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 아산만을 가로지르는 서해대교(西海大橋)는 지금이라도 ‘백제대교’(百濟大橋)로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다.
서해안 고속도로라서 서해대교? 참 무신경한 작명법이다. 압록강 하구에서 목포까지 서해안에 걸린 다리가 서해대교 뿐인가? 서해, 동해, 남해 따위로 부르던 원시시대 사고방식, 행정편의주의 그대로다.
한국인의 무지몽매한 역사의식이 남긴 대표적 분규가 동해다. ‘동해’냐 ‘일본해’냐 표기 싸움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倭)로 쫓겨간 백제의 보복공세를 두려워했던 통일신라가 진작 동해를 ‘신라해’(新羅海)로 규정했다든지, 일본을 우습게 알던 조선이 ‘조선해’(朝鮮海)로 선포했다는 기록이라도 있다면 ‘독도는 우리 땅’ 시비 따위 언감생심 일본이 입도 뻥긋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의식, 영토야심, 해양 개척정신이 그리도 없었던가.
① 아산만은 백제가 건국한 미추홀(彌鄒忽)이다.
② 아산만은 ‘2개의 백제’로 갈라선 비사(秘史)의 판도라다.
③ 아산만은 660년 백제왕조가 최후를 맞은 국제해전(國際海戰)의 결전장이다.
④ 아산만은 ‘일본’을 탄생시킨 한일역사의 아이러니다. 아산만의 패전을 끝으로 백제 왕실은 왜(倭)로 건너가 ‘일본’(日本)이란 국호를 제정하고 새 나라를 일으켰다.
⑤ ‘백제대교’를 계기로 한일 고대사(古代史)를 복원해야 된다. 일본이 왜곡-조작-은폐하고 한국이 방치해온 ‘거꾸로 된 역사’를 바로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역사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국격(國格)이 회복되는 법이다.
⑥ 역사의 무덤에 파묻힌 <아산만의 진실>이 부활된다면 공주(公州) 부여(扶餘)만 찾는 일본인들은 새로운 뿌리의 경이로움에 빨려들어 한중일(韓中日) 역사문화 관광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이다.
한류(韓流)의 원조 ‘아산만 드라마’ 백제사(史)의 르네상스야말로 21세기 한일 역사의 물줄기를 업그레이드 역전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설날 내 인생의 출발점 고향에 다녀왔다.
명절마다 건너가고 건너오는 서해대교 한가운데서 시작되는 고향땅 충남(忠南) 당진(唐津).
다 리 아래 행담도(行淡島) 휴게소부터 당진이다. 아산만 중심선으로 나눠지는 당진과 평택(平澤)은 신설 국제항 이름을 싸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2004년 ‘평택-당진항’으로 타협, 글로벌 수출기지로 거듭 났다. 수천년 중국대륙과의 교역항이 이제야 제구실을 다시 찾은 셈이다.
당진(唐津) 이전에 한진(韓津)이 있었다.
대륙을 당(唐)나라가 휩쓸기 전부터 한진은 한반도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그 옛날 중국 산동반도 칭따오(靑島) 쯤에서 뗏목 배를 타고 잠이 들면 흘러흘러 아산만에 닿는다고 했다. 동지나해 난류가 서해로 북상하다가 U턴, 경기만(京畿灣)을 쓰다듬으며 남하하는 조류의 힘 덕분이다.
대륙에서 밀려난 고조선(古朝鮮) 단군조선(檀君朝鮮) 집단들이 반도에 들어와 살던 시절, 삼한(三韓)의 중국교류 창구가 한진(韓津)이다. 마한(馬韓) 지역 아산만에 나라를 세운 백제 역시 송(宋)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동쪽 신라보다 앞서 무역강국이 된 것도 한진항의 경쟁력이 동력이다.
한진은 지금도 남아있다. 서해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직진하면 나타나는 작은 갯마을, 그곳 어딘가에 나의 어린 시절 추억도 아직은 숨쉬고 있을까.
1950년대 인천(仁川)과 서울로 가는 정기 연락선의 시발지 부둣가, 버스를 타면 서울까지도 온종일 비포장 외길에서 시달리는데 한진서 통통배를 타면 그나마 지름길 6시간 거리였다. 방학때 내려온 누나가 인천으로 떠나는 날 나도 따라 배를 타겠다고 떼를 쓰며 울던 철부지를 어머니는 달랬다. “넌 크먼 더 좋은 서울 갈껴...” 그 말씀대로 나는 서울서 57년째 살고 있다. 어머니는 새해로 99세다.
★ 백제의 건국: 아산만 인주(仁州) 미추홀(彌鄒忽)
백제가 개국한 이곳은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 용케도 이름이 살아 남았다.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경기도 안성천(安城川)과 충남 삽교천(揷橋川)을 양쪽에 끼고 바다를 향해 용머리처럼 뻗어 나온 넓은 벌이 현재 인주면(仁州面) 밀두리(密頭里)다.
주 몽(朱蒙)과 재혼한 부여의 왕녀 소서노(召西奴) 이야기는 이미 TV 드라마로 방영되었지만, 주몽에게 버림받은 그녀의 비련이 백제를 낳는다. 고구려(高句麗) 건국에 주몽을 도와 모든것을 바쳤던 소서노는 왕이 된 주몽이 첫사랑의 여인과 아들을 맞아 정비-태자(正妃-太子)로 삼자 고구려를 떠나고 만다. 소서노는 전남편의 아들 비류(沸流)와 주몽의 아들 온조(溫祚)를 데리고 남하하여 황해도에서 나라를 세웠으나 낙랑 말갈의 공격을 받고 다시 쫓긴다. 배를 타고 아산만에 도착한 3모자(三母子)는 드디어 미추홀(밀두리)에 백제 왕조를 본격 오픈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은 백제가 인주 미추홀에서 건국했다면서 ‘인주는 인천, 미추홀은 어딘지 모르겠다’고 썼다. 틀린 말이다. 인천을 처음 인주로 명명한 것은 김부식에게 삼국사기 편찬을 명했던 고려 17대왕 인종(仁宗)이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미추홀을 알면서 모르는 체 인천만 명시한 까닭은 당시 절대군주 인종의 영향력에 왜곡된 것이라고 사학자들은 분석한다. 인종의 어머니가 인천 출신이라고 한다.
그와 달리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一然)이 정확히 지적한 인주는 고려 이전부터 존재한 아산만 인주다.
미추홀-밀두리의 미(彌,密)는 용(龍)을 지칭하는 옛 말, ‘미추’나 ‘밀두’는 같은 소리 ‘용머리’다.
밀 두리는 바로 밀두천(密頭川: 밀두개) 하구에 자리한 포구였는데, 박정희가 구축한 삽교천 방조제로 하구가 막히고 상류에 저수지가 생겨 항구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수십 척의 중형 선박이 들끓던 이 지역 최대 파시(波市)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 충남북 일대의 3도 세곡(稅穀)을 서울 마포로 운반하던 국항(國港)으로서 밀두리와 붙어있는 공세리(貢稅里)가 그 자취를 일러주는 이름이다.
올해는 흑룡(黑龍)의 해, 용머리 미추홀에 형제가 도읍했던 백제가 그러면 어찌하여 ‘온조 위례성 건국’ 기록만 정설로 되어버린 것일까. 형 비류는 어디가고 동생 온조만 백제시조로 남았는가. 미추홀과 위례성은 같은 곳인가, 다른 곳인가. <역사의 올레길> 아산만 서해대교에서 출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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