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남아있는 백제후손들
부여서씨 [ 扶餘徐氏 ]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서융(徐隆)이다.
그는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에 들어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라 하사받아,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돌아왔다.
부여서씨는 계대의 연대가 가장 오래 된 성씨의 하나이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 시조가 되기 때문에 다른 서씨와는 출계를 달리한다.
부여서씨는 광해군 때의 계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가문이기도 하다.
만죽(萬竹) 서익(徐益)은 선조 초에 문과에 급제, 비변사 이준민의 천거로 군수가 되고,
그 해 종부시첨정으로 순문관이 되어 북방에 파견되었다.
그 후 의주목사가 되었으나 탄핵을 받은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시조를 잘하여 2수가 전한다.
계축옥사를 일으킨 서양갑(徐羊甲)은 그의 서자이다.
당시 서자는 벼슬에 기용되지 못함을 불평하던 그는 같은 처지의 박응서·심우영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지로 강변 칠우를 자처하며 시주를 즐기던 중,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했다가 체포되어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이첨 등
대북파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과 모의 하여 영창대군의 옹립을 도모했다고
허위 자백함으로써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 및 김제남 등 많은 사람이 참변을 당하게 되고
자신도 처형되었다.
이 옥사로 그의 친족들이 죄없이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하는 등 많은 피해를 당했다.
정헌공(貞憲公) 서필원(徐必遠)은 서익의 증손으로 김집·정홍명의 문하에서 배우고
인조 때 문과 에 급제, 4도의 관찰사, 총융사를 거쳐 형조·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이상진 등과 함께 당대의 오직으로 불리었다.
부여서씨로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의주목사를 지낸 익(益), 인조 때 문과에 급제, 형조·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왕에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5직(五直)>으로 이름난 필원(必遠) 등이 유명하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부여서씨는 4,486가구 총 14,31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건 부여 서씨라는 직계 왕족의 수 일뿐이고, 이 말고도 백제 귀족 성씨는 더 많습니다.
[백제계 성씨①] 장흥 마씨(長興馬), 목천 마씨(木川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장흥마씨는 8,985가구 총 28,33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목천마씨는 941가구 총 2,98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씨는 1960년도 국세조사에는 인구 1만 9695명으로 성별순위 258성 중 제70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7,404 가구, 인구 3만 864명으로 274성 중 제74위였다.
[백제계 성씨②] 행주 기씨幸州奇氏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행주기씨는 6,660가구 총 21,53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계 성씨③] 정선 (천안(天安)·용궁(龍宮)·경주(慶州)·기장(機張)·전주(全州)·나주(羅州)·죽산(竹山)·성주(星州)·황간(黃澗)·안동(安東)·옥천(沃川)·경산(慶山)·함창(咸昌)·성산(星山)·평강(平康)·팔거(八莒)·부여(扶餘) 등) 전씨全氏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정선전씨는 44,316가구 총 141,38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천안전씨는 40,740가구 총 133,074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용궁전씨는 8,693가구 총 27,70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위 세 전씨는 대표적으로 적은거고, 나머진 적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백제계 성씨인 전씨 집안은,
197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만 2816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0.9%로 249성 중 제22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10만 3059가구에 인구 43만 55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제21위였다.
[백제계 성씨④] 직산 조씨稷山趙氏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직산조씨는 1,072가구 총 3,38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이렇게나 백제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손들이 많이사는데,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거기다가 위에 성씨들은 현재 전해져 오는것들이고, 나머지 백제계 성씨들은
신라왕족이나 귀족들의 눈을피하기 위해서, 혹은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신라 성씨로
성을 바꿨을겁니다.
그 근거로는 백제 성씨가 부여(扶餘)씨를 비롯해서
사마(司馬), 재회(再會), 서문(西門), 사탁(沙宅), 흑치(黑齒), 고이,재릉, 귀실, 목리 등등..
삼국중 복성을 가장 많이 사용했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점과,
백제 8대 성들 중 하나인 진씨,협씨,국씨등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는것을 보아
신라 성씨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는 신라시대까진 지방 호족으로 남아 백제 성씨를 쓰다가, 후에 고려 시대때 상당수 새로운
본관과 성씨를 만들거나 하사받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백제멸망당시 인구가 추정키로 2~300 만명 내외인데,
백제가 멸망한뒤 그많던 백제인들이 고향땅을 놔두고 어디로 갔겠습니까?
일부만 왕족이나 귀족들을 따라서 왜로 갔지, 나머진 다 정착해서 통일신라로 왕조만 바껴서,
잘 살아갔는데, 일부 백제인들이 건너갔다고 백제가 일본 역사라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 예전에 2ch 종자들이나 그런소리를 지껄이더군요...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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