(阿知使主)를 백제계로 주장하고 있었고 주변에 백제 고분과 유사한 후지노키 고분이나 천문도로 유명한 키토라 고분이 발견되는 까닭이다. 아스카 지역에는 최초 가야인이 정착 했던 곳으로 보이며 이곳에 백제인이 파도처럼 밀려드니 오히려 백제계가 주도권을 쥐게끔 되었다. 때문에 먼저 이주한 사람들은 이미 일본인으로서 원주민 행세하게 되었고 나중에 정착한 이마키(今來-방금 막 온)에 대한 차별도 존재했던 것 같다. 이들 늦게 일본에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따로 행정구역을 두어 이마키군(今來郡-현 아스카 중.남부로부터 카시와라시(橿原市)남부에 걸친 지역)이라 하였을 정도였다. 요즘말로 하면 ‘뉴커머(New comer)’를 위해서 새로운 군(郡)을 하나 신설한 것이다.

나라지역의 백제계 이주민과 오오사카 지역의 백제 이주민 사이에는 강한 연대의식이 있었고 한반도에서의 본국 가야, 백제 멸망 후 많은 왕족, 귀족들이 일본열도에서 귀족 대우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미리 이주해가 정착한 아야씨 가문의 도움이 컸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자왕의 후손인 경복(敬福)이 오오사카의 사천왕사 주변에 있던 백제군(百濟郡)에서 왕인박사가 정착한 히라카타시(枚方市)에 쉽게 정착했던 연유일지도 모른다.

이들 동한.서한인들은 주로 외교관이나 정부의 문서담당 고위 관료로 많이 재직했다. 607년 견수사로 갔던 오노노이모코(小野妹子-아야씨 후손)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로 치면 외교부와 교육부, 행정자치부의 고관 자리를 이들 백제계가 거의 장악했던 것이다. 이들 아야씨족은 전문 학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외교문서 작성과 외교관으로 중용되었던 것이다.

이들 동.서한인들의 초기 정착자가 안라가야(安羅伽倻)출신임은『일본서기』흠명기(欽明紀)에 그들이 서한씨인 카와치 아따이(河內直-카와치 지역의 수령)가 안라에서 이주해왔음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입증이 된다. 결국 나라 아스카 지역이나 카화치(오오사카)지역에 정착한 세력이 안라가야 출신이라는 점이다. 초기 안라가야 출신들이 정착한 지역에 많은 백제인들이 이주해가 그들이 주도권을 쥔 형상이다. 이들 성씨에 관한 기록은 쿄오토의 키요미즈데라(淸水寺)를 건립한 백제계 후손인『사카가미 족보(坂上系圖)』나 815년 출간된『신찬성씨록』에 잘 나와 있다.

삼국시대 추화군(推火郡)으로 불려지던 밀양군에 안라가야(安羅伽倻)가 있었고,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박씨가 있으니, 이들이 일본에 가서도 ‘아야(漢)’나 ‘아라이(新井이나 荒井으로 표기)’씨라 했으며, 재일동포들도 밀양박씨든 반남박씨든 대부분 아라이라는 성씨를 즐겨 사용한다. 일본 중의원을 지내다가 희생양이 된 박장경씨가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라 했음도 좋은 예이다. 아라이라는 성씨는 실로 천오백년 이전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니, 재일동포들의 일본식 성씨 사용에도 이러한 유래와 법칙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안라가야인들이 8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한반도인들에 대한 차별의식 때문에 성씨를 한(漢)으로 고치고도 발음은 그대로 ‘아야’로 했음은 그 출신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요, 이미 익숙해진 성씨로써 고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안라는 일본에서 ‘아야’나 ‘아라이’로 바뀌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의 사용에도 구별이 있는 것 같으니, 백제계는 주로 ‘아야(漢)’를 선호한 것 같으나, 안라가야 출신은 ‘아라이’를 선호 한 것 같다. 이 말의 어원은 당연히 ‘안라가야’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낙랑이다. ‘아야’라는 성씨 유래를 한.중.일 삼국 역사로 더듬다 보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국명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사서에 중국인들이 ‘낙랑’이라 읽는다고 주를 달아 놨다고 하여 이를 맹신하나, 『사기』에 보면 ‘조선’이란 국명이 송나라의 배인(집해)이 주를 달기를,”조선은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汕음은 鮮과 동일)가 열수에 만나는 곳에 있어 낙랑조선으로 국명을 삼았다.”하고, 당나라의 색은 사마정이 주를 달기를 “험독현은 조선의 구 왕도가 있던 곳으로 낙랑군은 패수 동쪽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현재의 평양지역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성을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습수.열수.산수가 흐르던 계곡물이 험한 지형을 설명하듯 험독현(險瀆縣)의 계곡을 흘러 마치 낭낭(浪浪)한 음악처럼 들렸기에 ‘악랑조선’이라 불렸던 것이지, ‘낙랑조선’이나 ‘낙랑군’이라 함은 옳지 못하다. 이는 ‘즐거울 낙’으로 읽기보다는 물의 흐름이 마치 음악과 같이 들린 것으로 봐, ‘음악 악’으로 읽어야한다. 때문에 고조선에 아랑공주가 있음이요, 고조선 유민인 가야, 신라인들이 남겨진 아랑군(낙랑군) 동포들을 보고 ‘잔류동포’란 의미로 ‘아잔(我殘).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들이 아랑국의 선진 문화를 배우거나 친척을 만나러 오갔을 것이니, 그 고개가 아리랑 고개요, 헤어짐을 슬퍼하여 ’아리랑‘이란노래까지 나왔을 것이라고 이병도 박사도 얘기한바 있다.

만주의 아랑국이 한 무제에 망하고 이들 중 최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아랑국인이 한반도 평양 땅으로 이주하여, 여기서도 후한 광무제에게 또 망하니 AD44년에 망한 최리(崔理)의 아랑국(낙랑국)이다. 이때 상당수가 남쪽으로 이주(『삼국사기』)하였고, 주로 추화군 (밀양)지역에 정착하여 안라가야(아랑가야)를 세웠다가 일본에 이주하니 이들 성씨를 대개는 ‘아야’, ‘아라이’라 함이요, 박씨 성을 가진 재일동포들이 귀화하거나 통성명 사용 때 지금도 ‘아라이’라 하는 연유이다.

‘아야’,‘아라이’씨 이외에도 야마구치현(山口縣)과 큐우슈우 지역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구레(吳)’씨족도 백제계로 알려져 있다. 중세 때 큰 세력으로 이름을 떨치던 야마구치현의 다이묘(大名)인 오오우치(大內)가문은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조선 통신사에 알려『조선왕조실록』에 두 번씩이나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결국 아야씨는 가야(안라가야)계와 백제인이 주축이었고 백제계는 ‘아야’를 안라가야 출신은 ‘아라이’를 선호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아야씨는 607년 견수사로 갔던 오노노이모코(小野妹子-아야씨 후손)처럼 외교관이나 정부의 문서담당관으로서 재직했던 귀족층이었다.

이처럼 한·중·일의 역사를 고찰 해보면 한 가문의 성씨조차도 그 연유가 있고 맥이 있는 것이요, 막 지어 부른 뼈대 없는 가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의 주류층에는 신라계의 진씨족 못지 않게 중앙 무대의 권문세가로써 백제. 가야계 가문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www.onekorea.jp에 송고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162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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