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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7, 2014

신라의 무덤

제8강 신라의 무덤

1. 신라 고분문화의 시기구분

「古墳」의 의미를 「高塚古墳」으로 제한하지 않고,「옛무덤」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면 신라 고분문화의 시간적 범위는 사로국의 성립 무렵부터 통일신라시대 말까지가 해당된다.

신라의 중심지였던 수도 경주에서 신라 최고 지배세력들이 사용한 主墓制의 변화에 따라 신라고분의 축조시기를 나누어 보면 크게 土壙墓 축조기, 積石木槨墳 축조기, 橫穴式石室墳 축조기로 나뉘어진다.

고총고분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지상에 高大한 봉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적석목곽분부터이며, 횡혈식석실분도 적석목곽분보다는 규모가 축소되고 있지만 역시 지상에 큰 규모의 봉분을 조성하였다. 토광묘도 묘제상으로 토광목관묘 단계와 토광목곽묘 단계로 나뉘어지지만, 토광목관묘 단계의 처음부터 지상에 어느정도 규모의 봉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다음의 토광목곽묘 단계에 오면 우선 埋葬主體部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토광목곽묘 단계 후기에 오면 매장주체부의 규모가 다음의 적석목곽분 못지 않게 대형화 된 것도 있게 된다. 그러나 토광묘는 토광목관묘나 토광목곽묘 모두 기본적으로 같은 계통의 묘제였으며, 말기까지도 그 대형화된 매장주체부에 상응할 만큼 지상에 큰 규모의 봉분이 조성된 것은 아니었고, 부장유물의 내용도 성격을 달리할 만큼 바뀐 것은 아니었다.

묘제의 계통과 고분 외형의 일관성 그리고 각 묘제에 따르는 부장유물의 내용과 성격 차이를 고려하여 토광묘 축조기 전기간을 신라 고분문화의 조기로 하고, 본격적인 고대봉토가 만들어지는 적석목곽묘 축조기를 전기, 그리고 그 후속으로 이어지는 횡혈식석실분 축조기를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2. 신라 고분의 범위와 시기별 묘제의 특징

(1) 신라 고분의 범위

신라는 진한 12국 중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사로국이 모체가 되어 성장한 나라로서 먼저 진한 諸地域을 차례로 통합하고, 이어 변한 지역의 가야제국을 병합하여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으로 병립하다가 삼국을 통일하여 국권을 고려에게 넘겨줄 때까지 존속한 1000년 왕국이었다. 따라서 신라고분의 공간적 범위도 시기에 따라 확장되어 갔던 것이므로 신라고분의 공간적 범위도 시기에 따라 확장된 신라의 영역 또는 세력권 안에서 만들어진 고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 영역이 곧바로 정치적 영역이 될 수는 없는 것이나 동질지역은 단순히 문화적 동질지역이 아니기에 실질적 신라의 정치적 영역 또는 세력권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기별 묘제의 특징

1) 新羅早期 - 신라조기에 경주에서 토광묘와 공존하였던 다른 묘제로 옹관묘 있다. 그러나 신라 조기에 경주에서 옹관묘가 최고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주묘제로 등장된 시기는 없었으며, 현재까지 조사결과로 보면 경주 일원에서 신라조기의 옹관묘는 독자적인 분포를 이루지 못하였던 것으로 토광묘군 속에 부수적인 존재로 분포하고 있을 뿐이다. 신라조기에는 경주와 경주 이외의 영남 일원의 묘제상으로 따로 구분되지 않으며, 영남 일원 전체가 주묘제는 토광묘였고 옹관묘가 부수적 존재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현재까지 영남 일원에서 조사된 토광묘들은 크게 보아 전체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고, 경주와 다른 지방의 토광묘들 사이에도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영남지방 토광목곽묘 단계 후기의 회청색경질토기 양식이 경주중심군과 부산․김해지역군, 그리고 마산이남의 서부경남군의 3대지역군으로 구분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여기 토기양식의 차이란 양식이라기보다 지방형식의 차이이고, 그나마 현재로서는 경주중심군의 범위도 파악되지 않는다. 또 다른 자료없이 토기의 지방형식만으로 당시 정치적 세력권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현재로서는 토광묘시기, 즉 신라조기의 신라고분의 지역적 범위는 결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2) 新羅前期 - 신라전기에 경주에서 적석목곽분과 함께 공존한 묘제로는 조기 이래의 토광목곽묘, 옹관묘, 그리고 새로 발생한 竪穴式石槨墳이 있다. 그러나 경주에서의 경우 신라전기의 주묘제는 積石木槨墳이었으며 토광목곽묘는 적석목곽분과 짧은 기간 공존하다가 소멸되었고, 수혈식석곽분은 규모와 부장유물에서 적석목곽분의 이하로 떨어지는 下位墓制로 되어 있었다. 옹관묘도 적석목곽분이나 수혈식석실분에 부수적인 존재로 공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외에 신라전기 말경에 속하는 橫口式石槨墳이 경주에서도 조사된바 있으나 아마 그것은 신라전기 말에 주변지역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주민의 이동 등에서 온 예외적인 존재라 생각되며 경주 고분군에서 횡구식석곽분이 일정한 몫을 갖는 묘제로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라전기에 경주를 제외한 영남 일원은 조기 이래의 토광목곽묘가 얼마동안 계속되다가 대부분 수혈식석곽분으로 전환되어 이 수혈식석곽분이 주묘제로 되었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수혈식석곽에 횡혈식개념을 채용하여 변형시킨 長方形 平面의 平天井 橫穴式石室墳이 신라전기에도 이른 시기에 이미 발생하여 부분적으로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 중간형태라고 할 수 있는 횡혈식석곽분도 일찍부터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크게 보아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평행하는 시기의 영남일원의 주묘제는 수혈식석곽분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수혈식석곽을 내부 주체로 한 대형 봉토분들이 곳곳에 大古墳群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묘제 자체로만 보면 경주를 제외한 영남 일원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으면서 경주를 포위하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포위상황은 신라전기 초에서부터 말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영남 일원의 수혈식석곽분이라는 이같은 묘제의 포위상태를 두고 신라전기 말까지도 경주 일원만 신라권이고 나머지 영남지방은 모두 가야제국의 영역이었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아직 우리학계에 존재하고 있다. 신라전기의 영남지방은 토기양식에 있어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안신라군과 서안 가야군으로 나뉘어지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낙동강 서안인 성주지방도 토기양식에 있어서는 동안신라군에 속하고 있고 동해안지방으로는 대체로 강릉선까지 신라군에 들어가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토기양식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문화권의 차이일 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전기의 영남지방 횡혈식석곽분은 기본적으로는 같은 묘제이지만 그 평면형태에 있어서는 대체로 長方形群과 細長型群으로 나뉘어지고 있으며 이것을 토기양식과 결부시켜 보면 장방형군은 낙동강 동안 신라양식과 세장형군은 낙동강 서안 가야양식과 결합되고 있고, 성주지역은 묘제에 있어서도 장방형군에 속하고 있다.

또한 신라양식의 토기를 내는 영남일원의 전기 고총고분의 부장유물을 보면 토기뿐만 아니라 과대, 관모, 귀걸이, 환두대도 등의 장신구와 무기양식에 있어서도 묘제 자체의 차이와는 관계없이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동질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신라전기에 오면 영남 일원의 수혈식석곽분 지대는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의 양식에 있어서는 積石木槨墳 文化地域(경주의 적석목곽분과 동질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非積石木槨墳 文化地域으로 양대 지역군이 나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분문화기에 있어서 특히 銙帶, 冠帽, 環頭大刀등의 장신구와 佩刀는 단순한 부장품이 아니라 墓主의 신분을 나타내 주는 의장구였던 것은 물론이고, 한 지역내에서도 묘주의 신분에 따라 일정한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묘제는 적석목곽분과 수혈식석곽분으로 다르지만 출토유물에서는 동질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적석목곽분 문화지역에서 그와 같은 신분 표시적인 의장구는, 특히 관모에서 금제관모와 금동제 또는 은제관모로, 과대에서 금제과대와 은제과대로 뚜렷이 구분되는 것처럼 경주고분과 지방고분 사이에는 일정한 격차를 갖고 있다. 즉, 지방고분의 경우는 최고수준의 고분이라 하여도 최고수준의 경주고분보다는 한단계 낮은 수준으로 되어있으며, 부장유물의 전체적인 질과 양에 있어서도 경주고분과 지방고분 사이의 수준의 격차는 분명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적석목곽분 문화지역에서의 이와 같은 현상은 적석목곽분 문화지역이라는 것이 단순한 문화적 동질성만을 갖고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방의 古塚主들이 경주세력과 일정한 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었던 데서 나온 결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전기에 경주의 주묘제와 다른 수혈식석곽분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수혈식석곽분지대인 영남지방에서 나타나는 그와 같은 양대지역군의 분립은 단순한 문화권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세력권 내지는 최소한 영향권으로서 신라권과 가야권으로 분리되어 갔던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에 따라 빠르고 늦음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동질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적석목곽분 문화지역(경산, 의성, 안동 등 내륙지방)은 물론 낙동강 연안을 포함한 낙동강 동안의 영남지방 전체와 서안의 성주 이북 영남지방, 그리고 강릉선 이남의 동해안 지방이 최소한 신라전기의 신라 고분문화의 지역적 범위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3) 新羅後期 - 신라후기에 경주에 처음 들어온 橫穴式石室墳은 수혈식석곽분지대였던 영남지방 일부에서 전기부터 이미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평면 장방형의 平天井石室墳이었다. 그러나 재래식인 이 장방형석실분은 후기 초에 잠시 존재하였을 뿐 곧 사라져버렸고, 후기의 거의 전기간이 북쪽에서 내려온 平面 方形의 穹窿式天井石室墳 축조기로 되어있다.

신라후기에 경주에서 횡혈식석실분과 공존하였던 묘제로는 불교식의 火葬墓가 있는데, 용도 자체가 납골용기인 專用骨壺를 석함에 넣어 묻는 본격적인 화장묘는 통일 이후에 등장하는 것 같지만 화장골을 담은 유개합 등만 묻는 간단한 화장묘는 경주에 횡혈식석실분이 등장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미 출현하였다고 판단된다.

신라후기로 들어갔지만 경주고분이 아직 재래식의 장방형석실분으로 되어 있던 6세기 전반기까지 경주 이외 영남지방의 묘제는 전기와 큰 변동은 없었으며, 이시기는 낙동강 서쪽에 아직 가야세력이 남아있었고,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신라 고분문화의 지역적 범위는 전기 말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경주에 방형 궁륭식석실분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6세기 중엽경에는 신라 고분문화의 지역적 범위가 크게 확장되어 영남지방 전체와 한강 상류의 중원지방은 물론, 한강 하류의 중부지방과 동해안으로는 원산만일대로까지 신라 고분문화의 지역적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시기 지방고분에서는 재래식의 竪穴式石室墳, 橫口式石槨墳, 長方形 平天井石室墳과 신식의 方形 穹窿式石室墳 등 여러 가지 묘제가 혼재하고 있었고, 한 고분군 안에서도 여러 가지 묘제가 공존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예들이 많다. 그러나 이 고분들은 묘제의 차이와 관계없이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고분군을 영남지방을 제외하고 외곽지역만 살펴보면 진흥왕대 신라의 진출선과 일치하고 진흥왕 순수비가 위치한 지역 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방고분은 6세기 중엽부터 후반기 얼마동안까지 잡시 한시적으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이후가 되면 경주를 제외해 놓고 통일신라 말까지 이렇다 할 지방고분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3. 묘제 축조방법과 특징

(1) 토광묘

신라지역의 토광묘는 백제지역과는 달리 청동기시대 후기로부터의 전통을 갖고 있다. 구정동 입실리 죽동리 등지의 세형동검출토 토광묘들이 바로 신라 토광묘의 직접적인 조형이 된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지기 시작한 조양동 황성동 등지의 고분은 사로국 단계의 근거가 된다.

조양동의 토광묘는 산록의 낮은 평지성구릉에 위치하였다. 토광목관묘와 토광목곽묘의 두 종류가 있다. 토광목관묘는Ⅰ형과Ⅱ형으로 분류되는데,Ⅰ형묘는 토광의 길이2m 너비0.75m 깊이2m이며, 평면은 장타원형이고 후기의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Ⅱ형묘는 토광의 길이 2.5-3m 너비1-1.5m 깊이 1-1.5m로 평면은 세장의 장방향이며, 후기 무문토기․와질토기․약간의 청동기․漢鏡․철기․유리제식옥 등이 출토되었다. Ⅰ형묘는 남부지방 무문토기의 하한연대인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Ⅱ형묘는 38호에서 출토된 전한경과 무문토기 종말기인 黑色磨硏莊頸壺 등으로 1세기 후반으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 토광목곽묘인 Ⅲ형묘는 길이 4m 너비1.2m 깊이0.6m의 토광안에 목곽을 설치하였으며, 다량의 철기와 와질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철촉의 형식으로 보아 3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Ⅱ형묘에 속하는 5호분에서 지면위에 두겹정도의 적석이 있고, 또 토광에 타락한 돌들이 있었다고 하는 데 이것은 적석목곽분의 적석부와 간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Ⅰ형묘는 구조와 무문토기의 출토로 보아 재래식으로 보이고 Ⅰ형묘와 Ⅲ형묘는 전한경과 흑도등이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대동강 유역으로부터 후래한 형식으로 보인다.

황성동에서 발견된 토광은 목곽토광묘이며 와질토기가 출토되었다.

(2) 석곽묘

석곽묘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삼국시대 각 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간단한 구조의 묘이다. 지하에 광을 파고 그 안에 막돌이나 깬돌로 소규모의 곽을 만든 것인데, 청동기시대부터 내려오는 토착적인 묘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사용한 부차적인 묘제이다. 경주에서는 인왕동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바 있다.

(3)적석목곽묘

1) 적석목곽분의 구조와 형식 및 장법

규모면에서 본다면, 대형 중형 소형의 종류가 있는데, 이 중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대형분이다. 분구가 크고 높을 뿐만 아니라 매장주체도 지상 분구중에 축조되었다. 중형의 일부와 소형은 분구가 낮고 작으며 매장주체부도 지면아래에 토광을 파고 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 소형분은 계통과 기원에서 대형분과는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대형분에는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는데 이중 최대형은 황남대총이다. 대형분은 대개 專獨墳으로 존재하고, 대형과 중형분에는 분구 2기가 연접된 쌍분이 있다.

대형 적석목곽분은 지면을 정지하고, 그위에 목곽을 설치하고, 다음 상당한 두께의 적석으로 목곽을 둘러싸고, 다시 봉토를 상당한 높이로 축조하고, 봉토의 자락에는 냇돌로 1m미만의 土留石을 시설한다. 돌 재료는 모두 북천과 서천에서 구할 수 있는 인두대의 냇돌을 사용하였다.

중형과 소형에 속하는 적석목곽분은 처음 축조시 단을 만들지 않고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그 토광안에 목곽과 적석을 쌓아 올리고 나서 봉토를 덮는다. 적석목곽분은 1穴1人葬을 원칙으로 하며, 유물을 부장하기 위한 부곽을 주곽의 머리맡 또는 발치에 설치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곽의 옆에 설치하기도 한다. 대형분과 중형분에서는 1墳1葬을 원칙을 고수하나 중형의 일부와 소형분에서는 1墳幷葬 또는 1墳多葬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부합장이나 가족합장을 위하여 신라 특유의 雙墳이 발생하였고, 다장을 위하여서는 多墳多葬이 존재하였다.

2) 副葬遺物

신라 적석목곽분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부장유물이 많은 厚葬이라는 데 있다. 구조상으로 부장유물만을 위한 부곽을 시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장궤를 설치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종류도 다양하여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류, 환두대도를 비롯한 도검류, 철모․철창․철촉․有刺利器 등의 무구류, 토기류, 농구류, 馬鞍具․재갈․행엽 등의 마구류, 동합․ 동완등의 식기류, 이외에 鐵鋌 유리제완 등등 유물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도구와 용품을 부장한 듯하다.

이들 유물들은 고구려 백제 가야가 대개 비슷하나 신라의 금관만은 형식과 양식이 특이하다. 금관은 순금제, 은제, 금동제가 있다. 이 금관의 형식은 시베리아 샤만의 관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며, 금관이 출토된 고분은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북분, 교동고분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유리제완과 금제보검도 중동지방에서 그 형식과 제법이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3) 기원과 편년

적석목곽분은 신라지역 외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조형과 조형으로부터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정형화된 典型고분만이 알려져있기 때문에 기원을 밝히기가 대단히 어렵다. 적석목곽분 특히 대형에 속하는 고분은 목곽부 적석부 봉토부 호석부 등 4개의 중요한 요소로 형성되었다. 이 4요소 중 기원을 따질 수 있는 것은 목곽부와 적석부이다. 목곽은 이미 세형동검을 출토하는 토광묘와 전한경 黑陶를 출토하는 목곽토광묘에서 설치 사용한 바가 있는데, 이 목곽에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 적석부는 고분에서 봉토를 除하면 대략 14-15m의 방형적석부만이 남는데, 이 형상과 규모는 압록강유역지방의 고구려 적석총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것은 고구려 적석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경주 조양동의 목곽토광묘 5호분에서는 목곽의 상위부분에 두겹의 적석이 있었고, 또 토광내의 함몰부에서도 약간의 돌이 발견된 일이 있어서 이것이 양은 적지만 초기의 적석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횡혈식석실분

1)횡혈식석실분의 구조형식

① 횡구식석실분 - 출입시설의 구조차이에 따라 2종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출입할 때마다 벽을 헐었다 쌓았다 하는 폐쇄식과,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둔 출입구식이 있다. 폐쇄식은 황남동 151호분을 대표유적으로 들 수 있는데, 완전지하식으로 묘실의 평면은 장방형이며, 동서 2장벽과 북 단벽을 쌓고 개석을 올린 후 남쪽을 통하여 시체를 격납하고 퇴실한 다음 밖에서 남 단벽을 쌓고 분구를 축조한 것인데 추가장시에는 남벽을 헐고 매장한다. 여기에는 3인을 추가장하여 모두 4인을 매장하였다. 천장은 몇 개의 판상설으로 이루어진 평천정식이며, 벽체는 할석을 성글게 쌓았다. 출입구식은 보문동 부부총의 婦塚에서 볼 수 있다. 묘실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서쪽 단벽의 폭을 약간 좁히고 묘실바닥보다 약간 높게함으로써 그 벽이 출입구임을 표시하고 있다. 천장은 평천정식이고, 벽체는 괴석과 할석을 섞어서 성글게 쌓았으나 벽면은 整面하였다.

② 횡혈식 석실분 - 3종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順興己未銘壁畵墳형식이다. 묘실의 평면이 장방형으로 되고, 연도는 장벽의 한쪽 끝에 붙여서 설치하였다. 천장은 평천정식을 하고 벽면과 함께 전면에 두터운 백회발이를 한 다음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구조와 벽화의 내용에서도 고구려 양식이 보여 고구려가 5C경 남하하였을 당시의 영향으로 추측하고 있다.

둘째는 쌍상총이나 전신덕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고, 연도는 남벽의 중앙 또는 한쪽에 편재하여 설치하였으며, 천장은 돔식으로 하였으되 굴뚝처럼 높게 축조한 형식이다. 이런형식은 雙床의 萬寶汀1368호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신라에서의 유행은 대략 6C경으로 추측된다. 축조시 궁륭상천정을 목표로 하였으나 천장을 곡면으로 축조할 기술이 미발달하였기 때문에 높이 올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는 충효동 고분군에서 다수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인데,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고, 연도는 중앙과 편재가 골고루 섞여있으며, 천장은 완전한 穹窿狀천정식으로 되었다. 이 형식은 한반도에서 경주에만 특징적으로 분포되어있는데, 횡혈식석실분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신라가 수당과의 잦은 교통 속에서 유입된 北朝式의 석실형이며, 연대는 6C후반-7C경에 유행하고, 통일 후에도 성행하고 내부에 화장골호를 격납하는 것이 보통이며, 불교와 관계가 깊다.

2) 횡혈식석실분의 출현배경

신라의 경우 橫口式석실이 출현하여 보급되고, 이어 횡혈식석실이 출현, 유행하여가는 5C-

6C대에는 고대국가를 완성하고 삼국통일로 전진하는 기간이었다. 내물왕 이후 법흥왕에 이르는 약 100년간은 고대왕국으로서 체제를 완비하고 정복국가로서 도약해 가는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법흥왕 때 관제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建元이라는 신라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불교를 공인하여 정신적 지주로 활용하였으며 밖으로는 금관국을 병합하여 낙동강유역지방을 확보 통일하였다. 진흥왕때에는 전왕대에 이어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여 한가유역과 원산만까지 국토를 넓히고 화랑도를 시행하였으며 국사를 편찬하는 등 문운도 일었다. 궁륭상천정식의 횡혈식석실이 성기를 이룬 6C 후반의 진평왕 시에는 다시 관제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수당과의 친교를 두터이 하였으며 불교도 크게 진흥하였다. 결국 이시기에 횡혈식 석실분으로 묘제를 통일한 세력들이 나아가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고 보여진다.

4. 시기별 묘제 변천이 갖는 의미

신라의 고분문화는 신라 역사 전개과정의 상물이었으며 수도 경주에서 묘제의 교체는 신라 최고지배세력의 변동 또는 지배구조 변화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신라조기 토광묘는 ‘이사금’시기, 신라 전기 적석목곽분은 ‘마립간’시기, 신라후시 횡혈식석실분은 ‘왕’시기 최고 지배계층의 묘제였던 것이다. 신라의 고분문화는 신라의 역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 이면사였으며, 신라고분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물들 자체는 역사의 생생한 실증물들인 것이다.

※천마총:

155호 고분이라고 불려왔으나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명명되었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 봉토의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을 동서방향으로 설치하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은 뒤 봉토를 씌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유사하며 다만 덧널이 지면보다 위에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덧널 위와 주변에는 지름 23.6m, 높이 7.5m 가량 돌을 쌓고 표면에는 방수를 목적으로 점토를 발랐다. 덧널 내부에는 강돌과 잔자갈로 석단을 돌리고 그 위에는 유물을 배열했으며 석단의 내부에 길이 215cm, 너비 80cm 가량의 널을 덧널의 장축방향에 맞추어 동서방향으로 안치했다. 석단의 바깥쪽에는 널과 직교하여 남북방향으로 껴묻거리 상자를 놓았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껴묻거리는 위치에 따라 봉토 내부, 덧널 상부, 널 주위의 석단 윗면, 널 내부, 껴묻거리 상자 등으로 구분된다. 봉토 내부의 유물로는 정상부 근처에서 마구류로 추정되는 금동판·미늘쇠·쇠낫쇠투겁창·유리구슬등이 출토되었다. 덧널 상부 출토유물로는 쇠도끼와 굽다리접시·뚜껑접시·목단지·단지 등의 토기류, 금제 굵은고리, 가는고리귀걸이, 유리구슬 등과 대형환두철봉,환형철구 등이 있다. 널 주위의 석단에는 동쪽에 관모·허리띠·띠드리개 등의 장신구류, 나머지 부분에는 무기와 마구류가 부장되어 있었다. 널 내부에는 금관,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금제·은제 팔찌, 금제반지, 봉황환두대도 등을 패용, 착용한 인물이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채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껴묻거리 상자에는 다량의 유물이 들어 있었는데 뚜껑으로 생각되는 판재의 윗면에는 금제새날개모양관장식·금박편·금동관·금동제관모·금동제정강이가리개 등이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서는 재갈·발걸이·말띠드리개·밑동쇠·말띠꾸미개·청동말종방울·안장틀·말다래 등의 각종 마구류와 투구 1점이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세발솥, 자루솥, 다리미, 크고 작은 합, 굽다리접시 등의 금속제용기와 유리용기, 각종 칠기류가 빽빽이 차 있었다. 상자 아랫면은 4점의 쇠솥이 받치고 있으며 쇠솥이 없는 곳에는 각종 토기류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이고 일반 무덤은 묘(墓)라고 하는데, 능인지 묘인지 알 수 없는 옛 무덤을 통틀어 고분(古墳)이라 부른다. 발굴된 고분은 출토 유물중 대표적인 것으로 명칭을 정하여 총(塚)을 붙인다.

신라 금관이 처음 출토되었다고 금관총(金冠塚), 금방울이 나온 무덤을 금령총(金鈴塚)으로 이름 지었듯이 이 무덤에서는 천마도(天馬圖) 그림이 나왔으므로 「천마총(天馬塚)」이라고 하였다.

○○호분(號墳)이라는것은 일제 때 경주 평지에 있는 고분을 아무 의미없이 편의대로 붙인 번호인데 '무덤 임시 넘버'에 불과하다. 1973년 4월 어느날, 미나리꽝에 둘러싸인 무덤 앞에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그리고 무덤 꼭대기에서 발굴의 첫 삽을 떴다.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멋모르던 경주 시민들은 나중에 이런 소문을 듣고 "임금 무덤을 건드려 하늘이 노했다."는 등의 풍문이 돌기도 하였다.

이 고분 근방에는 미추왕릉이 있는데, 경주 김씨로서는 처음 왕이 된 분이다. 그래서 경주 김씨 문중에서는 미추왕릉 부근 고분들은 김씨 왕족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왜 하필 미추왕릉 부근의 무덤을 파느냐?"고 발굴단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굴은 계속되어 12월까지 약 8개월간 진행되었는데 7, 8월에는 비바람도 막고 직사광선도 차단하기 위해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작업했다.

무덤의 규모는 봉토지름 47m, 높이 12.7m로서 큰 무덤에 속하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지 덧널 무덤[積石木槨墳]인데, 나무판을 짜서 방 모양으로 만든 덧널[木槨] 바닥에 널[棺]을 안치하고, 덧널 옆과 위에 돌덩이를 쌓은 다음 흙을 덮은 방식이다.

발굴한 결과 이 고분의 구조는 덧널 안에 '껴묻거리[副葬品]를 넣은 궤짝'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안에 쇠솥, 토기 등 무겁고 큰 용기류를 맨 밑에 놓고 금속제 용기, 칠기, 유리잔 등 가벼운 물건을 올린 후, 맨 위에는 안장, 말 다래[障泥], 말 장식 등을 놓았으며, 나무 궤짝 뚜껑 윗면에 관 꾸미개[冠飾]를 놓아두었다.

지금까지는 금관을 쓸 때 소위 내관과 외관을 함께 쓰는 것으로 넘겨짚었으나, 이 무덤에서는 나무 널 속의 피장자가 외관만 착용하였고, 내관은 널 밖에 놓여 있어서 금관 쓰는 법과 금관의 성격에 대하여 새롭게 연구해야 되었다.

이 고분에서는 모두 1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도 천마도가 그려진 말 다래를 비롯한 말탄 사람 그림, 새 그림의 모자 챙, 칠기 그림 등이 출토되었다는 데 보다 큰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이 그림들은 지금까지 거의 없던 고신라 그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출토 유물과 고분의 구조 등을 비교, 검토하여 종합해 보고, 이 고분의 피장자는 소지왕(479~500년)과 지증왕(500~514년) 중의 한 분으로 추정하고 있긴 하나,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축조 연대가 대체로 5~6세기경임은 확실하다.

국립경주박물관에 학생들을 데리고 견학시키며, 고분관에 들리면 금관 앞에서 자주 질문받는 말이 있다.

"저 금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지금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금관은 모두 진품(眞品)이다. 하나 뿐인 옛 물건을 다른 곳에도 진열해야 될 경우가 있는데, 그 때는 똑같이 만들어야만 한다. 그럴 때는 '가짜'라고 하지 않고 '복제품(復製品)'이라고 한다.

가짜란 실속은 없으면서 겉만 그럴싸한 느낌이 드는 말이고 '모조품(模造品)'이란 창조성이 결여된 것으로 껍데기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옛 물건을 그대로 만드는 진지한 작업 과정을 '재현(再現)한다'하고, 작업 결과 만들어진 물건을 '복제품'이라고 한다." 고 하나하나 설명한다.

이런 경우가 바로 천마총이다. 출토된 유물은 전부 박물관으로 옮겼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 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그림이나 모자챙 같은 나무 제품은 보존 처리를 해야만 했다.

무덤 구조가 돌무지 덧널 무덤이기 때문에 피장자가 묻힌 나무 널은 썩었으며, 역시 나무로 짠 덧널이 싹는 바람에 위를 덮었던 돌덩이가 떨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때 피장자에게 착장(着裝)시켜 두었던 장신구들이 손상을 입었다.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금으로 된 관모(冠帽), 금 허리띠, 띠 고리, 띠 드리개 등은 세심하게 정성들여 처음 상태대로 복원하였다. 이렇게 손질한 진품들은 모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거나 전시되어 있다.

출처 : 백문불여일행(百聞不如一行) | 글쓴이 : 쑨아이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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