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해 나감에 있어서 새롭게 발견하는 사실은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철저하게 우리 나라 역사와 과거사에 대해서 무지할 수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달 달 외웠던 연대는 아무런 지혜도 되지 못했고 우리나라 역사는 단지 시험보기 위한 걸리적거리는 한 과목에 불과 했었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우리의 역사가 우리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뿌리이고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달라 질 수있다는 사실을 안 가르쳐 주었습니다. 좀 더 친근한 방식으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좀 더 사실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배웠더라면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도덕적 방황이 훨씬 단축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번역을 시작하고 완전 역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삼국시대,고려시대, 조선시대가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서 글을 쓰려고 하니 너무 딸리는 것이 많아서 인터넷을 뒤지고 역사책을 주문해서 읽고 법석을 떠는 중입니다. 마침 인터넷 검색도중 백제와 일본의 역사에 관련하여 좋은 글을 발견하여 이 번역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첨부합니다. 재미도 있고 또 유익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1. 백제 무령왕 Muryeong of Baekje (AD 461 - 523)
백제 무령왕(서기501 – 523까지 23년간 재위)은 생몰연대가 가장 확실하고 그의 인생역정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고 있다. 그의 본명은 사마이며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로 삼촌인 좌현왕 여곤 (곤지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에게 입적되어 여곤을 아버지라 부르며 오오사카 가와치성에서 자랐다.
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을 발굴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도굴꾼들의 피해를 입지않고 완벽한 모습을 드러냈다.무덤속에서 지석 이 함께 나왔는데 이름, 출생사망연대등이 기록되어있어 신분이 파악되었다. 이리하여 백제 무령왕은 생몰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고대의 왕이 되었다.
이후 일본 후쿠오카 북쪽 가카라시마섬 사람들이 공주에와서 백제 무령왕릉에 참배하고 461년 그곳에서 태어 난 무령왕의 탄생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일본 서기 Nihon Shoki 기록에 의하면 서기 461년 백제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에 보낼 때 임신한 부인을 아내로 삼아 함께 보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출산했다. 이때문에 무령왕은 섬 왕 즉 사마 왕이라 불렸다.
일본에서는 곤지에 대하여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없고 반드시 뒤에 군이나 왕자를 붙여 호칭한다. 일본서기 (곤지왕), 백제신찬 (곤지군). 일본 오오사카 히비키노시에 있는 아스카베신사가 곤지왕을 모시는 신사이며 곤지왕 시대에는 이 곳이 곤지왕의 거성 가와치성이었다.
461년 7월 백제의 정로장군이자 좌현왕 곤지가 일본에 가서 그해 8월부터 왜국의 지배층을 모두 숙청한 후 11월에 왜국왕에 즉위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백제 하남 위례성이 점령되어 폐허로 변 하고 이때 개로왕 (429-475, 재위 455-475 21년간) 은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 )를 건너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때 폐허가 된 하남 위례성은 1,500년 동안 4미터 깊이의 토사속에 묻히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하나 일본서기는 아들이 아니고 동생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으로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개로, 문주, 곤지는 형제간이다.
477년 야마토의 곤지가 야마토를 떠나 면서 무령왕을 왜무왕으로 봉한 뒤 백제에 나왔던 기록이 있다. 어찌 된일인지 삼국사기는 이 때 곤지가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요즘 역사학자들의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곤지의 생몰연도가 444 – 484로 되어있다. 왜무왕은 478년 송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무령왕은 백제왕이 되기 전 477년부터 왜무왕 이었고 그가 백제 무령왕이 된것은 501년 나이 40세때이다.
문주왕과 그 아들 삼근왕은 의문의 암살을 당하고 479년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야마토에서 돌아와 백제왕으로 즉위하여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중국본토에 백제분국을 설치하고 북위와의 전쟁에서 대승한다. 광양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등의 백제관리가 분국을 다스렸다.
동성왕 사후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무령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지리적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회복코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의 아들 성왕때 이 목표는 거의 이루어질 듯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훗날 동맹국 신라의 배신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2. 야마토 타케루 日本武尊 Yamato Takeru
본래 동양의 역사기록은 사마천 (BC145 – BC86) 의 사기이래 그 분류방법을 본 따 본기, 세가, 표, 서, 열전으로 나누어 기술하였고 후대의 모든 역사기술이 이 틀을 따르는데 일본의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 古事記 Kojiki 와 일본서기日本書紀 Nihon Shoki 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일본 건국신화위주로 시작된다. 자기 조상들의 역사를 신화형식으로 기록하면서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 놓아서 신화를 역사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상기 두개의 역사서는 덴무천황 天武 Emperor Tenmu (631 – 686) 재위 672 – 686 의 명에 의하여 Toneri 황자와 백제의 학자 안만려가 고사기 AD712년, 일본서기 720년에 완성하였다. 덴무천황부터 현직의 왕에게 천황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시작한다. 이제부터 야마토 타케루라는 신화속의 인물을 살펴보자.
Yamato Prince Ousu 는 전설속의 12대 천황Emperor Keiko의 둘째아들인데 총명하고 용감하였다. 나이 16세가 되어 부왕의 명으로 큐우슈 구마소 형제가 왕명에 잘 따르지 않으므로 정벌에 나선다. 상대는 너무나 용맹스럽고 용의주도하여 고심끝에 Ousu는 단신으로 여장한 모습으로 구마소 형제에게 접근한다. 가슴속에 날 선 비수를 감추고. 미모의 젊은 여인이 따라주는 술에 기분 좋아 진 형제를 처치하였을 때 그 형제가 붙여 준 이름이 야마토 제일의 무사라는 뜻의 Yamato Takeru였다. 그 후 이즈모 出雲 Izumo 를 정복하고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 돌아와 서 갑자기 병이 들어 Mie 현 Ise군 어딘가에서 죽는다. 죽어서 그의 혼백이 백조가 되어 날아 갔다고 전 한다. 그의 무덤이 오오사카 금탄원에 있는 백조능이다. 백조능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서기 295년 태어나 333년 39세로 죽었다.
그런데 신화속에서 Prince Ousu는 큐우슈와 동쪽의 나라를 향해 떠나기 전에 이세신궁의 숙모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지혜를 구하게 되는데 숙모에게서 받은 신물이 그 임무수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우연한 일인 듯 기록된 이 숙모는 야마토 천황가의 시조중의 하나로 알려져있고, 동쪽을 정벌하러 떠 날때 이세신궁의 숙모가 준 신검 Kusanagi는 현재 천황가의 보물중의 보물로 되어있다. 이세신궁의 주인 신녀인 Ousu왕자의 숙모와 Kusanagi 청동검은 역사속에서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신화는 요즘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인기있는 소재이다. 이 신화는 시대개념을 철저히 배재하고 있어서 어느 때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기록상 Emperor Keiko 생몰연도를 AD 71 – AD 130이라고 하나 아예 전설상의 천황으로 치므로 믿을게 못 된다. 백제가 망해 없어진 뒤에 야마토의 역사를 백제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하되 자기 조상들의 자랑스런 행적은 신화의 형식으로 남겨 둔 것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이다.
3세기 말, 만주에서 선비족의 세력이 강해져서 부여의 의라왕이 부여세력을 이끌고 한 반도를 거쳐 일본을 차지하여 숭신 천황이 된다. 그 와중에 백제의 책계왕이 298년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분서왕이 304년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백제 12대왕으로 기록된 계왕 (273 – 358)은 분서왕의 왕자였지만 당시 큐우슈와 오오사카에서 부여세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계왕의 나이가 어려 비류왕이 즉위했다고 적고 있으나 계왕의 실재나이는 이때 32세였다. 그런 사정으로 분서왕 사후 비류왕이 11대왕이 된다. 비류왕이 왕이 되기 전 서기 295년 쌍둥이 아들을 낳았었는데 이름이 큰방아와 작은방아였으니 오오(大)우스와 오(小)우스이다. 일본어로 우스로 읽는 한자의 뜻이 우리 말의 방앗간의 방아에 해당한다.
Yamato의 전설속의 12대 Emperor Keiko는 백제계왕의 젊은 시절이었으며 그를 도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것은 다름아닌 방아 쌍둥이 형제였다. 전쟁은 318년 Keiko측 승리로 끝 나지만 오오우스는 24세로 전사하고 그 후 오우스의 정복전쟁은 신화속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정복전쟁중 신검 Kusanagi의 존재는 백제황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신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백제 11대 비류왕이 죽고 Yamato의 Emperor Keiko가 백제에 돌아 와12대 계왕이 된 것이 344년이며 346년 Yamato Takeru 가 백제 13대 근초고왕이 되어 나이 80이 된 375년까지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Yamato Takeru는 백조가 되어 Yamato를 떠나 백제 근초고왕이 된 것이다.
작성자: 권선철 0 개의 덧글
3. 칠지도 七支刀 Seven-Branched Sword
한국과 일본간 논쟁중인 한일 고대사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중의 하나이다. 1870년대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가미 신궁 石上神宮Isonokami Shrine창고에서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발견되었다. 길이 74.9 cm이며 일곱 개의 날이 있고 양면에 60여자의 한자가 금상감되어 있다. 글자일부가 훼손되어 추측해서 해독해야 되는 탓도 있지만 기록된 연호를 둘러싸고 한일학자간에 공방이 계속되고있다. 일본은 한국이 고대에 자기들의 상국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 중국커넥션으로 설명하고 싶어한다. 곤란하면 신화라고 우기며 역사로 해석하는것을 거부한다.
일본서기에 신공황후 Empress Jingu 52년 백제 근초고왕이 七枝刀를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에 120년의 차이가 난다. 여기 나오는 Empress Jingu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가장 심한 역사왜곡이 이루어진 인물이며 신화속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일본학자들도 명치시대까지 그녀를 천황으로 기록했으니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저작했던 사람들의 심모원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왜곡이 심하다는 것은 그 만큼 숨겨야 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언젠가 그녀는 이 글의 제목으로 등장하여 역사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본서기 기록
則獻七枝刀一口 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 仍啟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飲是水 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
칠지도에 금상감 된 글자 가운데 괄호안은 추정이며 검은 부분은 추정불가한 글자.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 (作 or 祥)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가장 민감한 부분이 태화4년인데 백제연호로 볼 수도 있고 중국연호로 볼 수도 있어서 한일간에 자기 쪽에 유리한 주장을 한다. 다음은 아랫 줄 왕 세자 기생성음 부분인데 백가쟁명의 해석이 나와있다. 그런데 윗 글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奇로 표현된 사람의 이름이다.
백제 왕세자 기가 태어나 말을 하므로 왜왕으로 봉하여 후세에 전 하노라.
왜왕 奇는 위에 언급된 신공황후가 서기 363년 큐우슈 후쿠오카에서 출산한 왜기왕이다. 왜기왕을 367년 백자국 百慈國 (시가현) 의 세자로 책봉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근초고왕이었고 그를 기념하여 칠지도를 만들어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다. 백제태화 원년은 364년이
다. 타고 난 미모에 사나운 무사였으며 전쟁때는 전투의 선봉에 섯던 며느리를 근초고왕은 자랑스러워 했으며 거기서 태어 난 태자 奇에 대한 사랑과 기대를 표현한 것이다. 왜기왕이 훗날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는 것만 밝히고 넘어간다.
4.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에 관련된 역사는 삼국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일 발견된 광개토대왕비 Gwanggaeto Stele 때문에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되었다. 만주 지린성 지안에서 일본 정보장교 Sako Kageaki 중위가 1883년 탁본하여 일본학계에 보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을 파악한 일본군은 일본의 조선합병을 합리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흥분하는데…
높이 7미터 둘레 4 미터인 한 개의 화강암 석주에 1802자의 한자가 음각되어있다. 그런데 거기 기록된 내용중 한국과 일본학자간에 논쟁이 된 부분을 학계에서는 신미년조라 부른다. 우리역사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두 명의 왕이 있으니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이다. 광개토대왕 (391 – 413)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391년 17세때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라 39세에 병사하므로 22년간 왕위에 있었다.부왕의 위업을 기려 414년 장수왕 2년 건립하였다. 추모왕의 고구려건국과 광개토대왕시절 정복한 전쟁기록인데 등장하는 성의 이름만 백여개이다. 문제가 되는 신미년조는 다음과 같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XX)新羅以爲臣民
而後以辛卯年不貢因
신묘년 (AD 391)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XX)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록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한국측 학자들은 원래 두째 줄에 있는 내용을 처음 발견한 일본군이 첫 째줄의 내용처럼 비문을 변조하였다고 음모론을 제기하였다. 그렇게 되면 “ 그후 신묘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XX)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로 되어 한국측에게 만족스런 내용이 되나 세계사학계의 견해는 음모론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 9년 (364년) 대대적인 왜의 공격으로 신라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공격의 지휘관은 야마토의 응신천황 應神 Emperor Ojin (320 – 394) 이었다. 지금 일본에 있는 하치만 신궁에서 받 들어 모시는 신격화된 인물이다. 일본측 역사에는 Empress Jingu 가 신라를 정복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고의적인 왜곡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실성니사금 원년 (402년) 3월 내물왕자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낸다. 백제기록에도 아신왕 6년 (397년) 왕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낸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것은 김 부식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지는 인질이 아닌 왕자의 신분으로 야마토를 둘러 본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낭랑 대방이 가로 막아 주어서 접촉이 없었는데 313년 고구려 미천왕때 낭랑 ㄷㅒ방군이 소멸되고 국경을 맞 대게 되어 충돌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무렵 백제가 군사력에서 우세했던 것 같다.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2만의 군사로 먼저 공격하였으나 치양전투에서 백제에게 패배한다. 백제는 371년 근구수왕자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고국원왕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뒤 소수림왕이 즉위하고 중국대륙에선 전진황제 부견이 383년 비수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대륙은 혼란에 빠진다.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정비하면서 백제에게 패전한 상처를 회복한다. 이후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순으로 이어진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형제간이므로 광개토왕은 대 백제전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손자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왕자 담덕이 17세의 나이로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고구려의 국력은 주변국에 별로 위협이 되지 못 했는데 어떻게 하여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적의 나라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단숨에 백제를 유린하고 만주대륙을 종횡무진으로 공략한다. 백제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왜의 인덕천황은 399년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나 고구려군에게 궤멸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신라와 가야전역이 왜군으로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 대마도 큐우슈 오오사카를 점령하고 광개토대왕의 왕자 고진이 백제세력을 제압한 뒤 오오사카에서 윤공천황으로 즉위한것이 서기 431년이다.
이때 형성된 고구려 세력을 야마토에서 정리하는 것이 백제 무령왕 편에서 살펴 본 곤지왕의 몫이었다.
5.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大和)
왜의 최초역사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야마다이國 왜 여왕 히미꼬 (卑彌呼)가 서기 238년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사이다. 일본측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히미꼬의 기록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는 왜 여왕이 239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그들이 240년 돌아 왔다는 기록은 남겼다. 일본서기의 저자가 중국측 기록을 알고 있었다.
위나라와 시작된 이러한 야마타이국의 외교관계는 다음의 진(晉)으로 이어지다가 266년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이후 147년간 중국역사에 왜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가들은 서기 266년부터 413년까지의 147년간 일본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미꼬의 야마다이국은 부족연맹수준의 작은 나라였는데 147년 간의 역사가 없는 신비한 세월이 흐른 뒤 (이 기간 일본은 역사는 없고 신화만 무성하다) 갑자기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가 야마토와 가와치 지방 (현재 나라현) 에 나타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고학상 일본역사 발전단계의 한 획을 긋는 거대한 분묘가 이 무렵 나라 – 오오사카 지역에서 생기기 시작하더니 차차 일본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 분묘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해서 길이 420미터를 넘는 것도 있는데 이집트 피라밋 건립과 맞 먹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250년부터 552년 불교공인이후 매장문화가 변화할 때까지의 기간을 일본에서 고분시기(古墳時期)라고 한다.
이 새로운 문화가 일본내의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일본인이 인정하는데 어디에서 누가 왜 일본에 왔나? 하는 물음에 대 해서는 아직까지 공인된 결론이 없다. 결론이 없다기보다 결론이 두려워 회피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말 할 수 없는 대목에서 침묵할지어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 Wittgenstein)"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황실과 일본국민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이 무렵의 권력자라고 생각되는 천황묘의 발굴에 관심이 많은데 황실은 고인의 권위와 평안을 지켜야 한다면서 반대하고 있다.
사실 별 것 아닌 것도 국가 문제가 되면 국가라는 도그마에 매몰되어버린다. 요즘 티벳사태를 대하는 중국을 보면 된다. 성화가 지나가는서울에서 그들은 애국이란 이름으로 수치를 모르는 짓을 한다. 국가란 원래 폭력을 독점하고있는 합법적인 집단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교육 받은 개인들 또한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중국 대륙이 불안할 때 주변의 오랑케들은 편안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않고 있다. 1951년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뺏기고 57년 동안 티벳인들은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망해 없어진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기 보다는 가미(神)의 후손이라고 하자.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는 가미의 세계라면 지난 역사를 적당히 꾸며 댈 수 있을것이다. 만세일계로 이 곳에 군림할 권위를 신에게서 빌리자.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이 감히 가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의 자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온 천손이다. 천손강림 신화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오늘날 개명한 일본국민들 또한 믿고 있다. 믿음의 체계란 진실의 체계가 아니라 주관의 체계인 것이다. 믿음의 체계라는 이름아래 인류는 진리를 의식하지 못 하는 세계에 살고있다. 인간의 무명(無明)이 안타까울 뿐이다.
8 세기 초 성립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의도했던데로 일본국민은 가미를 생활화하면서 21 세기를 살고있다. 황실과 관련된 신궁, 이나리 신사, 하치만 신궁 등등 수 10만의 신궁과 국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 2006년 정초 3일간 269만명의 참배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단 한 개의 신사에 이렇게 사람이 몰려오는데 전국에 이나리 신사만 3만개, 하치만 신궁 2만5천개, Susanoo를 모시는 야사카 신사는 8만개 이상의 지역신사가 있다고 하며 이밖에도 무수한 신궁이 있다.
역사시대의 정교한 기록을 과시하는 중국의 전국시대( BC 8세기)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기원후 2 - 3세기의 역사를 일본은 이런 식의 신화로 만들어 놓았다.
6. 백제 근구수왕 (320 – 394)
삼국사기에 근구수왕 은 375 – 383까지 8년간 재위한다. 일본 측 자료는 그의 생몰연도 320 – 394로 74세를 살았다. 근초고왕 (295 – 375)의 둘째 아들이며 부왕과 함께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부왕이 왕위에 오른 서기 346년 그의 나이 26세 (부왕 51 세)였고 근초고왕시대에 역사에 알려 진 가야합병, 고구려와 치양전투 그리고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 왜의 신라침공이 실제로는 그의 기록이다.
그런데 역사상 그가 백제왕위에 있던 것은 8년뿐 (나이 55세부터 63세까지)이다. 왕자때부터 재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고 74세까지 살았다는 이 사람의 남은 세월은 역사의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를 꼭 빼어 닮은 싸움꾼이었고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대륙까지 위세를 떨친 인물이다. 아직까지 역사는 이 분의 모습을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Yamato라는 나라는 이 무렵 건국되었다고 본다. 일본 천황중 15대 응신 (應神 Emperor Ojin)이 있는데 이 사람을 Yamato의 시조로 본다. 일본열도에서 Yamato의 우위를 확실히 다져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것이다. 천황기록은 기원전 서기 660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사람앞에 기록된 14명의 천황은 이 사람을 위하여 이 때까지의 세월을 대강 짜 맞추었다. 일본기록에 응신의 재위기간이 270 –310의 40년간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역사학자는 없다. 다음은 응신왕 시절의 기록들이다.
백제의 직조기술자, 야금기술자입국. 백제 근초고왕 칠지도, 칠자경 헌상. 백제인 아직기 말 두필 가져 옴. 왕인 논어와 천자문 가져와 경서 강의하며 왕자의 스승이 됨. (한국측에는 왕인 기록이 전혀 없음). 고려인,백제인, 임나인, 신라인들이 옮겨 옴. 이들로 하여금 큰 못을 만들게 하고 한인지(韓人池)라 함. 유쯔키기미(弓月君- 훗날의秦氏) 가 백제에서 인부 백 이십현(縣)을 데리고 귀화하였다. (이들은 쿄오토 가쓰라강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 농사를 하고 농잠업으로 비단을 생산하여 농업생산력 증진에 공헌한다). 이 무렵 아야(漢)씨, 사케노기미 (酒君)등 유력호족세력이 대거 일본에 도래한다. 이 후 광개토왕의 백제정벌시 피난민의 행렬이 가야지방을 통하여 일본으로 유입되어 오오사카의 Naniwazu(難波津)부두는 백제사람으로 넘쳤다. 이러한 인구이동 때문에 백제의 인구는 줄어들고 야마토는 비약적인 국력신장을 이룬다.
역사가들은 이 무렵 왠지 모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좋았다고 본다.
오진왕의 이름은 Honda Wake 또는 Homuda Wake (譽田別) 이며 Homuda란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 (漢山 또는 漢田)을 뜻 한다고 한다. 오진왕, 근구수왕, Homuda Wake는 동일인물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야마토의 닌토쿠왕이 그의 이들이다. 야마토라는 통일왕조의 출현은 근초고(Yamato Takeru)와 근구수(Ojin or Homuda Wake) 부자의 2대에 걸친 정복전쟁( 318년부터 390년까지)의 결과이다. Homuda Wake는 서기 390년 나이 70에 야마토(大和) 라는 나라를 오오사카에 세운다. 만주 부여족의 후예로 백제에 이어 야마토의 지배자가 된 Homuda왕은 가와치(河內)의 구다라노(百濟野)에서 제천(祭天)의 의식을 올리고 만세일계의 영원한 일본지배를 기원한다. 그로부터 1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아직도 천황으로 있으니 역사를 다룰 줄 아는 조상들의 슬기에 숙연해 질 뿐이다. 일제시대 일본군부는 구다라노(백제 벌)를 하비키노(羽曳野)로 개명하여 백제의 남은 그림자마져 없애 버린다.
근구수왕(375 – 383재위) –야마토 오진왕(362 – 367재위) – 야마토 호무다왕 (383-394재위)의 인생역정
응신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어 하치만(Hachiman) 신궁에서 모시는데 전국에 3만의 하치만 신궁이 산재해있고 오오사카 응신천황능 앞에 하치만 신궁이 함께 세워져있다.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 (倭建命 또는 日本武尊)가 20 – 30대의 대부분을 일본의 전쟁터에서 보냈으므로 그 또한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를 따라 하늘이 그들 부자에게 준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일생동안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362년 (42세) 왜 성무천황 반란진압하고 성무천황비Empress Jingu (336 – 390)를 후비로 취한다.
363년 (43세) 근구수왕자와 Empress Jingu 왜기왕 출산(칠지도 편 참조).
364년 (44세) 신라 내물왕 9년 왜군을 이끌고 신라침공.
369년 (49세) 고구려 고국원왕 2만 군사로 백제침공했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
371년 (51세)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375년 (55세) 백제 14대 근구수왕으로 즉위.
376년 (56세) 고구려 침공.
377 년 (57세) 고구려 평양성 재탈환.
383년 (63세) 근구수왕 사망 (삼국사기). 실재로는 아들 침류에게 백제왕를 맡기고 그는 오오사카로 돌아감.
383 (63세) – 394 (74세) 왜 Homuda천황으로 재위. 그의 순행과 전쟁 행적이 일본 여러지방에 전 해 내려 오고 있다 함.
390 년 (70세) 야마토 (大和) 건국. 이 해에 신공황후(Empress Jingu아이 부인) 사망.
392년 (72세) 야마토의 장수 4명을 보내 백제 아신왕을 복위시키고 진사왕 체포하여 야마토로 압송.
394년 (74세) 사망. 묘는 大阪 譽田御墓山의 전방 후원분. 길이 420미터로 천명의 인부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지금 일본의 고분가운데 오진릉과 그 아들 닌도쿠(仁德)릉이 가장 거대하며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오진능 바로 남 쪽에 그의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의 백조능이 있다. 7.일본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편 Google 지도에서 하비키노(羽 曳野) 지역을 확대하면 이들 묘의 위치가 확인된다. 항공사진으로도 식별가능하다. 거기서 청녕 천황능이 곤지왕능이고 서쪽으로 커서를 옮겨 사까이(堺)항으로 오면 거대한 닌도쿠천황능이 보인다. 닌도쿠 천황(337 – 419)은 근구수왕의 장자로 백제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의 친 형이 된다. 왕인 박사가 372년 일본에 가서 그 스승이 되었다는 왕자가 우치노와케이라츠꼬 (宇遲能和氣郎子)로 나이 10세였다. 이 어린 왕자가 커서 20세때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 당시 백제와 일본은 백제왕실이 경영하는 한 나라였고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기 660년 한 반도의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지만 나머지 한쪽이 일본열도에 고스라니 남게 된 것이다.
2008년 6월 7일 토요일
7. 히미코(卑彌呼) Himiko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일절 언급이 없으나 중국역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역사적 왜왕이다.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고사기나 일본서기 저자들이 신화속에 끼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렵 신공황후를 가공하여 히미코와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신화를 기록하였다.
히미코의 역사기록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온다. 왜나라에 원래 남자왕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쟁만 계속되고 나라가 편안하지 않아 합의에 의하여 히미코라는무당여인을 왕으로 뽑은 뒤 야마다이국에 평화가 왔다. 여왕은 결혼하지 않았고 망루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궁에서 살았으며 무장한 경비들이 항상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처음 위나라에 사신이 온 것은 서기 238년이며 히미코의 사망을 247년으로 기록했다. 사망후 지름이 백 보를 넘는 거대한 분묘를 세우고 순장자 가 백명을 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 (서기 172년) 왜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그래서 히미코의 재위기간을 172 – 247로 보기도 한다. 일본학계에서도 히미코와 야마다이국의 위치에 관심이 많은데 정설이 없다. 1986년 큐우슈 사가(佐賀)현 간자끼(神綺)시 요시노가리에서 야요이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BC 3 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벼를 논에서 재배하였다고 한다. 1992 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위에 기록된 히미코의 궁과 흡사하다.
삼국유사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4년 (서기 157년)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신라에 해와 달의 광채가 사라졌다. 사람을 보내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와서 영일현에서 제사를 지내자 광채가 옛날 처럼 돌아왔다.
일본에 수 많이 등장하는 神가운데 Super Star는 단연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天照大御神)라는 여신이다. 이 여신은 태양신이며 이세신궁의 주인이다. 남자 형제신이라며 스사노오 라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함께 나오는데 성질깨나 있고 괘팍하여 누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다. 이때도 스사노오가 누나의 시녀를 죽이고 난폭한 행동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로 아마테라스 오호미가미는 동굴속에 들어 가 입구를 막아버리고 나가지 않았다. 태양신이 숨어버리자 세계는 암흑으로 덮히고 말았다. 곤란해진 신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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