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목씨 재실>
본관 : 사천 (泗川)
시조 : 목효기 (睦孝基)
** 유래 **
본관인 사천은 경상남도 사천시 이며, 시조인 목효기는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냈다.
우선 최초 목씨가 등장한것은 삼국시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를 비롯 귀족 8대성씨로 목씨,사씨 해씨 진씨,국씨 연씨 묘씨 협씨로 '남제서'와 '삼국사기'에 기록 되어있다.
하지만 나당 연합군으로 백제가 멸망한 후 성씨의 소멸,변형이 이루워졌다. 왕족인 부여씨는 소멸되고 본관을 부여로 성을 서씨로, 목(木)씨는 목(睦)씨로 변형되었다.
이후 중국(당나라) 일본(왜)등으로 건너가 목씨는 세계가 고려시대 이전까지는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시대 다시 정계에 등장한 목효기를 시조로 한다. 다른 문헌에는 가족 형제가 매우 화목하게 지내어 화목할 <睦> 으로 다시 사성했다는 기록도 있어 양설이 존재한다.
** 가문의 번영 **
목씨는 고려시대에는 무반으로 기반을 굳히고 조선 중종때 학자 11세손 목세칭(睦世秤)과 그 자손들이 목씨를 문반으로 다시 중흥시켰다. 특히 조선 중엽에 이르러서는 상신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문과급제자 33명을 내어 성씨별 급제자 순위는 현재인구 천명당 급제자를 비교했을때 1위이다.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대성들과 어깨를 겨루었던 성씨로 다른 희성들보다는 특징이 있는 성씨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충(睦忠) 목인길(睦仁吉) 목자안(睦子安) 등의 이름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으로서 정삼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목충은 공민왕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조에 조전병마사, 밀직부사가 되어 여러 차례 남해안에 침범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충의 종제 목인길은 공민왕때 역신들을 멸하여 1등공신이 되고, 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로 왕의 남행에 호종, 홍건적을 물리쳐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우왕조에 문하찬성사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렀다. 목자안 역시 우왕조에 밀직부사로 전라도 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았고, 평해부에 침범한 왜구 역시 격퇴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인 목세칭은 조선 중종때 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도승지등을 지내고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목첨(睦詹)을 비롯 첨의 아들인 목서흠(睦敍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삼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하여 중시조 이후 목씨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첨의 아들 3형제 중 맏이인 매계(梅溪) 목서흠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초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은 형보다 앞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좌부승지. 청풍군수등을 지낸 후 사직했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어 호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광주 목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 강릉부사 등을 지냈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목씨의 유일한 상신인 목내선(睦來善)이 있다. 그는 서흠의 아들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서 희빈 장씨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많은 파란을 겪었으며 현종 때 이른바 <제2차 예송>이후 서인이 실세한 데 이어 숙종 초 남인이 득세하면서 형조 호조 예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삭직되었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차 집권하면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5년 뒤에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당하면서 유배되었다.
<좌의정 수옹(睡翁) 목내선(睦來善)선생 신도비>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국립공원 내 위치
목장흠의 아들로 숙부 대흠에게 입양한 목행선(睦行善)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목창명(睦昌明)은 숙종 때 남인으로서 병조판사를 지냈다.
목씨는 희빈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히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을 잃었다.서인들은 득세를 하게되었다. 다른 파계의 목호룡(睦虎龍)이 신임사화(辛任士禍)의 고변자가 됨으로써 같은 준소인 김일경과 함께 조정에 피바람과 함께 큰 파장을 몰고 오기도 하였다.
이후 순조 초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뒤에 형조판서를 지낸 목만중(睦萬中)도 이 문중의 인물이며 일제 탄압에 대항한 독립운동가 목자상(睦子商)등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남한에 8,187명 으로 역사적 명성과 위세에 비해 극히 적은 인구 수 이다.
시조로부터 6세까지의 묘소(墓所)는 북한에 모셔져 있어 현재 7세조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선영(先塋)내에 단비(壇碑)로 모시고 있다.
** 계파 **
계파명칭 | 시조(휘) | 세수 | 비고 |
직장공 | 세준 | 11 | 종가댁 |
감찰공 (1) | 세규 | 11 | 증 사헌부 감찰 |
장악원정공( 2) | 승조 | 13 | |
부장공 (3) | 세형 | 11 | |
현헌공(4) | 세칭 | 11 | 4개 공댁으로 분파 |
해주공(5) | 세구 | 11 | |
사부공 | 희증 | 10 | |
괴산공 | 철경 | 9 | |
참군공 | 계남 | 8 | |
주부공 (6) | 지유 | 7 | |
찬성공 | 인길 | 6 |
** 족보발간 **
차례 | 발간년도 | 보명 ( 譜名 ) | 분량 |
1 | 1709 | 기축보 ( 己丑譜 ) | 단권 |
2 | 1806 | 병인보 ( 丙寅譜 ) | 3권 |
3 | 1920 | 경신보 ( 庚申譜 ) | 8권 |
4 | 1958 | 무술보 ( 戊戌譜 ) | 단권 |
5 | 1988 | 무진보 ( 戊辰譜 ) | 3권 |
** 항렬표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석(錫) | 원(源)○ | ○상(相) | 영(榮)○ | ○균(均) | 진(鎭)○ | ○수(洙)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
정(楨)○ | ○찬(燦) | 희(喜)○ | ○호(鎬) | 태(泰)○ | ○병(秉) |
** 연락처 **
TEL :(02) 956-4004 ~ 5
FAX :(02) 956-4006
서울시 도봉구 방학3동 271-2 사천목씨종친회 회관 빌딩3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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