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속의 韓國姓氏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지상지(黑齒常之), 부여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ㅡ.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히로시마현 일대
-백제혈통의 유명일본귀족성씨-
1) 야마토(和)씨
◆일본(日本)을 야마또라고 읽기 사작한것은 7C~8C이후 부터입니다.
야마또(혹은 야마토)는 일본서기의 등장인물 환무천황의 어머니쪽 성씨
라고 나와있습니다.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원래는 기비지방의 요시이 강 부근과 와께 이와나시에 있던 백제국에
서 살다가,
8C경 기내 야마또지방(현재의 오오사카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 지
역의 사무라이 집안이 됩니다.
이때 이주를 하면서 `야마토`씨로 성씨를 바꿉니다.
죠보군 일대
1) 아야씨 (혹은 가야, 가라)-->현재는 기비씨
가야에서 이주해 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전에는 대지주이며 대노예소유주였습니다.
에도시대(17C~19C)까지도 기비지방의 사무라이집안이었습니다.
4)도요(豊)씨
7C전에는 `가라`라고 읽다가 8C 이후에는 `도요`로 읽음
즉, 가라출신이라는 거죠.
오사카부근
1)소가(蘇我)씨
백제 개로왕때 백제->이시가와->다까이지 가루->아스까로 이어지는 경로로 이동을 해서 야마토에 자리를 잡았며
6C~7C전반기 까지 야마토 정권의 실권자였습니다.
같이 권력을 쥐고 있던 밑의 야마토노 아야씨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몰락했습니다.
가장 백제적 성격이 강했던 왕족이었습니다.
2)모노노베(物部)씨
지금 일본역사왜곡의 한 가운데있는 칠지도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집안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한(백제)에서 북규슈로이주, 다시 가와치로 갔다가 야마또로 이주해서 신라세력이 운영하던 이소노가미신궁을 빼앗아 현재까지 자기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원래 성씨는 모노노베 가라구니(物部韓國)인데 8C말 일본왕한테 가서 가라구니(韓國)을 떼어달라고 청원을 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 ^^
(가라, 가야, 아야,아나는 조선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시대의 흐름인 불교를 거부하고 일본토착종교인`신도`을 믿고 있었는고
야마토국에서 군사와 형벌을 맡았는데 소가씨와 같이 야마토를 운영했습니다.
3)나카도미(中臣)씨(후에 '후지와라'씨)
7C중엽 소가씨 가문을 몰락시킨 후 야마토노 아야씨(백제에서온 선진 기술인집단)를 쥐어흔들면서 야마토 정권의 실세로 등장했으며
야마토에서 제사를 담당하던 가문입니다.
“나카도미의 아들이 백제에 가서 장가를 들었다”--속일본기
이 집안은 나중에 ‘후지와라’라는 성씨를 받았습니다.
2)야마토노 아야씨(東漢)
소가씨의 군사,경제적 배경인 집안으로 오사카 남쪽 다카이치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야마토보다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3) 아스카베노 미야츠고
백제 곤지왕, 혹은 말다왕의 후손---신찬성씨록
이상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간직한, 혹은 만들어낸 성씨들이 있습니다.
다 적는 다는 것은 좀......(위에서 말했던 신찬성씨록이 큰 도움이 되겠네요)
대신 위에 설명한 성씨들의 뿌리와 이동경로를 따라 그 지역의 신사와 유물(특히 그릇과 무기류), 유적(특히 무덤과 산성, 집터)을 알기만 해도 일본 역사의 대부분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의 조상과 후손들이 일본역사에서 거의 주인공들이거든요.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일본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포고”라는 “신분해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씨를 하려니 갖가지 애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데 큰뱀(大蛇), 여우코(狐鼻), 메도키(百目鬼), 히토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끼), 시나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께(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교수도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귀족사회는 고대시대로부터 시작됩니다.
고대시대에는 호족이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며, 명칭은 다르지만 귀족계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때는 4대 유명 귀족 가문이 있었는데 "源平藤橘"이라고 해서 순서대로 나열하면 미나모토 씨, 타이라 씨, 후지와라 씨, 타치바나 씨 입니다.
후지와라의 경우 원래 '나카도미씨'였는데 후지와라라는 성을 받은것이며, 백제가문입니다.
한편, 근대에 와서는 華族(화족)이라는 귀족계급이 존재합니다. 화족은 1884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한 일본근대의 특권적인 귀족계급을 말합니다.
1884년, 화족령이 제정되어 화족에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다섯단계의 작위로 나뉘어지게 되어 특권신분으로서 취급받게 됩니다. 이 화족령은 1947년, 귀족제도의 금지와 법에 있어서의 평등을 담은 일본국헌법의 실행과 함께 폐지됩니다. 위키페디아 홈페이지 항목의 화족과 관련있는 유명 인사를 적어 보겠습니다 (비교적 유명한 이들만)
:아소 타로 - 중의원의원. 백작의 증손자.
(현재 자민당 총재 후보로도 유명하죠)
:이리에 타카코 - 배우. 자작의 딸.
:카메이 히사오키 - 중의원의원, 국민신당 간사장. 자작의 아들.
(전 자민당 소속이었으나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성 민영화에 반대하여 탈당했습니다)
:덴 히데오 - 뉴스 캐스터, 참의원의원. 남작의 손자.
(온건파적 사회민주주의자로 평화주의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 전 내각총리대신. 후작의 장남이나 공작의 외손자.
:무사노코지 사네아츠 - 작가. 자작의 아들.
(대표적인 시라카바 파 작가입니다)
한편, 정치가 가문도 일종의 귀족가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거구를 자신의 부친 또는 조부 등의 친족에게서 물려받아 정치가로 데뷔하는 케이스가 공공연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현재 일본의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와 차기 일본의 총리로 손꼽히는 아베 신죠 관방장관입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정치가였던 아버지의 사망으로 요코스카 선거구를 물려받아 정치가 데뷔를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낙선했습니다만) 아베 신죠 관방장관의 경우, 외조부가 총리 출신이고 부친이 외무대신이었습니다. 외에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경우에는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고 나중에 정치가로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는데, 그의 집안도 나름대로 신 귀족정치가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장남은 전 국토교통성대신인 이시하라 노부테루, 삼남인 이시하라 히로타카는 한번의 고배를 맛본 후 얼마 전의 선거에서 당선했습니다. (현 중의원의원)
참고: 위키페디아 저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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