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볼테르와 괴테 이래로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런 명성을 누린 작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작품 대부분이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의 대열에 든 반면, 그의 인물됨은 예나 지금이나 의문에 싸여 있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그의 인물됨을 둘러싸고 형성된 신화는 지금도 계속 남아 있다. 그 신화는 어찌나 강렬한지, 심지어 실제
사실이나 톨스토이의 본질마저 흐리게 할 정도다.”(얀코 라브린)
귀족 지주에서 청년 장교를 거쳐 문단에 등장
레
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러시아 남부 툴라 근교의 영지 야스야나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부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은 파산을 막기 위해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모친 마리아 볼콘스키는 남편보다 더 저명하고 부유한
귀족의 외동딸로,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야스야나 폴랴나는 이후 레프 톨스토이의 고향이자 분신이 되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톨스토이 가문의 다섯 남매는 친척집에서 성장했다. 귀족 지주에서 청년 장교를 거쳐 문단에 등장
넷째인 레프는 16세 때인 1844년에 카잔 대학에 입학했지만 불과 3년 만에 공부를 포기했다. 곧이어 그는 부모의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이 된 야스야나 폴랴나로 돌아간다. 영지에서 농노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계몽 실험을 벌이던 톨스토이는 1848년에 다시 고향을 떠난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빚을 많이 졌다(급기야 1855년에는 도박 빚 때문에 야스야냐 폴랴나의 저택을 매각하고 말았다).
1851 년에 그는 군인이었던 형 니콜라이의 뒤를 따라 캅카스로 가서 육군 장교로 입대하고 체첸 공격에 가담한다(1859년에 체첸은 결국 러시아에 흡수되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최근까지도 전투와 테러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체첸 독립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전소설인 [유년시절](1852)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854년에는 크림 전쟁에서 세바스토폴 방어전에 참전했고, 1856년에 전역했다. 이듬해에 톨스토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독일을 여행했으며, 1858년에 고향에 돌아와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1861
년에 러시아에서는 농노제가 폐지되었는데, 톨스토이는 그보다 수 년 앞서 영지에서 똑같은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
백작이 쓰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문학에는 진정한 농부가 없었다”고 훗날 레닌이 극찬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농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었다. 한편으로는 농민의 소박한 삶과 생각에 대한 진정한 감탄 때문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천성과 배경
모두에서 당대의 급진적인 지식인이나 상류층과의 교류를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작품이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는 무지한
농민들 사이에서 톨스토이는 도리어 편안함을 느꼈다.
1862 년에 34세의 레프 톨스토이는 지인의 딸인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이슬레네프와 결혼한다. 그녀는 훗날 남편을 대신하여 영지를 관리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등 내조에 힘을 쏟았지만, 한편으로는 신혼 초기부터 남편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격을 알고 충격과 혐오에 빠졌다. 비록 8남매를 낳고 반세기 가까이 해로하긴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성격부터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남편이 이상주의자였다면 부인은 현실주의자였으며, 이런 성격 차이는 날이 갈수록 극명해짐으로써 톨스토이의 말년을 힘겹고도 불미스럽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1869)와 [안나 카레니나] (1877)를 완성해 명성을 얻은 톨스토이는 40대 후반에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의 문제를 깊이 숙고했다. [고백록](1879)은 톨스토이의 생애를 사실주의 문학 중심의 전반기와 종교 사상 중심의 후반기로 나누는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한동안 문학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신학과 성서 연구에 전념한 톨스토이는 기존의 기독교에 실망한 나머지 자비, 비폭력, 금욕을 강조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창했다. 이른바 기독교적 아나키즘으로도 평가되는 ‘톨스토이주의’의 요지는 그가 발표한 수많은 우화에 잘 요약되어 있다.
1880년대에 톨스토이가 거둔 문학적 성과 중에서는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 (1886)과 중편 [크로이처 소나타](1889)가 수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여성과 결혼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후자는 점차 위태로워지던 그의 결혼 생활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톨스토이의 활동에서 문학보다 종교의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인 및 자녀와의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명성과 함께 톨스토이를 일종의 성인으로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야스야나 폴랴나로 몰려왔다. 물론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집주인의 호의를 악용하는 식객들도 적지 않았다.
이
즈음의 톨스토이는 청빈과 금욕을 예찬하면서도 정작 안락한 삶을 떨치지 못하는 본인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급기야 그의
본심을 이해 못하는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자리를 일부 추종자들이 파고들었다. 그중 하나인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는 아예
톨스토이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소피야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1891년에 톨스토이는 청빈의 실천을 위해 저서의 판권을 포기하려 했지만
가족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결국 그는 1881년 이후에 발표한 작품의 판권만 포기하고, 그 이전 작품의 판권은 아내에게
넘기기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톨스토이는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을 발표하며 필력을 과시했다. 뒤늦게야 종교 문제로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당하고, 격렬한 사회 비판으로 러시아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1908년의 80회 생일에는 전 세계에서 축하 인사가
답지할 정도로 명성의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사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1910년에 그는 (체르트코프의 조언을
따라)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편이었던 딸 알렉산드라에게 모든 저서의 판권을 상속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경악한
소피야는 이때부터 남편의 행적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 그 유명한 톨스토이의 가출이었다. 1910년 10월 27일 밤, 톨스토이는 자기 서류를 뒤적이는 아내의
행동에 분격한 나머지 가출을 결심한다. 그는 한 집에 살고 있던 친구 겸 주치의 두샨 마코비키와 함께 몰래 집을 빠져나와 기차를
탔다. 다음날 그의 가출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며칠 후, 톨스토이는 기차 여행 중에 감기에 걸렸고, 이는
곧이어 폐렴으로 번졌다. 작은 간이역 아스타포브의 역장 집을 빌려 몸져누운 톨스토이는 가출한 지 열흘 만인 1910년 11월 7일
새벽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야스나야 폴랴나로 운구되어 묻혔다.
“러 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아닐지라도 가장 거대한 인간”(D. S. 미르스키)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톨스토이는 생전에 당대의 누구보다도 더 영향력 있고 존경 받은 인물이었다. 80년 넘는 생애 동안 수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대표적인 업적은 역시 문학 분야에서 나왔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은 그가 “러시아의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와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한 마디로 요약한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1869)와 [안나 카레니나](1877)다.
1812년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소재로 한 [전쟁과 평화]는 원래 데카브리스트 사건을 소재로 구상했던 3부작의 첫 번째 권이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실주의적 묘사는 톨스토이 문학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반면, 작품에 드러난 특유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안나 카레니나]는 동명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열정을 추구하다가 사회의 편견 속에서 질식해 가는 과정을 고발한 소설로, 특히 그 비극적 결말이 유명하다. 특히 안나의 이야기와 병행되는 이상주의자 지주 콘스탄틴 레빈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집필 당시에 중년의 위기를 겪은 톨스토이의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말년의 대작인 [부활](1899)은 대중적 인기에 비해 문학적 완성도에서는 다른 장편에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더 짧은 작품 중에서는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1899)가 걸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그가 회심 후에 교육 수준이 낮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쓴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 순례자], [바보 이반] 같은 짧고도 교훈적인 우화가 아닐까. 유명한 [인생독본](1906)도 이처럼 계몽적인 의도로 간행된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이 탁월하다는 데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평가가 일치하는 반면, 그가 말년에 문학보다 더 몰두했던 종교 사상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부정적이다. 이른바 “독선과 신비로부터 해방된 기독교 (...) 내세의 구원이 아니라 이 땅에 구원을 주는 실천적 종교”를 만들겠다는 이상은 훌륭했지만, 그 결과물은 특별한 매력이나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진 않았던 까닭이다. 일각에서는 ‘독창적’이지 않았던 반면 ‘독단적’이기는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학 작품에 비해 종교 저술이 톨스토이의 사후에 의외로 빨리 잊혀지고 만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영 국의 정치학자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논한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고대 그리스의 격언을 하나 소개한다. “여우는 잡다한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굵직한 것 하나를 안다.” 곧이어 그는 세계의 위대한 작가를 여우 유형(평생 다양한 사실을 추구함)과 고슴도치 유형(평생 단일한 원칙을 고수함)으로 나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괴테,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이고 플라톤, 파스칼, 헤겔, 니체, 프루스트는 고슴도치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벌린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가설은, 톨스토이가 천성적으로는 여우지만, 그 스스로는 고슴도치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톨스토이의 생애를 관통한 모순에 관한 적절한 비유인지도 모른다. 그가 타고난 재능은 작가에게나 어울렸지 성인(聖人)에게 어울리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이 아니라 종교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로 인해 가족이며 세상과 불화한 것은 물론이고 결국 자기부정에 이르렀다. 종종 “톨스토이의 마지막 구도 여정”으로 미화되는 가출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런 모순이 빚어낸 파국이었다. 톨스토이는 물론 위대한 작가였다. 그러나 대중이 생각하듯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으며, 한때 소수가 떠받들었듯 예언자나 성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로망 롤랑처럼 톨스토이에게서 예술과 인간 모두의 완성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슈테판 츠바이크처 럼 예술가로서는 긍정하되 사상가로서는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폴 존슨처럼 인격 파탄자 톨스토이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해럴드 블룸처럼 톨스토이는 뭔가 잘못 말할 때에 오히려 더 큰 가르침을 남겨준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톨스토이는 거인인 까닭에 목소리 역시 워낙 우렁찼고, 그로 인해 역사 속에 뚜렷한 메아리를 남겼다는 점이다.
특히 톨스토이주의의 가장 돋보이는 특색이었던 비폭력 사상의 실천은 오히려 다른 나라의 다른 인물에 의해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크나큰 결실을 낳았다. “한 인도인에게 흥미로운 편지를 받았다.” 1909년에 톨스토이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에서 인권 보호 활동을 벌이던 한 인도인 변호사가 보낸 편지를 처음 받았고, 이후 사망 직전까지 소식을 교환했다. 수 년 뒤에 그 인도인은 고국으로 돌아가 톨스토이의 사상에서 힌트를 얻은 비폭력 투쟁 ‘샤티아그라하(진리의 힘)’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의 이름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참고문헌: D. S. 미르스끼, [러시아 문학사 1], 홍성사, 1985; 로망 롤랑, [톨스토이의 삶과 문학], 청암, 1993; 얀코 라브린, [톨스토이], 한길사, 1997; 이사야 벌린, [러시아 사상가들], 생각의나무, 2008; 해럴드 블룸, [세계문학의 천재들], 들녘, 2008; 빅토르 쉬클롭스키, [레프 톨스토이], 나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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