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Wednesday, November 23, 2011

치카틸로 신드롬이란?

1936 년 10월 16일, 러시아 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마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안드레이와 그의 여동생은 형 스테판이 1930년대초, 대기근때 어떻게 납치되어서 먹혔는지 귀가 닳도록 들었다. 사실 스테판 치카틸로에 대해선 공식적인 기록도 없고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치카틸로의 어머니가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말해서 두사람은 그 사실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 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안드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근시였고 청년이 되어서는 성기능 장애때문에 주기적인 성불능 상태에 빠졌다. 1960년대 초, 그는 결혼을 해서 두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 자신은 장님이었고 태어났을때 거세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그의 행동에 연료를 제공했다. 대학 졸업과 군제대 이후 충실한 공산당원이었던 그는 로스토프-온-돈(Rostov-on-Don)에 있는 남자 광산 학교의 교사가 된다. 그의 재직기간 초부터 학생들은그의 긴 목과 구부린 자세등을 흉내내며 '거위(goose)'라고 놀림을 받았다. 나중에 그가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희롱하기 시작하자 학생들을 그의 면전에 대고 '변태(faggot)'이라고 불러대기도 했고, 가끔은 그가 기숙사에 들어오면 불을 끈채로 공격하기도 했다. 나이와 체격에도 불구하고 치카틸로는 그의 반 아이들을 무서워한 나머지 수업중에도 칼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안드 레이 치카틸로는 보통의 연쇄살인자들과는 달리 늦게 '성숙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연쇄살인자들은 보통 20대 초반에 살인을 시작하지만, 그는 42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그가 처음으로 선택한 피해자는 9세의 소녀 레노카 쟈코트노바(Lenochka Azkotnova)로 그녀는 샤크티에 있던 빈집으로 유인되었고, 치카틸로는 그녀를 강간하는데 실패하자 세번 찌른후 사체를 그루쇼프카강(Grushovka)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근처에 있던 다리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이 사건의 용의자를 즉시 찾아 내었다. 그는 가석방된 강간 살인범 알렉산드르 크라프첸코(Alexander Krravchenko)는 처음에는 범행 사실을 부인했지만 1979년 2월, 그의 아내가 그에게 반대 증언을 하게되자 자백하게 된다. 최초에는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나중에 15년형으로 감형된다. 하지만, 분노한 쟈코트노바 가족의 항고로 1982년 3월 그의 사형 선고는 원상회복 된다. 크라프첸코는 1983년 7월 사살되었고, 고로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첫번째 살인사건은 종결되었다.
다 음 살인이 일어나기까지에는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때에는 학생들을 성희롱한 것 때문에 교사일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원으로서 그는 샤크티에 있는 공장의 순회 조달 사무원으로서의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는 거의 길위에 있거나 열차에 있었으므로 그의 살인을 위한 다음 희생자를 찾기에 좋은 위치에 되었다.
그의 두번째 희생자인 라리사 트카첸코(Larisa Tkachenko)는 로스토프의 재단 학급에 있었는데 치카틸로는 그녀에게 접근하여 근처 숲속에서 성관계를 맺자고 설득한다. 그녀는 그가 성불구인걸 알자 비웃고마는데 격분한 치카틸로는 그를 교살하고 목,팔, 그리고 가슴을 물어뜯고는 젖꼭지중 하나를 떼어내고는 그것을 그녀의 성기에 집어넣는다.
그의 세번째 희생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모른다. 1982년 6월 12일, 류바 비르유크(Lyuba Biryuk)는 자프라프스카야(Zaplavskaya)에서 유인되어 40번 이상 칼에 찔렸다. 그의 상처에는 안구절단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치카틸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1983년 7월, 그녀의 뼈만 남은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 때 치카틸로는 그 해가 끝나기 전까지 세번의 살인을 더 저지르게 된다. 그 중에는 그의 첫번째 남성 희생자인 올레그 포드치다예프(Oleg Podzhidaev,당시 9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올레그의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성기를 절단하였고 그것을 살해현장에서 가져갔다고 이후의 증언에서 스스로 밝혔다. 그리고, 그것은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열차선로를 따라 버려진 사체들 때문에 붙혀진 별명 "The elusive Shelter Belt Killer"라고 불려진 치카틸로는 1984년 1월부터 9월까지 15건의 살인을 더 저지른다. 그의 범죄 행각이 계속되던중, 1984년 2월 22일 그는 공장에서 리놀륨 장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기소된다. 7개월 후 이 기소가 채 끝나기도 전에 로스토프 버스정류장에서 여자들을 꼬시려고하다가 경찰한테 체포되고 '공공장소에서의 음란 행동'이라는 제목으로 15일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이후 형사들이 그를 용의자로 주목하면서 3개월이나 더 복역하게 된다. 사체에서 발견된 정액과 그의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게 되자 그는 풀려나는데 이번에는 공교롭게도 리놀륨 장판 절도죄로 1년형을 구형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미 3개월이나 복역했다는 사실을 참작하여 석방된다. 살육의 게임은 계속되고 로스토프와 그 근교에 시체들이 늘어갔다. 멀리로는 타슈켄트(Tashkent)까지도 희생자는 늘어났다. 1990년 11월 20일,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노보체라스크(Novocherassk)에서 다시 체포 된다. 이번에는 그의 범행을 상세하게 자백했고, 총 52명의 피살자의 이름을 댔다. 경찰은 현장에서 마네킨을 사용한 현장 검증을 했고, 치카틸로는 심경의 변화를 겪게된다.1992년 4월, 그의 공판이 열리자 이번에 그는 자백한 사실을 모두 부인했지만, 그의 증언을 철회할 길은 없었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1994년 모스코바(Moscow)감옥에서 1994년 2월 16일 사형되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