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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13, 2012

조선왕조실록에 묘사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실제상황


진주(晉州)에 사는 유생 3백여 명이 또 서로 통문(通文)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방어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비록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가 믿는 것은 인심이니 인심이 이와 같기를 하찮은 소신은 밤낮으로 하늘에 축원하였습니다.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도내(道內)의 병사(兵使)·수사(水使)·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防將) 등이 각 고을의 군기(軍器)들을 옮겨 전쟁터에 쌓아두었다가 무너져 달아날 때는 물이나 불속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도중에 버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병기(兵器)가 일체 없어졌으며, 창고 곡식은 수령(守令) 등이 왜적이 닥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겁을 먹고서 창고를 불사르기도 하고 혹은 백성들이 훔쳐 먹도록 내버려 두기도 하였기 때문에 군량도 일체 없어졌습니다. 의병이 비록 일어났어도 병기와 군량이 없어서 사람들이 견고한 뜻이 없어 적변(賊變)을 들으면 모였다가는 바로 흩어져 버립니다. 백방으로 생각해 봐도 도무지 병기와 군량을 조달해 낼 방도가 없으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진해·고성은 전일에 파선(破船)이 되어 육지로 올라온 왜적 40여 명이 고을 경내에 출현하자 진해 현감은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고성 현령 김현(金絢)은 부임한 지가 7년인데 형벌이 너무 가혹하여 민심을 잃은 지 오래이므로 진해에 적이 들어온 뒤에는 배반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현령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현령은 그 기미를 알고서 복병을 배치해 놓고 거짓으로 도망한 체하니 배반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성안으로 들어가 관고의 물건들을 훔쳐내자 복병이 엄습하여 50여 명을 사로잡아 참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더욱 원망하여 배반하므로 현령은 수사(水使)와 일시에 바다로 나갔는데, 이때 적이 이미 입성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므로 현령이 도망하였습니다.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는 데다가 형벌마저 매우 가혹하므로 군졸이나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이 뱃속에 가득한데도 호소할 길마저 없어 그들의 마음이 이산된 지 벌써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왜국은 정수(征戍)나 요역(徭役)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미 그들을 좋아하고 있는데 왜적이 또 민간에 명을 내려 회유(誨誘)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왜적의 말을 믿어 항복하면 반드시 살고 싸우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연해의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의복도 바꾸어 입고서 왜적을 따라 곳곳에서 도적질하는데 왜적은 몇 명 안되고 절반이 배반한 백성들이니 매우 한심합니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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