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야요이시대
내용
기원전 5~4세기로 비정되는 조몬 시대 말엽,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 북부에서 돌연 수도작(水稻作) 농경이 개시되었다. 단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서일본에 수도작을 기초로 하는 야요이(彌生) 문화가 성립되어 퍼져갔다. 이리하여 훗카이도와 남서제도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대부분의 지역은 식량채취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로 전환한다.
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에 걸친 시기를 야요이시대라 한다. 야요이문화는 수도작 농경을 기초로 하여, 철,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 등을 사용한 금속기, 목재를 벌채하여 가공하기 위한 돌도끼류, 벼이삭을 따는 용구인 돌칼 등의 대륙계 마제석기, 그리고 베짜기 기술 등을 포함한 새로운 문화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도쿄제국대학 근처 야요이의 패총에서 아라사카라는 학생이 둥그스름한 토기를 발견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 새로운 형태의 토기는 조몬 토기와는 달랐으므로, ‘주신구라’, ‘야요이식 토기’등의 명칭을 거쳐 ‘야요이 토기’로 불리게 되었다.
보존 가능한 식량으로 쌀이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야요이시대 혁명의 전주곡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상도 크게 변화했다. 규슈 후쿠오카 공항 서남단의 강을 따라 폭이 약 100m 정도의 대지가 있는데, 그 주변이 바로 일본열도 최초의 논농사 유적으로 유명한 이타즈케 유적이다. 논농사 초기부터 고도의 관개,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상당한 노동력의 결집이 요구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회생활이 영위되는 것이다. 농경을 통해 잉여식량을 비축하는 자는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활은 수도작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여전히 나무열매 채취와 수렵, 어로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생계수단이었다.
벼농사의 시작은 곧 집단과 집단간의 투쟁의 시작이었다. 토지분쟁이나 물분쟁이 빈번해졌으며, 이웃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빼앗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도 했다. 수렵도구가 아닌 무기로서의 칼이 등장한 것도 바로 야요이시대이다.
죽은 자는 취락 부근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규슈 북부 등에서는 지상에 큰 돌을 얹은 지석묘와 특제 대형옹관에 주검을 묻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토광묘, 목관묘, 상자식 석관묘 등에 신전장(伸展葬)한 경우가 많다. 흙을 쌓아올린 묘가 두루 출현하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으로, 후기가 되면서 서일본을 중심으로 상당히 대규모의 분구(墳丘)를 가진 묘가 축조된다. 또 규슈 북부의 옹관묘 중에는 30여 개가 되는 중국 거울과 청동제 무기 등을 부장한 것도 보인다. 이러한 대형 분구묘와 다량의 부장품을 가진 묘의 출현은, 집단 내부에서 신분의 차가 생기고, 각지에 강력한 지배자, 곧 수장(首長)이 출현했음을 말해준다.
한편 수도작 농경과 금속기 생산 등의 여러 새로운 기술은 전부 중국과 한반도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특히 야요이시대를 결정짓는 수도작 농경기술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전해졌다는 것은 농경기술과 공존하는 각종 유물의 유사성만 보더라도 확실하다. 야요이 인의 정체 또한 마찬가지로 한반도계의 도래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골을 살펴보면 조몬 인 성인남자의 평균 신장이 150cm 정도인 것에 비해 야요이 인은 거의 10cm 정도가 더 크다. 얼굴 모양도 현재의 폴리네시아계처럼, 깊이 팬 조몬 인과는 달리 길고 기복이 적은 평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바로 이점들이 민족의식과 관련하여 야요이시대가 가지는 딜레마다. 즉, ‘옛날부터 일본은 외국에서 문물을 배우지 않으면 진보하지 않는 나라였나’라는 의문이 보통의 일본인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한반도와 대륙을 향한 지배 야욕이 좌절당한 1945년 이후에도 이 의문은 상식적인 민족적 자부심과 결부되어 여전히 남아 있다.
연구의 진전에 따라 야요이문화는 다음의 세 요소가 합쳐진 문화로 설명된다. 수도작과 청동기, 철기에 관한 기술과 같이 대륙에서 전래된 요소, 토기와 타제석기처럼 조몬 문화로부터의 전통으로서의 승계된 요소, 동택, 무기형 제기, 타제 돌창과 같이 야요이 고유의 문화로 발전한 요소 등의 세 가지이다. 이에 다라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야요이문화는 이미 금속기와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지니고 일본열도에 오게 된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토착 조몬 인이 만들어낸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판 야마카와 출판사 <상설 일본사>).
참고자료
“한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장면”, 가람기획, 1998.
야요이시대의 정치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러 벼농사가 시작되고 동(銅)이나 철(鐵)의한 금속기가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은 한반도로부터 전해진다. 당시의 농사짓는 모습은 동탁(銅鐸:종 모양의 청동기)에 그려있는 그림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동탁은 이 시대의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의 토기로는 그 이전까지의 것보다도 튼튼하고 모양이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이들 토기는 도쿄(東京都) 분쿄오쿠(文京區)의 야요이정(彌生町)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야요이(彌生)식 토기라고 하고, 기원전 3세기 경부터 600년간 가량의 문화를 <야요이문화>라고 한다.
▶小國 分立 상태: 기원 후 1~3세기경에 이르러서는 벼농사가 발전되고 촌락이 차츰 커지면서, 그 촌락들은 쿠니(國: 지방의 (小國))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력한 지도자가 쿠니의 수장이 외어 힘이 센 우두머리가 약한 수장을 복종시켜 더욱 큰 쿠니를 만들었다. 이 무렵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서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B.C. 2~1세기의 일본에 대해서 한서(漢書)의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왜인의 사회는 100여국으로 나뉘어 있으며, 정기적으로 낙랑군(樂浪郡)에 사자(使者)를 보내고 조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사자가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조공을 하고 금인(金印)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200년쯤 전 즉, 에도시대인 1784년에, 후쿠오카(福岡)懸에서 어떤 농부가 우연히 땅속에서 금인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한위노국왕(漢魏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쿠니는 하카타(博多)부근에 있었던 소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금인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고 불필요한 글자인 <한(漢)>과 당시의 용례로는 어색한<國王>이라는 표현 등으로 인하여, 사인설(私印說) 또는 위조되었다는 설도 있다.
▶야마타이코쿠(邪馬台國)說: 그 후의 모습에 대해서는 진수(陳壽)가 쓴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중에서 <위지(魏志)>의 <왜인전(倭人傳)>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위지에 의하면 왜인의 나라는 30여개의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황 히미코(卑彌呼)의 야마카이코쿠(邪馬台國)가 가장 강성하여, 히미코는 3세기 초에 위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했다고 한다. 히미코는 무녀(巫女)로서 주술적(呪術的) 권위로 통치를 했다고 한다. 야마타이코쿠가 일본의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의 통일시기와 관련하여, 키타큐우슈우(北九州)또는 키나이(畿內:大和)등의 설로 대립하여 달리 해석되고 있어 아직 정설이 없다.
참고자료
황인영, “일본사 여행”, 일본문화연구센터, 1995.
야요이시대의 식생활
식생활은 쌀을 주식으로 하며 생선과 조개를 즐겨 먹고 야채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일본에는 소나 말, 양 같은 동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중에는 육류를 끓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멧돼지 고기나 사슴 고기를 먹는 풍습은 있었던 듯하다.
또한 식사 때는 먹을 것을 굽 달린 그릇(高杯)에 담아 젓가락을 쓰지 않고 손으로 먹었다고 하며 ‘그 성격이 술을 즐긴다’는 기록으로 보아 술도 좋아한 듯하다.
참고자료
기와이 아츠시,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 M&B, 1997.
야요이시대의 생활풍속
<위지> 왜인전에 나타난 야요이인의 생활과 풍속을 보면, 이들은 권력자에게 순종적이고 도둑질을 하거나 다투지 않고 여성을 범하는 사건도 적어 치안은 안정된 편이었다고 한다.
혼인제도는 일부다처제를 취하며 부모형제는 각기 침실을 달리 썼다. 또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에는 짐승 뼈를 태워 길흉을 점쳐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자료
기와이 아츠시,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 M&B, 1998.
신라와 왜의 관계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를 살펴보면, 신라와 왜의 관계는 시조 혁거세(赫居世) 8년 조부터 소지왕(炤知王) 19(497)년까지 지속적으로 보이며, 지증왕대(智證王代)(500)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신라본기의 신라와 왜의 관계는 대부분 적대적이지만, 아사달이사금(阿達羅尼師今) 5(158)년조, “3월에 죽령을 개통했다. 왜인(倭人)이 예방(禮訪)해 왔다”와 아달라이사금 20(173)년조, “5월에 왜국(倭國)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 왔다”는 우호적인 관계도 보이고 있다.
또한 기임이사금(基臨尼師今) 3(300)년 조에 왜국과 교빙하고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3(312)년 봄 3월에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아찬(阿?) 급리(急利)의 딸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35(344)년조 봄 2월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해 온 것에 대해 거절함으로써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36(345)년 2월에 왜왕이 글을 보내 국교를 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원년(元年)(402) 3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내어 국교를 회복했지만,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4(405)년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함으로써 우호관계는 다시 깨지고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2(418)년 가을에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으로부터 도망쳐 오게 된다. 그리고 적대적인 관계 기사에서는 왜인 또는 왜병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양국이 우호관계에 있을 때는 왜국으로 표현되어 있다.
참고자료
김현구, 박현숙 외,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1", 일지사, 2002.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cp0239&index_id=cp02390023&content_id=cp023900230001&pri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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