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광묘는 땅을 파고 내부에 별다른 시설을 하지 않고 시신을 그대로 안치하는 간단한 매장방법으로 영산강유역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또 가장 많이 분포하는 묘제다. 내부 시설을 기준으로 직장토광묘, 목관토광묘, 목곽토광묘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변에 도랑을 파고 물을 흘리는 주구묘가 나타나기도 하고 그 안에 옹관이 들어있기도 하는데 철기시대의 개막과 함께 일반화된다.
주구묘는 충남에서 전남에 이르는 서남해안 지방의 물을 대기 쉬운 농경지대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농경문화의 산물이다. 2009년에는 한강하류지역인 경기도 김포시에서 주구목관묘가 발견되어 마한의 남하경로와 일치한다. 이후 전남지역에 가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일본열도로 옮겨가 전방후원분을 품으며 5세기에 극성기를 이루었다. 무덤 주변에 주구를 만드는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生의 영역과 死의 영역을 물로서 구분한다는 농경민족의 관념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이정호).
옹관묘(독널무덤)는 토광묘 다음으로 나타나는데 토광묘와 옹관묘의 공존현상은 대동강유역, 한강유역, 금강유역, 낙동강유역 등 한반도 전역에서 전국에서 보고된다. 특히 영산강유역에서 발달한 합구식 옹관은 BC 2세기부터 나타나며 대형옹관고분은 3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데 영산강유역의 중심에 있으며, 지금도 사용되는 석실분이나 전축분보다 고형이다.
대형옹관이라도 처음에는 절반은 땅에 매장하는 방식으로 분구가 작았으나 4세기 중반이후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크기가 40m가 넘는 대형분구가 나타났다. 영산강유역에 웅장한 고분군이 성립하는 것은 이 시기부터다. 백제 근초고왕시기인데 이때부터 영산강유역에 독자권력이 들어선다. 따라서 근초고왕때 이 지역을 정복했다는 말은 고고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옹관은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대형분구를 가진 옹관묘는 경제적인 부를 의미하므로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권력이 출현한 것이다. 5세기 후반이 되면 점차 횡혈식 석실분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는데 횡혈식 석실분을 가진 장고형고분도 이때 나타난다. 이 무렵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화려한 유물을 보이는 전성기다. 모양은 장고형이라도 출토되는 유물은 대부분 백제·가야식이거나 토착인들의 것이다(이정호).
*옹관 2개를 맞댄 합구식 옹관: 초기 옹관은 입구부분이 홈이 있는 항아리 형태이나 후기로 갈수록 항아리형태를 벗어나 밋밋한 장례 전용관 형태를 가진다.
옹관을 사용한 사람들은 위만에 의한 위씨조선 건국과 준왕의 남천으로 인한 민족 대 이동기에 영산강유역에 들어온 조선인들로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을 흡수하여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이 되었다. 이들 역시 부여계인데 고구려 건국 직후 만주에서 들어온 부여인들 보다 먼저 들어왔고, 1세기 백제 온조왕대에 백제에 흡수된 마한의 후계세력으로 본다. 토광묘와 옹관묘가 공존하다가 점차 옹관묘로 전환되는 것을 볼 때, 옹관묘는 북에서 내려온 부여계 마한인들이 영산강유역에 들어와서 농경생활을 하면서 발전시킨 묘제라고 생각된다. 경제적인 부를 상징하는 대형옹관묘가 나타나는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묘제는 토광묘였다.
3세기 후반에 대형옹관고분이 대두하면서 晉書 장화열전에 282년에 20여국으로 이루어진 마한 新彌諸國이 서진과 교섭하였다는 것을 볼 때 마한 신미제국은 이들이라 생각된다. 마한 신미제국이란 마한지역 신미의 여러 나라란 뜻인데 ‘신’은 새롭다는 뜻이고 ‘미’가 물을 의미하므로 바다나 큰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면 한강유역이나 금강유역이나 영산강유역 중 한 곳인데, 한강유역이라면 고이왕이 한강유역을 석권하였을 때이므로 삼국사기에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므로 아니다. 금강유역은 백제 진왕이 거쳐하는 곳이므로 여기서 갔으면 백제의 공식사절단이었을 것이므로 여기도 아니다. 그러면 영산강유역만 남는다.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었다는 것(依山帶海)도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있으며 서남해안을 끼고 있는 영산강유역과 일치한다.
東夷馬韓 新彌諸國 依山帶海,去州四千餘裏,曆世未附者二十余國 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 士馬強盛。-晉書 列傳 衛瓘子恆孫璪玠張華子禕韙劉卞
그런데 4세기 말 동북아시아에 대 전쟁이 발생하다. 전쟁으로 인하여 한강유역, 금강유역, 그리고 낙동강유역이 고구려군에 의하여 초토화되고 영산강유역이 그래도 피해를 적게 받아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전쟁후인 5세기에 영산강유역에 대규모 건축물을 쌓게 되는데 웅진이나 사비의 백제 왕릉은 규모가 보통 10m급이나 영산강유역은 50m급도 수두룩하다. 왕릉급 고분의 규모나 숫자로만 보면 당시의 신라나 가야 못지않다. 고고학적으로만 따지면 영산강유역은 5세기 후반 백제의 최대 세력권이었다.
영산강유역에는 방대형분, 원형분, 사다리꼴고분, 장고형고분 등 여러 가지 묘제가 흩어져 있다. 묘제의 다양성은 여기에는 마한계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쟁 중 몰려온 가야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비교적 안전했던 이 지역으로 몰려와 문화를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서남부는 지리적으로 한·중·일 교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데 유리하다.
한반도에서 일본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장고형고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전남지역 외에 전북 남부인데 전북은 북부는 범 금강유역권이고 남부는 범 영산강유역권으로 볼 수 있다. 현재까지 14기가 발견되었는데 해남 장고산고분이 길이 77m로 가장 크다(임영진). 이들 지역들은 광개토왕 전쟁 후 살아남은 진왕백제계의 잔존영역으로서, 5세기에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한일 양쪽에 걸친 국가형태를 유지해왔다.
영산강유역의 여러 묘제 중 장고형고분의 축조시기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약 50년에 불과하여 가장 짧은 데, 왕력으로는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해당하며, 도읍으로는 웅진도읍기에 해당한다. 6세기 중반 이후 사비시대가 되면 영산강유역의 대부분 고분들이 모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는데 장고형고분도 마찬가지다. 이는 백제의 웅진천도 후에 혼란이 발생하고 이를 수습하여 안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잠깐 나타난 묘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남지역에서도 전남 동부인 섬진강유역에서는 대형옹관고분이 나오지 않는데(이정호) 이 지역에서는 장고형고분도 나오지 않아 옹관고분 집단과 장고형고분 집단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최성락).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6호분은 옹관묘이나 장고형 비슷한 원형분이다. 장고형고분은 원형부분과 방형부분의 크기가 비슷한 것이 보통인데 영암군 태간리 자라봉고분은 큰 원형부분에 작은 방형부분이 돌기처럼 붙어있는 장고형고분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옹관묘를 사용하던 원형분이나 방형분 집단이 장고형고분을 받아드린 것으로 본다.
영산강 북쪽인 함평군 예덕리 신덕고분군에는 2기의 대형분이 있는데 하나가 장고형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후대의 백제식이다. 같은 집안에서 선대는 장고형고분으로 후대는 백제식 석실고분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장고형고분은 내부에 붉은 칠을 하였는데 당시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에 나타나는 방식이다. 영산강유역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옹관고분 내부에 황토 칠을 하였는데 이것이 전방후원분의 붉은 칠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이정호). 이 고분군에서 兩耳白磁壺 등 중국제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중국제 도자기 조각은 해남지역에서도 발견되어 5~6세기에 영산강유역과 중국대륙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함평군 예덕리 신덕 1호분: 6세기 전반. 전체길이 51m, 원형부 직경 30m, 방형부 25m. 연결부 폭 19m이고, 높이는 자락에서 원형부 5m, 방형부 4m, 연결부 3.25m이다. 내부는 횡혈식 석실이며 원형부 정상에서는 筒形器臺片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1996년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는 하나의 봉분 안에 41기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었다(26기). 기존 옹관이 매납된 분구를 조정, 확대하여 거대한 분구를 조성한 것이다. 동일집단이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를 차례로 조성했다(윤근일). 크게 보면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변화하였는데 다장형식이라는 옹관묘의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조유전). 금동신발과 여러 자루의 장식대도, 금동신, 은제관식 등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당시 왜국에서 유행하던 형식을 사용한 96호 석실에서 가장 호화스런 유물이 나왔는데 예나 지금이나 활동영역이 넓고 국제화된 사람이 대체로 잘 산다.
*전남 나주시 복암리 3호분: 1996년에 발굴되었는데 하나의 봉분 안에 여러 기의 무덤이 조성된 복합고분이다. 안동권씨 선산으로 사용되어 도굴을 피했다.
2010년 발굴 조사된 전남 영암군 옥야리의 방대형 고분은 하나의 봉분 안에서 횡구식석실묘와 수혈식석곽묘, 옹관묘, 목관묘 등을 마련한 복합고분이다. 복암리 3호분처럼 동일집단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여러 가지 묘제를 조성하였다. 분구 중앙에 있는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장축이 3m, 단축 1.1m 정도의 세장방형으로 4개의 나무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하였는데 가야식이다. 봉분 주변으로 도랑을 둘렀는데 분구와 도랑에서는 일본의 전방후원분에서 흔히 나오는 하니와라 부르는 원통형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 전남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방대형 고분: 남북 29.98m, 동서 26.30m. 여러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복합고분이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순금관이 출토되는 가장 큰 고분들이 있고 주변으로 갈수록 점차 고분도 작아지고 출토물도 약해지는 것으로 보아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영산강유역은 나주시 반남면이 중심이나, 먼 외곽에도 대형 고분과 화려한 유물이 나오는 등 전체적으로 넓게 대형 고분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세력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에는 선대의 무덤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태의 무덤을 쓰는 반면에 영산강유역은 선대의 무덤을 파괴하지 않고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무덤을 축조했다.
사람들의 집단이 이동하여 먼저 와서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면 지배층의 교체가 일어나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만든 무덤을 부수고 자신들의 무덤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무덤에 순장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를 포함하여 한강유역, 낙동강유역 등 민족이동이 발생하면 대부분이 다 그런데 나는 이를 ‘무덤의 직렬분포’라 부른다.
반면에 민족이동이 발생해도 정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면 선주민의 무덤 파괴현상이 안 나타나며 순장도 없다. 이주민들의 무덤양식에 대한 거부감도 적어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무덤양식이 섞여서 출현하게 되는데 나는 이를 ‘무덤의 병렬분포’라 부른다.
아직까지 삼국시대 고분들 중에서 선주민의 무덤파괴 현상이나 순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이른바 마한권인 금강유역과 영산강유역이다. 특히 영산강유역은 선주민들이 외지인들과 함께 섞여 살며 그들의 무덤양식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곳이다. 대표적인 것이 6세기 양나라 유행양식인 전축분을 받아들인 무령왕릉인데, 무령왕이 이렇게 자유스럽게 당시 유행하던 무덤양식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지역도 이와 유사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만일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안 나왔다면 백제에 파견된 양나라 관리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유력한 학설로 등장했을 것이라 한다.
* 광주광역시 월계동 장고형고분: 6세기 초, 백제식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이 출토되었다.
낙동강유역의 가야지역에서 장고형고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알 수 있다. 4세기 초까지는 백제와 왜의 신라에 대한 정책이 동일하나 4세기 중반 이후에는 신라에 대한 정책이 백제는 친선이고 왜는 전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낙동강 하류를 통치하던 임나가야(신라본기의 왜)는 4세기에 이미 진왕백제의 직접통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광개토왕 전쟁이 끝난 이후 금강유역은 폐허화하였고, 낙동강유역은 가야제국이 재건국되고, 한강유역은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5세기의 영산강세력은 전쟁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아 번성했던 진왕백제계의 후계세력으로서, 독자세력이었던 한성백제보다 본래 같은 나라였다가 일본열도로 밀려난 왜국과 더 많은 교류를 했을 것이다. 왕인 외에도 5세기의 일본서기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출신이었을 것이다. 5세기의 중국대륙과 동남아의 백제영토도 이들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5세기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 侯王들의 주 근거지가 영산강유역이었는데 백제왕은 이들 侯王들 중에서 가장 큰 大王이므로 당시의 백제왕도 이곳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http://www.histopia.net/zbxe/index.php?mid=neo&category=3304&document_srl=9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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