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나가노 고대사찰
‘젠코지’백제 불상 모신 명찰… 日 국민들 성지로
◇ 젠코지 본당.
1998년 2월 일본 나가노현 북서부인 ‘우시로다테야마’ 산줄기의 핫포오네(八方尾根) 스키장을 중심으로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지금부터 10년 전인 이 겨울올림픽 당시 나가노 시민들은 유별나게 한국 선수단에게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의 목청을 돋우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나가노에는 고대 백제와 뿌리 깊은 7세기의 훌륭한 사찰
‘젠코지’(善光寺, 나가노시 겐센초 491 소재)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누가 나가노의 젠코지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고 할 만큼 젠코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사찰이다. 일본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명찰로 젠코지를 꼽는다. 이 사찰에는 6세기 중엽인 552년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재위)이 보내준 ‘일광삼존아미타여래’ 삼존불상을 모시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백제 아미타여래 삼존불상은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직접 본 일이 없다는 비공개 비불(秘佛)로도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이 백제 비불로부터 가호받으며 평생의 소원을 빌기 위하여 젠코지 가람을 찾아가고 있다.
젠코지 본당인 아미타원(阿彌陀院) 지하실에 존귀하게 모시고 있다는 이 백제 비불은 ‘아미타삼존불’로도 부르듯, 좌우 양편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협시로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최초의 사찰 명칭이 ‘백제사’였다는 아미타원 지하는 참배객이 시커멓게 어두운 디귿자형의 낭하(내내진, 內內陣, 전장 약 15m)를 걸어서 계단순례(戒壇巡り) 통로를 돌아나올 수 있다. 입장료 500엔을 내야 한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관람객은 백제 비불 아미타 삼존불의 가호를 받게 된다는 ‘무량(無量) 빛의 부처님과 결연한다’는 신앙심을 안고 줄지어 지하 통로로 주저없이 들어간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긴 줄을 지어 차례로 이 법당 지하 계단 내부를 그냥 한 바퀴 걸어서 돌아나가는 것으로 평생의 가장 보람찬 불복을 누린다고 하기에. 젠코지를 다시 찾은 이날은 단풍이 한창 물들고 있는 지난 11월17일이었다.
◇ 백제와 관련 깊은 젠코지가 있는 일본 나가노시 풍경.
일본 고대 문헌인 ‘현진자필 태자전 고금목록초 책자본’(顯眞自筆太子傳古今目錄抄冊子本)에 의하면 젠코지는 원래 명칭이 ‘백제사’(百濟寺)였다고 한다. 도쿄대학의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 젠코지는 긴메이천황(欽明天皇, 539∼571 재위) 때에 백제로부터 전래한 ‘아미타삼존’을 본존불로 삼는다는 전설이 있는 저명한 사원이다. 10번 이상이나 화재가 일어났으나 그때마다 재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
(‘國寶, 重要文化財案內’ 1963)고 말했다.
필자가 이 사실을 지난 6월13일 일본 도쿄의 학술강연(퍼시즌호텔 강연장) 때 밝혔더니 여러 일본인들이 직접 필자에게 찾아와서 “젠코지가 본래는 백제사였던 게 틀림없군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점은 지금부터 40년 전에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지적하기도 했다. 즉
“ 젠코지는 본명이 백제사였다. 젠코지의 아미타원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 성덕태자, 574∼622)가 세웠던 사찰 모두
46원들 중에서 두 번째 사찰이며 이름은 백제사이고, 뒷날의 명칭은 젠코지로 바뀌었다. 아미타원의 본존은 일광삼존(一光三尊)인 아미타불(협시는 관음 및 세지)로서, 백제국의 성명왕(聖明王, 일본 역사에서의 호칭, 필자주)이 갖다 바친 존상(尊像)이다 ”
(‘歸化人の社寺’ 1969)라고 했다.
◇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6세기경 금동삼존불.
불교 포교를 위해 성왕이 왜왕실에 가져다 준 것을 이마이 교수도 버릇처럼 ‘일본서기’ 투로 썼다.
즉 ‘일본서기’ 같은 역사책에서는 미개했던 고대의 섬나라 일본으로 문화 선진국 백제가 불상을 ‘갖다 바쳤다’는 등 왜곡을 했으며 일부 학자도 이를 답습하는 것을 차제에 아울러 지적해 두련다.
이날 젠코지 관계자인 후루타 가즈코(古田和子)씨는 필자와의 면담에서
“ 젠코지의 본존 비불인 아미타 삼존상은 백제에서 보내온 불상입니다. 어째서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루에 약 2만명 내외의 참배객이 저희 젠코지에 찾아옵니다. 연간 700만명이 방문한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들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나가노올림픽 이후 저희 가람은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라고 말했다. 물론 이날도 수많은 관람객 중에 서양인들도 경내 도처에서 눈에 띄었다.
현재 젠코지에서 발행 판매 중인 안내서(‘善光寺諸堂參拜’)라는 책자 서두에도 보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 신슈(信州, 나가노의 옛날 지명)의 젠코지에서는 일광삼존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성지로서, 사찰 창건 이래 1400년의 오랜 세월 동안 그 법등(法燈)을 호지하여 온 고찰입니다. ‘젠코지연기’(善光寺緣起)에 따르자면 어본존(御本尊)인 일광삼존 아미타여래는 긴메이천황 13년(서기 552년)에 일본에 불교가 전래될 때에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오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입니다. ”
이어 젠코지 안내서에는 본래 처음부터 젠코지(善光寺)가 ‘구다라지’(百濟寺, 백제사)로서 개창되었다는 일본 고대 문헌들의 고증과는 다르게 젠코지라는 가람의 명칭이 생긴 발자취에 대해 다음처럼 쓰고 있다.
“ 백제 불교가 건너왔을 당시 백제 아미타여래 불상을 둘러싸고 과연 백제의 불교를 일본에서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로 조정에서 큰 정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당시 불교 반대파(조정의 군사 및 치안 책임자였던 대련(大連) 벼슬의 모노노베노 오코시 일당, 필자주)가 난바(難波, 지금의 오사카 중심지, 필자주)의 ‘호리에’ 강물에 갖다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 불상을 나가노에 살던 혼다 젠코(本田 善光)가 서기 642년에 그 강물에 가서 건져내어 이 고장으로 모셔와서 자기 집에다 안치했습니다. 그후 곧 아미타여래 불상은 비불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이 시기를 ‘긴메이천황 13년’, 즉 서기 552년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일본 고대 왕실과 불교 문헌들은 서기 538년에 백제 불교가 백제 성왕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앞에서 인용했듯이, 오타 히로타로 교수와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는 7세기 중엽이 아닌 6세기 중엽에 젠코지가 쇼토쿠태자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밝혔다는 것도 지적해 둔다.
더구나 젠코지 안내서에서는
“ 안타깝게도 젠코지의 초창을 설명해 주는 확실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편집된 ‘이로하자류초’(伊呂波字類抄)에는 8세기 중엽에 젠코지 본존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불(靈佛)로서 중앙에도 알려지고 있었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 라고 주장한다.
◇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반도식 좌법으로 있는 젠코의 부인상(오른쪽).
여하간 중대한 사실은 지금의 젠코지 당사가 직접 제작 판매하는 두 종류의 책자에서 비불인 “일광삼존 아미타여래상은 백제에서 보내온 불상이다”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등 저명한 여러 사찰들이 일본 국보가 된 소장 백제 문화재들에 대해 사찰 안내서에서 일체 ‘백제 불상’ 등의 명칭을 표시하지 않고 있는 게 오늘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백제에서 보내준 불상’을 엉뚱하게도 그들이 만든 것인 양 거짓 선전하고 있어서 식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젠코지를 세웠다고 하는 혼다 젠코와 그의 부인과 장남 등 가족은 이 가람에서 높게 존숭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찰 본당의 우측 맨 안쪽에는 ‘어삼경간’(御三卿間)이 있다. 여기 모셔진 것은 세분의 조각 좌상이다.
중앙은 혼다 젠코경(卿)이고 그 우측은 부인인 야요이고젠(彌生御前), 그리고 좌측은 장남인 요시스케경(善佐卿)이다.
젠코지 발매의 또 한 권의 책자(善光寺 事務局 監修 ‘よくわかる善光寺參り’ 新晃社, 2000년 발행)에 보면 혼다 젠코의 부인인 야요이고젠의 좌상의 앉은 자세를 가리켜서
“ 야요이고젠께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계신 것이 주목됩니다. 이것은 조선반도의 치마저고리(チマチヨゴリ=원문)를 입은 귀부인의 정식 좌법(座法)입니다 ”
라고 굳이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부인은 말할 것도 없이 혼다 젠코 일가가 한반도, 특히 백제 도래인임을 지적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나가노 시민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일본 국민의 수호불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비불 일광삼존 아미타불은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일까. 현재 비불을 모방하여 제작했다는 것이 가마쿠라 시대(1192∼1333)의 청동 불상인
‘아미타삼존상’으로서 본당에 모신 전립본존(前立本尊, 중요문화재)이라는 불상이다.
물론 이 전립본존불도 늘 공개하는 것은 아니며, 7년에 한 번씩만 일반에 공개하는데, 2002년에 이어 내년 4월5일부터 5월30일까지 공개하게 된다.참고 삼아 살펴보자면 백제 왕도였던 부여땅 부소산에서 발굴된 6세기 금동삼존불
(부여박물관 소장)과 젠코지의 비불 아미타 삼존상은 혹시 서로 흡사한 모습은 아닌가 추찰해 보고도 싶다.
이 백제 가람 젠코지의 본당은 높이가 29.54m, 약 30m라는 거대한 목조건조물로서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크기를 자랑하는 국보이다. 가장 큰 것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전이다. 젠코지는 나가노역 앞에서 직선 도로로 약 3㎞ 언덕에 자리한다. 문전 거리의 상점가로부터 입구인 인왕문을 들어서면 삼문(三門) 정수리에 ‘젠코지’라는 한자어의 편액이 뚜렷하고, 삼문을 지난 곳에 웅장한 본당이 참배객을 압도한다.
‘젠코지’라는 글씨는 1801년에 일본 왕자(澄法親王)가 썼다는데 5마리의 비둘기 모양으로 획을 그은 것이 유명하다. 그래서 ‘구자액’(鳩字額)이라 부르기도 한다.
82. 나라현의 ‘고후쿠지 사찰’
백제인 세도가가 세운 고대 명찰 중의 명찰
◇ 고후쿠지 동금당과 오중탑 경관.
그 발자취에 대해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 등은
“ 처음에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부인이 세운 야마시나지는 그 후 서기 710년 천도한 새 왕도 헤이제이쿄(平城京, 현재의 글자는 奈良市가 됨, 필자주)로 옮겨서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658∼720년)가 지금의 터전에서 고후쿠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우선 금당(金堂)을 세우고 장육석가상(丈六釋迦像)을 모셨고, 이어 수많은 사람이 불사에 참여해 여러 당우와 탑이 잇대어 들어서며 가람이 커졌다. 더구나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고묘지(光明子, 701∼760년)가
제45대 쇼무천황(聖武, 724∼749년 재위)에게 시집가서 고묘(光明)황후가 되자, 쇼무천황은 동금당(東金堂, 726년)을 세웠고, 고묘황후는 오중탑(730년)과 서금당(西金堂, 734년)을 세웠다.
이와 같이 고후쿠지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후지와라 가문의 사찰이면서도 국가 관사(官寺)와 동격의 가람으로 융성하며 광대한 터전을 펼쳤던 곳이 지금의 터전(‘국보·중요문화재 안내’ 1963)이라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나라 시대(8세기)에 백제인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듯 기세등등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고후쿠지뿐 아니라 이 가람에서 북쪽으로 약 2km 지점 언덕받이(나라시 가스가노초 160)에는 역시 후지와라 가문의 큰 사당인 ‘가스가타이쇼(春日大社)’도 있어서 나라시 동쪽인 이 고장이야말로 고대 백제인 후지와라 가문의 권세를 미루어 살필 만한 곳이다. "
필자가 최근에 고후쿠지를 다시 찾은 것은 지난달 22일이었다. 그 무렵 고후쿠지에서는 ‘2008년 고후쿠지 국보 특별공개 행사’(10월18일∼11월24일)를 하고 있었다. 동금당의 문수보살상(회나무, 93.9cm 13세기경)과 약사삼존상(청동, 본존 270cm 1415년 주조·중요문화재), 국보 목조건물인 오중탑 1층의 석가삼존상, 난엔당(南円堂)의 불공견색관음상(회나무, 372cm 13세기경) 등 이 가람에는 국보 26점과 중요문화재 44점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 고후쿠지 동금당의 약사삼존상.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백제인 지배자라는 것을 여기서 간략하게 짚어보자. 서기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일본 왕족들 가문(左京皇別) 중의 제18번째 인물로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문중인 가스가노마히토(春日眞人)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가스가노마히토는 일본 제30대 “비다쓰천황의 황자(皇子)인 가스가왕(春日王)의 후손”이라고 돼 있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다름 아닌 “백제 왕족 출신 비다쓰천황” (‘신찬성씨록’)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기에 그가 나라 시대에 왕도에서 천하를 주름잡게 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저명한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씨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백제인이다”(‘古事記 天武天皇’ 1980년)라고 밝혀서 주목받았다. 오와 이와오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백제계 귀화인들에게 주어진 왕실 고관 벼슬인 ‘후히토(史)’ 그룹과 관계가 있었다”고도 지적했다.
그가 제30대 ‘비다쓰천황’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왕실 세도가가 되었다기보다 .피투성이의 정치적 권력투쟁에 승리했기 때문에 지배자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서기 645년의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끔찍한 정치개혁에 성공했다.
다이카개신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세력이 백제인 소가(蘇我) 가문을 뒤엎어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 고대사의 큰 발자취다. 지금까지 왕실의 외척으로서 왕실 최고 대신 자리를 아들 손자 대대로 세습하면서
천하를 주름잡았던 것이 소가 가문이었다.
다이카개신 당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본래 이름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였다. 그는 다이카개신 이후 ‘후지와라’라는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그 첫 조상이 되었다. 일본 역사를 보면 자기 스스로 개명하는 것은 아니며,
왕의 윤허를 받거나 왕으로부터 새 성씨를 내려받는 게(賜姓) 흔한 일이었다.
“ 다이카개신의 공이 있어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제38대 덴지천황(天智·661∼67년 재위)으로부터 ‘후지와라 조신’(藤原朝臣)의 사성을 받았다 ” (角川版 ‘일본사사전’ 1976)고 하듯, 그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로부터 새로운 성을 쓰는 인물이된 셈. 여기 덧붙이자면 그 당시 나라 땅 야마토(大和)조정의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문은 겐(源), 페이(平), 도(藤), 기쓰(橘) 네 가문이었다. 여기서 ‘도’는 물론 후지와라(藤原) 가문이다.
◇ 고후쿠지 오중탑 안에 있는 석가삼존상.
특히 6세기 초부터 나라 땅 아스카(飛鳥)의 백제계 왕실에 등장한 소가 가문과 소가 집안을 멸망시킨 7세기 중엽 이후 후지와라 가문을 모르고는 일본 고대 역사를 논할 수 없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에게 멸망당한 세도 가문 소가씨는 백제 개로왕(455∼475년 재위) 때의 조신이었던 목만치(木滿致)의 후손이다 ” (‘飛鳥’ 1970)라고 했으며,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아스카 왕실 실권자였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645년)를 암살하고 새로운 왕실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최고 대신(豊浦大臣)이었던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645년)는 아들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세력에 암살당하던 와중에 궁지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여간 두 원수 집안은 백제인 후손들이었다.
개혁을 주도하게 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5세기부터 왜왕실에서 백제신(百濟神)을 모셔온 구다라노(百濟野) 터전인
셋쓰(攝津, 지금의 오사카 일대) 별장에서 오랫동안 칩거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소가 세력이 왕실을 쥐고 흔드는 전횡이 극에 달하자, 드디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왕실의 나카노오에노오지(中大兄皇子)와 은밀하게 손잡고 소가 가문 제거의 큰칼을 빼들었다.
나카노오에노오지는 다름아닌 제34대 조메이천황(敍明, 629∼641년 재위)의 제1 왕자이다. 조메이천황은 서기 639년에 나라 땅 “ 구다라가와(百濟川)에다 몸소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다이쇼(百濟大寺)를 지었다 ” (‘일본서기’)
는 백제계 천황이다.
그보다 67년 전에 조메이천황의 친조부인 “ 제30대 비다쓰천황은 572년에 구다라오호루노미야(百濟大井宮)를 지었다 ” (‘일본서기’)는 것이며, 비다쓰천황은 ‘신찬성씨록’에 ‘백제 왕족’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실을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가 필자에게 자택(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 직접 시인했다(SBS TV, 박종필 PD 연출 촬영, 2007년 5월4일).
1972년 4월1일자 일본 도쿄신문에다 “조선과 일본은 똑같은 한민족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한일동족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더욱 유명해진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1909∼1992년) 씨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선 귀화인”이라고 밝힌 저명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씨가 지난날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 또한 일본 사학계에서 설득력이 매우 컸다.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본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였던 것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성씨를 바꿨다. 그것을 보더라도 나는 그가 귀화인 계통의 관료였다고 본다. 이름에 ‘다리(足)’가 붙는 것은 조선 도래인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7세기경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인명을 보면 거의 다 귀화인 계통의 인물이다. ”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개성한 것은 백제 멸망 당시 2만7000명의 백제 원군을 일본 규슈에서 백제 땅으로 보냈던 덴지천황 8년(서기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그 때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정의 최고 대신으로 임명 받았다” (‘新皇正統記’)고도 한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지난날 아스카 왕실의 최고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가 그랬듯이,
대대로 왕실과 자기 자신의 연고 관계를 완벽하게 밀착시키느라
“ 자기 딸들을 차례로 덴지천황과 덴무천황 그리고 고분천황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왕실 외척이 돼 권세를 장악했다 ” (栗崎瑞雄 ‘枾本人麻呂’ 1981년)고 한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두 누나를 차례로 긴메이천황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83. 오우미 땅 백제인 터전 오토모 가문과 덴치왕
日 천태종의 개창자도 백제인의 후손이었다
◇ 쇼겐지 경내.
일본 교토시 동쪽 비와코 호수 지대인 오우미(近江) 지방에는 사카모토(坂本)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고대 백제인 오토모(大友) 가문의 옛 터전으로 이름난 곳이다. 시가현 오쓰시의 오쓰역에서 사카모토행 전철을 타고 불과 10여분만 가면 사카모토역에 이른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고문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 오우미 지방에서는 명문인 백제인 오토모 가문이 번성했다 ” (‘渡來人’ 1987)고 밝혔으며, 그 밖의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들도 백제인의 고장임을 각각 고증하고 있다. 물론 비와코 호수 일대는 사카모토 지역 외에도 가모군(蒲生郡)을 비롯해 구루모토군(栗太郡)과 야스군(野洲郡) 등 오우미 땅 일대에 백제인들이 드넓게 퍼졌던 것이 문헌마다 잘 드러나 있다.
◇ 쇼겐지 내 옛 우물터.
우선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8세기 사카모토의 오토모 가문 터전인 오토모향(大友鄕)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사이초(最澄)라는 이름의 고승 덴교대사(767∼822년)였다.
일본사 연표에는
“ 덴교대사라는 시호는 사이초 승려 사후인 서기 866년에 세이와천황(淸和, 858∼876년 재위)이 내렸다 ” 고 쓰여 있다. 덴교대사는 일본 불교 천태종의 개창자로서 매우 유명하다. 사이초 덴교대사는 출가 전 소년 시절의 속명이 미쓰노오비토 히로노(三津首廣野)였다.
지난 11월25일 필자는 20여년 만에 또다시 사이초 덴교대사가 탄생한 오우미 땅 오토모향의 생가터인 쇼겐지(生源寺)를 찾아갔다. 이날 사찰 경내에는 천막을 치고 덴교대사를 위한 축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절터에는 덴교대사가 태어난 당시부터 있었다는 우물터며 그의 청동 동자상(童子像)이 서있고, 동쪽 벽면으로는 아기가 태어나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 그림 밑의 설명문에는 덴교대사의 출신을 일컬어 “ 전교 대사 사이초는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 일족이다 ” 라고 고대 중국인설을 내세우고 있었다.
저명한 고대 사학자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 고대의 고승들 중에는 도래인 계통이 많다. 이를테면 덴표 시대(天平, 729∼749년)의 불교계를 이끈 고승 교기(行基, 668∼749년)의 아버지는 백제계의 고시노 사이치(高志才智)였고, 어머니 하치타노 고니히메(蜂田古爾比賣)인 하치타씨도 백제계의 도래 씨족이었다.
히에이산(比叡山)에 입산해 수행을 거듭하다 당나라에 건너가 구법(求法)하고 귀국해 일본에서 천태종의 바탕을 이룬 사이초 덴교대사도 또한 도래인 씨족의 출신이다. ‘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 9세기 초 一乘忠 저술)에 의하면
사이초의 아버지는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이다.
미쓰노오비토의 선조는 도마키왕(登萬貴王)으로서 그는 오진천황(應神, 4∼5세기) 시대에 도래해 시가(滋賀) 땅 오우미에 살면서 미쓰노오비토로 불렸다고 기록돼 있다. 시가 땅의 아야히토계(漢人系, 고대 백제왕족 아치노 오미·阿知使主의 후손들) 씨족의 하나가 미쓰노오비토 가문이었다고 본다 ” (‘息く交流の史脈’ 2001)라고사이초 덴교대사 등 일본의 고승들이 백제인 후손임을 상세하게 밝혔다.
◇ 덴치천황의 사당인 오우미신궁.
일본의 권위 있는 역사 사전에서도 “ 아야씨(漢氏)는 고대 한반도에서 도래한 씨족이다 ” (‘각천판 역사사전’ 1976년)라고 해설하고 있다. 따라서 덴교대사가 탄생한 집터 쇼겐지 벽화 설명문에서 “ 전교 대사 최징은 후한 효헌제의 후손 ” 이라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도 “ 아야씨는 백제인임이 틀림없다 ” (‘渡來人’ 1987년)고 단정했다.
고대 백제인들의 오토모향 오토모 가문의 조상 신주를 모신 사당 터전도 오우미 지방에서 이름난 명소다.
이곳에는 제39대 고분천황(弘文, 671∼672년 재위)의 능이 있다. 고분천황이란 다름 아닌 제38대 덴치천황(天智, 661∼671년 재위)의 아들 오토모왕자(大友皇子, 648∼672년)다. 오토모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의 능이 백제인들의 오토모향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는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를 통해
“ 오우미의 오토모향에는 오토모노 후히토(大友史)와 오토모노 스구리(大友村主)라는 두 가지 성씨가 있었다. ‘오토모노 후히토는 백제국 사람, 시라루노 나세(白猪奈世)의 후손이다 (‘신찬성씨록’ 815)’라고 쓰여 있듯이 백제계의 도래 씨족이다 ” (앞책)고 단정했고, 두 오토모 가문의 여러 후손들이 벼슬을 받아 왕실로 진출한 과정들도 상세하게 지적했다.
◇ 쇼겐지 내 덴교대사 동자상.
오토모왕자의 생부인 덴치천황은 역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가. 그는 백제가 망한 지 3년째였던 서기 663년에
2만7000명의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백제 땅 백촌강(白村江)에 보냈던 백제계 왕이다.
덴치천황은 “ 서기 665년 2월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우미 땅 간자키군(神崎郡)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3월에는 백제인들에게 땅을 주었다 ” (‘일본서기’)고 했다.
이어서 “ 백제에서 망명해온 남녀 2000명을 아즈마(東國) 땅에 살도록 했다. 백제인들에 대해서는 승속(僧俗·승려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3년 동인 국비로 먹여 살렸다 ” (‘일본서기’ 서기 666년 5월조)는 열렬한 백제 구원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그뿐 아니라 덴치천황은 백제국의 관위 계급을 검토하고, 백제 망명 관리 기시쓰슈시(鬼室集斯)에게 소금하(小錦下) 벼슬을 내리는 등 계속해서 망명 백제인들에게 왕실의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뿐이 아니다. 크게 주목되는 사건은 덴치천황이 백제인들을 간자키군에 이주시킨 이듬해인 서기 667년 3월 19일 “ 왕도를 (나라 땅으로부터) 오우미 땅의 간자키군으로 천도했다 ” (‘일본서기’)는 사실이다.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에게 오우미땅의 간자키군에다 땅과 집을 주어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고장을 새 왕도로 삼았다. 덴치천황은 나라(奈良)의 왕도를 내버리고 머나먼 오우미 땅의 백제 망명자들이 있는 간자키군으로 천도했다.
그러자 “ 나라 왕도의 주민들은 천도를 반대하고 천황을 비난하며 간(諫)하는 자들이 많았다. 풍자 노래도 많이 나왔다. 낮이고 밤이고 수많은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 ” (‘일본서기’)고 한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풍자 노래에 관해 “ 대부분이 동요 형태로 유행된 노래인데 정치적 목적이 컸다 ” 고 지적했다.
이러한 덴치천황의 생부는 제34대 조메이천황(629∼641년 재위)이다.
“ 조메이천황은 나라 땅 구다라강(百濟川) 옆에다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다이지(百濟大寺)를 세우고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한 뒤에는 ‘백제대빈’(百濟大殯) 3년상을 치렀다 ” (‘일본서기’)고 알려진 백제계 왕이었다.
하여간 일본 역사상 민간에서 왕을 풍간하는 노래는 특히 순수한 백제 계열의 제왕들이 다스렸던 7세기 초엽부터
조메이, 고교쿠, 사이메이, 덴치천황 시대에 집중됐다는 점도 지적해 둔다.
덴치천황은 어째서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우미로 천도했을까. 오우미 지역 왕도오쓰경(大津京)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하야시 미치히로(林通博)씨는 그의 저서(‘さざなみの大津京’ 1978)에서
“ 이 지역에 거주한 백제계 도래인 집단은 식산흥업(殖産興業)과 고도의 토목 기술을 배경으로 협소한 지역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난 생산력과 경제력을 창출해 7세기 중엽에는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훗날 나가오카경(長岡京, 784년부터의 교토부 지역의 왕도)과 헤이안경(平安京, 794년부터의 현재의 교토시의 왕도)의 왕도 조영(造營)은 오우미 지역을 주름잡았던 도래인 씨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바탕이 돼 이뤄진 것이다.
오우미경 천도 역시 도래인의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고 설명했다.
즉 오우미 일대 백제 도래인들의 뛰어난 산업 기술과 자본이 덴치천황의 오우미 천도에 큰 밑받침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백제 유민들은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밑받침해 준다.
또한 이시하라 스스무(石原進)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 덴치천황은 천도에 필요한 고도의 토목 기술이며 경제적 기반을 도래인 집단에서 찾아냈다. 나라 왕도 일대가 신라와 가까워 늘 침략 위협에 노출됐다는 점도 고려됐다. 망명 백제인들의 우수한 기술로 일본 각지에 조선식 산성(山城)이 구축됐다. 덴치천황의 오우미 천도는 한반도의 정세를 강하게 의식한 극히 군사적인 색채를 띠었다고도 생각된다 ” (‘古代近江の朝鮮’ 1984)고 분석했다.
그런 오우미 땅에는 지금 덴치천황의 사당인 오우미신궁(近江神宮, 오쓰시 진구초)이 우뚝 서 있다. 이 사당에는 매일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덴치천황은 즉위한 지 두 달째인 서기 661년 9월 나라 땅의 왕궁 나가쓰노궁(長津宮)에서 백제 왕자 풍장(豊璋)에게 직관(織冠)을 수여했다.
또한 오노오미 고모시키 (多臣蔣枚, 왕도 나라 조정의 조신으로서 백제 귀족인 오노 야쓰마로·太安麻呂의 친조부, 필자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는 것도 덧붙여 둔다.
84. 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백제 농업문화 현해탄 건너 씨뿌리다
일본 오사카 지방의 각 지역에는 ‘구다라데라(百濟寺, 백제사) 특별 사적’과 ‘나시즈쿠리 유적지’ 등을 비롯해 200여곳에 이르는 백제 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사카 히라노의 ‘나가하라(長原) 유적’은 아득한 옛날 백제 농업 문화의 역사 터전 중 한 곳이다.
이곳은 백제에서 현해탄을 건너 새로운 개척지 나니와쓰(難波津) 나루터로 상륙했던 수많은 백제인의 뜨거운 숨결을 오늘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 나가하라 유적 발굴 당시의 논 터.
필자는 지난해 11월 25일 나가하라 유적 지대를 돌면서 오사카시 문화재협회 나가하라조사사무소의 기누가와 가즈노리(絹川一德) 소장 대리의 안내로 나가하라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고고학자인 기누가와 가즈노리는 전시되어 있는 토기 유물들을 가리키며
“ 이 유물들은 ‘나가하라식 토기’라고 이름붙였습니다만, 이 토기들 중에서 발굴 당시(1977∼1981)에 벼의 뉘가 짓눌린 자국 등이 여러 개의 그릇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곳 나가하라 지역에서 조몬시대(BC 3C 이전)가 끝나던 마지막 무렵과 야요이시대(BC 3∼AD 3C경) 토기에서 벼의 자국이 나타난 것은 벼농사가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발자취로 봅니다 ” 라고 했다.
오사카성 천수각(天守閣) 관장인 사학자 마쓰오 노부히로(松尾信裕)도
“ 조몬시대 후기에 북 규슈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벼를 생산하는 기술이 전해왔다. 그 시기는 지금부터 30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나가하라식 조몬 토기 등에서 벼자국이 나타났다. 개중에는 벼의 겨를 벗긴 현미가 붙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토기도 발견되었다 ” 고 했다.
즉 한반도로부터의 벼농사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부터 일본 각지로 퍼졌다는 것은 오늘날 저명한 고대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며, 오사카에서도 이미 그 당시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 나가하라 87호 고분 출토분인 흙말 하니와.
나가하라 유적에서 논갈이의 터전이 발굴된 것에 대해 오사카 문화재협회의 고고학자 이치카와 쓰쿠루(市川創) 학예원은
“ 한반도로부터 처음 규슈 북부에 전해온 벼농사 기술은 괭이며 써레, 돌식칼 (벼이삭을 잘라내기 위한 석기) 등 논농사용 도구이며 야요이식 토기와 더불어 급속하게(일본열도 서쪽으로부터, 필자주) 동쪽으로 퍼지게 됐다.
이곳 오사카의 나가하라 유적에서도 야요이 시대 전기 말에 만들어졌다가 중기 초두에 묻혀버린 것으로 보이는 논터(홍수 때문에 논이 매몰된 터전, 필자주)가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 논의 모습은 똑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진 탓인지, 기내 지방(오사카, 나라, 교토 등지)에서 어느 정도 서로 공통된 요소를 보이고 있다 ”
(‘농경사회성립’ 2008)고 지적했다.
그런데 고대 한국으로부터 벼농사가 건너오기 전까지 일본열도의 선주민들은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쓰오 노부히로는
“ 조몬시대에는 먹을거리를 찾아 주변의 산이며 강, 또는 가까운 바다에까지 찾아가 음식이 되는 동식물이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지면 주저없이 딴 곳으로 이동했다.
◇ 나가하라 유적 일대의 밭과 주택.
그러던 중 벼농사가 건너와 조몬인들은 신선한 음식을 맛보았고, 볍씨를 보관했다가 이듬해 봄에 심으면 그해 가을에는 다시금 열매가 되는 소중한 식료였다. 벼농사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한 곳에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고, 집단 주거지를 옮겨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 고 밝혔다.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건너오기 이전의 일본열도에는 그야말로 미개한 채집 생활을 하던 선주민들의 원시적 삶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옷감을 짜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옷 대신 짐승 가죽 따위로 몸을 가려 추위를 모면했다.
오사카 나시즈쿠리 유적에서 나무로 된 베틀 부품을 발굴함으로써 5세기 말에 고대 백제로부터 베틀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 (黑須亞希子 ‘나시즈쿠리 유적 발굴 보고서’ 2005).
물론 고대 백제로부터 그 이전인 5세기 초엽에 일본 왕실(백제계 오진왕 시대)로 백제 재봉사가 건너왔다는 역사 기사(‘일본서기’)도 있다. 여하간에 옷감을 직조하는 베틀 부품의 실물이 오사카 지방에서 2005년에 발굴돼 고대 백제 복식 문화가 미개한 일본땅에서 옷을 지어 입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의미가 크다.
모름지기 베틀은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한 한반도 사람들에 의해 그보다 더 일찍, 이를테면 야요이시대 이전에 벼농사와 함께 이주해온 사람들이 보급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볍씨 자루만을 덜렁 둘러메고 오는 것이 아니다. 큰 배에 농기구와 베틀 등 각종 생활 도구, 삽과 칼, 괭이를 만들기 위한 대장간 시설 등도 모두 함께 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확히 언제 백제 벼농사가 일본으로 전해졌을까.
현재 일본고고학회 회장인 규슈대학 고고학과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교수가 16년 전에 발표한일본 농경문화 연구론(‘朝鮮半島の道’ 1993)에 보면 고대 한반도 백제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해주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학계도 이 연구론을 평가하며 크게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론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상세히 규명하고 있다.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이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하나로 정립된 문화 체계로서 이식되어 왔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벼농사 문화를 전파한 데에 백제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벼농사 문화의 담당자를 일본으로 이주시킬 필연성이 한반도 내부 사회에 있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본다 ” 고 했다.
니시타니 교수는 벼농사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던 당시의 주거와 부락의 형태 등에 대한 논증을 다음처럼 상세하게 밝혔다.
“ 주거 형식은 한반도 서남부인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유적의 주거 자취를 표준으로 삼아 ‘송국리형 주거 자취’로 부르게 되는데, 지금까지의 ‘이마가와(今川) 유적’(후쿠오카현 무나가타군 쓰야사키정 소재) 등이 ‘송국리형 주거 자취’와 똑같다는 것은 그동안 잘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서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가스야정의 ‘에쓰지 유적’에서도 송국리형이 검출됐다. ‘에쓰지 유적’은 처음으로 그 부락 구조가 숫자상으로 어느 정도 추측할 만큼의 주거 자취들이 발견된 것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 고 지적했다.
니시타니 교수는 2007년 4월 7일 필자 등과 함께 가진 강연 (‘국립영산강고고학박물관 건립방향과제 세미나’ 전남 영암군 시종복지회관)에서도 “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 문화를 전파한 것은 영산강 유역을 필두로 하는 한국의 벼농사 문화였다 ” 며 백제 영산강 유역이 최초로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밝혀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부여 송국리의 벼농사와 돼지 등 축산이 일본에 전파된 것을 벳푸대학의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 교수도 다음처럼 밝혔다.
“ 일본의 경우 야요이 시대까지 가축이 없는 ‘결축(缺畜) 농업’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돼지도 농업의 기원과 더불어 존재하게 되었다. 일본의 농경은 중국과 한국에 뒤지고 있었다. 송국리를 정점으로 해 널리 확산됐으며 일본에 돼지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 (‘日韓中を結ぶ稻の道’ 1989)라며 의미 있는 주장을 펼쳤다.
즉 백제의 벼농사와 함께 돼지도 백제로부터 일본열도에 처음으로 전파된 것을 추찰케 했다. 백제의 아직기 왕자(5C)가 암수 한 쌍의 말을 일본 왕실로 데리고 가 백제말이 종마로서 일본에 처음 퍼지게 되었다는 것은 일본 역사(‘일본서기’)에 기사가 있으며, 어쩌면 소와 닭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전파된 것은 아닌가 한다.
나가하라 유물전시관에는 흙으로 구워서 만든 말과 닭의 하니와 (埴輪, 왕릉 등 고분에 나열하던 일종의 수호신 격의 동물)의 출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의 ‘흙말’ 하니와는 ‘나가하라 87호 고분’ 출토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고대 한국 농업의 일본 전파 과정에서는 소도 건너갔으리라는 것을 추찰시킨다. 고대 일본에서는 소를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소는 농업용 노동 가축으로서 큰 역할을 맡아 보호되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앞으로 소와 닭과 돼지 등 가축의 일본 도래 과정도 한일 농업 교류사상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고대 일본어 농기구에 ‘가라스키’(韓鋤, からすき)란 것이 있다. 이는 고대 한국에서 전해왔다는 쟁기로서 “논밭을 경작할 때 소가 끄는 쟁기를 흔히 가리킨다” (‘廣辭林’ 1925)고 일찍이 고쿠가쿠인대학 국문과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 박사가 밝혔다. 이로 미루어 소가 끄는 쟁기와 더불어 소도 한국 도래임을 짐작케 한다.
이 밖에도 농기구의 옛 명칭에는 한국 것이라는 뜻에서 이를테면 도리께는 가라사오(韓竿, 한국장대)라 하는가 하면
대장간도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데서 고대부터 가라가누치(韓鍛冶, 한국대장간)로 불러왔다.
땅을 파는 삽을 ‘사비’라고 불렀던 것도 주목된다. 쇼사부로 교수는 일본어 삽(さひ)을 가리켜 “조선어 ‘Sap’과 동계어”라며 ‘삽’(Sap)의 영어 발음까지 굳이 표시하면서 한국어임을 단정하기도 했다.
85. ·끝 백제 위덕왕시대 日 불교문화
백제인 숨결 깃든 목탑·춤… ‘아스카 문화’ 꽃피우다
◇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었다는 아스카절 입구.
일본의 불교문화가 백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아직까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백제 불교는 서기 552년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의 왜왕실 포교가 최초였다. 이를 이어나간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이름은 昌·554∼598 재위)이며, 위덕왕은 재위 기간 45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실제로 일본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선두주자였다.
그 시대, 즉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문화’(飛鳥·592∼645) 시대에 일본의 왕은 왜나라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推古·592∼628 재위) 여왕이었다. 스이코 여왕은 백제 성왕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백제 위덕왕과는 이복남매간이었다.
◇ 584년 백제가 왜왕실로 보냈다고 전해지는 백제 사리 용기.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문화 시대를 입증하는 백제 불교의 자취가 최근 국내에서 발견됐다. 바로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의 사리공에서 발굴된 금제사리호다.
또 “백제 귀족 좌평(佐平) 사탁적덕(沙琢積德)의 딸인 왕후가 기해년(서기 639년) 창건했다”는 미륵사의 창건자 등 내력이 적힌 금제 사리봉안기 기록 등을 비롯해 유물 500여점을 한꺼번에 발견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의 일대 경사다.
특히 백제 불교 금속공예의 빛나는 세공 기법을 보여주는 금제사리호는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지(백마강 구드래 나루터 건너 산언덕 밑 터전) 목탑터에서 발견된 위덕왕 시대(서기 577년 제작) 금은동 3개의 빼어난 사리기 이후 두 번째로 발굴된 자랑스런 백제 사리기다.
지금까지 백제 예터전에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최초의 사리 터전은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위덕왕 시대(567년)의 석제(石製) 사리감 (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었다.
이 세 곳 모두 백제 불교문화가 왜의 아스카 불교문화 시대를 이룩했던 직접적인 배경을 입증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일본 역사에서도 백제에서 왕흥사를 짓고 왜땅 아스카로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588년부터 596년까지 8년간에 걸쳐 일본 최초의 칠당가람 아스카절(飛鳥寺)을 세웠다 (‘일본서기’)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 불교 왕조사라 할 수 있는 ‘부상략기’(扶桑略記·13세기경)에서는 593년 1월,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 아스카절 목탑 터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법요를 가졌으며, 만조백관이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있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 고 쓰고 있다.
◇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황금사리병 등 유물 일괄.
그런데 일본 역사 기사로는 왜왕실 조정의 백제인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 대신이 584년 9월
“ 백제에서 보내준 미륵석상(彌勒石像)을 이시카와(石川)의 자택에 모시고 불전을 세웠으며, 이듬해 2월에는 오노노오카(大野丘) 언덕에 목탑을 세우고 그 기둥 밑에다 부처님사리 용기를 봉안했다 ” (‘일본서기’)고 한다.
이는 백제 미륵불교가 왜나라 초기 불교의 바탕이 되었음을 추찰케 한다. 또 오노노오카의 목탑에서 발굴되었다는 백제의 사리 용기 기사가 일본 역사 최초의 사리봉안 기록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후반 왕흥사 목탑 건립이며, 아스카 시대 등 백제식 목탑과 사리기 봉안 등에서 보듯이 백제는 원래 석탑이 아닌 목탑을 세우다가 후대에 가서 돌로 축조하는 석탑을 세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간에 목탑 건조에서 석탑 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639년의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뛰어난 석조 건축 양식이며, 예술적 미감 넘치는 훌륭한 석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최근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 금제사리호.
577년 왕흥사의 사리 용기며 서기 639년 무왕(武王·600∼641 재위) 당시의 미륵사 창건 석탑 봉안 사리호의 발자취와 더불어, 일본 아스카에서의 584년과 593년의 사리기 봉안 등은 모두 한결같이 백제와 일맥상통하는 아스카 스이코 여왕 당시의 백제 불교문화의 눈부신 발자취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4월 초 부여 왕흥사 목탑 사리공 등 이 터전 발굴 현장을 답사했던 일본 와세다대학의 불교미술사학자 오하시 가즈아키(大橋一章·와세다대학 박물관장) 교수는 지난해 5월 22일 필자에게 직접
“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금은동제 사리기 3종은 훌륭한 불교문화의 발자취이다. 또 각종 출토물과 기와(연꽃무늬 수막새)의 문양과 탑 구조 등은 일본 나라 땅 아스카 절의 유물과 거의 일치한다. 일본에 건너와서 596년에 아스카 절을 건축한 백제 건축가들은 이미 그 이전에 백제 땅에서 왕흥사를 건축했던 똑같은 기술자들이었다. 나라(奈良) 땅의 아스카 절은 왕흥사를 모델로 건설한 일본의 유일한 1탑 3금당 형식 사찰이다 ” 고 말했다. 오하시 교수는 이런 내용을 일본 아사히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에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596년 완공한 아스카절 건설은 일본 불교사를 장식하는 왜왕실 최초의 경사였고,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백제 문화가 일본 나라 땅에 꽃피기 시작하는 눈부신 발판이 되었다. 이 당시 건너간 백제 건축가와 기와박사, 화공 등 관계자들의 이름을 ‘일본서기’ 역사책에서 잠깐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당시 백제인들은
복부미신(福富味身)을 비롯해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마나문노(痲奈文奴),
석마대미(昔痲帶彌) 등 대부분 두 개의 한자 글자로 된 이른바 복성(複姓)을 썼다.
당시 일본 선주민들은 성씨라는 것은 전혀 없는 미개 상태였다. 즉 성명은 왕과 귀족에게만 허락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근세(近世)까지도 이어져 왔다.
17세기 에도시대까지도
“ 일반 서민은 성명을 지을 수 없으며, 허리에 칼도 찰 수 없는 엄중한 ‘명자대도의 금령’ (名字帶刀の禁令)이 내려져 있었다 ” (‘日本人の姓’ 1972)고 성씨 학자로 고명한 사쿠마 에이(佐久間英) 박사는 밝혔다.
일본에서 서민도 제 성을 법적으로 허용받게 된 것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1874년부터였다. 이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고대 백제 등의 복성인 한자 두 글자의 성을 짓느라 법석을 부렸다 (앞 ‘日本人の姓’).
아스카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603년 10월
“ 스이코 여왕의 왜왕실로 백제 스님 관륵(觀勒)이 달력과 천문지리 등 서적을 가지고 건너가서 가르쳐 주었다 ” (‘일본서기’)고 한다. 이에 따라 왕실과 귀족들은 비로소 달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은인’ 백제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일본 도쿄천문대학의 천문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 교수는 그가 발견한 우주의 소행성에 관륵 승정의 이름을 따 ‘간로쿠’(觀勒)라고 명명해 국제천문연맹(IAU)에 등록했다(홍윤기 ‘일본문화사’ 서문당, 1999).
아스카 시대 일본의 사자춤, 가면무 등 음악 무용은 역시 백제인에 의해 창시됐다.
“ 613년 백제의 음악무용가 미마지(味摩之·6∼7세기)가 스이코 여왕 왕실로 건너와 왕실에서 천거한 제자 둘(眞野首弟子와 新漢濟文)을 가르쳤다 ” (‘일본서기’). 물론 이들은 백제인 후손들이었다. 이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친 터전이 현재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 경내에 남아 있는 ‘무대강’(舞臺講)이라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큰 돌춤터다.
이 모든 것은 백제 위덕왕 시대 백제문화의 포괄적인 전수였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백제문화와 아스카에 연관된 사항은 많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 줄이며 일단 졸문의 대미로서 마무리하련다.
[출처] : 홍윤기 외대 교수 /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 세계일보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hyh45&logNo=201277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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