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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8, 2011

북연을 속국으로 삼은 광개토태왕



사서에 따르면 고구려 출신인 고운이 후연의 모용희를 죽이고 북연(대연)을 세우고 왕이 되자 광개토태왕이 사신을 보내서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敍宗族)"라고 한다.

그런데 에레메스님께서 보내주신 시노하라 히로카타님의 논문을 보니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고구려 왕실은 시조와 天을 혈연관계로 연결시키면서 天에 대한 정통성을 내세우고자 하였다...중략... 그렇다면 고구려의 "敍宗族(서종족)"이란, 단순한 동족 대우가 아니라, 天을 정점으로 한 고구려의 왕통으로서, 광개토태왕을 直系(직계)로, 고운을 傍系(방계)로 삼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관념(天)적으로는 (고구려의) 太王家(태왕가) 밑에 (북연의) 천왕가(天王家)가,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고구려 밑에 북연이 위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 고구려의 "敍宗族"에 대해 북연이 '侍御史(시어사) 李拔(이발)을 보내 이에 보답하였'음을 볼 때, 이것이 고구려의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운이 광개토왕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모용희의 두 번째 침공을 저지한 시점에서 고구려는 후연보다 훨씬 더 우위에 서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용희에서 고운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혼란기에 얼마든지 대연에 군사를 보내서 점령할 수 있었고 실제로 고구려의 대군이 침입했으면 고운의 대연은 붕괴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럼에도 광개토태왕은 고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며 즉, 동족으로 대우하며 대연을 존속시켰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 신라 등의 다른 나라에도 그러했듯이 굳이 나라를 멸망시키지않고 기존의 지배층으로 하여금 계속 그 지역의 지배를 허락하여 속국으로 삼은 것과 같다고 볼 것이다.

대연 이후 북연도 고구려가 주도하는 고구려 천하의 국제 질서 속에서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가진 것이다.
이는 후일 고구려가 신흥 강국 북위와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무릅쓰고 북연의 왕과 주민들을 고구려로 데려온 데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시노하라님도 그렇고 고구려 전문가이신 김용만 선생도 그렇고 북연을 고구려의 속국으로 보는 견해를 가진 역사 전문가들이 많은데 서영수 교수도 광개토태왕이 북연왕 고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는 기사는 주나라 종법 질서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 고구려가 대종(大宗), 북연이 소종(小宗)이 되는 관계로, 천자가 제후를 통제하던 주나라 종법적 봉건 질서를 고구려가 동방에 구현하여 고구려가 북연을 신하국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고 본다고 한다.

비록 고구려가 남긴 역사서는 단 한 권도 없이 일방적으로 고구려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터무니없는 왜곡만이 가득한 사료들만이 남아서 이런 정황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료 분석을 통한다면 역사의 진실은 얼마든지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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