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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rch 16, 2012

아빠의 30대 여친에게 20대 딸이 보내는 편지

가족
덤덤했죠 의심했죠 미안해요 고마워요

▶ 아빠의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고들 해요. 그런데 이런 얘긴 ‘내 사랑’을 주장할 때만 써먹는 말인 것 같아요. 어느날 문득 내 엄마, 아빠가 “새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세요. 어때요, 일단 좀 당혹스럽진 않으셨나요? 따지고 보면 엄마도, 아빠도 ‘○○○의 부모’이기 전에 사랑에 목마른 XX, XY 염색체를 지닌 ‘인간’일 뿐인데 말이죠. 자, 이번 주말에는 ‘○○○의 부모’란 이름표는 떼고 ‘한 쌍의 남녀’로 부모님을 보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20대 초반인 나와 50대 초반인 아버지, 그리고 30대 초반인 아빠의 여자친구. 나는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도 두 분이 잘 만나는지, 아니면 진즉에 헤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일상적인 대화도 자주 나누지 않는 아빠에게 “아빠, 스무 살 어린 여자친구랑은 아직 만나?”라고 묻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만나는지도 모르는 아빠의 어린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어린 날의 반항도, 아빠를 뺏긴 데서 오는 질투도,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그 ‘언니’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고맙다고.

50대의 두 번 돌싱남과
그녀는 무려 스무살 차

반항적인 사춘기 시절
엄마의 빈자리 채워준 분
진짜 가족이 됐더라면…

부모님의 이혼, 아버지의 재혼과 두 번째 이혼으로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학창시절 6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랑을 깨우쳐준 아빠의 여자친구였다. 사람들이 들으면 ‘아빠의 여자친구에게 고마울 일이 뭐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열여섯 살쯤 되었을 때다. 중학생밖에 되지 않았던 내가 부모님의 이혼과 아빠의 재혼, 그리고 두 번째 이혼까지 불과 4~5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을 보고 겪고, 또다시 아빠가 여자를 데려왔을 때의 기분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의 여자친구라고 소개 받은 사람이 그야말로 ‘언니’라고 부를 나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랬던 사실’이 되어 감정이 아닌 기억으로 자리할 뿐이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내가 당시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아빠의 여자친구)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알고 지낸 세월로만 따져도 6년 이상 아빠의 곁에 머무르며, 반복된 결혼의 실패로 많이 지쳤을 아빠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주었다. 부모님의 불행한 행보를 지켜보며 내 안에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불신이 쌓여갔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뭐든 스스로 잘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아빠보다 훨씬 어린,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녀가 아빠를 만나는 데에도 분명 어떤 이유(예를 들면 금전적인 대가 등)가 있을 거라며 두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에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빠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내 질문에 그녀는 명확한 대답 대신 수줍은 미소만 건넸다. 시간이 지나 그녀에 대해 더 알게 되고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과 아빠는 똑똑하고 다정한, 그녀의 이상형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녀가 아빠에게 끌리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사랑했다. 여전히 서로에게 간절했고, 서로를 존중했고, 사랑했다.

그녀는 돼지띠인 아빠를 ‘울 돼지’라 불렀다. 음치로 소문 나 있는 50대의 아빠는 그녀가 좋아하는 김동률의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서 불러주곤 했다. 조금은 이질적이고 낯선 모습들이었지만 그런 두 사람을 6년 넘게 지켜보면서 사랑을 불신했던 나도 결국 ‘사랑이 있구나’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열아홉 살 때였나, 아빠와 그녀의 3주년에 커플 열쇠고리를 선물한 적이 있다. 하굣길에 3주년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 근처 팬시점에서 구입한 싸구려 열쇠고리에 두 사람은 내가 당황할 만큼 크게 감동했다. 그때도, 그 후에도 그 일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녀는 아빠의 여자친구인 동시에 내게는 또 다른 가족이었다. 어린 나를 두고 집을 나간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두 번째 엄마(난 단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본 적 없었다)가 아니라 아빠의 그녀였다. 고등학교 때, 우울증이 있던 내가 한번은 죽고 싶다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집에는 가장 친한 친구와 그녀가 있었다. 아빠에게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는 내가 그녀 앞에서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오열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봐도 현실 같지 않다. 하지만 그랬다. 그녀는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던 나를 묵묵히 받아주었다. 내가 진정이 된 뒤에는 자신도 그런 적이 있다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위로해주었다. 참 고마웠지만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뒤늦게 용기 없이 인사를 건넨다. 참 고맙습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아빠와 내가 사는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사춘기 시절에 학생으로서, 여자로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얘기들을 해주기도 했다. 어디가 아플 때면 꼬박꼬박 약을 챙겨주는 것도 그녀였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나를 위해 용돈을 직접 은행에서 환전해 작은 메시지와 함께 챙겨주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차피 여행경비 환전하러 내가 은행에 갈 텐데 뭐하러 바쁜 시간 쪼개 환전까지 해 왔을까’라고 다소 퉁명스럽게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정성’이었다.

그렇게 내게 ‘가족 같던’ 그녀는 끝내 ‘진짜 가족’이 되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만남엔 암묵적으로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리고 미래에 대한 가짓수가 무한한 그녀에게 아빠뻘 되는 사람과의 결혼은 너무 많은 제약과 사회적 규탄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두 집안의 어르신들 역시 두 사람의 만남을 못마땅해한 이유도 있었다. 말했다시피 지금 나는 그녀와 아빠가 계속 만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엄마의 자리를 채워주고 다정한 언니가 되어주고 삶의 선배가 되어주었던 그녀가 끝내 가족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큰 아쉬움은 없다.

그녀가 가족이 되는 게 부담스러워서는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긴 세월을 사랑하고도 헤어질 수 있다. 20년을 넘도록 함께 살아온 부부도 헤어지는데, 긴 시간을 곁에 있었다고 해서, 가족의 역할을 해주었다고 해서 꼭 가족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아빠와 지금도 연애를 하고 있든, 훗날 결혼을 한다고 하든, 아니면 이미 헤어졌다고 하든 선택에 달린 문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을, 아빠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그런 부모가 무책임해 보이고, 큰 상처를 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녀의 행복을 위해 한 명의 여자이고 한 명의 남자인 그들을 평생 불행 속에 가둬두는 건 너무한 일 아닌가.

20대 초반의 늦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38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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