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과 신라의 전투기록 비교
먼저 조선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살펴보자.
5년(462) 여름 5월에 왜인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五年 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6년(463) 봄 2월에 왜인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우리 땅을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六年 春二月 倭人侵歃[주석2]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埸 緣邊築二城 秋七月 大閱
일본기록
3월 천황은 친히 신라를 칠려고 했다. 가미사마가 천황에게 경고 하며 “가지 말라”고 했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친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소궁수이,소아한자수이,대반담련담 소록화숙이들에게 친령을 내려 “신라는 본래 서토에 있다. 대대로 신하를 칭했다. 조공도 거르지 않았다. 공직가 충분했다. 짐이 천하의 왕이 되었는데 몸은 대마의 밖에까지 나오고 발자취는 잡라까지 감추고 고구려의 조공을 방해하고 백제의 성을 삼키고 하물며 조공을 거르고 공직을 수행하지 않는다. 야심이 있어 배부르면 가고, 배고프면 빌붙는다 4인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정벌을 하여 천벌을 가하라” 이에 기소궁숙이는 대반실옥대련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근심을 하지 말아달라며 “신은 졸렬하고 무력하지만 칙을 받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처가 죽기직전인데 돌보는 자가 없습니다. 공은 이 사정을 상세히 천황폐하에게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반실옥대련은 전하였다. 천황이 이를 듣고 슬퍼하였다.길비상봉도채녀대해를 기소궁숙에 주어 따라다니며 돌보게 하였다. 드디어 스스로 수레를 밀어 전송하였다.
기소궁숙이는 신라에 들어가 근처의 군을 취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사방에 관군의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국의 ᄄᆞᆼ이 점령된걸 알고 수백기와 도주하였다. 소궁숙이는 쫓아가 적장은 진중에서 베었다. ?국의 땅에서 대반담련과 만났다. 군사들은 남은 군사들과 싸움에 다시 크게 이겼다. 이날 저녁에 대반담련,기강전랩목련은 모두 힘껏 싸우다 죽었다. 담련의 종자 동성진마려가 후에 군중에 들어와 그 주인을 찾았다.군중에서 착을 수 없어 “우리 주인 대반공은 어디에 있으신가!!”라고 외쳤다. 어ᄄᅠᆫ 사람이 “그대의 주인은 적의 손에 죽었다”라고 말하자 시체가 있는 곳을 가리 켰다. 진마려가 듣고는 발을 구르며 “주인이 이미 돌아가셨다. 어찌 홀로 살아남은 것인가”라고 절규하였다. 적에게 돌진하여 죽었다. 조금 있다가 남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다. 관군도 물러갔다. 대장군 기소궁기이는 병에 걸려 죽었다.
『日本書紀』卷十四雄略天皇九年(乙巳四六五)三月◆三月。天皇欲親伐新羅。神戒天皇曰。無往也。天皇由是不果行。乃勅紀小弓宿禰。蘇我韓子宿禰。大伴談連。〈談。此云箇陀利。〉小鹿火宿禰等曰。新羅自居西土。累葉稱臣。朝聘無違。貢職允濟。逮乎朕之王天下。投身對馬之外。竄跡匝羅之表。阻高麗之貢。呑百濟之城。况復朝聘闕。貢職莫脩。狼子野心。飽飛飢附。以汝四卿。拜爲大將。宜以王師薄伐天罰襲行。於是。紀小弓宿禰使大伴室屋大連。憂陳於天皇曰。臣雖拙弱敬奉勅矣。但今臣婦命過之際。莫能視養臣者。公冀將此事具陳天皇。於是。大伴室屋大連具爲陳之。天皇聞悲頹歎。以吉備上道采女大海。賜於紀小弓宿禰。爲隨身視養。遂推轂以遣焉。紀小弓宿禰等卽入新羅。行屠傍郡。〈行屠。並行並擊。〉新羅王夜聞官軍四面鼓聲。知盡得喙地。與數百騎馬軍亂走。是以大敗。小弓宿禰追斬敵將陣中。喙地悉定。遣衆不下。紀小弓宿禰亦收兵。與大伴談連等會。兵復大振。與遣衆戰。是夕大伴談連及紀崗前來目連皆力而死。談連從人同姓津麻呂。後入軍中尋覓其主。從軍覓出問曰。吾主大伴公何處在也。人告之曰。汝主等果爲敵手所殺。指示屍處。津麻呂聞之踏叱曰。主旣已陷。何用獨全。因復赴敵。同時殞命。有頃遣衆自退。官軍亦隨而却。大將軍紀小弓宿禰値病而薨。
나중에 백제의 이간질에 걸려 자기들끼리 싸우다 본국으로 귀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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