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을 묻고 주변에 도랑을 두른 마한의 무덤, 주구묘(周溝墓)
마한지역의 특징적인 무덤 형태는 주검을 매장한 목관 혹은 목곽 주변에 도랑을 둘러 묻은 곳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를 주구묘(周溝墓)라 부른다. 구(溝)는 목관 등의 매장주체부를 덮었던 봉분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덤위에 흙을 쌓아 표시하는 이러한 묘제(墓制)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중국의 묘제 변천을 살펴보면, <예기(禮記)>단궁(檀弓) 상(上)에서 잘 나타나듯 "은(殷)이전에는 묘위에 봉분하지 않았"으나 이후 봉토분구하는 것으로 변한다. 즉, 묘는 있으나 그것을 표시하지 않는 "묘이불분(墓而不墳)"에서 묘위에 흙을 쌓아 "봉토분구(封土墳丘)"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기록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봉토묘는 <묵자(墨子)> 절장(節葬)편에 나오는 하(夏)의 우(禹)왕 무덤 설명에서 보인다. 두께 3촌(寸)의 오동나무 관을 칡으로 묶어 땅을 파고 묻고 파낸 흙을 그 위에 쌓아 분(墳)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고고자료로 확인된 바 없어 위의 문헌만으로 하대에 과연 분구가 확실히 존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고학자료상으로 분구가 확인되는 시점은 역시 은대인데, 그 무렵 묘상에 분이 등장하는 배경에 대해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봉토묘인 쿠르간문화의 영향설도 제기되나 그보다는 묘에서 행하는 제사의 보편화와 함께 조상 무덤의 확인의 필요성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중국 묘제의 흐름에 비추어 지석묘 등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시대 묘제는 지상에서 그곳이 무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거대한 바위로써 표시하는 지석묘는 물론이지만 점차 발견예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서 무덤 주변에 도랑을 돌린 "위구석관묘(圍溝石棺墓)"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최군 경남 마산시 진동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봉토묘의 존재는 그러한 봉토묘의 전형적인 예이기도 하다.
초기철기시대 점토대토기와 청동기가 부장된 무덤은 목관 주변에 돌을 채운 것인데, 그 주변에 주구가 있는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이 점토대토기인들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묘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경에 이르러 매장주체부 주변에 도랑을 두른 주구묘가 등장하고 있어 얼핏 초기철기시대의 무덤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그 기원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무덤임을 표시하는 방식으로서 봉분이나 도랑이 만들어진 예는 이미 청동기시대에도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 기원의 문제는 쉽게 풀린다. 주구묘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토착 묘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구묘의 정확한 출현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규명해야 할 점이 남아 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것이 여기에 소개하는 영광 군동리 주구묘이다. 주구묘는 기원후 3세기 후반경~4세기 전반경까지 지속되지만 영산강유역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5세기대까지도 지속된다. 지속기간이 긴 만큼 얼마간의 변화도 수반되는데, 이른 시기의 것은 매장주체부가 목관이 하나인 단독장의 형태이나 점차 2사람 이상을 함께 묻는 집단장의 형태로 변화하며, 금강이남지역에서는 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성인들도 옹관(瓮棺)에 묻는 옹관묘가 목관묘를 대신한다.
최초의 주구묘 영광 군동 주구묘
한반도 원삼국시대 마한 지역의 특징적인 묘제인 주구묘의 기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유적이다. 1998~1999년, 서해안고속도로 신설 공사 구간에 포함된 전남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 군동마을 276-46·46번지 일대의 표고 35m의 저평한 구릉 사면에서 발견되어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다. 주구묘가 분포한 구릉의 능선부에는 청동기시대 송국리유형 단계의 주거지 및 원삼국시대 주거지 등이 함께 분포하고 있지만, 원삼국시대 주거지들은 주구묘들과 중복되지 않는다.
주구묘는 모두 20기가 조사되었는데,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A-18호 주구묘이다. 이 무덤은 대부분의 주구묘들과 달리 구릉 사면의 아래쪽에 떨어져 있으면서 주구의 평면 형태 역시 사변이 모두 연결된 장방형으로 되어 있어 한쪽 변이 터진 말발굽형(馬蹄形)으로 된 나머지와 구분된다. 매장주체부에는 흑색마연호 1점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 토기는 형태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적색마연토기호(紅陶)와 거의 같으나 재질이 흑색마연으로 된 것이어서 점토대토기로 대표되는 초기철기시대로 소급해 볼 가능성이 높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흑색마연호는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다수 찾아 볼 수 있어 대략 기원전 2세기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이 주구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 된다.
조사 완료 후 공사로 인해 유적은 없어져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와 국도 23호선을 연결하는 진입로의 일부로 되었다.
군동리 주구묘와 더불어 중요한 학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보령 관창리 주구묘군이 있다.
보령 관창리(寬倉里) 주구묘
한반도지역에 주구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를 제공한 유적이다. 주구묘는 그간 일본열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야요이(彌生) 전기 무렵 킨키(近畿)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후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관창리 주구묘 발견이전에도 매장주체부 외곽 일부를 주구로 두른 예는 천안 청당동(淸堂洞) 등에서 확인된 바 있었으나 그 시기가 일본열도에 비해 훨씬 늦은 3세기대여서 일본열도 주구묘와 관련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관창리 유적은 1994~1995년에 걸쳐 충남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 일원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그 예정부지에 포함되어 고려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유적의 대부분은 송국리유형 단계의 주거지 및 지석묘로 구성되어 있으나, 표고 22~16m의 저평한 구릉지에는 송국리유형 단계의 취락이 폐기된 후 주구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조사된 주구묘는 모두 99기에 달하지만 매장주체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구 출토품의 대부분은 기원후 3세기대에 해당되지만 437호에서는 점토대토기 단계의 유물이 부장된 토광위석(목관)묘가 주구 내부에 남아 있어 만약 이것이 주구묘의 매장주체부라면 기원전 2세기대까지 올려 볼 수 있다. 발굴조사 후 공단이 조성됨에 따라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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