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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7, 2014

경상도의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것이다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지은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 특수용도로 건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적 제2호.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骨角製品)으로서도 골촉(骨)·골침(骨針)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尖頭類]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硬質)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打形)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新羅土器)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1920년의 발굴 때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의 돈인 화천(貨泉) 1 개가 나와 이 패총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南方式支石墓]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있다.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는 2001.2.5일 회연리 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 문화재지정일 : 2003.2.5 (사적2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이 봉황동유적으로 통합 지정)
⊙ 위  치: 김해시 봉황동 158번지 
⊙ 부지면적 : 99,222㎡ (30,014평)
⊙ 연 면 적 : 563㎡ (170평)
⊙ 주요시설 : 관리동, 고상가옥, 지상가옥, 수혈건축, 망루, 여의각, 패총전시관 

 
https://www.gsiseol.or.kr/siseol.htm?active=GB00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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