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수차례 부여를 방문하였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백제의 고도인 부여를 제대로 관람하지 못하였습니다.
잠시 짬을 내어서 부여박물관과 초촌면에 있는 송국리 유적발굴지를 방문하였네요.
*송국리 선사유적지 방문*
근처의 초촌파출소에 들러 부여에서의 마지막 업무를 종결한 후 잠시 시간을 내어서 근처의 송국리유적지를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임시로 지어진 듯 한 가건물의 유적지 전시실은 문이 잠겨 있고, 주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관리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니 점심식사중이니 금방 오겠다고 합니다.
관람객은 나 한명. 60세는 되어보이는 관리인은 잠시 사무실로 가자고 합니다. 방명록에 싸인을 하고, 송국리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곳의 관리인은 인국환선생님으로 공무원이나 연구원이 아닌 지역 주민이었습니다. 30년전 처음 송국리 유적이 발굴을 할 때부터 지켜보았다는 인국환선생님께서는 어느 기관에서도 이제는 관심을 안 갖는 이곳 유적지를 보수도 없이 지키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현재 유적지에 대한 발굴은 오래전에 끝났으며, 지난 30년간 유적지는 방치가 되어있는 것과 마찮가지라고 하군요. 당시 발굴을 하였던 곳은 비닐을 씌우고 흙을 덮어, 현재는 콩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부여지역 국회위원을 만나서 이곳의 발굴과 복원 개발을 하기로 약속을 받아 놓았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고대 선사유적지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썰렁하여 관람객의 수를 물으니 어제 한커플이 왔다가 갔으며, 몇일전에 어느 대학교에서도 다녀갔다고 합니다.
하긴 왠만한 매니아가 아니라면 백제유적지가 사방에 널려있는 다른 곳을 놔두고서 제대로 관리도 안되는 선사유적지에 올 리가 없겠지요.
한참 설명과 몇 차례의 질문이 오고간 뒤 준비해간 음료수 한박스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발굴터를 둘러보기 위하여 산속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산속 외길을 운전하니 주변의 콩밭이 보입니다. 나는 감격에 빠져들었습니다. 2500년전 바로 이곳에 청동기인들이 살았다는 상상을 하니, 그들이 쌓아놓은 방책과 집들, 주변에 농사를 짓는 청동기인들이 눈에 선합니다.
비록 산속의 나무와 콩밭이 전부인 이곳을 천천히 감상을 하며, 내려오는데 비가 오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길을 잘못들었습니다. 뻘건 흙길로 접어든 나는 차를 돌릴만한 곳을 찾기위하여 계속 직진을 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차가 비로 젖은 길에 빠져버렸습니다.
차를 후진해보지만 이미 깊이 빠져있는 바퀴는 헛돌기만 하더군요. 주변에서 돌이라도 찾아보지만 불과 20분전에 들었던 인국환선생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이곳 송국리는 돌이라고는 자갈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지요. 그래서 쌀이든 콩이든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청동기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나 봅니다...”
혼자서 10여분을 힘겹게 차를 빼기위하여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농사꾼 한분이 오시더군요.
“여기는 비가 안오는 날이라도 차가 빠지고는 하여서 차가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인데, 어쩌자고 여기로 들어왔는가?” “길을 잘 못 들었어요. 조금 도와주세요.”
이분께서는 이길의 입구에서 제가 이곳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시고는 급히 따라오신 것 입니다. 같이 힘을 내어서 차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역시 역부족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에게 전화를 하시더군요. “형님! 여기 차가 빠져 버렸는데, 형님 트랙터 좀 써야겠어요. 예? 멀리도 있구먼 빨리 좀 와요”
20분을 기다리니 트랙터가 왔습니다. 쇠사슬로 차를 묶고 트랙터가 뒤에서 당기니 다행스럽게 차가 움직입니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도랑에 트랙터도 바퀴가 빠지고 나의 차 바퀴도 빠져버리고... 고생끝에 결국은 다시 포장된 도로까지 나와버렸지요.
“이걸 어떻게 보상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때 나의 지갑속에 들어있는 돈을 전부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은 되려 나를 더욱 걱정하며, “우리야 여기가 집이니 걱정할 것이 없지만 젊은이는 서울까지 어찌가려는가? 추울텐데... 잠시 우리 집에서라도 쉬었다 가던지...” 이때 나의 몰골은 얼굴과 머릿속까지 온몸이 다 젖은 흙으로 뒤덮혀 있었으며, 속옷과 양말도 다 젖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마음이 너무나 따뜻한 분들이시더군요. 감사함을 느끼며,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송국리유적지는 어떻게 발견이 되었는가?*
1974년 어느날 지역주민 한명은 낮선 사람들 둘이서 산속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일을 두사람이 다녀가는 것을 본 이 주민은 이상함을 느꼈고, 결국은 어느날 그 사람들이 삽으로 땅을 파는 것을 보고서 경찰서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시는 남북간의 대치상황이 심화되던 시기였었기에 간첩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하지만 경찰에 붙잡힌 그들은 간첩이 아닌 국내에서도 유명한 도굴범이었습니다. 많은 유물들을 파내어 일본등 해외로 빼돌리던 이들은 이미 경찰의 수배중이었고, 여기서 잡힌 것입니다.
그들이 삽으로 파던 자리는 송국리선사유적지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석관묘의 자리로 이곳에서는 후일 청동검등의 유물이 나옵니다.
1975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 공주박물관은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을 수차례 시작합니다. 나오게 된 유물들은 청동기시대를 표현하는 청동검과 돌검, 돌칼, 토기등등과 50여채의 집터, 방책, 중세의 해자와 같은 방어용 수로등등 또한 놀라운 것은 타버린 쌀등이 나와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송국리유적지의 특징*
송국리 유적지는 대략 기원전 5~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이 되며, 출토된 요령식동검과 석관묘, 옹관묘, 토기등은 이 유적지가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송국리유적지는 토기가 타지역의 것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집터의 모양 또한 이전의 유적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후 한반도 남부에서 발굴되는 비슷한 집터는 ‘송국리형집터’로 불리우며, 송국리식 토기는 단절이 되지 않고 고려청자, 분청사기를 거쳐 조선백자로까지 이어진다고 학계에서는 보고있습니다.
또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요시노가리유적지와 송국리유적지의 유사성입니다. 이미 석기시대부터 일본과 한반도는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석기 시대의 타제석기의 재료중 화산석의 일종인 흑요석이 한반도 남부해안가에서 일본산이 출토되는 것에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반도 중부이북은 백두산에서 나온 것이 주종이지요.
송국리형집터와 요시노가리집터의(또는 토기) 유사성은 당시 한일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는 것을 표현하며, 같은 부여 합송리에서 출토된 대롱옥은 마찮가지로 일본 요시노가리에서도 출토가 되고 있습니다.
*송국리 유적지의 규모*
과거 송국리 유적지는 24,000평이 문화재로 고시되어 있었으나 학자들은 일대 100만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송국리 뿐만이 아니라 초촌면일대 어느 곳을 파던지 당시의 유적이 쏟아져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송국리유적지 근처에는 같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또한 존재하여 송국리인들과의 연관성에 대하여도 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62,000평을 현재 사적지로 고시를 하여 매입중에 있습니다. 정부의 주변 토지매입에 또한 인국환선생님께서 적극나서서 주민을 설득하는등 추진중이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것은 나 또한 전문가가 아니므로 더 이상은 무리겠지만 이곳 송국리유적지를 보면서 생긴 의문이 있어서 이곳 유적지 발굴에 상당히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는 충남대학교의 이강승교수님께 개인적인 메일을 보내어 질문을 하였습니다.
*메일*
송국리유적지에 깊은 관여를 하신 충남대학교의 이강승교수님께 보낸 메일입니다.
jigooho의 Mail
안녕하세요. 저는 일반 직장인입니다.
갑작스러운 메일에 죄송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송국리 유적 전시실의 인국환선생님께서 송국리 유적에 교수님께서 깊은 관여가 되어 있으며, 종종 방문을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교수님께서 다니시는 학교 사이트를 통하여 메일주소를 확인하였습니다.
회사일로 부여지역을 종종 출장을 다니게 되었는데, 조금의 시간을 내어 부여박물관과 송국리 유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방문 후 송국리유적은 상당한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현재 관심을 갖고서 이곳저곳에서 자료를 찾아보는 중입니다.
그러다 의문 사항이 생겼는데, 질문을 드릴 곳이 없어 염치 불구하고 교수님께 이와 같이 메일을 보냅니다.
질문은 기원전 5~6세기의 유적이라고 추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청동검등의 출토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라고 밝혀졌고요. 제가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기원전 5~6세기 요령지역이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가 된 유적, 특히 요령식 동검등의 출토는 한반도의 남부가 고조선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거나 또는 고조선의 직접적인 영향권내에 속하였다고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까요? 또한 그렇다면 실질적이며 직접적인 고조선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전파가 되었다고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또 하나 질문은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의 남부에는 진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진과의 중계무역을 했었다는 내용을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송국리의 청동기인들은 진과의 연속성이 있을까요? 고조선이 중계무역을 하였다는 진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너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잠시 송국리청동기인 -> 진 -> 마한 -> 백제라는 연속성을 상상해 봤습니다.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함부로 메일내용을 공개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하군요... ^^
이강승 교수님의 답변 Mail
질문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는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므로 역사에 대해서 자신있게 답변할 수 없습니다. 현재 고조선에 대해서는 참 문제가 많아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선 고고학적인 사실을 역사기록과 연계하는 일도 그리 쉽지않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고조선에 대한 역사기록은 제처두고 고조선의 문화내용이 무엇인가하면 대체로 비파형동검, 고인돌과 기타 미송리형토기 등을 고조선 문화의 표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물들을 살펴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런 유물이 나왔다 하더라도 바로 고조선과 연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고고학적인 문화하고 고조선이라는 민족이나 정치체, 또는 세력하고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한국의 문화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예로 진로 참이슬 소주병을 들면 현재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지에서 많이 마신다하니, 만약 진로소주병이 나오는 곳을 한국의 영토라든가, 혹은 영향권을 말한다면 모순이 되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비파형동검이 고조선문화 내용의 한가지일 수는 있으나 비파형동검이 나온다해서 그 지역이 고조선영역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 역사연구경향을 보면 고조선에 대한 향수가 강하여 영역을 넓게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자국문화중심적인 발상이지요. 만약 고조선이 그때에 있었다면 그것은 요령지방의 얘기이고(실제로 기원전 5-6세기경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지역이 고조선 영역이었는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고인돌은 많이 있으나, 요령식 동검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경향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고조선 연구자에 의하면 엄밀하게 말하자면(사료를 엄밀하게 적용하여 역사를 말하자면) 위만조선만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고조선의 역사로 다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작은 알 수 없으나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위만이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니, 위만 이전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위치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고조선을 비파형동검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송국리문화는 그 내용으로 보아 금강이남(최근에는 강원도 고성지방에서도 이런 형태의 집자리(송국리형집자리)가 나와서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지만)에서만 보이는 문화내용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고조선과 관계시킬 수 없는 문화내용이고, 비파형동검이 한자루 송국리유적에서 나오긴 했지만 그것을 고조선문화의 표지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기록에 나오는 진국에 대해서는 그 문화내용이 잘 알려져 있지 못합니다. 북한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을 진국의 세력권에서 일어난 문화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고고학적으로는 선뜻 말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선 그 문화요소를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고고학 연구성과가 부실합니다. 어느 때 장래에 그런 데 대한 토의가 가능하겠지요. 대답이 시원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참고로 송호정이 쓴 ‘단군, 만들어진 신화’(산처럼 2004)를 읽어주십시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강승
잠시 짬을 내어서 부여박물관과 초촌면에 있는 송국리 유적발굴지를 방문하였네요.
*송국리 선사유적지 방문*
근처의 초촌파출소에 들러 부여에서의 마지막 업무를 종결한 후 잠시 시간을 내어서 근처의 송국리유적지를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임시로 지어진 듯 한 가건물의 유적지 전시실은 문이 잠겨 있고, 주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조용한 전시관>
관리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니 점심식사중이니 금방 오겠다고 합니다.
관람객은 나 한명. 60세는 되어보이는 관리인은 잠시 사무실로 가자고 합니다. 방명록에 싸인을 하고, 송국리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곳의 관리인은 인국환선생님으로 공무원이나 연구원이 아닌 지역 주민이었습니다. 30년전 처음 송국리 유적이 발굴을 할 때부터 지켜보았다는 인국환선생님께서는 어느 기관에서도 이제는 관심을 안 갖는 이곳 유적지를 보수도 없이 지키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현재 유적지에 대한 발굴은 오래전에 끝났으며, 지난 30년간 유적지는 방치가 되어있는 것과 마찮가지라고 하군요. 당시 발굴을 하였던 곳은 비닐을 씌우고 흙을 덮어, 현재는 콩밭이라고 합니다.
< 현재 콩밭인 유적지>
하지만 최근 부여지역 국회위원을 만나서 이곳의 발굴과 복원 개발을 하기로 약속을 받아 놓았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고대 선사유적지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썰렁하여 관람객의 수를 물으니 어제 한커플이 왔다가 갔으며, 몇일전에 어느 대학교에서도 다녀갔다고 합니다.
하긴 왠만한 매니아가 아니라면 백제유적지가 사방에 널려있는 다른 곳을 놔두고서 제대로 관리도 안되는 선사유적지에 올 리가 없겠지요.
<유적지에서 바라본 논산쪽 방향 - 2500년전에도 그 누군가가 이 자리에서 저 먼곳을 바라보았겠지요?>
한참 설명과 몇 차례의 질문이 오고간 뒤 준비해간 음료수 한박스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발굴터를 둘러보기 위하여 산속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산속 외길을 운전하니 주변의 콩밭이 보입니다. 나는 감격에 빠져들었습니다. 2500년전 바로 이곳에 청동기인들이 살았다는 상상을 하니, 그들이 쌓아놓은 방책과 집들, 주변에 농사를 짓는 청동기인들이 눈에 선합니다.
비록 산속의 나무와 콩밭이 전부인 이곳을 천천히 감상을 하며, 내려오는데 비가 오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길을 잘못들었습니다. 뻘건 흙길로 접어든 나는 차를 돌릴만한 곳을 찾기위하여 계속 직진을 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차가 비로 젖은 길에 빠져버렸습니다.
<유적지로 향하는 산길-유적지가 얕은 구릉지역인데, 비오면 이길은 장난이 아닙니다>
“이곳 송국리는 돌이라고는 자갈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지요. 그래서 쌀이든 콩이든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청동기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나 봅니다...”
혼자서 10여분을 힘겹게 차를 빼기위하여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농사꾼 한분이 오시더군요.
“여기는 비가 안오는 날이라도 차가 빠지고는 하여서 차가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인데, 어쩌자고 여기로 들어왔는가?” “길을 잘 못 들었어요. 조금 도와주세요.”
이분께서는 이길의 입구에서 제가 이곳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시고는 급히 따라오신 것 입니다. 같이 힘을 내어서 차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역시 역부족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에게 전화를 하시더군요. “형님! 여기 차가 빠져 버렸는데, 형님 트랙터 좀 써야겠어요. 예? 멀리도 있구먼 빨리 좀 와요”
20분을 기다리니 트랙터가 왔습니다. 쇠사슬로 차를 묶고 트랙터가 뒤에서 당기니 다행스럽게 차가 움직입니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도랑에 트랙터도 바퀴가 빠지고 나의 차 바퀴도 빠져버리고... 고생끝에 결국은 다시 포장된 도로까지 나와버렸지요.
“이걸 어떻게 보상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때 나의 지갑속에 들어있는 돈을 전부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은 되려 나를 더욱 걱정하며, “우리야 여기가 집이니 걱정할 것이 없지만 젊은이는 서울까지 어찌가려는가? 추울텐데... 잠시 우리 집에서라도 쉬었다 가던지...” 이때 나의 몰골은 얼굴과 머릿속까지 온몸이 다 젖은 흙으로 뒤덮혀 있었으며, 속옷과 양말도 다 젖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마음이 너무나 따뜻한 분들이시더군요. 감사함을 느끼며,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송국리유적지는 어떻게 발견이 되었는가?*
1974년 어느날 지역주민 한명은 낮선 사람들 둘이서 산속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일을 두사람이 다녀가는 것을 본 이 주민은 이상함을 느꼈고, 결국은 어느날 그 사람들이 삽으로 땅을 파는 것을 보고서 경찰서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시는 남북간의 대치상황이 심화되던 시기였었기에 간첩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하지만 경찰에 붙잡힌 그들은 간첩이 아닌 국내에서도 유명한 도굴범이었습니다. 많은 유물들을 파내어 일본등 해외로 빼돌리던 이들은 이미 경찰의 수배중이었고, 여기서 잡힌 것입니다.
그들이 삽으로 파던 자리는 송국리선사유적지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석관묘의 자리로 이곳에서는 후일 청동검등의 유물이 나옵니다.
<방문시의 사진이 아니라 발굴 당시의 사진으로 이 사진만 웹에서 퍼왔습니다.>
1975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 공주박물관은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을 수차례 시작합니다. 나오게 된 유물들은 청동기시대를 표현하는 청동검과 돌검, 돌칼, 토기등등과 50여채의 집터, 방책, 중세의 해자와 같은 방어용 수로등등 또한 놀라운 것은 타버린 쌀등이 나와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 사진은 전시장안에 발굴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송국리유적지의 특징*
송국리 유적지는 대략 기원전 5~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이 되며, 출토된 요령식동검과 석관묘, 옹관묘, 토기등은 이 유적지가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송국리유적지는 토기가 타지역의 것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집터의 모양 또한 이전의 유적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후 한반도 남부에서 발굴되는 비슷한 집터는 ‘송국리형집터’로 불리우며, 송국리식 토기는 단절이 되지 않고 고려청자, 분청사기를 거쳐 조선백자로까지 이어진다고 학계에서는 보고있습니다.
또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요시노가리유적지와 송국리유적지의 유사성입니다. 이미 석기시대부터 일본과 한반도는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석기 시대의 타제석기의 재료중 화산석의 일종인 흑요석이 한반도 남부해안가에서 일본산이 출토되는 것에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반도 중부이북은 백두산에서 나온 것이 주종이지요.
송국리형집터와 요시노가리집터의(또는 토기) 유사성은 당시 한일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는 것을 표현하며, 같은 부여 합송리에서 출토된 대롱옥은 마찮가지로 일본 요시노가리에서도 출토가 되고 있습니다.
*송국리 유적지의 규모*
과거 송국리 유적지는 24,000평이 문화재로 고시되어 있었으나 학자들은 일대 100만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송국리 뿐만이 아니라 초촌면일대 어느 곳을 파던지 당시의 유적이 쏟아져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송국리유적지 근처에는 같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또한 존재하여 송국리인들과의 연관성에 대하여도 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62,000평을 현재 사적지로 고시를 하여 매입중에 있습니다. 정부의 주변 토지매입에 또한 인국환선생님께서 적극나서서 주민을 설득하는등 추진중이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것은 나 또한 전문가가 아니므로 더 이상은 무리겠지만 이곳 송국리유적지를 보면서 생긴 의문이 있어서 이곳 유적지 발굴에 상당히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는 충남대학교의 이강승교수님께 개인적인 메일을 보내어 질문을 하였습니다.
*메일*
송국리유적지에 깊은 관여를 하신 충남대학교의 이강승교수님께 보낸 메일입니다.
jigooho의 Mail
안녕하세요. 저는 일반 직장인입니다.
갑작스러운 메일에 죄송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송국리 유적 전시실의 인국환선생님께서 송국리 유적에 교수님께서 깊은 관여가 되어 있으며, 종종 방문을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교수님께서 다니시는 학교 사이트를 통하여 메일주소를 확인하였습니다.
회사일로 부여지역을 종종 출장을 다니게 되었는데, 조금의 시간을 내어 부여박물관과 송국리 유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방문 후 송국리유적은 상당한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현재 관심을 갖고서 이곳저곳에서 자료를 찾아보는 중입니다.
그러다 의문 사항이 생겼는데, 질문을 드릴 곳이 없어 염치 불구하고 교수님께 이와 같이 메일을 보냅니다.
질문은 기원전 5~6세기의 유적이라고 추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청동검등의 출토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라고 밝혀졌고요. 제가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기원전 5~6세기 요령지역이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가 된 유적, 특히 요령식 동검등의 출토는 한반도의 남부가 고조선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거나 또는 고조선의 직접적인 영향권내에 속하였다고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까요? 또한 그렇다면 실질적이며 직접적인 고조선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전파가 되었다고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또 하나 질문은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의 남부에는 진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와 진과의 중계무역을 했었다는 내용을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송국리의 청동기인들은 진과의 연속성이 있을까요? 고조선이 중계무역을 하였다는 진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너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잠시 송국리청동기인 -> 진 -> 마한 -> 백제라는 연속성을 상상해 봤습니다.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함부로 메일내용을 공개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하군요... ^^
이강승 교수님의 답변 Mail
질문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는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므로 역사에 대해서 자신있게 답변할 수 없습니다. 현재 고조선에 대해서는 참 문제가 많아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선 고고학적인 사실을 역사기록과 연계하는 일도 그리 쉽지않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고조선에 대한 역사기록은 제처두고 고조선의 문화내용이 무엇인가하면 대체로 비파형동검, 고인돌과 기타 미송리형토기 등을 고조선 문화의 표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물들을 살펴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런 유물이 나왔다 하더라도 바로 고조선과 연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고고학적인 문화하고 고조선이라는 민족이나 정치체, 또는 세력하고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한국의 문화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예로 진로 참이슬 소주병을 들면 현재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지에서 많이 마신다하니, 만약 진로소주병이 나오는 곳을 한국의 영토라든가, 혹은 영향권을 말한다면 모순이 되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비파형동검이 고조선문화 내용의 한가지일 수는 있으나 비파형동검이 나온다해서 그 지역이 고조선영역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 역사연구경향을 보면 고조선에 대한 향수가 강하여 영역을 넓게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자국문화중심적인 발상이지요. 만약 고조선이 그때에 있었다면 그것은 요령지방의 얘기이고(실제로 기원전 5-6세기경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지역이 고조선 영역이었는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고인돌은 많이 있으나, 요령식 동검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경향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고조선 연구자에 의하면 엄밀하게 말하자면(사료를 엄밀하게 적용하여 역사를 말하자면) 위만조선만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고조선의 역사로 다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작은 알 수 없으나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위만이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니, 위만 이전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위치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고조선을 비파형동검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송국리문화는 그 내용으로 보아 금강이남(최근에는 강원도 고성지방에서도 이런 형태의 집자리(송국리형집자리)가 나와서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지만)에서만 보이는 문화내용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고조선과 관계시킬 수 없는 문화내용이고, 비파형동검이 한자루 송국리유적에서 나오긴 했지만 그것을 고조선문화의 표지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기록에 나오는 진국에 대해서는 그 문화내용이 잘 알려져 있지 못합니다. 북한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을 진국의 세력권에서 일어난 문화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고고학적으로는 선뜻 말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선 그 문화요소를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고고학 연구성과가 부실합니다. 어느 때 장래에 그런 데 대한 토의가 가능하겠지요. 대답이 시원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참고로 송호정이 쓴 ‘단군, 만들어진 신화’(산처럼 2004)를 읽어주십시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강승
http://jigooho.egloos.com/m/363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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