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세력으로서의 이슬람의 부상
팔
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를 모두 차지한 이슬람군은 명장인 알-왈리드의 지휘하에 637년과 638년에 시리아를 거쳐 지금의 터키
중부인 마라쉬까지 진출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이어 동로마의 ‘본토’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터키)까지 이슬람군의 침공에
노출된 것이다. 야르무크에서 10만의 군사가 궤멸 당한 동로마는 이슬람의 침공을 막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다행히 터키 중부까지
왔던 이슬람군이 북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리면서 본토는 잠시 안도할 수 있었지만 제국의 경제적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가
아랍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무역기지와 식량보급지를 동시에 잃은 동로마는 중대한 타격을 입고 휘청거렸다. 제국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었는데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곳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튀니지까지 잃어버리면서 중요한 해상기지도 잃게 된
반면 이슬람 세력은 해군을 크게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부랴부랴 지금 터키 남부의 선공(船工)집단을 고용하여 해군력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지방을 잃어버린 타격은 컸다. 우수한 조선공들과 선원들의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655년에 지금의 터키 남부인 피니케에서 격돌한 해전에서 새로이 해군을 만들기 시작한 이슬람군이 해상력과 무역에 도가 튼 동로마
해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슬람 해군은 이후 북아프리카 서부(현재 알제리와 모로코)와 에스파냐의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육상병력에 이어 해상의 우위까지 빼앗기면 동로마로서는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이때 이슬람 제국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며 라시둔 조가 움마이야 왕조로 바뀌었고 동로마는 잠시 숨돌릴 틈을 얻었다.
라시둔 조를 움마이야 왕조로 바꾼 무아위야는 다시 정복에 나서 크레타와 로도스를 차지하고
중앙아시아로 이슬람군을 진격시켰다. 아울러 지금의 튀니지 지방에서 마그레브(지금의 북아프리카 서부)로 진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새로이 정복한 시리아 지방의 기독교인들과는 공존하면서도 조직적인 교단으로써의 기독교 세력은 철저히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의 아들 야지드의 지휘하에 이슬람군은 아나톨리아를 통과하여 674년에 보스포루스에 다다랐다. 이제 좁은 해협만 건너
고도(古都) 콘스탄티노플만 무너뜨리면 기독교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리스의 불
기
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이슬람군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보스포루스를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동로마는 수십
년간 아랍군에 밀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그 도성이 포위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야지드가 이끄는 아랍군은 지금까지의 승세로 볼 때
자신들이 패할 일은 없다며 의기양양하였지만 몇 가지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테오도시우스
황제(408-450)가 지은 거대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이슬람군도 수십 년간 싸우면서 많은 성채들을 보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같은 거대한 방벽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랍군은 정면공격을 시도하여 보았지만 이중성벽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갖가지 발사물, 그리고 성벽 앞의 해자에 막혀 큰 손해만 입고 번번이 실패하였다.
아울러 동로마군에게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 바로 ‘ 그리스의 불’
이라 불리는 액체 화약이었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의 불은 7세기 중반에 시리아 출신의 동로마 사람 칼리니코스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발명한 액체 화약이다. 일설에는 칼리니코스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기였는데 시리아가
아랍세력에게 점령당하면서 피난을 한 칼리니코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온 것이라 하였다. 또 다른 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학자들이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발명하였건 간에 대부분의 무기와 배가 나무로
되어있던 시절에 그리스의 불은 핵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불이 붙기만 하면 빠르고 뜨겁게 타올랐고 물을 부어도 끌 수가 없었다.
이슬람군에게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장벽을 파해(破解)할 방법이 없었고, 한편 콘스탄티노플은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안전하게 바닷길로 공급받으면서 1차 콘스탄티노플 전투는 지루한 공방전이 되었다.
이슬람군은 따뜻할 때는 공격하다가 겨울이 되면 120km밖의 시지쿠스섬에 구축한 보급기질로 후퇴하여 쉬다가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아울러 아랍군이 다시 건너와서 공격하게 되면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활용하여 아랍군의 보급선들을 공격하였고,
이슬람군은 계속 공격은 하면서도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지리한 포위전을 끝낸 것은 677년 콘스탄티노플 앞의 마르마라해(海)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큰 통에다 채운 다음 긴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마치 화염방사기와 같은
원리로 이슬람 해군을 대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사정이 좋지 않던 이슬람군은 본격적으로 굶주릴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러나 물러가는 와중에 아랍 함대는 폭풍을 만나서 더 많은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겨우 귀항할 수 있었다. 기번에
의하면 수년간의 전쟁으로 약 3만의 아랍군이 전사하였고 동로마에서 움마이야 왕조의 도성인 다마스쿠스로 사절이 파견되었으며 약
30년동안 싸우지 않기로 하는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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