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이 명문(銘文)은 아무리 봐도 칼 12자루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그런 의견은 없습니까?"
"있기는 한데 '果(과)'자에 그런 뜻(자루)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시 교육위원회 매장문화재센터(이하 센터) 스가나미 마사오(管波正人) 씨는 센터에 전시 중인 후쿠오카시 니시(西)구 모토오카(元岡) 고분군 G6호분 출토 철제대도(鐵製大刀) 유물을 안내하면서 이 칼에서 드러난 글자의 해석과 관련한 기자의 물음에 이같이 대답했다.
스가나미씨에 따르면 쇠칼은 지난달 초에 찾아냈다.
센터는 그 조사성과를 지난달 21일 발표했으며 이는 즉각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국내 학계의 관심은 출토 유물 중 19개 글자를 몸통에 상감(象嵌)한 길이 75㎝가량 되는 쇠칼에 있다. 그 명문(銘文)에서 백제와 밀접한 내용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X선으로 녹슨 칼 표면을 촬영한 결과 손잡이에 가까운 칼등 부분에서 '대세경인정월육일경인일시작도범십이과*(大歲庚寅正月六日庚寅日時作刀凡十二果*)'라는 문장이 확인됐다. 그 의미를 센터는 "경인년 1월6일 경인일에 이 칼을 만드니 무릇 12번을 두들겨 만들었다" 정도로 해석했다.
마지막 글자 *는 글자 모양은 분명하나 정확히 어떤 글자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센터는 칼을 벼리다는 뜻의 '鍊(련)'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봤다.
센터는 쇠칼이 출토된 무덤 축조연대를 고려할 때 경인년 1월6일이 간지(干支)로 경인일에 해당하는 연대는 570년밖에 없으며, 나아가 그에 해당하는 역대 달력은 원가력(元嘉曆)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가력은 중국 남조 송(宋)나라에서 만든 달력으로 백제가 수입해 사용하고 백제는 그것을 다시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른다면 이 칼은 백제가 원가력이라는 책력을 고대 일본에 전해주고 일본이 그것을 실제로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인 셈이다. 센터에서 이번 성과를 '대발견'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기자는 지난 연휴 이곳을 찾아 스가나미 계장의 안내로 먼저 명문 상감 쇠칼이 전시 중인 센터의 전시장을 둘러봤다. 쇠칼은 흙덩이를 떼지 않은 상태로 여러 개로 동강 난 모습이었다.
명문 19글자는 이 흙덩이에서 X선을 통해 드러났다. 칼 몸통을 따라 그 끝에서 자루 쪽으로 한 줄로 써내려간 각 글자는 아주 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작았다.
아직 명문을 상감하는 데 사용한 재료가 금인지 은인지는 알 수 없다 하고, 몇 개 글자는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문맥 등을 감안할 때 판독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었다.
같은 고분에서 칼과 함께 출토된 유물 중에는 길이 12㎝에 이른다는 동령(銅鈴), 즉 청동방울과 금귀걸이, 수정을 비롯한 장신구 11점이 함께 전시 중이었다. 출토 유물 중 토기는 발굴현장에 있다고 했다.
센터 보존처리 담당자인 다가미 유이치로(田上勇一郞)씨는 "명문 각 글자는 크기가 5~6㎜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흙덩이를 떼어내는 등의 보존처리는 문화청과 협의해 진행할 예정이며 그것이 끝나면 칼의 원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명문 중 일부 구절에는 해석에 의심스런 대목이 있다.
경인년 정월 6일 경인일에 이 칼을 만들었다는 대목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바로 뒷부분 "凡十二果(범십이과)"를 "모두 열두 번 쇠를 두들겼다"고 해석하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열두 번 두들겨 칼다운 칼을 만든다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보다는 문맥으로 보아 명문은 "경인년 정월 6일 경인일에 이 칼을 만드니 도합 12자루다"는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칼이 출토된 고분은 농촌 평야지대 산구릉에서 지난 2월에 발견됐다. 온통 대나무밭인 산기슭을 뒤로 한 현장에서는 막바지 발굴이 한창이었다. 센터 직원들인 나가야 신(長家伸)씨와 현장 발굴책임자인 오쓰카 토시노리(大塚紀宜)씨가 기자에게 현장을 안내하고 발굴성과를 설명했다.
무덤은 널길을 따로 마련한 횡혈식 석실분이었다. 시신을 안치했을 석실은 대형 돌로 쌓아 벽체를 만들고 뚜껑은 거대한 자연돌 5개 정도로 덮었다. 지금은 뚜껑돌 일부를 해체해 장방형 석실 내부와 바닥이 훤하게 드러난다. 널길과 석실 입구에는 각각 문지방 같은 시설이 발견된다.
오쓰카 씨는 무덤 뒤편 산을 가리키며 "무덤돌은 아마도 저곳에서 옮겨왔을 것"이라며 "암석이 같은 종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석실 주변으로는 원형에 가깝게 빙 두른 도랑 같은 시설인 주구(周溝)가 발견됐다. 또 널길에서 이 주구로 이어지는 직선 방향으로 주구와 비슷한 도랑시설도 드러났다. 센터는 무덤 크기를 18m라고 했는데, 그 기준이 바로 주구 지름이었다.
이곳이 무덤이리라고는 지난 2월 무렵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센터 측에서 보여준 발굴 이전 모습을 보면 둥근 돌덩이 2~3개 정도만 지표에 노출돼 있을 뿐이다.
현장에서 살핀 고분 배치에는 언뜻 이상한 점이 있었다. 등고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무덤 장축(長軸)을 두고 주변으로 배수를 위한 주구가 있다고 하지만 많은 비에는 취약한 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쓰카 씨는 "무덤 장축은 정확히 남북 방향으로 맞춘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쇠칼 출토 지점과 그 당시 모습은 오쓰카 씨의 설명과 발견 당시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석실 안에서는 각종 호(壺. 항아리)라든가 고배(高杯. 굽다리접시), 뚜껑과 같은 토기류가 더러 발견되기는 했지만 무덤 규모라든가 쇠칼을 부장한 점 등에 비춰보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현장 사무소에서 본 토기 출토품은 완형이라고 할 만한 게 10~20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무덤이 도굴당한 게 아닐까 했는데 오쓰카 씨에게서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도굴됐습니다. 그 시기는 13세기 무렵 가마쿠라 시대로 봅니다. 철검과 토기류를 비롯한 원래의 무덤 축조 당시 유물이 발견된 석실 바닥에 두께 30㎝가량 되는 퇴적층이 있었고, 그 위 약 두께 약 10㎝ 층위 구간에서 패각(조개무지)이라든가 불땐 흔적이 가마쿠라시대 유물과 함께 발견됐습니다. 아마도 가마쿠라시대에 이 고분은 모종의 제의시설과 같은 곳으로 사용된 듯합니다."
무덤을 만든 시기에 대해 오쓰카 씨는 일본 열도에서 이른바 고분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7세기 중반기 무렵으로 간주했다.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보다시피 널길 넓이가 석실 넓이하고 거의 같은데 이것이 7세기 중반기 고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출토 토기류가 모두 7세기 중반기 유물입니다."
무덤 축조가 7세기 중반이니 쇠칼 제작 연대(570)와는 대략 70년 차이가 난다. 오쓰카씨는 "아마도 이 쇠칼이 전세(傳世. 세대를 이어 전해짐)되다가 나중에 묻힌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곳에 묻힌 사람이 유력한 지방세력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기자는 현장을 떠나기 전 조사단에 "쇠칼이 이른바 삼인검(三寅劍)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보았다. 삼인검이란 인년(寅年)ㆍ인월(寅月)ㆍ인일(寅日)에 제작된 칼을 말한다. 이런 때 제작한 칼은 무엇보다 신통력이 크다는 믿음이 당시 동아시아에는 있었다.
칼은 (경)인년 정월 6일 (경)인일에 만들었다고 한다. 정월을 원가력(元嘉曆)에서는 인월(寅月)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이 칼은 인년하고도 인월에다가 인일에 만든 셈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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