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Thursday, November 17, 2011

매년 미녀를 바친 신라

중국대륙의 지배자들은 한국 여인들을 공녀(貢女)라는 명분으로 데려갔다. 몽골국(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한국 여인들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표시했다. 청나라에 갔다 돌아온 공녀들이 서울 홍제천에서 몸을 씻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불쾌한 기억'을 지우고자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공녀 문제와 관련하여 당나라 황제들은 비교적 색다른 태도를 보였다. 동맹국인 신라에서 '공물' 명분으로 미인들을 파견하는데도, 계속 사양하며 이들을 곧바로 귀국시키곤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따르면, 제26대 진평왕 53년 7월(631.8.3~9.1) 신라는 당나라 태종(당태종)에게 2명의 미인을 보냈다. 그러자 당태종은 측근인 위징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들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당태종은 "저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이를테면 모진 추위를 못 견뎌 그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더군다나 두 여인이 친척들을 멀리 이별했으니!"라며 동정심을 표시했다. 임읍(林邑)은 지금의 베트남 중남부에 있던 나라로서 참파라고도 불렸다. 베트남에서 바친 앵무새도 고향이 그리워 울부짖는데 신라에서 온 여인들의 심정은 어떻겠느냐며 돌려보낸 것이다.



신라는 계속해서 여인들을 파견했다. 그러자 당나라 황제는 짜증 섞인 반응을 나타냈다. 당나라 고종(당고종)은 "이후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라는 공문을 신라 제30대 문무왕(김춘추의 장남)에게 보냈다.



하지만 신라는 중단하지 않았다. 제33대 성덕왕 22년 3월(723.4.10~5.8)에도 2명의 미인을 당나라 현종(당현종)에게 보냈다. 당나라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나라는 푸짐한 선물을 안겨서 이번에도 여인들을 귀국시켰다.



신라의 대외관계에서 당나라가 차지한 비중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한동안 관계가 냉각된 적은 있지만, 발해가 강성해진 뒤로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양국은 동맹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당나라와의 공조가 절실했던 신라로서는 '미녀 조공'을 통해서라도 관계를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