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블러-로스라는 정신과 의사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5단계로 설정하였다.
살면서 죽음만큼 괴로운 일이 있을까. 그런데 죽음이 아니라도 부정적 사건은 대충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가난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1단계
자신은 가난하지 않다고 믿는다.
2단계
돈이 없어 어떤 일을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러면서 내가 가난함을 깨닫는다.
3단계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는지 이리저리 궁리해 본다. 그러면서 가난이 어떤 이유로 발생했건 간에 내 문제임을 깨닫는다.
4단계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 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부족을 깨닫는다.
5단계
가난을 받아 들인다.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부족이 문제가 아니었음도 깨닫는다.
너무 도식적으로 예를 들었지만 어떤 부정적인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결과는? 참으로 다르다.
단계별로 긍정적 대응과 부정적 대응방식으로 그림을 다시 그려보자. Yes or No
긍정적 대응
1단계
자신의 가난함을 받아들인다. 가난함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주고 있는지 살펴 본다.
2단계
가난함이 왜 나에게 찾아 왔는지가 아니라 내가 왜 가난하게 되었는가를 살펴 본다. 스스로 나태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금전적으로 관리를 허술하게 했던 것은 아닌지 찬찬히 살펴 본다. 꼭 문제점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단계
가난을 벗어날 길이 있는지 살펴 본다. 금전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금전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분리해 본다. 쉬운 예로 문화생활을 위해 영화를 보려면 금전이 필요하지만 공원이나 유적 등 꼭 돈이 없어도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호주머니에 차비를 넣고도 걸어가는 것과 차비가 없어 걸어가는 마음의 차이랄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인지도 생각해 본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면서 또 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검토해 본다.
4단계
일시에 가난해 질 수는 있지만 가난으로부터 일시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대부분 그 상상에서 돈을 깔고 누워 행복해하는 상상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아마도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거나, 어딘가 근사한 곳에서 여행을 즐기고 있거나, 하여튼 즐거우면 된다. 그리고 그런 때가 오지만 단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5단계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투자했던 과거의 시간 중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투자한 시간을 꼼꼼히 골라내 보자. 돈을 벌기 위해 참았던 즐겁지 않았던 시간들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또 금전적으로는 도움이 안됬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보자.
부정적 대응
1단계
자신의 가난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여전히 나는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여야 하고, 돈이 없다고 무시당할 수도 없다. 빚을 내서라도 예전의 '이미지'는 관리해야 한다. -> 가난은 깊어 진다.
2단계
그때 누구가의 말을 듣고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화가 난다. 해고되지만 않았더라도, 친구에게 보증을 서주지만 않았더라도, 누구 말대로 그 사업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하는 후회와 남들은 다 잘먹고 잘사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왔을까 화가 난다. 사회가 문제인 것도 같다. 나는 부지런히 살았고 성실했다. 그런데도 가난한 것은 세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도 화가 나고, 술이나 회피 등 잊을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된다.
3단계
복권 밖에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누군가 자본금 없이도 돈 벌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하면 솔깃해진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다보니 생활비는 생활비대로 활동비는 활동비대로 지출되고 수입은 더 줄어들어 간다. 그래도 자꾸만 '큰거 한방'이 떠오른다.
4단계
모든게 힘들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했던 일인데도 이제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작은 일도 쉽게 못넘어가고 매사에 짜증이 난다.
5단계
나는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난하고 구제불능이다.
너무 희화화한 것 아니냐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각 단계에서 부정적 결론을 내리고 삶을 포기해가는 사람들을 간간히 보게 된다. 또 어떤 단계를 아주 힘겹게 벗어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빈곤의 문제는 사실 너무 복합적이고, 변수들이 많아서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 빈곤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삶의 모습은 참으로 많이 다르게 보인다. 물론 금전적 궁핍 앞에서 즐거울 사람이야 없을 터이고, 가난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고약한 것이기도 하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마지막에 수용의 단계라고 되어 있다. 수용은 체념과는 다른 것이다. 결과에 초연한 것이다. 내가 이 죽음이라는 불행을 받아 들였다는 것이 죽음에게 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나에게 죽음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긍정적 대응을 말하면서 긍정적으로 대응하면 빈곤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빈곤을 벗어나고 못벗어나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빈곤이라는 상태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 들이고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는, 더 나아가 빈곤이라는 장해물이 행복한 삶을 막지는 못함을 깨닫는 것이다. 빈곤이 결코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만, 벗어나지 못함을 한탄하며 체념하는 삶 즉,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음이다. 더 나아가 나와 남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그리고 함께 빈곤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그것이 괴롭지 않음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우리의 무기'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정직할 수 있다. 가난은 비교할 때 생겨난다.
가난한 사람끼리는 비교가 없다. 빈곤을 달관하면 어떻게 될까?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다.
돈을 얼마만큼 가지고 못가지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같이 이야기 못할 만큼 많은 돈을 가졌을 때인데, 어차피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우리와 말을 섞고 있을 이유도 없을 테니 미리 걱정할 것도 아닐 것이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만의 빈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로 바뀔 때 비로소 빈곤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말이다. .
나에게 닥쳐 온 가난은 내가 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에는 나에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성공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항상 부지런함, 현명함, 철저함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행복과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끔 한탄하는 것 중에 나보다 못난 사람이, 나보다 게으른 사람이 나보다 왜 부자일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런 논리에 따르다 보면 빈곤에 의한 차별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보지 못하고, 가난해서 무시당한다. 이건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빈곤에 의한 사회적 배제이다. 가난에 의해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조건에 의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차별이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이미 아니다. 사회구성원 전체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눈감는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빈곤을 대하는 가장 긍정적 태도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사고와 같은 것이고, 이 문제를 다같이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에게는 이미 닥쳤지만 누구한테는 아직 안닥쳤고, 앞으로도 안닥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서로 갖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함께 노력해서 빈곤의 문제를 극복할 수도 있지만 끝내 못할 수도 있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노력을 함께함으로써 얻는 현재의 행복이다. 마치 죽음을 이겨낸 사람들이 나타내는 일관된 반응-"내가 죽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죽음은 이미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 열심히하고 있다는 행복감이 중요한 것이었다. 어느덧 나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있었고, 어느날 나는 내게 주어진 시한을 넘어서 오늘까지 살아 있었다."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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