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66)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 문화 왕국 - 新羅'
요시미즈씨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고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였다고 합니다.
흥분한 요시미즈씨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했습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이다』고 단정했다고 합니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요시미즈씨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신라 왕과 異國의 왕·왕비 사이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 玉구슬 속에는 뭔가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국제적 전개와 고대 신라 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문화 상황이 넘쳐날 정도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 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신라의 王墓에서는 로만 글라스(로마 유리제품)를 비롯, 황금의 칼, 금가락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 裝身具나,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형 왕관, 자작나무로 만든 冠帽 및 말 배가리개(障泥·장니)가 나왔고, 무엇보다도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積石木槨墳이 확인되는 등 중국 문화권에는 없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어 著者 요시미즈씨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시미즈씨의 글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토해 내는 환희의 절규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논리 전개와 사실 확인 과정의 엄밀성과 과학성은 학자적입니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습니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고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였다고 합니다.
흥분한 요시미즈씨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했습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이다』고 단정했다고 합니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요시미즈씨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신라 왕과 異國의 왕·왕비 사이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 玉구슬 속에는 뭔가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국제적 전개와 고대 신라 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문화 상황이 넘쳐날 정도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 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신라의 王墓에서는 로만 글라스(로마 유리제품)를 비롯, 황금의 칼, 금가락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 裝身具나,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형 왕관, 자작나무로 만든 冠帽 및 말 배가리개(障泥·장니)가 나왔고, 무엇보다도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積石木槨墳이 확인되는 등 중국 문화권에는 없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어 著者 요시미즈씨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시미즈씨의 글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토해 내는 환희의 절규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논리 전개와 사실 확인 과정의 엄밀성과 과학성은 학자적입니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습니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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