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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14, 2014

일본인은 충청도인의 후손:왜는 한반도 안에 있었다

마한진왕과 남한/[양직공도]백제>斯羅(신라)
- 마한(백제) 진왕은 진한(신라)과 번한(가야),왜(해상세력)을 통치했다
윤복현 객원논설위원, 2012-03-04 오전 06:42:11  
 

마한(백제)의 진왕은 진한(신라)과 번한(가야),왜(해상세력)을 통치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삼한 78개국 중 큰 나라는 만여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이다.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리 이며, 동쪽과 서쪽이 바다와 접하니 모두 옛 진국(단군조선)이다. 마한이 가장 크므로 여러 나라가 함께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으니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땅의 왕들로 군림한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사람들이다." 

[사료]양나라 때 각 국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백제국에 대한 소개글을 해석하면,"백제라는 나라는 예전의 동이(東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 

[사료]梁書양서 卷 054 東夷列傳/ 辰韓(사로국=신라)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相係 辰韓不得自立爲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① 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하는데, [梁나라와는] 서로 1만 리 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流亡人들이 役을 피하여 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②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孤,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辰韓의 王은 항상 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남3한 당시 왜倭의 실체는 마한진왕에 복속된 한반도 해상세력

"마한은 남쪽으로 왜(倭)와 접해 있다."馬韓..南與倭接」後漢書 
"변진은 남쪽으로 역시 왜(倭)와 접해 있다."弁辰..其南亦與倭接」後漢書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倭)가 수시로 신라를 침범한 내용이 나온다. 

일부 사학자는 삼국지나 후한서에 마한(馬韓)과 변진(弁辰)의 남쪽에 왜(倭)가 살고 있었다고 적혀 있자 이 왜(倭)를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로 보고, 일본열도 왜의 세력이 마한과 변진의 남쪽까지 뻗어 있었고, 신라를 수시로 침범한 왜(倭)는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왜(倭)라는 문구에 현혹된 것일 뿐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나오는 왜(倭)는 대부분은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가 아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박혁거세 거서간 8년조에 박혁거세가 사로국를 건국한 후 사로국의 세력권에 편입된 진한 12국이 마한의 진왕에게 복속하지 않자 마한의 진왕이 정벌군을 보낸 것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사가(史家)들은 마한(馬韓)이 보낸 군사(軍士) 중에 왜인(倭人:서.남해 토착 무리)이 섞여 있자 왜인(倭人)이 섞여 있는 마한(馬韓) 군사를 비하(卑下)하여 왜인(倭人) 또는 왜병(倭兵)으로 적었다.

마한의 진왕이 사로국를 평정하기 위하여 군사를 보낸 이유는 박혁거세의 사로국이 마한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서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박혁거세 38년조에는 마한의 진왕이 호공(瓠公)에게 진(辰).변한(弁韓)은 마한(馬韓)의 속국인데도 진한(辰韓)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내용이 나온다.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년) 봄 2월 호공을 보내어 마한을 예방하니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진.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들어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의 예가 이러할 수 있소 하였다. 호공은 우리 나라는 이성이 발흥함으로부터 인사가 닦여지고 천시도 화평하여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사양하여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없으되 우리 왕이 겸허하여 하신을 보내어 방문하였으니..중략..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倭人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불렀다.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中略..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위 문구에 의하면, 신라가 건국되기 전까지는 진(辰).변한(弁韓)이 모두 마한왕에게 조공을 바쳤으나,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한 후부터 진한(辰韓)은 마한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마한왕이 신라를 평정하기 위하여 군사를 보낸 것은 신라가 마한의 진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였음을 알 수 있다. 

<양직공도>사라斯羅(신라)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백제에 속해 있다. 

양나라 때 각 국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백제국에 대한 소개글에서,

"백제라는 나라는 예전의 동이(東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였다..백제의 서울(치소)는 고마(곰, 웅진=공주)라고 부르며, 지방을 22개의 담로로 나누어 왕의 아들이나 왕족들에게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작은 나라들인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斯羅, 지미, 마연, 상사문, 하침라 등이 백제에 속해 있다.백제는 말과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같았고, 두 팔을 벌리지 않고 걸었으며 절을 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관모(冠帽)를 ?으며, 저고리를 복진, 바지는 곤이라 부르는데, 그 말중에는 중국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진한(사로국=신라)의 풍속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증왕 때 공식국호로 <신라>가 사용되기 전에는 사라斯羅였다. 남3한의 상국은 마한이였고, 마한을 통합한 나라가 백제였다. 따라서 백제가 남3한의 상국이였고, 웅진백제세력이 마한열도로 이주해 간 후에 고구려에게 망한 한성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에 백제가 다시 강성해진 동성대왕 시기에는 신라가 백제연합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직공도>백제국에 대한 소개글에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인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斯羅, 지미, 마연, 상사문, 하침라 등이 백제에 속해 있다."라는 내용의 의미가 될 것이다. 동성대왕 시기에 신라는 중앙집권국가의 기본이 되는 법령도 공포되지 않는 부족연합체에 불과한 나라로 지나국에 사신을 보낼 때도 백제 사신을 따라 가야 했을 정도의 국가상태였던 소지 마립간 시대다.

동성대왕 당시 남한은 백제중심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장수태왕의 고구려에 남진에 방어했음을 삼국사기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삼국사기 26권 백제본기 24.동성왕]재위 5년 봄,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 왔다.  

6년 가을 7월, 내법좌평 약사를 남제를 보냈으나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가 가로 막아 가지 못하였다.

10년, 위나라(북위)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겨울 10월, 왕이 제단을 만들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15년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16년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청천강)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군를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다.(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 벌에서 고구려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견아성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가 그들을 포위했다. 백제왕(부여모대)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그들을 구원하였다.-신라본기 소지 마립간) 

가을 8월,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왕(동성왕)이 신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 갔다.  

* 이상 [삼국사기]기록만 보아도 동성대왕 시기 남3한은 백제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와 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소지 마립간]"재위 3년 3월,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및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였다. 적이 패하여 물러 가자, (백제연합군은) 그들을 니하 서쪽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 동성왕<東城王  479~501  재위기간 22년> 시기는 신라 소지 마립간 (炤知 麻立干  479~500  재위기간 21년) 시기다. 그리고 신라가 초원문화를 금지시키고 농경문화로 접어 들면서 비로소 법령을 공포한 시기는 모씨(모용선비족)에서 김씨로 창씨개명한 법흥왕 (法興王  514~540  재위기간 26년)시기다. 신라가 김씨왕조로 알려진 시기는 법흥왕의 아들 진흥왕 시기다. 

백제와 고구려의 치고박기 틈바구니 속에서 잇속챙기고 당나라와 윈윈협정 체결한 신라

백제의 동성왕이 무녕왕을 옹립하려는 호족세력에게 시해당하면서 백제가 권력내분에 휩싸이게 되고, 지나 동해안지역의 담로군도 고구려 문자태왕에게 상실하면서 백제가 서서히 황혼으로 접어드는 반면에 신라는 중앙집권화와 철저한 개혁를 실현한 법흥왕 이후 진흥왕 시기부터는 화랑제도로 무장한 정신력으로 고구려.백제영토를 공격하고 한강지역을 차지하면서 서해를 통하여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김춘추와 김유신이 권력싸움없이 의기투합하여 정치적 결집을 이루어 내었다.
 
그 결과 백제지역는 신라가 먹고 고구려지역은 당나라에게 넘겨 주는 당나라와 신라의 윈윈협약으로  당나라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마침내 권력내분에 휩싸여 정신 못 차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나당연합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보다 권력내분이라는 내부적인 요인이 더 크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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