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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31, 2014

충남 보령 주교면 관창리 일본보다 100여년 먼저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주구 묘가 발견

충남 보령 주교면 관창리 일본보다 100여년 먼저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주구묘가 발견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 무덤덧널 무덤, 굴식돌방 무덤 등 130여개의 가야식 무덤이 발견된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있다. 덧널 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棺을 만든 것으로,

이전에 통나무관을 이용하던 것에서 나무판 널을 사용하는 시기로의 전환이 1세기경임을 보여준다.

 

수천점의 토기류, 청동유물, 철기유물, 철정鐵釘, 중국제 동경銅鏡 등이 출토되는데 한반도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는 한·중·일의 문화교류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파형동기와 오도로스Ordos

(鄂爾多斯)형 동복銅鍑 등 층층이 다른 시기와 다른 양식의 무덤에서 이질적인 유목민의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한꺼번에  

발굴된다.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대성동 고분에서 6개의 파형동기巴形銅器(방패에 붙이는 회오리 모양의 구리장식)가 발굴된다.

이 파형동기는 이전에 일본에서만 100 여개 발견되어 일본학계에서도 김해 대성동 고분의 파형동기에 관심을 갖고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연관성에 다시 주목한다.

 

뒷동산 높이의 구릉지처럼 보이는 대성동 고분을 인근 나이 많은 주민들은 예전부터 애꼬지, 애꾸지라고 부른다.

애-는 아이, 꼬지/꾸지-는 구지龜旨을 경상도식 된 발음이다. 즉 대성동 고분은 작은 구지봉, 제2의 구지봉이다.

건국신화의 구지봉 다음으로 중요한 작은 구지봉이라고 부른 것이다.

가야인들에게 대성동 고분은 왕궁터이며 왕족 무덤의 성지聖地였던 것 같다.  

먼저 비류 백제를 침공하여 한성을 차지하고,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의 남진정벌로 한반도는 남부지역까지 전쟁에 휘말린다.

김해 대성동 고분지역에는 튼튼한 성채가 축조되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된 흔적이 있다.

그리고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진 가야 민족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삼국사기>는 통일신라 이후에 편찬되어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 신라를 중심으로 완성되어 가야에 관해서는 매우 적은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고자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가야지역을 마구잡이로 발굴

조사한 후  수많은 자료와 유물을 일본으로 갖고 간 후, 궁내청 소속의 왕립박물관과 도서관에 넣은 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일 고대사에 관한 중요한 것을 숨기려는 의도가 확실하다. 궁내청 도서관에는 아직도 한민족의 엄청난 자료를 강탈한 후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화랑세기> 필사본 사건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메이지明治왕 시대부터 일본 최고의 명절로 중시하던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을 히로히토廣人왕은

1970년 말부터 단순한 ‘건국일’로 바꾸고 일본을 건국한 실존인물이라고 선전하던 초대 진무神武왕이 신화적 인물로 바꾼다.

이미 에도시대 정치가이며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는 '일본 신화 속의 신神은 실재했던 한 명의 인간'이라고 하여 진무왕이 도래계 정복자임을 최초로 암시하는 발언을 한다.

토쿄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교수도 한반도에서 도래한 기마민족이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를 이룩했다는

‘기마민족 정복설’을 주장하여 일본사학계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진무왕의 실존설과 부정설을 놓고 일본 사학계의 논쟁은 아직도 뜨겁다.

 

일본 개국신화의 고향 타카지호노미네高千穗の峰의 쿠지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구지봉) 천손강림지天孫降臨地와

일본 건국신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の尊를 모시는 카라쿠니타케韓國岳(駕羅山)의 지명을 보더라도

일본 신들은 고향 한반도 가야를 그리워한 것이 분명하다.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の尊가 일본 최초의 궁을 창건한

남큐슈 카사사笠沙에눈 일본 건국신 3대三代 능묘가 있는데 궁내청으로부터 지정받은 금족지禁足地이다.

니니기노미토코의 아들 호호데미火照命 능묘 다카야 산상릉高屋山上陵에서 가야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흔적도 없이 다시 묻어 버리고 출토품에 관해 함구含垢하고 있다.

 

손자 우가야후키아에즈鵜草葺不合命(彦波瀲武盧茲草葺不合尊)의 아이라 산상릉吾平山上陵 역시 가야식이다.  

우가야후키아에즈의 이름에서 가야의 진실이 있다.  

야마토정권 이전의 신 우가야후키아에즈와 신대神代역사를 기록한 <상기上記>와 <후지미야 하문서富士宮下文書> 등에  

우가야上伽倻왕조의 기록이 있다. 우가야는 윗-가야를 말한다. 즉 가야가 상국上國, 모국母國이라는 의미이다.  

손자 간야마토 이와레히코神日本磐余彦는 큐슈로 남하하여 이토국伊都國를 정벌하고 다시 열도 내해를 통해 야마토 지역를 정복하고 가시하라궁橿原神宮을 짓고 가와치內海왕조의 왕에 등극한다. 백제사에서는 그를 구수왕仇首王이라고 칭하는데 그가 바로 초대 일왕 

진무神武왕이다. 구수仇首도 큐슈九州와 같은 발음이다.  

 

연오랑세오녀 전설과 관련된 최초의 일본 원주민 왕국 탄생지 이즈모出雲과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일본 큐슈를 중심으로

가야의 7왕자 도해설渡海設와 백제의 분국론을 주장하는 학설이 있다. 일본사학계에서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나任那는 '님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즉 가야 도래인들이 고향 가야를 지칭한 상징적  

지명이다. 

 

<일본서기>의 작자 오오노야스 마로太安萬呂는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망명한 도래인이다.

비록 최고의 학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낯선 왜국에 도착하여 왕실에서 모아온 전국의 모든 문서들을

혼자 읽고 단기간에 정리하여 방대한 역사서을 저술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작업중에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또한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증오가 있었으니 적국 신라에 대하여 고운 시각을 가질 수 없다.

신공왕후의 임나일본부도 오오노야스 마로가 만든 고의적 오류이거나 조작일 것이다.

왜왕의 명으로 전국에서 모은 수많은 기록들을 읽던 오오노야스 마로도 이전에 이미 한반도 가야로부터 일본 열도에  

도착하여 가야 김수로의 후손들이 야마토를 세운 왕족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스폰서 백제계 혈통 텐지왕의 압력으로 백제중심으로 새로운 일본의 역사서을 저술해야 했기에

가야의 이주 정복사를 일본 왕가의 신대기로 조작할 수밖에 없다. 백제 도래인 오오노야스 마로와 백제 혈통 텐지天智왕이  

함께 만든 역사서이므로 <일본서기>는 당연히 백제 중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본 역사서이다.

즉 일본이라는 고대 국가 탄생의 모태에는 가야와 백제가 있다는 것을 <일본서기>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가 신라계 귀족 김부식金富軾의 저술한 이유로 지나치게 신라중심의 역사책이라고 지적하는 국내 사학계의  

비판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서기>도 이와 같은 배경으로 저술된

것이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200여년 앞서 저술된 것이라고 현시現時에 가까운 역사서이기에 믿을 만 하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역사가들이 중요하게 주장하는 공정성의 기반이 되는 중국과 한반도의 기록을  

차용 비교하는 부분이 없다.  <삼국사기>는 김부식과 수많은 당대 학자들이 오랜 기간 한반도, 중국, 일본의 역사적 고기록

古記錄들을 총망라하여 저술한 것이다. 게다가 후대에 다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이 차용한 중국의 역사기록들을  

통해 정사서正史書로서 재입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참조되고 거론된 수많은

한반도의 고대 기록과 역사서들은 소리 소문 없이 강탈되어 현재까지 일본 궁내청 관리하에 폐쇄된 왕립도서관 창고안에

들어가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오노야스 마로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는 많은 부분이 백제에 관한 역사와 교류에 관한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저술한 <일본서기>에 백제의 역사에 이토록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모태가 한반도이며 특히 백제 혈통의 왕실과 학자가 준비했으므로 백제중심의 역사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백제계 도래인과 관련되지 않은 이전의 이즈모와 큐슈에서 시작된 가야 도래계의 고대왕국에 관한 기록과 전설들이

새로운 일본왕실의 기록으로 윤색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일본에는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도 없는 순수한 일본혈통의

왕실계보가 필요한 것이다.

 

광개토호태왕비문에 기록된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하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일본의 해석 오류이다. 당시 백제는 진사왕과 아신왕과의 숙질간 권력투쟁이 생긴다.

이전에 일본열도로 피신해 있던 아신왕과 그의 추종세력이 고국 백제의 왕권투쟁에 개입한다.

그것이 신공왕후의 신라정벌설과 임나일본부설의 핑계라면 그것도 오류이다.

결국 한반도 침략세력도 왜인이 아니라 도래계 한반도인이 되는 것이다.

'임나'는 국명도 지명도 아니다. 4세기에서 7세기까지 고대 일본에는 큐슈가 아닌 나라와 아스카지방에서

이미 백제와 고구려 도래계 왕족이 서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하며 권력투쟁을 하던 시기이므로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쟁취하기 위해 전투력을 한반도 남부에 파병할 수 없다.

 

당시 고구려 장수왕의 대규모 철갑기병의 침공으로 한반도는 전란에 휩싸인다. 장수왕의 남진정벌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최초의 민족 대이동을 야기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벌南進征伐과 민족 대이동

 

고구려 20대 장수왕(394~491)의 대규모 철갑기병을 통한 남진정벌로 인해 5세기 중반부터 한반도는 전란에 휩싸인다.

결국 장수왕의 남진정벌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에서 민족 대이동을 야기한다.

 

초대 온조왕이 세운 비류 백제沸流百濟는 500년 漢城한성의 사직社稷을 버리고 개로왕의 죽음을 지켜본 신하 목협만치 

木刕滿致는 일부 왕족과 귀족들을 데리고 열도에 망명한 모쿠라 마치木禮滿致로 기록되고 후에 나라시대에는 소가노 마치 

蘇我満智로 개명하며 왜국 정치의 중심에서 백제계 권력자로 등장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망가서 제 2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나 그후 오랫동안 왕권투쟁속에 백제는 성장이 지연되고 또 다시 부여로 천도遷都하게 된다.

 

사로국斯盧國(신라)을 굴복시킨 고구려는 417년 왕위계승에 개입해 19대 눌지왕訥祗麻立干을 옹립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신라와 화친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자 468년 다시 신라를 공격하여 실직주성 

悉直州城을, 481년 미질부彌秩夫(포항시 흥해)까지 진출해 7개 성을 빼앗는다. 그후 사로국은 서라벌에 고구려 도독부를  

설치케 하며 겨우 살아 남아 24대 정복군주 진흥왕(534~576)의 등장 이전까지 고구려의 속국으로 눌려 산다.

 

스키타이 민족의 후예이며 아마존 여전사의 피를 이어받은 가야는 어린 여자들까지 전투에 나서는 전쟁태세에 돌입하지만

제철기술이 우수한 가야지역은 고구려의 신경을 건드리는 주요 목표이다. 이미 강력한 수군水軍도 보유한 고구려는

풍부한 야철지와 높은 제련기술을 가진 가야지역을 수륙으로 공격한다. 가야인들은 여전사들까지 나서서 방어하지만

영산강 친백제親百濟 세력과 석탈해 이후 외교를 맺고 있던 사로국조차 고구려에 무릎을 꿇으니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결국 김수로왕의 7왕자 후손들은 평소 영산강 친백제 세력과 5가야와 무역교류가 있던 일본 큐슈의 일본 원시부족국가로  

이동한다. 

 

초대 온조왕이 세운 비류 백제沸流百濟는 500년 漢城한성의 사직社稷을 버리고 개로왕의 죽음을 지켜본 백제 대신

목협만치木刕滿致는 일부 왕족과 귀족들을 데리고 열도에 망명한 모쿠라 마치木禮滿致로 기록되고

나라시대에는 소가 마치蘇我満智로 개명하며 왜국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망가서  

제 2의 백제를 건국한다.  

 

아직 부족국가 사로국斯盧國(신라)은 고구려와 화친하여 서라벌에 도독부를 설치케 하며 겨우 살아남아 진흥왕때까지

고구려의 속국처럼 눌려 산다.

 

스키타이 민족의 후예이며 아마존 여전사의 피를 이어받은 가야는 어린 여자들까지 전투에 나서는 전쟁태세에 돌입하지만

제철기술이 우수한 가야지역은 고구려의 신경을 건드리는 주요 목표이다. 이미 강력한 수군水軍도 보유한 고구려는

풍부한 야철지와 높은 제련기술을 가진 가야지역을 수륙으로 공격한다. 가야인들은 여전사들까지 나서서 방어하지만

영산강 친백제親百濟 세력과 석탈해 이후 외교를 맺고 있던 사로국조차 고구려에 무릎을 꿇으니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결국 수로왕의 7왕자 후손들은 영산강 친백제 세력과 5가야와 함께 무역교류가 있던 일본 큐슈의 원시부족국가로 이동한다.

 

대성동 고분 등에서 층층이 다른 양식의 가야 무덤형태가 발견된 것은 장수왕의 남진정벌 이전까지 고구려, 백제 등  

고대국가들이 한반도 남부를 공격하지 않고 평화지역으로 방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제철무역으로

풍부한 물자와 교역속에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야의 고분군은 장수왕의 남진정벌 시기에 갑자기 축조가 중단되는  

모습이 발견된다. 갑자기 한반도에서 사라진 것이다.  

 

가야는 제철을 중심의 오랜 외교무역으로 익힌 항해기술은 대규모 선단船團위에 왕과 귀족과 백성의 혈통, 고도의 문화,

제철기술, 말과 소 등 가야의 모든 것을 싣고 큐슈에 도착한다. 우월한 무기와 문화로 무장한 가야 이주세력은 큐슈를  

정복하고  이후 내해內海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초기 고대국가의 기초를 이룩한다.

그것이 진무왕의 동정神武東征을 통해 창조된 카와치왕조內海王朝이다.

 

 

1970년부터 일본사학계에서 그 이전까지 최고 숭배대상 진무왕을 격하시킨 이유는 이것이다. 앞으로 발굴될 수많은  

래계 유물과 유적을 통해 나타나게 되면 가야계 혈통 진무왕을 일본 최초의 왕으로 계속 숭배하는 것이므로 일왕가의 본토  

탄생설과 순수 혈통설에 큰 위협이 된다. 이미 한일간에 고대 큐슈는 백제의 속국일 수 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로,

큐슈의 땅 밑에는 예측할 수 없는 고대의 비밀이 묻혀 있다. 일본 건국의 기초가 되는 큐슈 세력은 가야 도래계가 

열도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세운 최초의 일본정권이기 때문이다. 즉 야마토 조정이 나라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한 뒤 큐슈 등  

일본열도 전역에 문물을  파급시켰다고 해야만 일본 본토 민족이 가야의 이주민 세력에 앞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우월성이 인정된다.  

이것이 메이지시대 이래로 가장 존경받는 진무神武왕과 위대한 그의 진무동정神武東征을 전설로 바꾼 이유이다.

진무왕의 동정東征과 큐슈의 초기 정권을 인정하면 가야왕국의 큐슈 이주 및 정복과 김수로왕의 후손이

고대 일왕가의 뿌리라는 것이 증명된다.

 

2001년 125대 아키히토明仁일왕은 '50대 칸무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녕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국과 일본의 남다른 인연을 느낀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독도영주권과 종군위안부에 관한 여러가지 역사 문제로 경직된 양국의 협력을 위해

일왕이 친히 고대 한일간의 혈연관계를 언급한 것이다. 신대神代에 속하는 가야의 혈통과 연결 짓기 보다는,

정사의 기록으로 확실한 백제 모계母系혈통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나름대로 구색이 맞다. 가야 혈통을 인정하게 되면

일본의 뿌리가 되는 이즈모국, 큐슈국, 야마토정권 모두가 한반도의 속국이나 도래인이 세운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는 일왕의 순수혈통이 없다는 것이다. 결코 일왕가와 친왕파 사학자들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산강 장고형長鼓型 고분

 

1991년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에서 특이한 형태의 무덤, 장고형長鼓型 신덕고분이 최초로 발견된다.

길이 50미터 높이 10미터의 대형고분이며 석실내부의 벽에는 붉은 칠이 되어 있다.

4각형과 원형이 합쳐진 고분의 모양은 열쇠구멍이 닮기도 하고 장고를 닮기도 하여 장고형 고분이라고 부른다.

이 고분을 작은 산으로 알고 있었던 주변 마을의 이름은 예전부터 장고산長鼓山 마을이다.

신덕고분에서만 110cm의 일본식 대도大刀가 발견되어 피장자가 왜의 장군이나 백제관직을 받은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목걸이와 귀걸이 같은 장신구들은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옥과 유리 장신구들도 발굴된다.

백제왕실에서 제작한 금동관 조각도 발굴된다.

 

紀臣奈率彌麻沙 키토미 나솔 미마사

物部施德麻哿牟 모노노베 시덕 마가모

詐勢奈率歌麻 코세 나솔 가마

上部德率科野次酒 상부 덕솔 시나노 차주

<일본서기>

 

일본의 기록중에서도 당시 왜인들이 백제의 중급 관직으로 소개되고 있다. 4,5세기부터 많은 한반도인들은 오사카에 진출하여

야마토 정권에 영향을 준다. 오사카와 나라 인근 와카야마和歌山는 키씨 세력의 중심지이다. 아직도 와카야마 곳곳에는

키씨의 흔적이 지명과 상호명으로 남아 있다. 특히 430 여개의 이와세岩橋 센츠카千塚는 고대 지배세력의 고분군이다.

전형적인 횡혈식 석실고분이며 백제 특유의 무덤 양식이다. 발굴된 연꽃 무늬 기와와 백제 영산강 유역의 토기들은 피장자가

백제 도래계임을 알려준다. 일본에서는 이와세에 묻힌 피장자들은 백제와 야마토의 외교 및 무역을 대신하던  

급사給仕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와카야마和歌山의 고야산高野山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송金松이 자라고 있다.  

백송은 왕족들의 관으로 쓰인다.  과거 무녕왕릉의 목관도 바로 와카야마의 금송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진다.

 

나가노현의 옛이름은 시나노科野이다. 시나노씨의 지배영역이다. 예로부터 군마를 생산하던 지방이다.

일부 무덤에서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20여개의 말뼈가 발견되고, 한 무덤에서는 인골이 수습되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50세 전후의 한반도 도래인 남자로 밝혀진다. 백제 선진기술을 들여와 이 지역에서 호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29대 킨메이欽明왕 시절 시나노科野에서 기른 많은 말들과 군사원조를 백제에 보낸 기록이 있다.

 

7년 말 70필, 배 10척

11년 화살 1,500개

14년 말 2필, 배 2척, 활 50개, 화살 2,500개

15년 말 100필, 배 40척

<일본서기>

 

백제 도래인은 왜에서 백제의 선진 문물과 기술을 야마토에 전하여 호족으로 자리 잡은 후, 그 대가로 군사원조를 백제에 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의 수도는 부여이다. 그러나 장고형 무덤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에 존재한다.  

나주 신촌 고분군에는 백제왕릉보다 규모가 큰 것이 있다. 신촌리 9호고분에서는 옹관,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출토된다. 백제와는 다른 세력이 당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은 내륙수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육지안 쪽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국제적 교류가 가능한 중국 신나라 화폐 화천貨泉이 발견된다. 화천은 서기 8년에서  

23년까지만 사용된 것으로서, 이미 1세기부터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의 교류를 증명한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후쿠오카福岡는 고대부터 교류가 많다. 후쿠오카의 마루쿠야마丸隅山 고분은 긴 입구와 위로 좁아지는  

석축방식으로 사용한 백제의 횡혈식 석실 양식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북큐슈北九州 방식이라고 부른다.  

후쿠오카 하치반츠카八幡塚 고분에서 발견된 조족문鳥足汶 토기는 표면에 새긴 3가닥의 새발 돌출 무늬가 특징이다.  

나주 덕산리 4호 고분에서도 동일한 것이 출토된다.  마한세력의 특징 양식이다.

 

耽羅不修貢賦親征至無珍州

498년 동성왕 20년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른다.

<삼국사기>

 

475년 장수왕의 남진공략으로 한성의 비류 백제가 망하고 웅진(공주) 백제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장수왕은 청원까지

계속 침공하며, 내부적으로는 478년 22대 문주왕文周王은 제위 4년만에 피살되고, 480년 23대 삼근왕三斤王은 제위 2년만에

의문스러운 사망을 하는 등 웅진 백제의 정세는 위태롭다. 백제는 왜에 원군을 요청한다.

 

築紫國軍士五百人衛送於國

21대 유라쿠雄略왕 23년 480년 곤지왕의 차남은 츠쿠시국筑紫國의 군사 500명을 함께 보내

백제로 호위하러 보내는데 그가 동성왕이다.

<일본서기>

 

나주 복암리 다시면의 복암리 고분에서는 옹관과 백제식 고분의 양식이 층층이 조성된 것으로 발견되며 귀갑문龜甲汶  

금동신발이 출토된다. 어지러운 국내 정세속에서 백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주요왕족을 왜에 보내 차기 왕권을 준비한다.  

특히 가까운 북큐슈와 오사카에 있는 백제귀족들에게 위탁된다. 근처 해남군 북일면 장고산 마을에도 이와 같은 장고형  

고분이 발견된다.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1994년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는 발견된 봉분

주변에 장식된 장례의식용 원통형 토기에는 몸통에 구멍이 있다. 일본 효고현 고시키즈카 고분五色塚의 주변을 장식한  

일본 하니와埴輪 토기와 흡사하다.  

일본에서는 이곳에 6세기 왜인이 묻힌 일본식 고분이며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전방후원형 무덤이라고 추측되던 경남 고성 송학동 무덤을 2000년 발굴할 때 일본사학자들은 더욱 관심을 가진다.

석실 내부벽에 붉은 칠을 한 것과 일본 고대 토기와 흡사한 것들이 출토된 것이다. 송학동 고분도 전방후원분으로 판단되어

일본사학자들에게 관심의 집중이 된다. 내부 석실의 벽에 붉은 칠이 되어 있고, 4세기 왜의 토기와 흡사한 토기들이 발굴된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가야의 고분으로 판명된다. 원래 3개의 봉분封墳이 연결된 것인데, 도굴되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2개가 연달아 가라 앉아, 외부에서 보기에는 전방후원분처럼 보인 것이다. 고성은 과거 가야국에 포함된 지역이라서  

임나일본부설에 집착한 일본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관심을 두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영산강 유역에서 여러 곳의 고분을 발굴하면서 한반도 남부 등지에서 고대 왜국의 영향을 확신한다.

토지샤同志社대학 모리 코이치森孝一교수는 4세기 왜는 중국과 직접 무역거래를 하고 있는데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  

왜의 지배 영역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경북 왜관倭館과 같은 곳이 이미 오래 전에 영산강 일대에 존재한 것이라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이러한 고분 발견 때문에, 임나일본부가 가야와 경남지역이 아니라 전남지역이라고 기술한 일부

학설과 교과서가 일본에 있다. 그러나 모리 고이치 교수는 백제영역에 임나가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 반대하고 있다. 

 

自稱都督倭百濟新羅任那辰韓募韓

왜, 백제, 시라, 임나, 진한, 모한의 도독이라고 스스로 칭한다.

<송서宋書> 왜국조

   

아직도 그 위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한募韓’을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가야의 영향력 밖의 지역이며

이곳이야말로 왜가 점령한  임나이며 영산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함평 월야리 예덕면 신덕 고분의 내부에는 촘촘히

쌓아올린 석실인데, 내부 벽에 붉은 칠을 한 것이 일본식이다. 이것은 일본에서 발견되는 고대 고분 전방후원형 무덤과  

닮아 있다.  

 

 

가야의 기마문명,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에 묻히다

 

야마토 정권이 열도를 정복하면서 일본 전국에 전방후원형 무덤이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고분이

일본 전방후원형 무덤의 영향이라면, 일본이 4세기경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되는 것이므로, 장고형 고분 발견 당시 한국보다 일본사학계가 더 관심을 가진다.

전방후원분은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와 성립과 지배 영역의 상징물이다. 야마토 정부가 정복한 지역의 호족들이  

전방후원분에 묻히게 된다. 초대형 고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을 이용해야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된  

것을 증명한다. 기록이 적은 고대사 연구에서 유물로 증명하는 고고학은 중요한 학문이다. 특히 고분의 축조기술과 출토품은  

매우 중요하다. 

 

전방후원분과 같은 8자 모양을 가진 중국 타호정打虎亭 고분은 3세기에 조성된 지역호족의 무덤이다.

북한 압록강변 자강도 송암리 88호 돌무지 고분積石塚은 돌로 쌓은 고구려 무덤인데 둥근 무덤앞에 사각형의 제단을 쌓아  

놓은 모양이 전방후원분과 같다는 견해가 있다.

광주 월계동의 장고형 무덤은 주위를 둘러 싼 도랑, 주구周溝가 있는데, 이것은 닌토쿠왕릉을 둘러싼 거대한 호수와 같은

주구의 기원이 된다. 1965년 최초로 발굴된 히라바루平原 유적에는 2m 폭의 도랑이 주위를 둘러싼 방형주구方形周溝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방후원분의 기원으로 본다. 3세기 후반 야요이 지방에서 시작된 방형주구묘는 키타큐슈北九州지역으로  

전파되어 무덤의 앞부분이 길어지면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의 3세기 유적에서 봉분 주위로 깊이 파놓은 주구와 주구 안에서 철기시대의 두형豆形토기가 많이  

발견된다.  

전남 나주 노안면 안산리에서 발견된 영산강 장고형 고분도 더 넓은 폭 40m와 더 긴 길이 100m의 주구가 나타난다.

전남 함평 월야면 예덕리 만가촌 유적은 4각형과 타원형과 사다리형 등 다양한 모양의 초기 주구형 고분이 모여 있다.

1996년 충남 보령 주교면 관창리 일본보다 100여년 먼저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주구묘가 발견되어 일본학계를 뒤집어 놓는다.

일본 이외 지역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周溝墓이기 때문에 일본 고유의 고분형태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된 주구묘가

일본 자생 독자설이라는 이론은 완전히 무너진다. 

일본 전방후원분중 가장 규모가 큰 대선릉大仙陵고분은 닌토쿠仁德왕릉인데 이집트 피라미드와 중국 진시왕릉과 더불어

세계 3대 고분으로 알려진 일본의 초대형 전방후원형 무덤은 일본만의 자랑이며 야마토 시대의 상징이다.

정식 능호가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차차자百舌鳥耳原中陵인 닌토쿠왕릉은 3중 해자垓字를 가진 전장 486m이며

궁내청에 의해 관리되는 일본 최대의 고분이다.

 

일본 오사카大阪 사카이堺의 모즈百舌鳥에 있다. 닌토쿠왕이 생전에 묘자리를 찾던 중 들판에서 죽은 사슴을 찾았는데,

그 사슴의 귀에서 떼까치百舌鳥가 튀어 나와 날아갔고 그곳을 묘자리로 잡았다고 전해진다.

1872년 태풍으로 왕릉의 토사가 무너져 마차를 닮은 특이한 모양의 토기관土器棺, 마탁馬鐸, 동경銅鏡, 금동제 갑주甲冑 등

기마유물과 각종 토기류 등이 일부 출토된다. 야요이 시대를 대표하는 하지키土師 토기와 스에키須惠器 토기도 출토되어

현재 근처 사카이堺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스에-'는 '쇠'라는 한국어에서 온 말이다. 하지키土師는 이름 그대로 '흙의  

스승'이다. 5세기경 가야로부터 건너온 가야인들은 왜인들에게 불의 기술을 전수한다. 스에키 토기를 만드는 기술은 1,000도의

불을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이 기술은 곧 제철기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스에키 토기는 쇳소리를 낼 정도로 얇고 강한  

검은 토기이다.  

 

도명사道明寺 인근에 하제노고土師の鄒라는 마을이 하저씨土師氏들의 도읍陶邑이다. 도명사 천만궁天滿宮은 가야 도래계  

토공들의 우두머리 노미스쿠네野見宿祢命가 무덤 주위에 토기와 토용土俑을 부장품으로 순장殉葬을 대신하자고 일왕에게  

제안하여 하제라는 성씨를 받고 도읍을 봉토로 받은 것을 기념하고자 세워진 가마터 유적이라고 <일본서기>에서 밝히고  

있다.  

노미스쿠네는 당시 지역 최고의 장사壯士 다이마노케하야를 씨름으로 물리친 일본 스모相僕의 시조始祖이다.

 

천만궁에는 하제씨들이 사용한 거대한 나무로 깍아 만든 이동기계 슈라修羅가 전시되어 있다. 슈라는 한국어 수레에서  

온 말이다.  이것으로 닌토쿠왕릉에 사용된 엄청난 양의 흙과 엄청난 무게의 바위를 옮긴 수레이다.

닌토쿠왕릉은 연인원 약 150만명이 동원된 일본 최대의 세계적인 고분양식이다.

닌토쿠왕의 아버지 15대 오진應神왕의 왕릉은 닌토쿠왕릉 다음으로 작은 전장 425m이지만 축조된 흙의 양은 더 많다.

오진왕릉이 일본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선정된 이유는 그 이전 고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기마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어묘산誉田御廟山고분 혹은 에가노모후시노오카노미차차자恵我藻伏岡陵라는 능호로 불리는 오진왕릉의 내부에는

오진왕은 신공왕후의 아들이며 신라정벌 직후 츠쿠시築紫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그곳이 후쿠오카 우미宇美라고 하여

우미신사에는 오진왕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오진왕이야말로 일본 최초의 기마민족이다.

 

수로왕 7왕자의 가야 후손, 야마토를 건국하다

 

오진왕릉에서 최초의 마구馬具들이 출토되었다. 오진왕 시대부터 일본 최초의 철기문명과 기마민족이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말과 소가 왜에 나타나면서 농경문화에 큰 변화가 생긴다. 한반도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진 가야는 다른 삼국의 시기와 질투에 공격당해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일본 열도로 이동한다.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중요시 인정받는 후쿠오카 타케하라고분竹原古墳의 채색벽화는 고구려의 벽화를 보는 듯 하다.

전방후원분과 같은 시기의 무덤인데, 이 고분의 채색벽화에는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와 벽화는

중국과 조선반도의 영향을 받았다中國と朝鮮半島の影響 受고 일본학자도 인정한다. 지배층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타케하라  

고분의 채색벽화에는 바다위에 떠 있는 배에서 두 마리의 말을 뭍으로 내리는 철갑투구와 갑옷의 남자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당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그려 넣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한반도의 말과 철기문명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온 것이다.

가야 멸망 이후 말과 제철기술과 앞선 문명을 가지고 일본에 왔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其地無牛馬

그 땅에는 소와 말이 없다

<삼국지三國誌> 왜인전倭人傳

 

키리시마의 천손강림 마츠리天孫降臨祝祭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모장에서의 의식에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보는 듯 한 행사가  

있다.  대지를 뒤흔드는 북소리와 함께 9명의 원로들이 하늘에 제문을 올린다. 가야의 구지봉龜旨峰에서 9명의 족장들이

춤추며 제사를 올려 하늘로부터 천손 김수로왕金首露王을 받는다는 내용과 같다.  

교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도 일본의 건국신화에서처럼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과 내려온 곳이  

구지봉이라는 것은, 가야신화와 공통이라고 인정한다.  

김수로왕의 후손이며 가야 왕족 오진왕은 금관가야국의 멸망과 동시에 민족 대이동을 통하여 고대 일본을 건국한 시조이다.  

일본역사계에서도 오진왕 이전의 신대 역사는 신화라고 말하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사카만에까지  

이르는 신대기 최초의 일본왕 진무神武왕의 동정과 같다. 오사카만의 평원지대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데 그것이  

가와치왕조河內王朝이다.  

이름 그대로 일본 열도의 내해內海를 통해 이루어진 나라임을 암시한다.

 

16대 닌토쿠仁德왕릉 외 107기의 전방후원형의 왕릉들이 이곳에만 있다. 가야의 혈통이 새롭게 창조한 왜국의 가와치왕조는

한반도에서의 가야 멸망후 새로운 이름으로 150년이상 존속했다. 그후 한반도에서 도래한 더욱 앞선 문명과 정치세력을  

가지고 온 백제계의 이동과 유입으로 가와치왕조도 멸망하고, 백제계의 새로운 왕조는 타케노우치가도竹の內街道(오사카 

大阪-아스카飛鳥간의 일본 최초의 국도)를 통해 일본 열도의 동쪽으로 이동한 아스카飛鳥 왕조시대가 탄생한다.

 

가야의 역사는 한국 고대사 중 결사시대缺史時代에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가야의 역사가 복원되지 않고는 고대 한일관계의 미스테리를 풀 수 없다.

 

*건국약사略史: 인도-한반도-왜를 잇는 가야

 

하늘이 열린 이래 땅위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나 임금과 신하의 호칭조차 없던 시기의 가야에는 원시적 형태의 부족민들을  

9간이라는 추장들이 다스리고 인구는 1백호 7만5천명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이다.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봉龜旨峰에서 모습이  

없고 기이한 소리만 들려 2,3백명이 모여 들어 하늘을 향해 <구지가>를 부르며 춤추고 하늘에 절한다.

 

歌之云 以之踏舞卽是迎大王 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灼而喫也

노래부르고 말하고 뛰고 춤추고 즉시 대왕을 맞이하라

거북아 거북아 그 머리를 보여라 만약 보여주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삼국유사> 가락국기

 

42년 3월 김수로왕(?~199)은 가야 구지봉에 내려 온다. 하늘에서 붉은 줄이 묶인 붉은 보자기로 싼 금궤짝이 내려와 그것을  

열어보니 해같이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고 다음날 금궤짝을 열자 6개의 알들이 남자로 변하여 그 중 수로는 보름이 지나자  

9척 장신이 된다. '황금알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다'고 하여 김수로金首露라 이름 짓는다. 나머지 5개의 황금알에서 태어난  

남자도 각기 5가야의 왕이 된다. 김수로는 임금과 신하의 호칭조차 없던 한반도 남부지역에 44년 가야를 세운다.  

9부족의 추장들을 9간이라고  이름을 짓고 신라 직제처럼 각간, 아간, 급간 등의 계급을 두고 주周와 한漢나라의 관제를 따라

그 아래 관리직을 정한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지 4년후 48년 7월 서남쪽 바다에서 붉은 돛과 깃발을 단 배가 북쪽 항구에 도착하고 허황옥許黃玉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비단 속바지를 벗어 산신께 예물로 드린다.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허황옥을 맞이하여 왕후로 삼는다. 결혼한 수로왕과 허황후許皇后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집안을 바르게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하며 교화敎化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절로 다스려 진다’고  

기록한다.  

 

사로국斯盧國(신라) 4대 석탈해왕昔脫解王(?~80)이 가야로 침공해서 수로왕과 변신變身을 겨룬다. 석탈해왕이 매가 되니  

수로왕이 독수리가 되고 석탈해왕이 참새가 되니 수로왕은 새매로 변하여 수로왕이 겨룸에서 이긴다. 석탈해왕은 '

내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수로왕이 살생를 싫어하는 성인聖人과 같은 어진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수로왕에게  

절하고 가야를 떠난다. 이후 사로국 5대 파사왕婆娑王(?~112) 때에는 한반도 남부의 소국 실직곡국悉直谷國과 음즙벌국 

汁伐國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는 등  금관가야를 강력한 세력으로 키운다.

 

허황후와 수로왕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陽에 음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

태자 거등공居登公 외에 8명의 왕자들을 낳았으며 수로왕이 허황후를 너무 사랑하여 2명의 왕자에게 왕후의 성씨를 주어

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수로왕 사후, 고려高麗 삼중대광 

三重大匡을 지낸 35세손 가락군駕洛君 허염許琰을 시조로 한 성씨라고도 한다.

189년 3월 1일 허황후는 나이 157세로 죽는다.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 구지봉 옆 구산동龜山洞에 장사 지내고

수로왕은 오랫동안 슬퍼한다. 10년후 199년 3월 23일 수로왕도 158세로 김해 서상동 납릉納陵에 묻힌다.

허황후는 수로왕보다 9년 연상이다.

 

대륙의 부여국으로부터 이주한 비류 백제의 한성왕조보다 먼저 한반도에 살고 있던 부족국가는 가야 연맹체이다.

수로왕릉의 거대한 고인돌 2기, 김해 해반천의 국내 최대 고인돌 무덤군을 보아 기원전 3,4세기 청동기시대부터 가야는

한반도에서 터를 잡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7만5천의 인구가 모여 살던 한반도 최대의 원시  

부족국가이다.  

수로왕릉 납릉納陵의 정문 正門에는 두 마리의 고기 쌍어문雙魚紋이 조각되어 있다.  

태국의 아요티아, 인도의 아요디아, 그 외에 아율타, 아유디아 등의 유사지명에서 쌍어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사어死語 드라비다어로 ‘카이아kaya’는 ‘물고기’이다.  

이것은 허황옥의 가문은 동남아시아와 극동아시아 곳곳에 해상무역기지를 만든 인도 출신의 해상무역집단임을 알려준다.

가야 건국에서 수로왕 곁에서 해상무역의 거대자본으로 고대국가를 완성한 인도 아유디아국의 왕녀 허황옥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기록은 정사 <삼국사기>보다 설화와 야사를 담은 <삼국유사>에 좀 더 많다. 

것도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조'가 가야에 관한 거의 절대적 기록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허황옥이 본래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이며 부왕父王의 꿈에 상제上帝가 나타나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라'고 명한다. 허황옥이 가야로 항해하던 중, 해신海神의 노여움으로 항해하지 못하고  

돌아와 아버지께 아뢰자 아버지가 파사석탑을 싣고 다시 가게 한다. 과연 파도가 조용하여 가야 땅에 이른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것은 불교가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삼국유사>에서 승려 일연에 의해 윤색한 듯  

하다. 허황옥이 인도 야유타국阿踰陀國에서 왔다는 것은 불교의 전파를 의미하는 것인데 당시 가야에서 불교의 흔적은 매우  

약하다. 아요디아 지역의 사원의 정문에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 두 마리 그림이 있다. 2,800 여년전 바빌로니아

문명에서 물고기는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이며 신전의 문위에 쌍어문을 새긴다. 쌍어문雙魚紋의 영향은 중앙 아시아 유목민족  

스키타이인에게 퍼져 후에 인도까지 전해진 것 같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허황옥이 직접 야유타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무역업을 크게 하는 허황옥의 부왕父王이 중국 동쪽에 터를 잡고 있던 대상大商으로 주장한다.

 

허황옥의 시호 보주태후인데, 보주는 현재 사천성 안학현이며 고대 중계무역으로 성행하던 중국 동남부의 항구도시이다.

사천성의 고대기록에는 도래집단 허씨들의 해상 세력과 반란과 추방의 역사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허황옥이  

인도 아유디아국의 왕족이라는 추측은 맞는 것 같다.

 

현재 아유타라는 지명은 인도 갠지즈강 중류 아요디아 ayodhia지역과 태국 방콕 인근 아유티야 ayuthia지역이다. 그런데  

태국의 아유티아는 약 13세기 생겨난 도시이므로 허황옥 생존 1, 2세기에는 존재 하지 않던 곳이다.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은 인도 아요디아이다. 인도 아요디아는 BC 6세기 융성한 도시국가 코살라Kosala국의  

수도이다. 인도 전통종교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왕의 탄생지이며, 득도得道하기 전 시타르타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김해 허씨 종친회는 야유디아 지역을 방문하여 허황후의 후손 왕족에게 허황후의  

한국화 영전을 전달하고 허황후의 기념비를 건립한 바 있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波形銅器는 인도 동남부 지역과 일본 오키나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회오리 모양의 나팔  

조개인데 일본의 파형동기와 이러한 조개들로 추측하면 서기 전부터 인도-중국 사천성-한반도 가야-일본 큐슈 및 오키나와를  

연결하는 무역항해로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허황옥이 가져 왔다는 파사석탑은 현재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지만 일연은  

직접 보고 '각진 4면의 5층석탑이며 조각한 모양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얕은 붉은 색 반점이 있고 바탕이 아주 부드럽지만

이곳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라고 기록한다. 아주 이국적인 광물인 것이다. 그러나 파사석탑과 같은 종류의 돌은 인도  

외에 사천성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허황옥이 인도에서 직접 갖고 온 것인지 보주지역에서 가져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있다. 

 

장수왕의 남진정벌은 한성 비류 백제의 고위층을 열도로 보내면서 차후 백제의 차기 계승자가 망명하는 수준이지만

가야는 완전히 열도로 옮겨 새로운 제국 야마토를 완성한다. 초기 가야 연맹체의 하나였던 근기국勤耆國의 제사장 부부

연오랑 세오녀가 넘어가 세운 청동기문명의 이즈모국을 이미 세우고 지속적으로 한반도의 모국 가야와 연락한다. 

이즈모국과의 교류로 일본 열도의 상황을 가야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산강에서 부산 지역에 걸친 한반도 남부의  

부족연맹체 가야는 고구려의 남진정벌을 피해 마침내 열도의 오키나와와 큐슈 등으로 민족 대이동을 감행하여 야마토를  

건국하고 명실상부한 열도 최초의 정복자 오진應神왕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당시 야마토에는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도래인과 정치적 망명으로 일부 이주한 백제 도래인들이 공존하지만

가야는 앞선 제철기술과 기마문명과 여전사들까지 가세한 엄청난 전투력을 갖고 단기간에 큐슈와 서일본지역을 점령하고

열도 내해의 군소부족국을 정복하여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정권을 세운다. 

한반도 남부 고천원이 고향이라는 일본 건국신들의 신화, 근기국 출신의 제사장 부부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 영산강 장고형  

고분과 일본 최초의 철기문명 무덤 전방후원분의 비밀 뒤에는 금관가야가 있다. 한반도에서 갑자기 사라진 4,5세기 열도에 


기이하게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야마토정권이 탄생한다. 수로왕의 7왕자 직계후손이 오진왕으로 재탄생한다. 

 

문명은 대륙에서 대양으로 이동한다. 대륙 저편 스키타이 평원과 한반도 남부 고천원을 거쳐

마침내 조용한 미개국 열도에서 가야는 한민족의 영원한 태양의 제국 야마토정권을 세우고

일본왕가의 첫 순수혈통을 수혈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속일본기, 양직공도, 최인호의 제4의 제국 가야,  송서, 삼국지, 구당서, 수서, 아미지도래기, 광개토호태왕비문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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