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척의 갤리선 - 베네치아 공화국
이 글에서는 한 때 갤리선을 이용하여 넓은 바다를 장악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쓰고자 한다.
1. 베네치아 공화국의 탄생(서기 697년, 초대 도제의 선출)
서기 697년, 베네치아의 초대 도제가 선출되면서 베네치아가 사실상 공화국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비잔틴 제국에 속한 항구도시였다. 베네치아의 도제 체제는 나폴레옹에게 지배당하기 이전까지 11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가 왕정이었던 것에 비해, 베네치아는 공화국이라는 점이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기 810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의 아들 페펭이 베네치아로 침략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아냈다. 1년 후,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대제 사이에 조인된 조약에 따라 카를대제가 베네치아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함으로써 베네치아는 계속 비잔틴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이미 인정되고 있던 비잔틴 제국 영내에서의 교역의 자유와 함께 베네치아 상인들, 그리고 무역을 나라의 미래로 보던 베네치아에게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수도를 리도섬에 위치한 말라모코에서 리알토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제10대 도제 파르테치파치오가 선두에 나서서 나라 전체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오늘날의 베네치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2. 베네치아 공화국의 발전(10세기 ~ 16세기)
수도를 옮기고, 나라 전체를 이동하여 도시의 모약을 갖추는 등 베네치아는 이제 서서히 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잠시 동안이었다. 서기 976년, 베네치아는 칸디아노 도제를 중심으로 한 육지정복을 하려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민중들이 반기를 들었다. 칸디아노 도제는 쫓겨났고, 산 마르코 대성당과 총독 관저를 비롯한 300여채의 목조 건물들이 전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리를 겪고도 베네치아는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유럽 - 아시아 중계무역, 커다란 부를 축적하는 공화국
지구본이나 세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베네치아는 발칸 반도에서 조금만 더 북서쪽이면 금방이다. 그 곳의 위치는 유럽과 동방, 즉 유럽과 아시아의 중계무역에 딱 알맞은 장소이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이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시작했다. 중계 무역의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향료나 비단같은 아시아의 물건들은 유럽에서 매우 비싸게 팔렸다. 비단은 한 필당 금 한덩이에 거래될 수도 있었다. 중계무역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커다란 부를 춪적하게 되었다.
- 갤리선의 도입, 중계무역의 선두주자가 된 공화국
중계무역은 큰 이득을 남기는 일 이었지만, 그 길은 아주 험난했다.
잘못해서 태풍을 만나는 날에는 거래는 물론, 선박의 안전도 보장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태풍보다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적이었다.
해적을 만나면, 당시로써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이로인해 베네치아는 큰 피해를 입은 적이 많았다. 당시 의회의 대부분을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베네치아 정부에서는 해적 문제가 매우 골치아픈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든 방법이 바로 갤리선을 상선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갤리선은 본래 베네치아 해군들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상선으로 사용되면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해적으로 부터 훨씬 안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갤리선은 일반 범선들과 다르게 노를 저을 수 있어서 바람이 안불어도 항해에 별 지장은 없었다. 노는 매우 많았고, 그것을 젓는 인부들 또한 많았다. 때문에 시간이 중요한 거래에서는 아주 훌륭한 점이 되었다. 전투력도 좋았다. 노젓는 인부들은 전시에 총만 쥐어준다면 훌륭한 군인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갤리선들을 4척 이상이 이동할수 있도록 하였다. 덕분에 해적들은 베네치아 갤리선에는 쉽게 손댈 수가 없었다.
해적으로부터의 위험 문제를 해결하고, 속도도 더욱 빨라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중계무역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15세기, 갤리선이 한참 번성할 즈음에는 베네치아는 엄청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5세기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배들증 하나인 갤리선.
갤리선을 이용한 중계무역 덕분에 베네치아는 지중해와 흑해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항로의 개척,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해 그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점점 쇠퇴하였다.
3.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퇴와 멸망(16세기~)
중계무역으로 번성하던 베네치아는 16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 대서양의 주도권을 노리는 프랑스
프랑스가 해군에 별로 신경을 안쓸때, 베네치아는 대서양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해군 강국이라는 영국도, 당시에는 별볼일 없는 촌구석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프랑스가 안정을 찾자, 그들은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야 하는 대서양은 이미 베네치아가 접수했다. 결국 그들은 무력으로 베네치아 상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규 해군들의 공격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대서양에서의 주도권을 조금씩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다음에 있을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페스트의 유행
중계무역 도중 동쪽에서 건너온 페스트라는 전염병은 전 유럽을 시체로 덮어버렸다.
베네치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약 20만이었던 인구는 페스트가 휩쓸고 간 이후 무려 10만명이나 줄어버렸다. 전체 인구의 약 2분의1이 줄어든 것이다. 인구가 줄어듬으로 인해 노동력 문제등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모든 면에서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 동쪽의 커다란 위험, 오스만 투르크 제국
16세기, 동쪽에서 커다란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 대제가 다스리면서 그 힘이 매우 커졌고, 쉴레이만 대제가 다스릴 즈음에는 그 힘의 크기가 전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세계 최강이었다. 그러한 제국의 바로 옆에 붙은 조그마한 공화국이 무사할 리 없었다. 더구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같은 가톨릭 국가도 아닌, 이슬람 국가였다. 공화국의 미래는 너무도 당연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베네치아의 상선이 나가는 길인 에게해를 순식간에 봉쇄해 버렸다. 만약 무역을 하러 나간다면 이슬람 해적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역으로 황금기를 일궈냈던 공화국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 신항로의 개척,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공화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등장은 베네치아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큰 문제가 안될 수가 없었다. 아시아와의 교역을 하고 싶었던 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은 2가지 있었다.
1.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무력공격을 감행한다.
2. 신항로를 개척하여 그 길이 멀어도 아시아와 무역을 한다.
유럽 국가들이 1번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의 규모는 전 유럽 국가들의 힘보다도 훨씬 컸다. 그들이 오스만 제국에게 단체로 덤벼서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또한, 그들이 서로 단결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과 비잔틴 제국이 몰락해가고 있을때,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유럽 국가들이 선택 할 수 있는 방법은 2번이었다. 신항로의 개척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는 것 보다 훨씬 안전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에게 붙잡힐 확률도 적었다. 그들은 지중해의 주인이었을 뿐, 그 바다를 넘어가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항로가 개척되었다. 그 길은 옛날에 비하면 너무나도 길었으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배와 물건들을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나았다.
이제, 베네치아 공화국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대양 항해를 해야 했던 신항로에서 갤리선을 운항하기는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베네치아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발전시켜가던 옛날의 베네치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변화에 적응할 줄 몰랐다. 신항로의 개척에도 불구하고 계속 갤리선을 사용했다.
결국 그들은 갤리선의 쇠퇴와 함께 쇠퇴해갔다.
- 나폴레옹의 공격, 죽어가던 공화국에게 가해진 마지막 일격
페스트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협이 잠잠해 졌을 즈음, 이번에는 서쪽에서 커다란 위협이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 왕국의 나폴레옹 1세였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유럽을 정복해갔다. 베네치아 공화국도 예외일 수 없었다.
1797년, 나폴레옹 1세는 죽어가던 공화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얼마안가 나폴레옹의 시대가 끝이났다.
하지만, 공화국은 독립을 찾지 못했다.
반세기 이상동안 오스트리아의 통치속에서 살아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 후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베네치아를 점령하였다.
그렇게 베네치아는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여전히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있다.
18세기 말, 온 유럽을 종횡무진 휩쓸었던 나폴레옹 1세.
그는 죽어가던 공화국을 점령하였고, 그 이후 공화국은 다시는 독립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베네치아의 역사를 간단히 서술해 보았습니다. 이 글의 제목처럼 베네치아 공화국은 갤리선과 함께 번성하고 쇠퇴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갤리선의 역사로 생각해 보시면 더 쉽게 이해가 가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틀린점, 질문등은 덧글로 달아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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