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 토론방
- 성씨의 유래
- 2006-01-18 20:00:29조회 :1232
- 최산
- 00코멘트 : 34
오랜만에 글 써봅니다 오늘은 성씨자랑을 할까 합니다 제 성은 밀양 박씨입니다
역사로 본다면 삼국대립전 삼한이 있었습니다 이 삼한중 진한의 12개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이 권력의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여러 세력이 연합세력이였는데요 발전과 더불어 왕권이 확립되면서 신라국으로 변모해 갑니다.
사로국의 형성을 본다면 여섯개의 마을(6부)에 촌장이 있었습니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기원전 69년 이 여섯 촌장들이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것을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고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알이 있어서 깨어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였습니다
13세가 되자 6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모셨고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되었는데,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왕은 시조 박혁거세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입니다. 그리고 박 석 김이 우리민족의 고유의 성씨라고 합니다 고유의 성씨는 세개뿐인가요?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가 유일한 시조이기때문에 박씨끼리는 혼인을 못하게 합니다.
밀양 박씨가 박씨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력사상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김씨 리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가 박씨라고 합니다
유감이라면 저의 집에 족보가 저의 아버지가 어렸을때 화재에 타버려서 무슨 파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여려분과 함께 성씨에 대한 유래도 담론할겸 제 족보도 찾을수 있지 않겠나 해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IP: ♡.161.♡.64
http://bbs.moyiza.com/bbs/view.php?bbid=crcn_debate&no=1517
중국조선족의 가정에서도 족보책을 유지하고있는지요? 물론 한국의 대종친과는 거래없이 독자적으로??
예전부터부터 전래되어지고, 몇년마다 한번씩 문중사람끼리모여서 족보를 수정,추가하는지요? 궁금하군요.
족보책이 불타 없어졌다하여도 웬만하면 자기성씨의 본 과 파정도는.. 성인이라면 알고있을텐데요..
참고로 저희문중은 20년마다 한번씩 대종손중심으로 모여서 족보를 관리하고있습니다.
저희문중시조는 신라경순왕때 성씨를 하사받은 어르신이십니다. 저까지 26대손. - 조그만 자랑거리^-^
노완동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면 종친회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홈페이지가 있다면 거기 관리자에게 문의를 해보시는게 좋을 듯합니다.
부친 성함과 형제분이 계시다면 형제분 성함 출생연도 등을 참고하여 문의하시면 될거 같네요
금방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한국에서는 다섯명중 한명은 김씨라고 한답니다...
로완퉁님은 성씨 어뜨케 쓰시죠 ?
암튼 토론방에 금방와서 길게 말남기기도 좀 그렇군요...
그냥 재밌는글을 올리는 님들이 참 고맙습니다
토론 재밌게 벌려나가길 바라겟습니다
그럼 ...ㅎ
솔직히 우리민족의 성씨는 조선말기,, 일제와의 합방이전까지만 하여도 1/5정도는 성씨도 없었죠.
양반 상놈식의 천민계급을 두었던 봉건시대에,,, 갑돌이,갑순이, 만적, 등으로만,,ㅎ (부끄러운 면)
개화기를 지나면서 일제히 성씨취득(?),,, 그중에서 값나가는 박씨,김씨,최씨,이씨가 주종을 이루었고...
과거지사 이런분들은 족보이야기하면,,, 웬 봉건사회이야기하느냐며 두눈에 쌍지심.
심지어는 돈으로 남의족보에 살짝 넣어달라는 졸부들의 아우성도 있습니다만,,,,,,,
많은자료가 있습니다만, 개략적으로 성씨에관련되어 상식적으로 알아야할것만 발췌해보았습니다.
1. 성씨(姓氏)란 무엇인가.
성씨란 출생의 혈통이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의 칭호를 말함. 성과 씨는 본래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임(성- 출생의 계통을 표시, 씨- 성의 분파, 본관). 명(名, 이름)은 개인의 이름을 표시.
(1) 성씨의 유래와 보급
우리의 성씨는 중국 문화를 수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부족국가 시대에 이미 성씨의 기록이 보인다. 삼국시대의 성을 간단히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 해(解), 을(乙), 송(松), 주(周), 마(馬), 창(倉), 동(董), 연(淵), 을지(乙支) 등
백 제 : 사(沙), 연(燕), 협(協), 진(眞), 국(國), 목(木), 백(?) 등
신 라 : 박(朴)·석(昔)·김(金), 이(李)·최(崔)·정(鄭)·손(孫)·설(薛)·배(裵)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초로 잡고 있다. 이중환은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① 고려초 사성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락국의 왕실 등),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초 사성 등 셋으로 구분,
고려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조선조에 들어와 끊임없이 분관, 분파되어 다양해짐.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식 한자성은 왕실→귀족→관료→양민→천민 순으로 보급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無姓 계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 향·소·부곡민, 역민 등 천민계층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극히 일부만 성씨를 획득했지만, 이들에게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후기였다. 갑오경장(1894년)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되면서 성(姓)의 대중화를 촉진. 1910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게끔 법제화.
(2) 성씨의 종류와 본관
1> 성씨의 종류: 토착성(土着姓), 귀화성(歸化姓), 사성(賜姓)
토착성: 박·석·김씨 등
귀화성: 우리 나라에 귀화해 살면서 자기가 살던 나라에서 사용하던 성씨를 그대로 사
용하는 경우, 우리 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
사성: 공신의 녹훈에 수록된 인물이나 귀화인에게 국왕이 하사한 성씨.
*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존속된 성의 수는 대략 250성 내외였다. 현재 250∼300여 성씨.
2> 본관: 원래 本은 본관, 본적, 향관(鄕貫) 등으로 부름. 본관을 바꿀 수 없으나, 임금이 사관(賜貫)할 때만 가능.
* 본관의 연원: 본관의 체계가 확정된 시기는 고려초.
① 7세기 이전에는 출신지(거주지)가 신분 표시로써 성(姓)의 구실
② 시조의 출신지 또는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킴.
③ 이족(異族)의 동성(同姓)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족의 표시로써 쓰임.
비바람님, 저도 자료 뒤적거려보며 더불어 많은 공부가되네요. 이런것이 인터넷의 장점이자 혜택인가 봅니다.
그이전에 이렇게 생각해볼수있는 기회와 주제를 올리신 노완동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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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韓國姓氏>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지상지(黑齒常之), 부여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일본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포고”라는 “신분해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씨를 하려니 갖가지 애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데 큰뱀(大蛇), 여우코(狐鼻), 메도키(百目鬼), 히토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끼), 시나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께(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교수도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비바람님, 님이 지적한것은 우리의 어두운역사의 일면이라고 여겨지는것이겠지만,,,
봉건왕조이든 오늘날의 민주사회이든 왕조와 정권이 새로운 권력으로 대체가 되었을시,
이전의 모든것을 부정하고 소멸시킬려는경향이 우리민족사에 짙게 베여있고, 이에 민중들도 습관들여 진것같습니다.
물론 나쁘고 계승할필요도 없는것은 당연히 혁명하여야 하겠지만, 권력과 관련없는 전통도 단절시킨일은
많은 아쉬움을 남게하는 부분인것같습니다.
유구한 전통이란것이 일개의 왕조시대나 공화국시기의 짧은기간으로서 규정할수없는 장기간의 세월을 요구하는것이 아닐까요.
게이머님, 위의 첨부글중에 귀화성설명중에서 <우리나라 대부분이 이에해당>이라함은,,,
지금의 외국인 귀화개념으로 독일인이 한국인으로, 혹은 프랑스,미국인이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새로운성씨를 가졌다라는 뜻이아니고.
고구려에서 신라로, 백제에서 신라,후삼국의 인적교류등과 예전 여진인이 조선으로 등등의 이전 역사에서의 귀화성이라는것입니다.
물론, 최근세사의 일본인,중국인의 조선,한국으로의 귀화와는 이곳에 포함될수있으나 이는 극히 일부분일뿐입니다.
자칫잘못 오해한다면 짬뽕요리(?)로 볼까 괜히 신경쓰이군요. 혐한파분이 계신다면 착각속에 박수금지.
한얼님
조선족중 적지 않는 가정에서 족보를 가지고 있으며....후대들의 이름을 적어서 넣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한국의 종친회를 찾은 분들도 계시고.......
경순왕이면 신라의 제일 마지막 왕이네요 .... ㅎㅎ
김한기님
반갑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인테넷에서 종친회를 찾아서 여러번 문의의 글을 남겼는데......
제가 지금 알고 있는 선색으로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저의 증조할아버지가 1905년에 중국에 왔는데 저의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증조할아버지가 저의 아버지를 키우셨는데......저의 아버지까지는 돌림자로 이름을 지었고
화재가 나고 저의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제 형제들은 돌림자로 모르게 되여
돌림자로 이름을 짓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가 3대독자였고
지금까지 저의 아버지가 알고 있는 선색이라면.....어렸을때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들은것인데
밀양 박씨이고 저의 6대부 되시는 분까지 조선왕조에서 큰 벼슬을 했고 그 후로 죄를 지어서
함경도로 추방왔다고 합니다 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저의 아버지 3대의 성함과 돌림을 알고 있는데
이정도로 문의 해서는 찾을수 없답니다
아마 박씨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그러나 보네요......파도 많고.....
비바람님
저의 본의와 조금 틀리게 오해하게 됐네여
저의 아버지는 늘 저를 보고 조선족의 순수한 성씨는 박석김이라고 말해서요
그외에는 고유의 성씨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구요
박석김이 제일 순수한게 아니냐 그런 의미였죠
노완동님 향토냄새가 물씬 풍겨나온주제를 선보여 감사합니다. 이쯤에서 요며칠간 화약냄새를 식힐겸,,,
설마, 성씨가지고 중국이 좋네/한국이 좋네등등의 시비걸사람이 나올려나??
이형님 바라는데로 개인대 개인/인간대 인간으로 싸우면 몰라도.. 당신성씨보담 내성씨가 더좋소라는식으로,,ㅎㅎ
함경북도 명천과 무산이란곳에서 대략 80년전에 위대한 두분이 탄생하셧습니다.
그분들이 존재했기에 내가 이렇게 모이자에 글도 남기는겁니다 ........
우리가문의시조는 바로 시랑공 현담윤(玄覃胤)이란 분이군요..ㅋㅋ
아주 드문성씨..........
중국에서 살면서 아직 현씨인 한족을 보지 못했고 물어보니 굉장히 드물고 거의 한족중에는 업는 성씨인줄로 아는데...다들 그렇게 말하고...중국인이 아니구나?하는 롱담도 들어보고 ㅋㅋ..그런데 gamer님은 외래계?????
아님 토종계???
인류는 한품종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다윈과 헉슬리는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와 고릴라 등이 아프리카에 가장 흔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고고 인류학적 연구 결과 인류의 기원은 약 600만년 전 침팬지의 조상과 분리된 후, 오스트랄로피테신을 거쳐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출현한 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나와 지금으로부터 3만년 전까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살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학자들은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바원인, 북경원인, 아슐리안토기를 만든 프랑스원인 등 호모 에렉투스가 세계 각 지역에서 살았으며, 이른바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을 거쳐 현대 인류가 각 지역에서 진화하였을 것이라는 샹델리아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우리 한반도의 선조는 수십만년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고, 유럽에 살던 사람들과는 조상이 아주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영국의 고인류학자 크리스토퍼 스트링거와 미국의 앨런 윌슨은 각각 두개골 화석을 비교하는 방법과 분자유전학적 방법(분자시계)으로 현대 인류가 약 15만년 전 동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 이 후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이주하여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는 노아의 방주 모델(또는 Out of Africa theory)을 주장하였다. 지금은 수많은 자료가 이 이론과 합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은 현 인류(크로마뇽인)에 의하여 대체되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윌슨이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와 부합된다. 여기서 유전자 분석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995년 독일의 느봔테 파아보가 1856년부터 보존되어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에서 뼈를 조금 떼내 유전자를 분석해본 이후 여러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연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네안데르탈인들 사이에는 유전적 차이가 거의 없었으나, 네안데르탈인과 현 인류와는 그 차이가 상당히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전되는 생물체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DNA 염기서열에 의하여 결정된다. 생명체의 종(種)이 다르면 당연히 이 염기서열도 달라진다. 염기서열에 어떤 생명체의 청사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요즈음 막 끝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사람의 모든 염기서열을 밝혀낸 기념비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평균 1300염기서열에 하나의 비율로 차이가 난다. 생명체 사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염기서열의 차이도 크다. 즉 염기서열이 다른 정도가 크면 클수록 생물간의 차이도 커진다는 것이다. 생명체들이 원시적인 것에서 점차 진화해왔기 때문인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화하려면 유전자들의 복잡성도 커져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세포내 물질인 미토콘드리아DNA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인류 사이에는 단지 8개의 염기서열 차이를 보이는 반면 네안데르탈인과는 무려 27개의 차이가 나타나고 또 유인원과는 55개의 차이가 나타난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과 인류 사이에는 염기서열에서 차이가 크므로 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미토콘드리아와 분자시계
이러한 차이점들을 근거로 결론지어 말하면 인류는 어떤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약 60만년 전에 나뉘었다고 계산되고, 아프리카에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일부가 유럽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멸종되었고,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네안데르탈인에서 현 인류의 부모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 최근 들어서는 분자시계 개념과 DNA 돌연변이론으로 인류의 기원을 풀어보려는 연구가 매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963년 주커칸들과 폴링에 의해 처음 제시된 분자시계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진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환경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떤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나 환경의 변화가 크면 그 지역에 살던 생물의 수는 줄어들고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의 수가 증가할 기회가 부여된다. 이러한 현상을 뒤집어보면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체가 많을수록 즉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그러한 진화가 진행된 시간이 길고 아마도 환경의 변화도 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크면 클수록 진화가 일어난 시간이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돌연변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단백질의 변이(나아가 단백질을 만들도록 지령하는 DNA의 변이)를 조사하여 진화가 일어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분자시계의 개념은 이후 직접 DNA 분석자료와 지질학적으로 얻어진 자료들을 대비함으로써 확립되었다. 이러한 분자생물학적 방법들은 지금은 모든 생물학 연구의 핵심 기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자시계 개념은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 같은 것으로 우리가 먹은 당분이나 지방질들을 태워서화학에너지인 ATP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수억년 전에 외부에 존재하던 어떤 미생물이 세포 안으로 들어와 공생을 하게 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미토콘드리아에는 자체적으로 유전정보를 가진 DNA가 있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mtDNA)는 세포질에만 있어서, 세포의 핵 DNA와 달리 어머니의 난자를 통해서만 유전된다(정자에 있는 mt DNA는 수정될 때 들어가지 않는다). 미토콘드리아는 극히 정교한 전자전달장치를 가동하여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리(遊離) 전자가 나오고, 이것은 소위 (산화)스트레스로 작용하여 mtDNA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더구나 mtDNA는 잘 보호되고 있지 않아서 나이가 들면서 돌연변이가 축적되고, 결국 이것이 산소호흡을 하는 생명체가 노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운동, 특히 유산소 운동을 하면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활발해져 산화 스트레스를 같이 막아줄 경우 장수하는 것이다. 아무튼 1만6500개의 염기로 이루어진 mtDNA는 그 돌연변이가 핵 DNA에 비하여 훨씬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 변이를 조사하면 정밀한 분자시계를 찾아낼 수 있다. 윌슨이 세계 각처 사람들의 mtDNA를 분석한 분자시계 이론에 의하면 피그미족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아주 적은 변이만을 나타냈다. 이 결과는 약 20만년 전 인류는 한 어머니에서 모두 갈라져 나온 것으로 해석될 밖에 없어서 모든 인류는 한 어머니를 가졌다(미토콘드리아 이브)는 설명이 뒤따랐던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이브
스트링거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한 지역에서 인류가 나타나 다른 지역으로 그 일부가 이주하게 되는 경우(노아의 방주 모델), 인류의 원(原) 발생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는 이주하여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가령 일본 오사카에 이주하여 사는 우리 동포나 연변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의 유전적 변이는 그 중심지인 서울의 유전적 다양성에 훨씬 못미칠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특성을 기준으로 한 비유적인 의미에서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내기 위해 mtDNA를 분석하는 일은 우리들의 어머니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의 mtDNA와 얼마나 비슷한지 알아보는 친자감별법을 크게 확대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 보면 mtDNA의 변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가장 다양하게 나타났고, 분자시계 개념으로 계산할 때 가장 오래된 변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이 mtDNA를 가진 여성이 우선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 각처 사람들의 mtDNA 분석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또 분자인류학적 연구 수단으로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지금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을 하플로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은 미국 에모리대의 더글러스 월레스가 운영하는 Mitomap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한편으로 사람의 성을 결정하는 것은 성(性)염색체다. 이른바 Y염색체가 있으면 (XY) 남자가 되고, 그것이 없으면(XX) 여자가 된다. Y염색체에 있는 어떤 특성 즉 어떤 유전 요소는 민족에 따라 크게 다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 요소는 유전인자가 아니다. 어떤 형질을 나타내는 것, 즉 표현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씨처럼 그냥 따라다니는 DNA 염기서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실제 인체 게놈에는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유전자에 기생하는 이기적 유전자(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이 요소를 포함한 여러 유전자의 변이를 분석한 결과 최근 남자의 원형은 약 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것으로 결론이 났다. mtDNA 분석 결과와 시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으나, 분자시계법으로 얻은 수치의 오차는 상당히 커서 수만년의 차이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연구는 단국대 김욱 교수의 업적을 위시하여 일본 학자들에 의해 많이 이루어졌다. <그림 1>는 최근 에모리대의 월레스와 스탠퍼드대의 피터 언더힐 및 루카 카발리 스포르차의 자료들을 종합해 뉴욕타임스의 스티브 듀에네즈 기자가 그린 인류의 이동도다. 단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화살 그림은 필자의 이론에 근거해 수정한 것이다.
솔직히 조선족들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시기에 족보를 많이 잃어버렷습니다..사실입니다.
그냥 뭐 연주현씨정도인걸 압니다.
그시절에 또 많은 만족들이 한족으로 민족을 바꾸었지요....
우리현씨가문도 뭐 솔직히 별로 이름난 인재가 없는것도 사실입니다...
김 리 박 못비하지요 ㅋㅋ
아~~ 그러시군요 ㅋ.........
gamer님 한번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에 대해서 한번 연구해보면 어떨지?
그리고 해방후 숱한 소수민족 특히 만족들이 많이 한족에 융합되였습니다...일부 특별정책을 ...위해서..........조선족들도 많이 그시기에 족보를 강제적으로 빼앗긴일이 많아요...
그리고 내는 솔직히 좀 아랍놈과 일본놈의 복합스타일입니다 푸하하하
전형적인 조선민족처럼 안생겻습니다 ㅋㅋㅋ 푸하하하하
gamer님
후삼한=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전3국과 후삼국이 있는것은 아는데.....
삼국을 후삼한이라고 하는것은 처음인데여
알고보니 이형님도 현씨네요~~반갑네요.
전 연주 현씨거든요.알기론 현씨는 본관으론 크게 두개로 나뉘든데.
하나는 연주 현씨고 하나는 남쪽에 있는데 딱히 이름이 생각안나네요.
혹시 이형님도 연주 현씨세요?
한족남편님
커닝맨님이시죠? 오랜만입니다 새해 인사 늦었지만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의 아버지가 3대 독자다 보니까 친척도 없고......
만들수도 없고.......족보도 가짜를 판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아직 못했는데요
지금 알고 있는 선색으로 찾기 어려운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족보를 돈을주고 산다라는것은 자칫하면 일반상거래식의 상품거래로 오해될것같아 제가 알고있는 범위로 글을 써봅니다.
여기서 <족보>란 족보책과 동일한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가령, 족보책을 갖고있지않는 사람이 족보책을 구하는방법
1. 자신의 혈족을찾아 이미작성된족보속에 자신의 가계를 확인시키고 기록을부탁
- 이는 합법적이고 문중에필요경비만 지불하면됨.-족보책 제작비
2. 남의 족보책을 허락없이 이용하여 인쇄업자에게 자신의 가계를넣어적기위해 수정함
- 당연히 부정적인방법이고 인쇄비용만 부담
3. 남의 족보를 적당히참고해서 자신의 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족보책을 만듬.
- 많은 시간과 작업비용이 예상됨.
이상 위와같은방법으로 족보(책)을 구하기위하여 금전이 필요한것입니다.
따라서, 2번같은 비합법적-엉터리족보책을 만드는것외에 1,3번의경우는 정상적인방법으로서
보통 족보제작과 책자구입을위해
1번경우는 보통 기여금형태로 납부하는데, 저희 가계같은경우는 사람 1인당 5만원(한화)기준입니다.
3번경우는 자세히는 알지못하나 6대기준으로 제작할경우 100만원이내이면 제작과 출판이 가능할것입니다.
보통 족보를 산다라는것은 <족보책>제작및 구입을 말하는것으로서, 남의 족보를 몰래 돈주고 불법인쇄는 가능할지모르나
그리고, 돈을받고 자신의 족보에 남의가계를 넣어주지도 않습니다. 싸앙~넘의 족보가 아닌다음에요.
메일주소님, 장고한 문중의 대종손집의 족보같은경우 10권이상이 될수있고, 파종손가계일경우는 10권내일것입니다.
만약 메일주소님이 족보책을 원한다면,,, 님의 성씨본과 파를 알고나서 님 종친회에 문의를 해보시는것이 우선일듯.
인터넷싸이트에 있을수도 있을겁니다. 가령 <밀양박씨>라면 검색싸이트에 치면되고요.
만약 님이전의 모든 본과 파를 몰라서 우선 님의 대부터 기록한다면 이것도 가능합니다.
예를들면 님이 박씨라면,,, 님은 1대로서 연변박씨등으로 이름짓고 새로운 가계를 작성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님의후손이 계속 2,3,4대식으로 이어갈수있겠죠.
노완동님, 새해 안녕하세요!^^
성씨유래, 본관 등에 관해서 사실, 저를 포함한 지금애들이 아는것이 넘 적어요..
그냥 성만 알뿐이죠. 더 깊게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족보가 없어 그런건지요?....
글 잘 봣습니다! 저는 리씨인데요..글 보니 조상되는 분이 옛날엔 한자리햇엇네요.ㅋㅋㅋ (흐뭇)
좋은 시간되세요!
메일주소님, 저의 할머님은 월성(경주)최씨,,, 최치원후손임을 긍지로 여기시는.
그리고, 최씨의 고집이란,,, 앉은자리에 풀도나지 않는다하던데,,ㅎㅎ.
저의 할머님 고집에는 <무조건항복>이 최선의 방책입니다.(덕담 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의영 남씨구요 지금 족보두 갓구잇습니다(5권) 대정15년에 출간된 책자인데요 지금 년대루 하면 몇년에 출간댓는지 알구싶포요 근데 무슨파인지는 아직 몰르구 잇어요 책이 모두가 옛날 한자루 되여잇어서 어케 보는지 잘모르겟네요 의영남씨인 분들 플마니 달아주세요
참고로, 대정(大正-타이쇼우)은 일본의 연호입니다.
근세기에 명치(明治-메이지)-대정(大正-다이쇼우)-소화(昭和-쇼화)-평성(平成-헤이세이)순 입니다.
1912년이 大正(타이쇼우) 원년이고 1925년 대정 14년으로 끝나고, 1926년 昭和(쇼와) 元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님이 대정15년에 출간이라기보다 소화원년,,,즉, 님이 보관중인 족보책은 1926년에 출간된 족보인것 같습니다.
시간나시면 한국의 검색싸이트(네이버,야후,구글,엠파스등)에서 <족보>라고 치시고, 의령남씨를 찾으면 잘 확인할수있을것같습니다.
의영남씨가 아니고 <의령남씨>인것 같은데요.
http://bbs.moyiza.com/bbs/view.php?bbid=crcn_debate&no=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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