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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1, 2014

일본인은 충청도인의 후손이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형 무덤이 일본 주구묘의 원형이다

중서부지역의 토광묘
성정용(충북대학교)
Ⅰ. 머리말
지상화된 매장시설을 갖지 않는 무덤들은 모두 땅을 파고 매장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매장
시설의 재료에 관계없이 지하 또는 반지하식의 무덤들은 모두 토광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우리가 토광묘라 할 경우 이는 땅을 파고 시신을 그대로 매납하는 직장묘와 함
께 나무로 관이나 곽을 짜서 묻는 목관묘와 목곽묘에 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중 토
광 직장묘는 인류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매장형태 가운데 하나로서 신석기시대에 이미 등장
하엿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매장시설을 사용하는 토광묘는 청동기시대 말 이후
한반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배경에는 아마도 도구의 발달에 힘입은 목재 가공
기술의 발전과 청동기시대의 석축무덤을 선호하던 장제 관념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1990년대 이후 경기․호서․호남지역의 고고학적 조사 진전에 힘입어 영남지역에 비해 불
확실하였던 이 지역 토광묘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영남지역의 토광묘가
원삼국시대에 목관→목곽으로 비교적 기계적으로 변화하는데 비해, 중․서남부지역의 토광
묘는 일률적으로 목곽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목관묘와 목곽묘가 한 유적에 혼재되거나 또는
목관묘 일색의 고분군[천안 용원리]이 조영되기도 한다. 또 구조나 크기상 목곽과 목관의 구
분이 불확실한 경우도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를 토대로 중서부지역 토광묘의 다양성과 변화 양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장주체부의 형태에 따른 분류를 실시하고, 다양한 토광묘 형태가 시기적
으로 어떠한 양상을 보이며 변화하였는지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이 지역 토광
묘를 조사할 때 유의해야할 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Ⅱ. 매장주체부의 형태에 따른 구분
1. 목관
목관은 기본적으로 시신을 매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신변착장품은 관내에 매납되어 있
는 반면에 토기 등과 같이 순수하게 부장을 위하여 넣어지는 기물들은 관외에 매납하는 것
이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목관과 목곽을 구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성
격이나 양으로 보아 역시 토기이다.
2. 목곽
목곽은 기본적으로 관을 보호하면서 한편으로 부장공간의 확대를 꾀한 것이기 때문에, 토
기와 같은 부장을 위한 기물이 곽내로 수납되는 것이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서
남부지역의 목곽묘는 크게 곽안에 관이 있고 관과 곽 사이에 부장품을 넣은 전형적인 목곽
(Ⅰ형)과 함께, 곽은 있지만 별도의 관이 없어 주검과 부장품을 하나의 곽 안에 매납한 형태
(Ⅱ형)1), 부곽이 분리되어 있는 주․부곽식(Ⅲ형)2) 등 다양한 형태가 관찰된다.
3. 목관계 목곽
중․서남부지역에서는 위와 같은 구분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목곽이 존재한다. 화성 마하
리목곽묘의 경우는 관과 곽 사이의 공간이 거의 없고, 부장품도 곽 외부에 별도의 시설없이
안치되어 있어 곽이 단순하게 관을 한 겹 더 둘러싼 존재 즉 二重木棺的성격이 강해 보인
다. 천안 신풍리 목곽묘도 비록 곽 내에 일부 토기가 부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주된 부장공
간이 곽 외부에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목관묘의 장제
적 관념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러한 유형의 목곽묘를 “목관계 목곽”으로 분류한다.
Ⅲ. 토광묘의 발달 양상
1.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① 장제적 관념의 변화 : 사용 재료가 석재에서 목재로 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덤을
사회상징적 표식으로 이용하였던 청동기시대의 장제적 관념에서 탈피하면서 발생한 이해된
다. 또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가 표지적으로 부장되고 있어 청동기시대 말 이후 유이민
의 유입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이며, 2가지 형태가 관찰되고 있다.
② 형태
․위석토광묘 : 대개 묘광이 세장하고 남아 있는 묘광의 깊이가 30~50cm 내외로 얕은
편이며, 관 또는 시신 주위에 할석을 1~2겹 돌린 것이다. 위석이 돌려진 범위 등으로 볼 때
관의 존재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으며, 대개 하나의 묘역에서 2~5기 이내로 적은 기수가 발
견된다. 안성 반제리와 대전 궁동, 금산 수당리 등
․토광목관묘 : 위석이 없는 대신 묘광 깊이가 1m 이내로 상당히 깊고, 묘광의 단벽이 둥
글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공주 수촌리 등
2. 주구토광묘와 분구묘
① 형태
․청당동형 : 묘광의 사면 위쪽에 눈썹처럼 구를 돌린 것으로서, 매장주체부는 모두 목관
묘 또는 목곽묘임
․관창리형 : 묘광의 사방에 구를 돌린 것으로서,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
아 지상 또는 지상에 가까운 위치에 주체부를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호남지역의
3~4세기대 관창리형 무덤에서 토광이 매장주체부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아 이 유형 또한 매
장주체는 기본적으로 토광묘로 생각된다.
② 분포범위 :
․최근 인천-용인 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한강 이남의 경기․충청․전라도 지역 분포
․청당동형은 경기 이남과 충청 내륙 지역에서 많이 보이고, 관창리형은 충청 서해안과
호남 지역에서 주로 확인
③ 성격 : 과연 별개의 묘제인가?
․이러한 분포 양상에 근거하여 청당동형을 중국 진한교체기의 유이민에 의해 축조되었다
1) 이에는 부장칸과 주검칸을 나누는 격벽이 뚜렷이 있는 것(ⅡA형)과 없는 것(ⅡB형)이 있다. 조사 시 이 격벽
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층위 관찰이 중요하다. Ⅱ형은 대개 규모가 작아 목곽의 장제적 관념은 수용하였으
면서도 목관이 안치되기에 부적합한 경우가 많다.
2) 이 지역에서는 주곽과 부곽을 별도의 광을 굴광하여 설치한 예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거나 또는 관창리형이 일본 야요이시대 주구묘의 기원이라 보는 해석 대두
점토대토기가 부장되는 초기철기시대 ․ 토광묘들이 단독 또는 소규모로 군집되어 있는데
비해, 주구토광묘들은 수십 기 이상 군집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이들은 개인의
묘역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는 원삼국시대 수장층들의 권력 독점화 현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청주 송절동, 공주 장원리, 연기 응암리 등 내륙지역의 주구토광
묘군에서도 청당동형과 관창리형이 혼재하고 있음
④ 분구묘화 : 호남 지역에서 관창리형 주구토광묘가 점차 지상화되면서 분구묘화되어 거
대한 옹관고분으로 발전하는 것은 주구토광묘의 발전 단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이는 원삼국시대 이래 전통적 문화를 강하게 유지하는 곳에서의 사회적․문화적 발달상
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경기 이남과 충청 내륙지역은 주구가 없는 토광묘로 빠르게
전환되는데, 이는 이들 지역이 3세기 후반~4세기대에 빠르게 백제의 지방으로 편제되는 것
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충청 서해안의 서산 부장리와 같은 곳에서는 5세기대까지도 시차를
두고 여러 기의 주체부가 하나의 분구에 매장되거나 혹은 분구가 수평으로 확장되는 형태도
관찰된다. 이는 백제의 지방화된 이후에도 일부 지역은 전통적인 묘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시사하며, 완주 상운리도 이와 같은 예이다.
⑤ 시기 : 현재 상한은 불분명하지만 초기철기시대까지 소급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
며, 대전 용산동토광묘와 같이 일부 지역에서는 5세기대까지도 조영된다.
3. 토광묘
4세기 이후 경기와 충청 지역은 빠르게 토광묘로 전환되는데, 3세기대 이후 주구토광묘와
같이 혼재하면서 계속 조영되는 경우(오산 수청동, 청원 송대리 등)와 4세기대 이후 새로이
등장하는 고분군(청주 봉명동, 천안 용원리, 청주 신봉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들
은 각기 그 집단의 성격 즉 백제 중앙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천안 용원리
는 4세기 후반~5세기대에 조영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토광묘는 순수 목관묘만 조영되어 있
으면서 수혈식석곽과 혼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4~5세기대 토광묘군들은 대
부분 다양한 형태의 목관과 목곽이 혼재하고 있으면서, 석곽 또는 석실이 한 고분군 내에
조영되는 경우가 많다. 목곽→석곽→석실 순으로 순차적인 조영 모습을 보여주는 공주 수촌
리고분군과 토광․석곽․석실이 한 고분군 내에 혼재되어 있는 연기 송원리고분군 등은 이
러한 묘제의 다양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4. 합장묘
① 이 지역 토광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합장묘의 유행으로서, 크게 3가지 형태로 나누
어볼 수 있다
․이혈합장 : 묘광을 달리하는 2개의 토광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영되어 있는 것으로서,
공주 하봉리와 천안 청당동․연기 응암리 등 3세기대의 주구토광묘부터 관찰되고 있다. 주
구가 없는 경우는 이혈합장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두 개의 묘광이 아주
근거기를 두고 의도적으로 나란하게 조영된 모습을 보인다면 일단 합장묘의 가능성을 생각
해볼 수 있다. 청주 봉명동 A-26-①②호, A-40-①②호, B-79-①②호, B-92-①②호, C-23-
①②호와 충주 금릉동 43․44호, 125․129호 등이 이에 해당된다. 매장주체부는 낙랑지역과
달리 하나의 합장묘에서도 목관과 목곽이 혼용되고 있다.
․병혈합장 : 2개의 혈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선축한 묘광의 한 쪽 장
벽을 파괴하고 확장하여 설치된다. 거의 대부분 묘광의 크기에 차이가 있고 묘광 사이에 단
차가 존재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선축한 혈에 붙여 만든다는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비록
우연히 단차가 거의 없거나 또는 묘광의 크기가 비슷하더라도 동일한 곽을 공유하는 경우는
없다. 만약 이렇게 정의한다면 중․서남부 지역에서 동혈합장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청주
봉명동 22-23호, 청주 송절동 2․3․6호, 충주 금릉동 24․35․37․40․63․78․84․86․9
4․99․100․144 등이 이에 해당된다.
․동혈합장 : 동일한 묘광 안에 합장한 경우이다. 낙랑의 동혈합장은 기본적으로 동혈동곽
합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3), 중․서남부지역 합장묘의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 동혈
합장묘는 찾아보기 어렵다. 연기 응암리 4호묘가 동혈합장의 예가 될 수 잇을지 모르며, 충
주 금릉동 111호묘의 경우는 두 묘광 사이에 격벽을 두는 등 상당히 동혈합장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성격 : 중․서남부 지역 특히 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합장묘가 성행하는 것은 결국 2~
3세기대 이후 낙랑문화의 파급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낙랑지역에서는 2인 합장 외
에도 多人合葬木槨墓가 존재하는데 비해, 이 지역에서는 2인 합장목곽묘만 발견되고 있어,
낙랑 지역 초기 목곽묘의 양상이 수용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합장묘의 주체부로서
목관과 목곽이 혼용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이혈합장묘가 조영되다가 점차 병혈합장묘가 많
아지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것도 낙랑지역의 합장묘에서 변용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3) 낙랑지역에서 별도의 측곽을 설치하여 합장하는 경우도 우선 주곽 안에 합장한 다음 공간적 여유가 없을 경우
측곽을 설치한다.


http://www.cprc.or.kr/fdown.jsp?d=d&f=2011%2F%C1%DF%BC%AD%BA%CE%C5%E4%B1%A4%B9%A6-%BC%BA%C1%A4%BF%EB1.pdf&o=%C1%DF%BC%AD%BA%CE%C5%E4%B1%A4%B9%A6-%BC%BA%C1%A4%BF%EB.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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