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르무크 전투의 결과로 동로마군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어
637년에 알-왈리드가 이끄는 아랍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기독교도들의 관점에서는 성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동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상실하면서 소위 성지를 되찾는 것은 이후 모든 기독교 국가의 목표가 되었고 수세기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아울러 아랍군이 북아프리카의 동로마 영토를 접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집트방향으로
향한 아랍군은 헬리오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는 동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에 건립한 후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존재하였던 알렉산드리아 역시 641년에 아랍군에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동로마
정부에 막대한 세금을 바치고 있었는데 아랍-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면서 동로마 정부는 심한 재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집트는
무역기지일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시절부터 제국을 먹여 살리던 곡창지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집트를 아랍군에게 빼앗기면서 동로마는
식량보급기지도 잃어버린 셈이 되었고 동로마는 이집트 실함으로부터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645년에 동로마군은
상륙작전으로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되찾기는 하였지만 이듬해에 아랍군에 다시 점령당하였고 647년에는 튀니지 지역마저 점령당하면서
카르타고 항구를 제외하고는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동로마군의 패배는 아랍군에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로마가 당시 근동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정교(正敎)의 교리를 강제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로마의 종교적 독재와 지나친
세금에 시달리던 근동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용인해줄뿐더러 세금도 동로마보다 낮은 이슬람의 통치를 선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이후 수세기 동안 반복되어 나타난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건과 테마 제도의 설립
라시둔 조가 팽창을 하는 와중에 이슬람 제국 내에선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이끈 깔리프(최고 종교지도자) 우마르가
644년에 페르시아인 포로에게 암살당하면서 움마이야 가문의 오트만이 깔리프로 등극한다. 656년에 이집트에서 라시둔조의 총독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이집트의 반란군은 일종의 자치권을 획득한다. 반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메디나로 암살단을 보내어 오트만을
암살하게 된다. 오트만이 암살된 후 알리가
깔리프가 되지만 알리는 일부 세력에 의하여 오트만의 암살을 사주하였거나 사실상 묵인하였다고 의심을 받게 되고 이에 656년에
라시둔 조는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알리는 모하메드의 부인 중 한명인 아이샤가 이끄는 파벌을 무찌르지만 모하메드의 친구 중 한
명이었던 무아위야가
이끄는 다른 파벌의 도전을 받는다. 알리는 659년에 무아위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무아위야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를 본 시리아의 일부 파벌들이 무아위야를 새로운 깔리프로 추대하였고 일시적으로 라시둔조는 두 개의
파벌이 있게 된다. 그러다가 661년에 알리가 암살당하고 무아위야가 깔리프가 되면서 추대로 깔리프를 선출하던 라시둔 조의
계승방식을 바꾸어 친족간 계승으로 바꾸어버린다. 추대에 의한 종교지도자 대신 계승에 의한 실질적인 왕이 이슬람 제국을 다스게 된
것이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건이었다.
이 와중에 동로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수염왕’ 콘스탄투스 2세가 이전의 용병 위주의 군제를
고쳐 이후 동로마 제국의 근간이 되는 ‘테마’ 제도를 도입하였다. 국가가 장원을 설립하여 병사들에게 내어주고 생업을 영위하게
하는 대신 전쟁 시에는 자신들이 있는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떠나 원정을 하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이전의 용병제도에 비하여 보다 안정적인 군사동원을 가능케 하였다. 일단 병사들이 자신들이 일구고 있는 땅을
지키려고 용병들보다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정착이 되기 전에 움마이야 왕조의 새 깔리프인 무아위야는 해군을
발진시켜 동로마 해군을 수 차례 무찌른 후 아들 야디즈의 지휘하에 대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동로마-아랍 전쟁의 정점을
이루게 되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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