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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17, 2012

나PD "MC몽 하차로 휘청할 때 강호동이 날 불러

인간 나영석(36)은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붙임성이 없었다. 공부는 잘해 좋은 대학에 갔지만 제도권 교육에 적응을 못했다. 그런 그가 좋아했던 것은 TV였다. KBS ‘유머 1번지’를 넋 놓고 봤고, MBC ‘느낌표’에 열광했다. ‘예능으로 세상을 바꿔보자.’ 행정학과 출신인 그가 예능 PD를 선택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KBS 버라이어티 ‘1박 2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4년 반 동안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시청자투어 3탄엔 무려 6만9000여 명이 신청했었다. 1박 2일의 성장기는 곧 나 PD의 성장기. 16일 나 PD를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만났다.

26일 종영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1박 2일’ 시즌1의 마지막 멤버. 왼쪽부터 엄태웅·이승기·이수근·은지원·김종민.
◆태동기(2007년 8월)=시작은 단순했다. 게임에서 지면 굶기고 밖에서 재우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여행은 관심 밖이었다. 나 PD는 여행을 싫어한다. 충북 청주 출신인 그는 연세대에 입학해서야 처음 서울에 올라왔다. 지하철을 갈아탈 줄 몰라 표를 다시 샀을 정도였다. 그러니 ‘1박 2일’에서 최종 목적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누구와 가고,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 여행보다 여정에 콘셉트를 맞추자, 그게 시작이었다.

 ◆황금기(2008년~2010년 6월)=강호동·이승기·이수근·은지원·MC몽·김C 체제가 순항하기 시작했다. 나PD는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고 기억해주는 시기”라고 했다. 그는 진짜 야생을 위해 잔인하리만치 가혹해졌다. 새벽 4시에 모여 오프닝 장면을 찍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음식을 주지 않았다. 허기가 질대로 져야 멤버들이 독이 올라 복불복 게임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시청자들은 멤버들이 고생할수록 더 열광했다.

 나 PD는 의외성의 재미를 믿는다. 어떨 때는 이미 정한 게임이나 대본을 버렸다. 43.3%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찍은 그 순간도 은지원이 즉석 탁구시합을 제안한 날이었다. 그는 “PD에게 순간 판단력은 정말 중요하다. 그걸 배운 시기”라고 했다.

 ◆위기탈출기(2010년 7월~2011년 9월)=김C와 MC몽이 하차하면서 프로그램이 휘청거렸다. 그때, 강호동이 나 PD의 이름을 불렀다. 나 PD는 “ 메인 MC가 이름을 부르면 ‘꽃’이 된다”며 “TV에 얼굴이 나온건 다 강호동 책임이다”라며 웃었다. 그는 반항하는 멤버들과 대립하며 깨알 같은 재미를 빚어냈다. “편집은 후배PD들이 한다. 내가 얼굴이 나오는 것이 싫다고 해서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했다. 카리스마보다 존중과 신뢰, 그의 리더십이다. 형식 실험도 추진했다. ‘외국인 근로자 특집’ ‘다큐멘터리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등 한층 진화된 포맷을 만들어갔다. 위기가 기회를 만든 셈이다.

 ◆작별준비기(2011년 10월~2012년 2월)=강호동이 하차를 선언했다. 프로그램의 존폐위기였다. 나 PD는 굴하지 않았다. 더 많은 실험을 했다. 남은 멤버 다섯 명은 방방곡곡에 흩어져 대한민국 김치를 찾고, 유홍준 교수와 함께 역사기행을 떠났다. 웃음기는 빠졌지만 신선했다. “잘나가는 집안이니까 그런 시도를 해봤다. 8번 웃긴 걸 했으면 2번 정도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게 시청자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그 시도가 나 PD의 자산이 됐다. 그는 “다음에 맡을 프로그램도 이 지점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나 PD는 지난 10일 마지막 촬영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1박 2일에서 ‘박(泊)’은 곧 ‘정’이다. 하루 종일 고생하고 잠자리에 함께 누웠을 때 속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다. 그는 26일 방송을 끝으로 ‘1박 2일’을 떠나지만 시청자들은 그 정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2/18/7039700.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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