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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February 8, 2012

이순신 장군의 위상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칠천량)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 선조 -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
- 선조실록 사관 -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서애 류성룡 -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 연천 홍석주 -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 《이조사대전》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G. A. 발라드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이순신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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